춤추는 사계 - 흙빛에 담은 한국의 봄여름 가을 겨울 그 길을 따라
이대일 글.사진 / 정신세계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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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답게 찍을 수 있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103] 이대일, 《춤추는 四界》(정신세계사,2005)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살아가지 않는 곳에서는 사진을 못 찍고, 누구라도 스스로 좋아하며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라면 즐겁게 사진을 못 찍습니다.


  고향이 서울이기에 꼭 서울에서 사진을 찍지는 않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스스로 마음으로 바라는 삶터가 있을 때에는, 서울에서는 사진을 안 찍으나 마음으로 바라는 어느 삶터로 나들이나 마실을 할 때에 비로소 사진을 찍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진을 바라보는 아무개는 ‘여행사진’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막상 이러한 사진을 찍은 누군가한테는 ‘여행사진’이 아니에요. ‘그냥 사진’이요, ‘그저 스스로 좋아하는 곳에서 지내며 저절로 찍은 사진’입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면,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들 만한 곳이야말로 스스로 마음을 활짝 열며 살아가고 싶은 곳이요,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들 만하지 못한 곳이야말로 스스로 마음이 닫히면서 고단한 곳이에요.

 

 


  한국땅 적잖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고 자란 동네’에서 사진을 못 찍거나 안 찍는 까닭을 찾자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스스로 나고 자란 동네’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거든요. 둘레가 아름다운 숲과 바다라 하더라도, 숲과 바다를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 사진으로 담지 않아요. 숲과 바다를 뒤로 하고서 사진 찍는 일도 없어요. 둘레가 높직높직한 빌딩뿐이라 하더라도, 이 같은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빌딩들을 뒤로 하고서 사진을 찍어요. 서울에서든 부산에서든, 일본 도쿄에서든 프랑스 파리에서든, 스스로 마음에 드는 데에서 찍는 사진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으레 ‘아이 얼굴’만 담고, ‘아이가 지내는 집안 살림살이’가 드러나도록 사진을 담지 못할 적을 헤아려 봅니다.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인데, 내 보금자리를 나 스스로 좋아할 적에는 아주 스스럼없이 ‘아이 얼굴’뿐 아니라 ‘아이 온몸’이랑 ‘아이가 지내는 집안 곳곳’이 잘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기 마련입니다. 아이하고 집 앞에서 사진을 찍어요. 아이하고 마당에서 사진을 찍어요. 집을 좀 멀리서 바라보는 들판에서 사진을 찍어요.


  사진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으며 이루어집니다. 글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삶을 연필로 적바림하며 태어납니다. 그림이란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야기를 붓으로 놀리며 빛납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좋아하고, 스스로 좋아하면서 시나브로 살아내기에, 바야흐로 사진으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대일 님 사진책 《춤추는 四界》(정신세계사,2005)를 읽습니다. 이대일 님은 한국땅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춤추는 네 철”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보여주려 합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린 싹들의 노래와 춤 앞에서 나는 조금 전 나비의 춤을 떠올렸다(26쪽).” 하고 읊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눈이 알록달록해지는 듯한 단풍잎들은 하오의 햇살 아래 물비늘처럼 반짝였다(92쪽).” 하고 노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대문을 나서니 곧바로 아스팔트에다가 양식 이층집들이 사방에서 어수선했다. 어리벙벙해졌다. 시간이 잠시 역류를 했음이 분명했다(124쪽).” 하고 외치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꿔 가며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저 가벼운 구름은 무슨 의미일까(166쪽)?” 하고 꿈꾸며 사진기를 어깨에 겁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한 셈인지 모르나, 이대일 님은 ‘아스팔트와 서양식 빌라’로 이루어진 당신 살림집 둘레에서는 사진을 안 찍습니다. 이대일 님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살붙이들과 뒤섞이는 보금자리에서는 사진을 안 찍습니다. 아니, 사진을 더러 찍을는지 모르나 바깥으로는 안 보여줄는지 모릅니다. 이대일 님 삶터에서는 으레 ‘어리벙벙해졌다’ 하고 느끼니,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사진기를 쥔 손이 흔들릴 테고, 사진기에 박은 눈이 빙글빙글 도는데,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대일 님만 이와 같지 않아요. 한국에서 ‘아름다운 숲과 들과 바다와 내와 메’를 사진으로 담는 분들 거의 모두 이와 같아요. 막상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 한복판에서 아스팔트와 자동차와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 갇히듯 살아가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도시 한복판에서 멀리멀리 벗어납니다. 먼먼 그림자로도 도시 끄트머리조차 안 보일 만한 데에서 사진을 찍으려 해요. 사진책 《춤추는 四界》를 살피면 어느 사진 귀퉁이에도 ‘도시 자취’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통 시골 삶자락입니다. 온통 시골 숲이요 시골 들판입니다.

 

 


  춤추는 봄이요 여름이며 가을이고 겨울이에요. 시골에서는 언제나 봄부터 겨울까지 춤추는 나날이에요. 시골에서 조그맣게 보금자리 이루어 살아가면, 애써 멀리 마실을 다니지 않아도 날마다 새롭고 새삼스러우며 싱그럽다 싶은 모습을 신나게 사진으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빚을 수 있어요. 날마다 같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사진으로 찍어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얻을 수 있어요.


  꼭 지리산이어야 하지 않아요. 반드시 백두산이어야 하지 않아요. 으레 울릉섬이나 제주섬까지 가야 하지 않아요. 구례가 더 좋거나 경주가 더 좋거나 영월이 더 좋거나 보령이 더 좋거나 하지 않아요. 어느 시골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서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길 살림을 일구면 돼요. 사진은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찍기 마련이니,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진기 단추에 손가락 살포시 얹으면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낄 사진을 일구어요.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사진기 단추에 손가락 살짝 얹으면서 스스로 사랑스럽네 하고 느낄 사진을 낳아요.


  이리하여 사진책 《춤추는 四界》는 이대일 님이 꿈꾸는 시골 이야기가 담깁니다. 스스로 살아내지 않거나 살아내지 못하면서 그예 꿈꾸듯 마음속에 담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숲, 멀찍이 떨어진 채 지켜보는 냇물, 멀디먼 데에서 스쳐 지나가며 들여다본 들판 이야기를 《춤추는 四界》로 갈무리합니다. (4345.6.27.물.ㅎㄲㅅㄱ)

 


― 춤추는 四界 (이대일 글·사진,정신세계사 펴냄,2005.12.1./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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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여행사 - 연못 탐험대 모집 과학 그림동화 30
마츠오카 다츠히데 글.그림, 이영미 옮김 / 비룡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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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웃은 어떻게 살아갈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8] 마츠오카 다츠히데, 《청개구리 여행사》(비룡소,2008)

 


  도시에서 살아가며 새벽 일찍 일어나 버스나 전철에 실려 짐짝처럼 짜부라진 채 일터로 간 뒤, 저녁 늦게 하루일을 마치고는 다시 새벽 때처럼 버스나 전철에 실려 짐덩이처럼 찌그러진 채 집으로 돌아가는 굴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날씨를 알 수 없습니다. 더우면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야 합니다. 추우면 보일러를 돌리거나 난로를 때야 합니다. 이뿐입니다. 하늘에 구름 없이 맑으면 얼마나 파란 빛깔이면서 맑은지 못 느낍니다. 하늘에 구름이 조금 낀 채 맑으면, 여름날에는 구름이 해를 가릴 때에 얼마나 시원한지 못 느낍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채 빗방울이 듣는다면 빗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집에서고 일터에서고 또다른 여러 문화시설에서고 공공기관에서고 온통 전기로 밝힌 등불 밑에서 지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일하는 사람은, 똥오줌을 누러 뒷간에 갈 적에도 전깃불을 켭니다.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일하는 사람은, 햇볕이 잘 들어오도록 집이나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도서관도 책방도 극장도 공연장도 모두 전기로 불을 켭니다. 축구나 야구나 농구나 배구를 한다는 경기장에서도 전기로 불을 켭니다. 아주 맑은 한낮에 햇볕을 쬐면서 벌이는 경기는 매우 드물어요. 헤엄치기마저 냇물이나 바다에서 하지 않아요. 네모난 틀에 가둔 수영장에서 할 뿐입니다.


.. “이 배는 안전한가요? 가라앉으면 어떡해요?” “에이, 걱정 마세요. 이 배는 아주 튼튼하고 물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답니다. 사람들이 버린 페트병으로 만든 제 작품이죠. 하하.” ..  (4쪽)

 


  전기가 사람한테 얼마나 좋거나 도움이 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기가 있기에 셈틀을 켜서 글을 쓸 수 있고, 인터넷도 즐길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디지털사진기를 전지 닳을 걱정 없이 쓸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싱싱한 푸성귀를 퍽 오래도록 냉장고에 건사할 수 있어요. 전기가 있으니, 몸이 힘들거나 이불을 빨아야 할 때에 빨래기계 힘을 빌 수 있어요. 전기가 있어, 땅밑에서 물을 뽑아 끌어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기를 왜 써야 할까요. 훤한 한낮에 햇빛이 아닌 전기로 밝히는 등불 빛을 쐬야 할 까닭이 있나요. 왜 도서관이나 책방은 햇빛 아닌 전기로 밝히는 등불을 켜야 할까요. 왜 학교나 공공기관이나 여느 회사에서는 햇빛이 아닌 전기로 등불을 키려 할까요. 건물을 짓는 이들은 왜 햇빛을 골고루 누리면서 햇볕을 잘 살리는 길을 안 찾을까요.


  햇빛이 아닌 전기로 밝힌 등불 빛을 받는 사람 몸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자연스럽게 흐를 뿐 아니라, 모든 목숨을 살찌우는 햇볕과 햇빛이 아닌, 석유를 태우고 석탄을 태우며 우라늄을 태워서 얻는 전기로 켜는 등불 빛을 받는 오늘날 도시사람 몸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풀도 꽃도 나무도 햇빛과 햇볕을 골고루 받을 때에 싱그럽게 자라요. 능금도 배도 복숭아도 귤도 수박도 오이도 가지도 배추도 무도 당근도 딸기도 상추도 깻잎도 몽땅 햇빛과 햇볕을 즐겁게 받을 때에 알차게 여물어요. 전깃불이나 난로불로는 푸성귀와 열매를 알차게 무르익히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큼직하거나 때깔이 좋아 보이도록 키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사람을 살찌우는 좋은 숨이 깃들지 못해요. 빗물 아닌 수도물을 마시는 감나무에 맺힌 감알이 맛날까요. 빗물을 못 먹고 수도물을 마시는 벼포기에서 얻은 쌀알이 맛날까요.


.. 손님은 무당벌레, 공벌레 부부, 달팽이예요. 다들 처음으로 물속 구경을 하는 거라 무척 신이 났지요 ..  (6쪽)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을 먹고 자라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한결 굵직해지고 겉보기로는 빛이 곱다 합니다.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에 길든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병해충을 잘 못 견딘다 합니다.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으로 큰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비바람에 쉬 꺾인다 합니다. 요즈음 ‘농업과학’에서는 비료와 항생제와 풀약을 먹으며 자라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가 ‘병해충에 잘 견디고 비바람에 잘 안 쓰러지’도록 유전자를 건드립니다. 왜냐하면, 도시사람 누구나 ‘더 싸게 장만해서 더 많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바라거든요.


  알맞게 먹고, 즐겁게 먹으며, 사랑스레 먹는 길을 나날이 잊습니다. 알맞게 누리고, 즐겁게 누리며, 사랑스레 누리는 길을 자꾸자꾸 잃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더 많은 사람을 더 손쉽게 길들이면서 가두려고 자꾸자꾸 과학기술을 부추기면서 무언가 새롭다 싶은 기계와 물질과 문명을 빚는지 모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사람들 스스로 아름다운 꿈과 사랑하고 동떨어지도록 자꾸자꾸 문화나 예술을 북돋우는지 모릅니다.


  아주 마땅하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밥이든 빵이든 내 목숨을 튼튼히 이을 다른 목숨을 먹어야 합니다. 내 목숨을 이을 목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 몸은 살아내지 못합니다. 이슬을 마시든 바람을 마시든, 내 넋이 깃든 몸뚱이를 지키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몸뚱이는 이럭저럭 살찌운다 하지만, 내 몸뚱이에 깃드는 넋을 함께 살찌우지 못하면, 내 목숨은 산 목숨이라 하기 어려워요. ‘나’라 하는 사람은 살결과 뼈와 핏줄과 피와 물과 세포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아니거든요. ‘나’라 하는 사람은 과학으로 샅샅이 파헤칠 분자 얼거리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세포 조직 꾸러미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이는 넋이 있고, 몸을 이끄는 얼이 있어요. 몸을 움직여 사랑을 빚는 마음이 있고, 몸을 이끌어 꿈을 이루는 생각이 있어요.


  ‘두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 얼굴과 몸매’를 ‘그 사람’으로 여길는지 모르나,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얼굴과 몸매’를 ‘그 사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두 눈을 못 쓸 뿐 아니라 두 귀를 못 쓸 때에는, 또 내 몸뚱이를 쓸 수 없을 때에는, ‘내 앞에 선 사람’을 어떤 갈래와 모습과 무늬와 빛깔로 헤아리면서 ‘한 사람’인 줄 알아챌 만할까요.


.. “저도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참개구리 주위에 모여든 물방개, 송장헤엄치개, 거머리, 장구애비는 모두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육식 동물이거든요.” 무당벌레가 혼자 중얼거렸어요. “물속 세상도 살아가기 꽤 힘든 모양이로군.” ..  (13쪽)

 

 

 

 


  해마다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해마다 날씨가 크게 뒤틀리기만 하지 않고, 다달이, 또 나날이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하루에도 숱하게 날씨가 크게 뒤틀립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뒤틀리는 날씨를 살갗으로 느낀다든지 마음으로 느끼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뒤틀리는 날씨를 깨달아 스스로 삶을 바꾸며, 생각을 바꾸고, 사랑을 바꾸는 사람 또한 매우 적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떠들고 글로는 시끄럽습니다. 모두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 또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밥벌이 아닌 돈벌이에 얽매입니다. 여느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도 돈벌이에 얽매이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돈벌이에 얽매입니다.


  지난해에는 끔찍한 큰물 때문에 힘들었다면 올해에는 끔찍한 가뭄 때문에 힘들다 할 만하지만, 도시사람 살림살이는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큰물과 가뭄 때문에 힘들 때에 대통령이 누가 되건 말건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대통령이 큰물이나 가뭄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진 마당에 누가 파업을 하건 말건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파업은 민주주의를 누리는 권리 가운데 하나이니,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사람을 살리지는 않아요. 사람을 살리는 길은 사람 스스로입니다. 사람 스스로 깃드는 숲과 들과 내와 메가 곧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노동자는 파업을 할 노릇이 아니라, 공장이나 회사를 그만둘 노릇입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 모두 떠나 공장은 공장장 혼자 꾸리고, 회사는 사장 혼자 이끌라 할 노릇입니다. 스스로 노동자 아닌 ‘한 사람’으로 사랑스레 살아갈 길로 찾아들면 됩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영국 맨체스터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은 하지만, 그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까마득히 모릅니다. 민주주의에 따라 파업까지는 했지만, ‘삶짓기’로 무엇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나날을 빛낼까 하는 대목을 생각하지 못해요. 집에서 아이들한테 윽박지르고, 밥을 제대로 차리거나 청소나 빨래조차 옳게 할 줄 몰라요. 그저 공장이나 회사에서 톱니바퀴 같은 부속품 같은 삶에 얽매이면서 돈만 벌 뿐인 노동자예요. 이래서야 ‘노동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에요. 노동자로 살고 싶다면, 참말 노동자다우면서 사람다운 길을 걸어야 해요. 이를테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고, 텃밭을 일구어 푸성귀를 거두면서, ‘공장이나 회사에서 일삯을 안 받더라도 얼마든지 즐겁게 먹고 누리는 삶’을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빛내면 돼요.


  도시사람더러 하루아침에 도시를 떠나라고 한다든지, 도시에서 물 펑펑 쓰는 짓 그치라고 한다든지, 도시에서 더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 그만 좀 돌리라고 한다든지 하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도시사람 스스로 이 같은 굴레를 스스로 짊어지니까, 도시사람 스스로 ‘돈을 버는 걱정’이라는 올가미를 스스로 쓸밖에 없어요. 굴레를 짊어지니 올가미를 써요. 사랑을 나눌 때에는 꿈을 이루고, 믿음을 나눌 때에는 뜻을 이루지만, 돈을 벌려 할 때에는 도시에서 울타리에 갇혀요.


.. 청개구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꼬마잠자리 세 마리가 나타났어요. 공벌레 아줌마가 놀라며 말했지요. “어머나, 잠자리가 나만큼 작네!” ..  (18쪽)

 


  마츠오카 다츠히데 님 그림책 《청개구리 여행사》(비룡소,2008)를 읽습니다. 청개구리는 왜 이름이 ‘靑개구리’일까 궁금한데, 시골에서 살아가며 이들 청개구리를 보노라면, 언제나 풀숲에서 만납니다. 풀에서 사는 작은 개구리라 할까요. 그래, 이들 개구리는 ‘풀개구리’예요. ‘파란(靑)’ 개구리가 아니라, ‘풀숲에서 사는 풀빛’ 개구리랍니다.


  조그마한 풀빛 개구리는 조그마한 삶을 누립니다. 조그마한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고, 이슬을 마시며 살아갈 수 있어요. 풀잎을 뜯으며 살아갈는지 모르지요. 풀개구리는 언제나 풀개구리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작은 풀숲을 밀고 빌라를 짓거나 고속도로를 닦더라도, 풀개구리는 다른 풀숲을 찾아 길을 떠나며 목숨을 이어요. 풀개구리는 풀개구리다운 삶을 놓지 않아요. 풀개구리 사랑이 빛나는 길을 찾고, 풀개구리답게 키우는 꿈을 아껴요.


  풀개구리는 풀이 없으면 죽어요. 논개구리는 논이 없으면 죽어요. 멧개구리는 멧자락이 없으면 죽어요.


  아마, 도시사람은 도시가 없어지면 죽겠지요. 이와 마찬가지인데, 시골사람은 시골이 사라지면 죽어요. 시골에서 맑은 햇살과 바람과 냇물과 흙과 푸나무하고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도시사람이 돈에 눈이 멀어 고속도로를 더 내느니 관광개발을 하느니 골프장을 짓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꾸 시골땅 시골흙 시골자락을 더럽히면 숨이 막혀요.


  그림책 《청개구리 여행사》에 나오는 작은 목숨들은 저희가 살아가는 작은 터전 곁에서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는 이웃이 궁금해서 나들이를 떠납니다. 풀개구리가 이끄는 작은 배를 타고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며 작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영화나 논문 같은 데에는 실리지 않을 작은 이야기를 스스로 누리면서 스스로 즐겁습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을 돌이킵니다. 내 좋은 이웃들 삶을 헤아리면서 내 좋은 삶을 돌아봅니다. (4345.6.26.불.ㅎㄲㅅㄱ)

 


― 청개구리 여행사 (마츠오카 다츠히데 글·그림,이영미 옮김,비룡소 펴냄,2008.6.26./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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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 아나스타시아 5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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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사랑을 일구는 사람인가
 [환경책 읽기 37] 블라지미르 메그레, 《아나스타시아 (5) 우리는 누구?》

 


- 책이름 : 아나스타시아 (5) 우리는 누구?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10.4.20.)
- 책값 : 12000원

 


 (1) 흙에 깃든 목숨


  사람이 돌보지 않는 흙땅에서는 사람이 심지 않은 풀이 뿌리를 내려 자랍니다. 사람이 돌아보지 않는 흙땅에서는 사람이 뿌리지 않은 나무씨가 뿌리를 내려 자랍니다.

  풀은 마구 자라지 않습니다. 풀은 아주 조그마한 땅뙈기에 뿌리를 내립니다. 풀포기 하나는 혼자만 자라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뿌리를 내리기도 해서, 여러 풀이 뿌리가 엉긴 채 자라기도 합니다. 뿌리가 엉긴 여러 풀이 쑥쑥 자라서 흙땅을 뒤덮곤 해요.


  한 가지 풀만 자라는 흙땅은 없습니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들여다보면 온갖 들풀이 저마다 가장 빛나는 새싹을 틔우고 새 줄기를 올립니다. 온갖 들풀은 저마다 가장 튼튼한 줄기를 올리며, 저마다 가장 고운 꽃을 피웁니다.


  사람은 이 풀을 바라보며 망초라고도 하고, 저 풀을 바라보며 조릿대라고도 하며, 그 풀을 바라보며 괭이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풀과 저 풀과 그 풀은 모두 저마다 누리는 삶에 따라 태어나서 자라고 시들다가 씨앗을 남기고는 흙으로 돌아가서 고요히 잠듭니다. 이듬해 봄에 잠에서 깨어나 다시 태어나고, 이듬해 겨울에 다시 잠들며, 다음해 봄에 거듭 잠에서 깨어나기를 되풀이합니다.


.. 땅에 자라는 모든 것은 물화한 하느님의 생각이며, 하느님이 원래 짓기를, 사람은 음식을 얻는 문제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조물주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와 함께 짓기만 하면 된다 … 우리 아들도 무슨 열매 하나 풀 하나를 살짝 먹어 볼 수 있어. 해롭고 쓰다면 그리고 그 애한테 안 맞으면 그냥 뱉어 버릴 거야. 조금 먹어서 위장에 탈이 생기면 토할 거야. 대신 그걸 기억해서 앞으로는 먹지 않겠지. 결국, 온 세상을 누군가의 얘기가 아니라 맛으로 알게 될 거야. 우리 아들이 온 삼라만상을 맛보라지 …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잘 사는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면, 학교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서로서로를 보충하며 아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  (9, 18, 169쪽)


  흙땅 수풀 곁에서 아기가 태어나든, 늙은 어버이가 죽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수풀 곁에서 사람들이 아파트를 짓든, 시멘트를 냇물에 퍼붓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수풀 곁에서 사람들이 비행기를 날리든 자가용을 굴리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건 말건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대학입시 굴레가 더 깊어지든, 사람들이 영어 자격증 시험이나 은행계좌 숫자 늘리는 데에 마음을 쓰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풀을 낫으로 벱니다. 흙땅 풀을 손으로 뽑습니다. 한 시간쯤 땀을 흘리면 갖은 풀로 뒤덮이던 작은 수풀은 맨흙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맨흙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키 높이 자란 수풀만 베이거나 뽑힐 뿐, 이 밑에서 새로 싹을 틔우는 또다른 다른 풀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스스로 먹을 푸성귀를 생각하며 흙땅을 일구고는 씨앗을 심거나 뿌립니다. 어느 씨앗은 골을 내고 고랑을 만든 다음 구멍을 작게 내어 심습니다. 어느 씨앗은 고랑에 길게 줄을 낸 다음 씨앗을 솔솔 뿌립니다.


  꽃집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푸성귀 씨앗’은 ‘푸성귀 씨앗 만드는 공장’에서 거두어들여 봉지에 담아서 팔까요. 깨알보다 작고, 모래알보다 작은 푸성귀 씨앗을 ‘푸성귀 씨앗 만드는 공장’ 일꾼은 어떻게 갈무리하고 어떻게 건사했을까요.


  배추와 무와 상추만 사람들이 먹을 푸성귀이지는 않을 테지요. 이 풀만 먹고 저 풀은 안 먹어도 되지는 않을 테지요. 토끼풀은 토끼가 잘 먹기에 붙은 이름일까요. 괭이밥은 고양이가 잘 먹는대서 붙은 이름일까요. 사람은 토끼풀잎을 따서 먹으면 어떠할까요. 사람들이 괭이밥잎을 따서 냠냠하면 어떤 맛을 느낄까요.


.. 수백만의 사람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지구는 모든 사람 손길을 하나하나 다 느꼈어 … 우리가 같이 있을 땐 좋은 시간이야. 우리가 함께 있을 땐 분·시간·날이 아주 좋아. 그러면 주위의 모든 것이 기뻐해 … 아빠는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아무하고도 얘기도 하지 않고, 재미있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해. 그런데 지금은 아빠가 항상 곁에 있지.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 됐어. 이제 난 폭발을 할 수 없어 … “왜 아빠는 차갑기만 하고, 아무 에너지도 주지 않는 컴퓨터 주변에서 걱정스레 서성일까? 나무가 꽃을 피우고 새가 지저귀고 온갖 풀과 나뭇가지가 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온몸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동산으로 나가지 않을까?” ..  (27, 70∼71, 81∼82쪽)


  뒤꼍 빈땅 한쪽 귀퉁이를 갈아엎어 당근을 조금 심으면서, 곁에 자라는 까마중풀은 그대로 둡니다. 까마중 하얀 꽃이 지면서 푸른 알맹이가 까만 열매로 익을 테니까, 까맣게 잘 익기를 기다려 아이들하고 먹을 생각을 합니다. 나는 까마중 씨앗을 뿌린 적이 없고, 까마중이 이곳에 나리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까마중은 뒤꼍 빈땅에서 마음껏 자랍니다. 내가 들여다보든 안 들여다보든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면서 작고 맑은 꽃잎을 내놓습니다. 예쁜 열매를 맺고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쩌면, 내 마음이 까마중풀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내 생각이 까마중풀더러 이곳에도 함께 자라 주기를 빌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할 수 있으나, 먼먼 옛날부터 내 오늘 삶을 찬찬히 그렸는지 모릅니다. 망초를 비롯한 다른 풀은 썩썩 뽑아서 한쪽에 쌓고, 까마중풀은 그대로 두며, 노랗게 꽃을 피운 자그마한 괭이밥은 밭둑에 살짝 옮겨심자고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몰라요.


.. 행복한 여인이 선한 손으로 손수 짠 의복이 컨베이어 기계에서 제작된 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값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제품들을 기꺼이 산다고, 아나스타시아가 설명을 곁들였다 … 화폭 대신에 1헥타르의 땅에 그림과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지은 사람을 당신은 왜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지? …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고 진리를 품는다면,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104∼105, 106, 131쪽)


  하루 내내 내린 빗물이 들판 모든 잎사귀에 대롱대롱 붙습니다. 논자락에 갓 심은 벼포기에도 빗물이 달리고, 논둑 뭇풀 잎사귀에도 빗물이 달립니다. 돌로 쌓은 울타리 담쟁이 잎사귀에도 빗물이 달리며, 유월 끝무렵에 한창 꽃내음 날리는 밤꽃송이에도 빗물이 달립니다.


  빗속을 가르는 제비 날개에도 빗물이 달릴까요. 제비나 까마귀나 직박구리나 노랑할미새나 종달새가 빗속에서도 먹이를 찾아 날아다닐 적에, 두 눈망울에 빗물이 톡 하고 떨어지기도 할까요. 하늘을 날며 비를 맞는 들새와 멧새는 어떤 마음일까요. 사람과 달리 긴옷도 비옷도 이불도 없이 살아가는 새들은, 벌레들은, 짐승들은, 풀과 나무는, 비가 듣는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누릴까요.


  흙에 깃든 목숨은 흙이 보금자리입니다. 개미는 흙땅을 뚫고 들어가서 집을 짓습니다. 크고작은 뭇벌레 또한 흙땅을 파고 들어가서 집을 짓습니다. 사람 눈에는 자그맣겠지만, 사람 눈으로는 작게 보이는 벌레한테는 몸뚱이보다 훨씬 큰 들풀 잎사귀가 보금자리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높은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잎 하나를 골라 뒤쪽에 착 달라붙으며 밤을 나는 벌레가 있습니다. 내 종아리가 나무줄기라도 되는 양 여기며 볼볼 기어오르는 나비 애벌레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한테 흙은 어떤 품이 될까요.


  고속도로를 낸다며, 아파트를 짓는다며, 새 철길을 낸다며, 새 굴을 판다며, 냇물 흐름을 곧게 펴며 시멘트를 붓는다 하면서, 크고작은 수풀을 하루아침에 갈아엎는 커다란 기계를 모는 일꾼은 수풀 사이에 깃든 뭇목숨을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요. 이라크로 쳐들어간 미국 폭격기 모는 사람이 높디높은 하늘에서 단추 하나 눌러 폭탄을 떨구면, 낮디낮은 땅에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꽥 소리 없이 사라지듯 죽습니다. 삽차나 밀차는 흙땅에 뿌리내리던 온갖 풀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온갖 풀에 깃들던 온갖 벌레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 “걱정 마, 블라지미르, 여기가 좋아. 공기는 신선하고 별들이 보여. 봐, 와, 오늘 별이 참 밝다. 다정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데, 춥지 않아.” (269쪽)


  낫과 호미를 쥔 손으로 딱정벌레가 타고 오릅니다. 딱정벌레는 갑작스레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밭을 얻고, 딱정벌레는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나는 푸성귀 심을 흙땅을 얻고, 내가 푸성귀로 삼지 않는 풀은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이 풀들은 내가 베거나 뽑는다 하더라도 제 넋을 일찌감치 숱한 씨앗에 남겼어요. 어느 한곳에서 모조리 베이거나 뽑히더라도, 사람 손길을 타지 않는 흙땅에는 어느덧 이 풀들이 새로 돋아요. 아니, 사람 손길을 타는 흙땅이라 하더라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고개를 내밀어요.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벗이에요. 지구별에서 숨을 나누어 쉬는 동무예요. 지구별에서 서로를 보듬는 이웃이에요.


  딱정벌레는 나를 탓할 수 있으나, 애써 나를 안 탓할 수 있습니다. 그예 없어진 보금자리를 그리지 않고, 새 보금자리를 찾을 테니까요. 누구를 탓하느라 애먼 하루를 흘리지는 않을 딱정벌레이리라 느껴요. 개미들도 그래요. 내가 밭을 일군다며 개미집을 몽땅 허물더라도, 이 개미들은 금세 다른 빈 흙땅을 찾아들어 새 집을 짓습니다. 애써 지은 집을 모조리 날린다지만, 새삼스럽게 씩씩한 기운을 차려 개미 스스로한테 좋은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2) 바람에 실린 목숨


  새벽 두 시를 지나 세 시로 접어들면, 다시 네 시 무렵이 되면, 시골마을 들판은 무척 고요합니다. 모든 소리가 잠을 자는 듯합니다. 저녁부터 노래하던 개구리도 조용합니다. 밤에 노래하는 새도 조용합니다.


  나는 모든 목숨들이 고요히 잠든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기를 좋아합니다. 딱히 좋아한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모르나, 이무렵에 아이들 쉬를 누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기도 하고, 잠자리에서 내내 내 몸을 고이 쉬게 해 주던 소리들이 한꺼번에 뚝 끊기는 이무렵 눈이 번쩍 뜨이곤 합니다.


.. 비석은 죽음의 기념비이다. 장례는 검은 힘의 고안이며, 그 목적은 잠시나마 사람의 영혼을 가두어 두기 위함이다. 우리 아버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어떤 고난도 심지어는 슬픔도 생산하지 않았다 … 조화로운 전체의 하나이며 영원하다 … 정보의 홍수, 아니 홍수처럼 보이는 정보 속에서 우리가 혼동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우리가 고립되었고 진정한 정보의 원천에서 단절되었다 … “당신은 그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왜 점점 더 새로운 종류의 질병이 생겨나는지 생각 안 해 봤어?” … “사람이 돌연변이 열매를 먹기 시작하면, 그 자신도 점차 변종이 되고 말아.” … “사람은 사람 고유의 능력을 잃고, 조종하기 쉬운 바이오 로봇이 되고 있고, 자유와 독립을 상실하고 있어.” ..  (10, 21, 107, 108쪽)


  내가 옆지기와 아이들하고 시골로 삶터를 옮긴 햇수를 세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내 삶터는 이곳 시골인 터라, 도시살이 도시물결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때때로 생각나기도 하는데, 왜 생각나느냐 하면, 날마다 좋은 소리 바람결에 실린 채 나한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겨울날 매서운 바람이든, 봄날 산들거리는 바람이든, 여름날 상큼한 바람이든, 가을날 시원스러운 바람이든, 갖가지 냄새와 이야기와 소리를 실어 나한테 찾아옵니다. 나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듣습니다. 바람이 속삭이는 꿈을 듣습니다. 이때에 가끔 문득 생각납니다. 내가 도시에서 첫째 아이를 낳고 살던 지난날, 밤이면 밤마다, 또 낮에도 으레 전철 소리와 자동차 소리에 귀가 쟁쟁거렸습니다. 나는 전철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차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가게마다 트는 시끄러운 대중노래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며 쩡쩡 울리듯 손전화로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내 몸을 살가이 건사하면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는 삶터를 바랐습니다. 내 몸이 힘들어 할 적마다, 내 마음이 지칠 때마다, 내 생각은 바람 한 점 나한테 찾아들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랐습니다.


.. 왜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인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무기 생산이 우리 인류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사고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일까요 …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오물들을 우리가 모두 함께 청소해야 합니다 … “지금 당신이 사는 곳에, 아파트에, 흙이 담긴 조그마한 화분에 씨앗을 심으면, 거기서 가문의 나무가 솟아날 것이고, 미래의 가원에서 높게 솟아오를 거야.” … 사람은 몇 층에 살던 흙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매일 음식으로 취합니다. 흙에서 자라는 것들을 공급하려면 도로·자동차·창고·가게가 필요하고, 이것들 모두가 땅을 차지합니다 ..  (93, 100, 130, 151쪽)


  모든 동무 개구리가 잠든 새벽 네 시 이십사 분에 홀로 우는 개구리가 꼭 있습니다. 왜 이 개구리는 너른 들판에서 홀로 잠들지 못하며 울까요. 왜 이 개구리는 다른 동무 개구리는 색색 잠들었는데 홀로 안 잠들면서 노래하고 싶을까요.


  이제 삼십 분이 더 지나 새벽 네 시 오십 분이 되면, 우리 집 처마 밑에 깃들어 함께 사는 제비 식구들이 하루를 엽니다. 어미 제비 두 마리와 새끼 제비 네 마리는 모두들 싱그럽고 밝은 날갯짓을 뽐내며 하루를 엽니다. 마당을 두루 날아다니며 어디로 마실을 갈는지 서로 얘기하는 듯합니다. 삼십 분 또는 한 시간쯤 서로 짹짹빽빽 얘기하다가 어느 때부터 조용합니다. 모두들 어딘가 날아갑니다. 이때부터 휑뎅그렁 조용한 집이 됩니다.


  아이들은 일찍 일어납니다. 먼동이 천천히 틀 무렵 몸을 옴쭉달싹합니다. 어제 하루 고단하게 놀았으면 조금 더 자지만, 어제 하루 개구지게 놀았어도 일찍 일어납니다.


  시골마을 이웃 어른들은 봄철부터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엽니다. 아니, 겨울철에도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엽니다. 한창 바쁜 일철이든, 한갓진 겨울철이든, 새벽밥을 짓고 새벽녘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그리고, 일찍 하루를 닫아요.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에 하루를 닫아요. 지친 몸을 쉬고, 흙 묻은 몸을 씻으며, 서로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으로 하루를 접습니다.


.. 국가는 대규모 혹은 중소기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근로자 가족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가족은 급여를 주는 고용자, 혹은 난방·상수·전기를 공급하는 공공서비스 기관에 의지해야 하며, 식품 및 서비스의 공급 또한 그 가격에 의존해야 합니다. 가족은 이 모든 것들의 노예이며, 이런 가정에서 어린아이는 노예 근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 과학기술 세상이 아무리 노력해도 첨단기기를 갖춘 현대식 공장에서는 우리 할머니들이 만드는 토마토·오이·양배추 절임의 맛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  (146, 161쪽)


  시골마을마다 다 다를 텐데,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이곳 시골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온 지도, 집집마다 물꼭지를 달아서 쓴 지도, 제법 너르다 싶은(그래 봤자 두찻길이지만) 아스팔트길이 놓인 지도, 그리 오랜 옛일이 아닙니다. 어느 집에나 텔레비전은 없었고, 어느 집에나 등불을 밝혔습니다. 어느 집이나 나무를 땠고, 어느 집이나 솥을 걸었어요.


  우리 식구 깃든 좋은 보금자리에서 예전에 살던 식구들은 1980년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집에서 전기를 썼다고 합니다. 아마 이웃집도 어슷비슷하겠지요. 마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마을 샘터에서 물을 길었겠지요. 아이들은 물을 동이에 담고 나르느라 부산했겠지요. 아이들은 샘가 또는 빨래터에서 씻고 논다며 부산을 떨었겠지요.


  1980년대에 인천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던 일을 되새깁니다. 그무렵 나는 도시에서 전기를 걱정없이 누렸습니다. 전기가 픽 나간 다음 몇 시간이나 며칠이고 안 들어오는 때도 잦았지만, 전기를 참 쉽게 쓸 수 있었습니다. 전기 안 들어오는 집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무렵에도 한국땅 다른 시골에는 틀림없이 전기 없이 살아가던 집이 꽤 있었으리라 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 전기가 꼭 있어야 하지는 않거든요.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는, 늘 누릴 만한 흙이랑 물이랑 햇볕이랑 바람이랑 풀이랑 나무가 있으면 되거든요.


  다만, 어린 나한테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 갖출 여러 가지’를 옳게 들려줄 어른은 없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 누구나 도시살이에 젖어들었기에, 아주 마땅히 전기를 쓸 뿐이요, 아주 마땅히 돈을 벌 뿐이고, 아주 마땅히 도시에서 집 사들여 아이들 낳고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삶을 짓는 사랑, 삶을 빚는 꿈, 삶을 이루는 생각을 들려주는 어른을 마주하지 못했어요. 삶을 빛내는 넋, 삶을 나누는 얼, 삶을 어깨동무하는 가슴을 알려주는 어른을 찾아보지 못했어요.


..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동등해. 서로서로를 숭배하면 안 돼. 난 그냥 여자야. 난 사람이야!” … “숭배가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아. 숭배는 오직 사람한테만 있는 생각의 힘을 앗아갈 뿐이야.” ..  (277, 278쪽)


  날마다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루 날씨가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를 바람한테서 듣고, 멧자락 새들과 짐승들 하루는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바람한테서 듣습니다. 바람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흔들면서 노래와 소리와 꿈이 무엇인가 하고 살짝 들려줍니다. 바람은 풀잎과 머리카락과 빨래를 살며시 힌들면서 빛깔과 내음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살짝 알려줍니다.


  해님은 지구별에 따숩게 볕을 나누어 주고, 바람은 볕이 골고루 퍼지도록 실어 나릅니다. 흙은 볕을 고이 담습니다. 풀과 나무는 흙이 담은 볕을 받아먹으면서 푸른 잎사귀를 틔웁니다. 푸른 잎사귀는 꽃을 피우고, 꽃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씨앗을 품으며, 씨앗은 내 목숨을 보살핍니다.

 


 (3) 아나스타시아 다섯째 권, 《우리는 누구?》


  블라지미르 메그레 님이 옮겨적은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다섯째 권인 《우리는 누구?》(한글샘,2010)를 읽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목숨이요 어떤 겨레인가 하고 찬찬히 생각합니다.


  나는 꿈을 아끼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을 보살피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빚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를 둘러싼 동무와 이웃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 이 숲이,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걷고 있는 이 숲이 생산하는 산소로 숨을 쉰다 … 누가 우리로 하여금 나를 닮은 남에게 피해를 주며 자신의 복을 얻도록 강요하는 것이오? … “모스크바처럼 큰 도시에서 강물을 어떻게 깨끗하게 만들었을까?” “더럽히지 않고, 유해 폐기물을 방치하지 않고, 강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돼.” … “넓은 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작물들 속에서 자라는 풀은 사람한테 이로운 모든 것을 땅과 하늘에서 취하지 못해.” … “선생님의 아드님 혹은 따님이 어디에 살길 원하시는지요? 돌무덤 같은 아파트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동산에 에워싸인 집입니까? 딸, 아들, 자손들에게 무얼 먹이고 싶습니까? 통조림 식품입니까? 아니면, 신선하고 청정한 식품입니까? ..  (14, 42, 48, 58, 164쪽)


  우리 두 아이뿐 아니라 나와 옆지기 두 어버이가 살아갈 나날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맑은 넋을 곱게 빛내는 한삶을 누릴 때에 아름답습니다. 한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늘나라 품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에 어여쁩니다. 몇 살에 무엇을 배우고, 몇 살에 어느 학교를 마치며, 몇 살에 어떤 돈벌이를 거머쥐어, 몇 살에 시집장가를 간다 하는 굴레에 두 아이가 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두 아이 모두 가장 싱그러이 빛나는 넋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두 아이와 나와 옆지기 모두 싱그러이 빛나는 넋으로 하루를 누릴 때에 가장 좋은 삶이 된다고 느껴요.


  책은 종이책도 책이지만, 사람책도 책이요, 꽃책도 책입니다. 흙을 만질 때에는 흙책을 읽어요. 땀을 흘릴 때에는 땀책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책을 읽고, 길을 걸어갈 때에는 다리책과 길책을 읽어요. 버스를 얻어 타고 마실을 다니면 버스책을 읽습니다. 어쩌다가 도시로 나들이를 간다면 도시책을 읽겠지요.


  온누리 모든 목숨이 책입니다. 온누리 모든 님이 책입니다. 그러니까, 온누리 모든 목숨이 이웃이면서 넋이고 사랑입니다. 온누리 모든 님이 동무이면서 꿈이고 이야기예요.


.. 낡은 쓰레기는 자식들에게 필요없다 … “석유·가스·그리고 무기 수출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 게 도대체 뭔데?” “많아, 블라지미르. 예를 들면, 공기·물·좋은 냄새·창조의 에너지를 체험하기·좋은 것 바라보기 … 온실에서 재배한 토마토나 오이보다 밭에서 햇빛을 직접 받고 자란 열매가 훨씬 맛있다는 거 당신은 알지. 해로운 화학물질을 투입하지 않은 흙에서 자란 야채나 과일은 더 맛있고 몸에 좋아. 그 주위에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자란다면 더 몸에 이롭지. 열매를 재배하는 사람의 감정, 그리고 태도도 중요해. 열매에 들어 있는 향은 사람에게 매우 이로워 ..  (44, 56, 57쪽)


  오늘날은 ‘햇볕 없이 물만 먹이며 푸성귀를 기른다’는 ‘수경 재배’도 있습니다. 햇볕은 없어도 비닐집에서 비료와 풀약을 먹이며 푸성귀를 기르기도 합니다. 아직 이월이나 삼월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딸기가 나오잖아요. 고작 사월이나 오월에도 수박이 나와요.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말이 안 되는 줄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아요. 느끼지 못하니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니 다시금 느끼지 못해요. 곧, 몸으로 겪지 않을 뿐더러 마음으로 살피지 않기 때문에 삶을 모릅니다. 몸으로 겪으면서 마음으로 살필 때에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몸도 마음도 꽁꽁 닫아건 채 껍데기와 이름값과 돈에 시달리니까, 오늘날 어디에서도 사랑을 찾지 못해요. 참사랑을 만나지 못해요.


  쌀밥 한 그릇도 사랑이어야 해요. 콩나물국 한 그릇이랑 두부 한 접시도 사랑이어야 해요. 시금치나물이든 오이 하나이든 사랑일 때에 내 몸이 즐겁게 받아들여요.


  내 몸은 화학첨가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화학첨가물 꾸러미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면, 내 몸속은 아주 괴롭다고 소리쳐요. 똥을 눌 때마다 똥구멍이 아파요. 똥을 누고 난 다음 냄새가 고약해요.


  자연을 먹을 때에는 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요. 자연을 먹고 똥을 누면 내 똥내음은 자연내음이에요. 아주 마땅하겠지요? 비료를 먹은 능금나무는 굵직하고 바알간 알맹이에 비료를 품어요. 항생제를 먹고 풀약을 먹은 배나무는 굵직하고 누우런 알맹이에 항생제와 풀약을 품어요.


  햇살을 먹은 포도나무는 햇살을 포도알에 담아요. 빗물을 먹은 매화나무는 매실 한 알에 빗물을 담아요. 바람을 마신 배추 한 포기는 바람 한 닢을 잎사귀에 담아요.


.. “사람은 자기의 꿈과 생각으로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짓는 거야.” ..  (290쪽)


  나는 어떤 사랑을 일구는 사람일까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짓는 사람일까요. 나는 어떤 사랑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떤 넋이나 손길이 깃든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말하거나 꿈을 들려주려 하나요.


.. 아나스타시아는 좋은 것만 믿고 짓기 때문에 항상 미소를 짓는다 ..  (292쪽)


  몸이 아프기 때문에 이맛살을 찡그리지 않아요. 내 몸속에 나쁜 밥이 들어왔으니 이맛살을 찡그려요. 내 마음속에 짓궂은 지식조각이랑 정보덩이가 스며들었으니 이맛살을 찡그려요.


  몸이 아프건 안 아프건, 내 몸속에 사랑스러운 목숨이 깃들 때에는 환하게 웃어요. 몸이 튼튼하건 몸이 여리건, 내 마음속에 사랑스러운 꿈과 이야기가 감돌 때에는 해맑게 웃어요. 삶이니까요. 사람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4345.6.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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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이승편 - 상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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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꿈을 꾸자
 [만화책 즐겨읽기 158] 주호민, 《신과 함께 (이승편 상)》

 


  좋은 꿈을 꿀 때에는 좋은 삶을 누릴 수 있구나 싶어요. 좋은 꿈을 못 꿀 때에는 좋은 삶을 못 누리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좋은 길을 바라니까 좋은 일이 찾아들고, 내 마음속부터 좋은 삶을 누릴 좋은 길을 깨닫지 못하니까 좋은 일이 찾아들지 않아요.


  좋은 꿈을 안 꿀 때에도 좋은 일은 찾아올 수 있겠지요. 그런데, 좋은 꿈을 안 꿀 때에는 나한테 찾아드는 좋은 일이 참말 좋은지, 참으로 기쁜지, 참으로 아름다운지를 느끼지 못해요. 알아보지 못하고 살피지 못해요.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바라보고, 느끼며, 알아채요. 스스로 바라는 대로 생각을 잇고, 사랑을 나누며, 꿈을 펼쳐요.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좋은 꿈을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내 마음속에 먼먼 옛날부터 스며들거나 깃든 얄궂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궂은 생각이 무엇인가 하고 돌이키면서, 이런 생각들이 차츰차츰 허물을 벗으며 예쁘거나 곱거나 착하거나 참다운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꿈을 꿉니다.


- “우린 이 집이 지어질 때부터 여기 있었지. 집이 우리고, 우리가 집이야.” (16쪽)
- “이 조건이면 임대아파트로 가실 수 있습니다.” “이보쇼. 내가 전쟁 끝나고 열여덟에 상경해서 58년째 여기 살고 있소. 가긴 어디로 가란 말여?” “에이, 어르신. 그래도 이참에 깨끗한 아파트로 가시는 게 손자 키우기도 편하시고.” “택도 없는 소리 마쇼! 지금 나보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닭장 같은 곳에서 살란 말요? 멀쩡한 우리 집 놔두고 왜?” (38∼39쪽)

 

 


  비가 내리는 하루이기에 빗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멎고 맑게 갠 하루이기에 맑은 햇살을 누립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하루이기에 산들산들 시원하며 싱그러운 바람을 즐깁니다.


  몸이 아파 힘들며 고단하고 괴로운 하루를 보냅니다. 몸이 나아 개운하면서 홀가분한 하루를 누립니다. 아이들 뒤척이는 소리에 밤에 한잠도 이루지 못하며 찌뿌둥합니다. 아이들 새근새근 잘 자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고요히 단잠을 이룹니다.


  스스로 즐기면서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바라는 대로 누리는 삶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일도 겪고 저러한 일도 겪으면서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지 모릅니다. 이런 아픔과 저런 기쁨을 겪으면서 내 생각과 사랑을 한결 따사롭게 가다듬고 싶은지 몰라요.


  꿈이란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꿈이란 이름을 더 얻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꿈이란 무언가 더 거머쥐겠다는 생각이 아니에요. 꿈이란 내 모습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티없이 보듬고 싶은 생각입니다.


- “조왕이도 마찬가지야. 아파트에는 부뚜막이 없어.” “뭐?” (45쪽)
- “그뿐만이 아냐! 곧 이 동네까지 사라진다구. 이런 상황에 꼭 데려가야만 속이 시원하겠냐?” “사정은 안됐지만, 이 사정 저 사정 다 따지면 세상에 죽을 사람 하나도 없소.” (78쪽)
- “그래도 그런 상황이셨으면, 말씀이나 해 주시지, 에휴. 그럼 도와드렸을 텐데.” “말을 해야 아는 거요?” (292쪽)

 

 


  갓난쟁이가 뒤집습니다. 뒤집고 놀던 갓난쟁이가 깁니다. 기던 갓난쟁이가 걷습니다. 천천히 걷던 갓난쟁이가 드디어 뛰며 달리기를 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말꽃을 피웁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납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어른도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납니다. 어제는 모르던 무언가를 오늘 깨우칩니다. 이제껏 모르던 무언가를 시나브로 알아챕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 깨닫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 쉰에 알아채는 슬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스승이 되고, 서로서로 좋은 벗님이 됩니다. 나는 너한테 좋은 이웃이며, 너는 나한테 좋은 동무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꿈을 꾸자고 생각합니다. 좋게 살아갈 나날을 꿈꾸자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좋게 빛내고, 나와 이웃한 사람들 삶 또한 당신들 스스로 좋게 빛내는 결을 생각합니다.


  내가 좋을 때에 네가 좋고, 네가 좋을 때에 내가 좋거든요. 내가 웃을 때에 네가 웃고, 네가 웃을 때에 내가 웃어요. 내가 골을 부릴 때에 네가 골을 부리고 말며, 네가 골을 부릴 때에 나까지 골을 부리고 말아요.


- “라면만 사?” “우리 집은 라면만 먹는데요! 할머니 안 계셔서 라면 먹어요. 할아버지는 밥할 줄 몰라요.” (72쪽)
- “얼마 정도요? 보증금이란 게.” “천 5백에서 2천만 원 정도구요, 월세는 20만 원 정도입니다.” “그럼 이 집 부수면 얼마가 나오는 거요?” “에, 2인 가구에 평수를 계산해 보면, 9백만 원 정도네요.” (122∼123쪽)

 


  주호민 님 만화책 《신과 함께》(애니북스,2011) 이승편 상권을 읽습니다. 사람들 곁에 늘 있던 ‘지킴이’가 오늘날 갑작스레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사람들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빚습니다. 먼 옛날, 사람들은 지킴이를 바랐기에 집에 지킴이를 모셨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지킴이를 바라지 않으니 집에 지킴이를 모시지 않아요. 먼 옛날, 사람들한테는 돈이 없었어요. 흙이 있고, 살붙이가 있으며, 햇살과 바람과 물이 있었어요. 풀과 꽃과 나무가 있었어요.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흙이 없어요. 햇살도 바람도 물도 풀도 꽃도 나무도 없어요.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돈만 있어요.


  집에 지킴이가 꼭 있어야 집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집에 지킴이가 없기에 집을 못 지키지는 않습니다. 나라에 군대가 있어야 나라를 지키지 않아요. 내 마음에 믿음이 참답게 있을 때에 나를 사랑하면서 나를 아끼고 나를 지켜요. 전투기나 탱크나 잠수함이 나를 지켜 주지 않아요. 믿음과 사랑과 꿈이 나를 지켜요. 돈이나 아파트나 자가용이 나를 지켜 주지 않아요. 생각과 마음과 가슴이 나를 지켜요.


- “지금껏 집에만 있다가 요즘에 세상 구경을 해 보니까 많은 걸 느낀다.” “어떤 거?” “인간들의 세상이란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을 배웠지. 한쪽이 살려면 다른 한쪽이 죽어야 한달까?”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둘 다 살면 되잖아.” “문제는, 누구든지 자신은 사는 쪽일 거라 생각한다는 거지.” “뭐래.” (213쪽)
- “집이 없어지면 장맛이 다 무슨 소용이죠? 장독대도, 심지어 먹을 사람도 사라지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요? 난 부엌의 신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싸우고 있죠.” (268쪽)


  내 곁 좋은 이웃들이 좋은 꿈을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나 또한 언제나 내 하루를 좋은 꿈으로 빚으면서 내 이웃들한테 좋은 동무로 살아가자고 빕니다. 내 곁 좋은 이웃들이 좋은 사랑과 생각으로 하루를 빛내기를 바랍니다. 나 또한 늘 나부터 내 하루를 좋은 사랑과 생각으로 빛내면서 기쁘게 웃는 꿈을 빛내자고 바랍니다. (4345.6.24.해.ㅎㄲㅅㄱ)

 


― 신과 함께 (이승편 상) (주호민 글·그림,애니북스 펴냄,2011.11.1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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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도 -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윤미화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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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느낌글(서평)'은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지만, 이에 앞서, 내 책을 다룬 꼭지에서 잘못 적은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붙인다. 부디 잘못 적은 곳은 낱낱이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로잡은 결과를 '실물'로 나한테 보내 주기 바란다.

 

..

 


 파란여우(윤미화) 님, 《독과 도》를 읽다가
 ― 《사진책과 함께 살기》 잘못 다룬 곳 짚기

 


  2012년 6월 15일에 나온 《독과 도》(북노마드)를 읽다가, 내가 쓴 책 가운데 하나인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다룬 대목을 자꾸 잘못 말하기 때문에, 몇 가지 바로잡고자 이 글을 쓴다. 벌써 종이에 찍혀 나온 《독과 도》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달리 어찌할 길이 없으니, 이렇게 ‘바로잡기’를 한다.


 01. 책이름 잘못 적음
  알라딘서재에서 ‘된장’이라는 이름을 쓰는 내(최종규)가 지난 2010년에 내놓은 책 가운데 하나는 《사진책과 함께 살기》이다. 그런데, 파란여우(윤미화) 님이 쓴 《독과 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 책과 함께 살기”로 적는다. 왜 띄어쓰기를 바꾸는가? 게다가 ‘사진집’은 붙여서 적으면서 ‘사진 책’은 띄어서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 내가 인천에서 2007년부터 꾸리다가 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옮긴 서재도서관은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이다. 내 서재도서관 이름을 밝힐 때에도 ‘사진 책’을 띄어야 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 머리말을 살피면, 머리말 끝자락에 ‘사진책’이라는 낱말을 일부러 쓰려고 한 까닭을 밝혔다. 한국 사진문화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하고 싶기 때문에 ‘사진책·사진밭·사진말·사진읽기·사진찍기·사진마을’ 같은 새 낱말을 나 스스로 지어서 썼다. 이와 같은 대목을 처음부터 옳게 살피지 않는다면,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 담은 줄거리와 고갱이는 어떻게 돌아볼 수 있을까.


 02. 사진책 비평 갈래
  파란여우 님은 234쪽에서 “‘사진 책 서평집’이라는 장르는 물론 없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있다. 없을 까닭이 없으며, 없어야 할 까닭도 없다. 이 갈래로 나온 책이 한국에는 몇 가지 없고, 도서관 분류법에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았대서 이 갈래가 없다 할 수 있을까. ‘사진책 서평’이란 곧 ‘사진읽기’를 뜻하고, ‘사진비평’이다. 사진책을 말하는 책이 바로 사진비평인데, 이러한 갈래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다.


 03. 헌책방에서 건진 사진 책 위주로 썼다 (234쪽)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모두 1·2·3부로 나눈다. 이 가운데 3부는 ‘새책방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사진책만 다룬다. 1부는 도서관에서 찾아볼 만한(그러나 아직 한국 도서관에서는 알뜰히 못 갖추는) 사진책을 다룬다. 2부는 사진책을 널리 장만할 수 있는 좋은 헌책방을 소개하면서, 이 헌책방에서 장만한 사진책을 다룬다. “헌책방에서 건진 사진 책 위주”란 무엇일까? 더욱이, “헌책방에서 건진”이라는 말마디는, 이렇게 ‘건지기’까지 품을 많이 팔아야 하거나 다른 책들은 썩다리라는 뜻을 풍긴다. 나는 헌책방을 다닐 때에 “책을 건진” 적이 없다. 《독과 도》라는 책을 쓴 분이 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를 모르지 않으리라. 나는 언제나 “책을 살” 뿐이다. 살림을 장만하듯 “책을 장만한”다.


 04. 글쓴이의 주관적 견해가 많은 (234쪽)
  모든 글은 스스로 쓰니까 모든 글은 ‘주관’이다. 《독과 도》는 주관인가 객관인가? 《독과 도》를 쓴 사람 눈길로는 ‘주관’이라 하더라도, 이 주관이란 무엇인가. 게다가, 서평이든 비평이든 모든 ‘평가’란 주관이 내리는 평가이지, 객관이 내리는 평가일 수 없다. 스스로 읽은 다음 느낌을 말하는 일이 평가요, 서평이나 비평이 된다.


 05. 사진의 속내를 통해 (235쪽)
  내가 쓴 글이라면서 따온 대목인데, 나는 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토씨 -의’하고 ‘통(通)해’라는 말투를 어느 한 곳에서도 안 썼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런 말투를 ‘내가 쓴 말투’인 듯 따온글로 적어 놓았다. 몇 쪽에 이런 말투가 나오는지 밝혀 주기를 바란다(교정지에서 바로잡았으나 출판사에서 나한테 말하지 않고 이런 말투로 책을 냈으면, 내 책 또한 새로 고쳐야 하니까). 글쓴이 말투가 아닌 글을 마치 따온글이라면서 함부로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


 06. 상업광고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인 스타일은 애초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사진은 여러 갈래이고, 사진책도 여러 갈래이다. 상업사진과 상업사진책을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안 다루었대서 내가 이러한 갈래에 아예 눈길을 안 둔다는 투로 말하는 일은 얼마나 올바른 서평이나 비평이 될까. 내 알라딘서재(blog.aladin.co.kr/hbooks)에서 사진책 비평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으면 알 테지만, 나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나 ‘사진을 말하는 책’을 모두 다룬다. 다만, 이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는 상업사진이나 상업사진책은 굳이 안 다루어도 된다고 여겼고, 출판사에서도 이렇게 하자 해서 이와 같이 나왔을 뿐이다. 책 하나만 서평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어느 책 하나를 쓴 사람이 펼치는 ‘글누리(작품세계)’를 찬찬히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07.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 살면서
  사람은 ‘골목길’에서 살 수 없다. 내가 쓴 다른 책 《골목꽃,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에서도 여러 차례 밝히지만, 사람은 ‘골목동네’에 산다. ‘길’은 오가는 자리이다. 그리고, 나는 ‘배다리 골목동네’에만 살지 않았다. 내가 산 곳은 ‘인천 골목동네’이고,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쪽에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를 세 해 반 열다가 시골로 삶터를 옮겼다.


 08. 사진 책 도서관 (235쪽)
  앞서 내 책 이름에서도 말했지만, 내 책이름도 이름이고, 내 도서관 이름도 이름이다. 이름을 옳게 읽지 못하고 옳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란 더없이 슬프다. 내 도서관은 ‘사진책 도서관’이다.


 09. 최종규는 골목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236쪽)
  비평이나 감상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평과 감상을 들을 사람’ 눈높이에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이야기를 내 보금자리에서 사진으로 찍었을 뿐, 나는 어떠한 모습도 그림도 ‘수집’한 적이 없다.


 10.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이야기는 대개 ‘잊혀 가는 것들’이거나 ‘이미 잊은 것들’이다. 그래서 책은 굴피집 사진과 지금은 원로가 된 복서들로부터 시작한다 (237쪽)
  거듭 말하지만, 비평이나 감상은 자유다. 그러나 ‘잘못 읽기’는 자유가 아니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잊혀진 이야기를 한 가지도 다루지 않는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오직 ‘사진’을 다룬다. 오직 ‘사진’을 다루기 때문에, 사진책과 사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매우 대단한 《굴피집》이 첫머리에 들어갔고, ‘일본 사진문화’를 돌아보면서 ‘한국 사진문화’를 견주는 첫 책으로 ‘일본 사진쟁이가 찍은 한국 권투선수 이야기’ 사진책 이야기 또한 첫머리에 들어갈 만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제대로 읽어야지, 잘못 읽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굴피집》은, 내가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37권 사진책 가운데 첫째 꼭지였으나, 《Korean Boxer》는 여섯째 꼭지이다. 여섯째 꼭지로 다룬 글은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이 아닌데, 왜 파란여우 님이 이렇게 글을 썼는지 아리송하다.


 11. 1967년에 나온 주한미군 기념사진 책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에는 주한미군 범죄 행위가 붙어 있다고 한다 (237쪽)
  주한미군 기념사진책 이름은 《7th BN(HAWK) 2nd ARTY》이다. 왜 엉뚱한 이름을 붙였을까? 《7th BN(HAWK) 2nd ARTY》라는 사진책을 이야기하다가, 끝자락에 오연호라는 기자가 쓴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 이야기를 살짝 곁들였다. 두 가지 책을 헷갈려서 섞으면 안 된다. 이 대목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마치 내가 엉뚱한 글을 쓴 사람처럼 되고 만다.


 12. 최종규는 헌책방 순례자다. 지금은 사라진 책이거나 품절된 책을 다루는 그는 이미 헌책방을 주제로 한 책을 펴냈다 (237쪽)
  나는 ‘헌책방 순례자’가 아니다. 나는 새책방도 가고 헌책방도 간다. 나는 “책방에 책을 사러 가는 사람”이다. 헌책방에 순례하러 다니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사는” 사람이지, 사라지거나 없어진 책을 다루지 않는다.


 13. 《우리말과 헌책방》
  내 책 가운데 하나 이름을 또 잘못 적었다. 내가 한동안 내던 1인잡지 이름은 《우리 말과 헌책방》이다. 나는 ‘우리 말’처럼 띄어서 적는다. 왜냐하면, ‘우리 글’, ‘우리 옷’, ‘우리 문화’, ‘우리 강’, ‘우리 겨레’처럼 띄어서 적는 말법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14.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언급한 대부분 사진 책이 헌책방에서 찾은 책이다 (237쪽)
  앞에서 이 말이 잘못이라고 밝혔으니 덧붙이지는 않는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독과 도》라는 책에서 자꾸 이야기하는지 궁금하다.


 15.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까지 (237쪽)
 일본 ‘아이돌 화보집’ 《I♥U》를 말하는 듯한데, 이 사진책은 ‘실제 중학생’을 ‘아이돌 그라비아 사진책’으로 만드는 일본 사진문화를 돌아보면서, 한국에서 상업사진을 하는 이들이 사진책을 빚으려고 얼마나 애쓰거나 어떠한 눈길로 사진책을 빚는가 하는 이야기를 할 때에 다루었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라니, 참 듣기에 남우세스럽다.


 16. 최종규가 최민식의 《HUMAN》을 두고 쓴 글이다 (239쪽)
  그러나, 이 따온글은 최민식 님이 손수 쓴 글이지, 최종규가 쓴 글이 아니다. 최종규가 쓴 글인지 최민식이 쓴 글인지 헷갈릴 만큼 책을 제대로 안 읽었는가.


 17. 케빈 카터 사진 이야기 (240∼241쪽)
  케빈 카터 님이 찍은 사진은 그이가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사진과 얽힌 이야기를 더 꼼꼼히 더 널리 더 찬찬히 헤아린 다음 고쳐쓰기를 바란다. 파란여우 님은 케빈 카터 님이 ‘어린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적는데, 케빈 카터 님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곳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아이가 한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인데, 어느 한 아이만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케빈 카터 님은 ‘사진을 찍으며 그곳 아이들을 돕는 사람’이다. 케빈 카터 님이 찍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가슴속으로 따스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곳 아이들을 돕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그 아이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돕는다’면 훨씬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런 ‘가설’은 함부로 들추지 않기를 빈다. ‘외신 전속 사진가’이든 ‘프리랜서 사진가’이든, 저마다 계약한 회사에 보내줄 사진을 찍는 사람이기에, 부자도 아니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사진가한테 왜 자원봉사자 노릇을 바라는가. 그곳에 있는 다른 자원봉사자가 이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 일을 탓해야 하지 않는가. 아이를 돕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아이를 도울 어버이와 자원봉사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곧,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파란여우 님이 이야기하면서 “사진 찍기에 앞서 사진 읽기가 안되는 현실을 개칸하는 최종규는 사진 학교의 꼬장꼬장한 훈장님 같다(241쪽)” 같은 대목은 하나도 올바르지 않다. 최종규는 케빈 카터 님 사진과 삶을 파란여우 님이 《독과 도》에서 적은 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최종규가 마치 이렇게 ‘훈계하는 훈장님’이라도 되는 듯 끼워넣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옳지도 알맞지도 않다. 나는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파란여우 님 말처럼 비판’하지 않는다.


 18. 최종규의 책에선 회화적 이미지를 찾기는 어렵다. 요컨대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사진 생태학적 해석에 가까운 평론을 펼친다 (242쪽)
  모든 사진은 ‘회화’를 보여준다. 모든 사진은 ‘이미지’이다. 어떤 사진을 들여다보든 ‘회화 이미지’를 찾기 마련이다. 이러한 회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달리 느낀다. 그래서 나는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는 ‘주관 감상’을 따로 적지 않았다. 파란여우 님은 《사진책과 함께 살기》가 ‘주관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어떤 사진 어떤 책 어떤 작품’을 놓고도 ‘주관 해석이나 감상’을 달지 않았다. 부디, 내 책을 제대로 읽고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주관 해석이나 감상’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 몫이기에, 굳이 어떤 비평가나 평론가가 애써 안 밝혀도 된다. 시를 읽는 사람이 시를 느끼지, 평론가가 시를 느끼는가. 아니, 평론가가 느낀 시를 독자가 똑같이 느껴야 하는가. 평론가는 다른 대목을 말하는 사람이다. 시를 평론하든 사진을 평론하든 똑같다. 파란여우 님은 사진책을 평론하는 일을 너무 모르는구나 싶다. 더군다나,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여러 사진책 가운데 《Photograms of the year 1929》라는 사진책을 다룬 꼭지는 안 읽으신 듯하다. 다른 사진책에서도 어엿하고 번듯하게 숱한 ‘회화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데, 파란여우 님 스스로 못 느끼거나 안 느끼면서, 이처럼 말하는 일이야말로 ‘주관 해석과 감상’이라고 느낀다. 그나저나, ‘사진 생태학적 해석’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19. 우리나라 독자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에두아르 부바 사진 책 《뒷모습》도 벗은 사진을 표지로 삼았다 (244쪽)
  틀린 말이다. 프랑스에서 나온 이 사진책은 ‘발레하는 소녀’ 뒷모습이 표지로 들어간다(이 얘기는 내 알라딘서재에도 사진을 올리면서 밝힌 적 있다). 한국판을 펴낸 출판사에서 ‘한국 (남자) 독자 눈길을 사로잡아 책을 많이 팔려는 생각’으로 표지 사진을 바꾸었을 뿐이다.


 20. 결국 최종규가 말하는 사진의 정수란, 삶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이자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다. 최종규는 이럴 때 ‘사진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246쪽)
  파란여우 님 ‘주관 해석과 감상’을 존중하고 싶다. 《독과 도》라는 책은 틀림없이 파란여우 님 ‘주관 해석과 감상’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아름다운 사진’이란 “삶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도 아니다. 또한, 이럴 때 “사진을 즐길 수 있”지도 않다. 나는 어느 사진책을 비평하거나 다루더라도 언제나 이야기하는데,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만큼 사진을 찍는다’고 밝힌다.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언제나 이와 같다. 사진기를 손에 쥔 이가 모델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마음결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 ‘사진 의뢰한 회사’에서 이래저래 조건을 붙인다 하더라도,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매무새와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지, 기계질에서 사진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모델은 마네킹이 아닌 사람이니까. 사람 아닌 마네킹을 찍어도 똑같다. 애써 사람인 사진가가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면, ‘사진 의뢰하는 회사’는 왜 비싼값을 치르면서 여러 이름나거나 훌륭한 사진가를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맡기겠는가. 사진을 어느 사진가한테 맡기지 말고, 자동사진기로 찍어도 될 노릇 아닌가. 회사마다 스스로 사진을 찍으면 될 노릇 아닌가. 나는 ‘날것 사진’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날것을 찍으면 그냥 날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즐기고 싶은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즐기고 사랑을 즐기면 된다. 스스로 좋아하고 싶은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좋아하고 사랑을 좋아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와 ‘날것’ 얘기는 한참 동떨어진다.


 21. 끝으로 덧붙이면, 《독과 도》 3부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랑을 찍는 것〉이라는 자리는 거의 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놓고 쓴 글인데, 책 뒷날개에 붙은 “파란 여우가 탐닉한 책”에는 수전 손택 책이 실렸다. 꽤나 뜬금없구나 싶었으나, 내 책을 내 책 그대로 즐기지 못했구나 하고 느끼고 보니, 이렇게 뒷날개에 딴 사람 책을 적은 일이 외려 참 고맙구나 싶다.

 

..

 

http://blog.aladin.co.kr/hbooks/5700614

(에두아르 부바 사진책 <뒷모습>이 어떠한 책인가 하는 느낌글을 새로 썼다. 이 글을 함께 읽는다면, 파란여우 님이 내 '사진책'을 이야기하며 든 다른 책들 이야기란 너무 안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느끼실 수 있을까... 파란여우 님 또한 <뒷모습>이라는 사진책이 어떤 사진책인지 옳고 바르게 헤아리시기를 바란다. 한국 번역판 <뒷모습>은 표지부터 원본 프랑스책과 달리 잘못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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