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을 못 읽은 책집마실 (2017.4.29.)


― 경북 포항 〈달팽이책방〉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길 10번길 32

070.7532.3316.

https://www.instagram.com/bookshopsnail



  지난 3월에는 사진판을 땀빼며 들고 나르려 포항마실을 했다면, 이달 4월 끝자락에는 이야기꽃을 펴는 자리가 있어 포항마실을 합니다. 가볍게 스미는 봄바람이며 봄볕이 곱습니다. 새삼스럽지만, 포항 효자동은 마을책집 〈달팽이책방〉이 있어 든든하구나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꽃 자리에는 1인출판사 스토리닷 대표님이 아이하고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올해에 써낼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란 책을 놓고 여러모로 이야기하고, 같이 낮밥을 누립니다. 밥집지기님이 “포항에 여행 오셨나요?” 하고 물으시기에 “포항에 있는 마을책집을 보려고 왔어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포항버스나루에서 택시로 책집까지 오는 길에 택시 일꾼은 “효자동에 뭐 볼 게 있어서 가십니까?” 하고 물으셔서 “효자동에는 포항을 빛내는 엄청난 마을책집이 있답니다.” 하고 얘기했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라 곳곳 마을책집은 하나같이 대단합니다. 그동안 ‘글쓴이하고 만나는 자리’는 으레 큰책집에서만 하기 일쑤였고, 큰 출판사에서 꾸리기 마련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온나라 마을책집에서 조그맣고 알뜰하게 이야기판을 꾸립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이는 자리가 아닌, 가까이에서 숨소리까지 느낄 만하도록 아기자기하게 모여서, ‘글쓴이 혼자 떠드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생각을 나누면서 한결 깊고 넓게 마음을 북돋우는 수다판’으로 나아간다고 느낍니다.


  밤을 밝히는 촛불 한 자루는 아주 조그마하겠지요. 한 사람이 손에 쥔 촛불 한 자루라면, 열 사람이 열 자루, 서른 사람이 서른 자루를 쥐면서 둘레를 포근하게 밝힙니다. 다 다른 숱한 글쓴님이 꾸준하게 여러 마을책집을 고루 찾아나서면서 자그맣게 꾸미는 수다판이라면 조금 더 삶에 뿌리내린 슬기로운 숨결이 피어날 만하리라 봅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제가 이야기꽃을 펴는 자리인 터라 “작가님, (다른) 책은 그만 보고, 작가님 책에 미리 사인하셔야지요!” 하는 말씀에 맞추어 ‘다른 글님이 쓴 다른 책’은 다음에 읽기로 하고, 제가 쓴 사전하고 책에 바지런히 넉줄글이나 석줄글이나 닷줄글을 남깁니다. 다 다른 이웃님이 이 사전하고 책을 만나시기를 바라면서 다 다른 짧은 동시를 그립니다. 포항 이웃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간추려 옮깁니다.



  시골에서 지은 사진 ― 아이랑 짓는 살림을 고스란히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요.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이녁 아이를 바로 그분들 스스로 가장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 잘 찍을 수 있어요. 사진 솜씨를 배워야 아이 사진을 잘 찍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 재주가 있어야 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고 살림을 함께 짓는 기나긴 길동무로 바라보기만 하면 아주 값싸고 허름한 사진기를 갖추었어도 언제나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일을 하기 때문에 늘 ‘말·넋·삶’을 함께 헤아려요. 사진도 이 얼거리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스스로 바라보려는 눈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면서 사진도 달라진다고 느껴요.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 말씨가 달라지듯이,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담는 사진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멋부리려는 마음에서 멋부리려는 말이 흘러요. 속을 가꾸려는 생각에서 속을 가꾸는 말, 이른바 알찬 말이 흘러요. 멋부리려는 마음에서 멋부리려는 사진이 태어나요. 서로 사랑하려는 생각을 지으면 서로 사랑으로 바라볼 사진이 태어나요.


  아이들한테 사진기를 쥐어 주면 아이들이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한번 눈여겨보세요. 아이들은 오직 사랑으로 즐겁게 찍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사진을 매우 잘못 알기 일쑤예요. 사진은 ‘배워서’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랑으로’ 찍을 뿐이지 싶습니다. 말은 ‘배워서’ 할 수 없습니다. 말도 늘 오직 ‘사랑으로’ 주고받을 뿐이지 싶습니다. 사진읽기나 사진찍기를 가르치거나 배울 까닭이 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읽고 찍으면 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나 말하기를 따로 가르치거나 배울 까닭도 없이, 늘 스스로 살림을 짓는 몸짓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느껴요.


  삶을 짓는 사랑으로 살림을 스스로 신나게 가꾸는 새로운 마음으로 말을 빚고 생각을 나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을 짓는 사랑으로 살림을 스스로 신나게 가꾸는 새로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서로 즐깁니다. 그저 삶을 사랑으로 짓는 새로운 생각을 스스로 북돋아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사진을 찍으면 돼요. 이리하여 저는 이야기 한 자락으로 웃음꽃을 지피고 싶은 마음에 제가 시골집에서 요 몇 해 사이에 아이들하고 짓는 신나는 살림이 살짝 묻어나는 사진 꾸러미를 챙겨서 조촐히 사진잔치를 마련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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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손수 지으니 아름답네 (2017.3.4.)


― 경북 포항 〈달팽이책방〉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길 10번길 32

070.7532.3316.

https://www.instagram.com/bookshopsnail



  어떤 눈으로 보느냐로 모두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손수 빵을 굽겠다고 나서서 용을 썼는데 그만 태워먹을 적에, 하하 웃으면서 “어쩜 탄 빵이 이렇게 맛있을까?” 하고 맞아들이는 길이 있다면 “불판까지 태워먹었구나!” 하고 으르렁거리는 길이 있지요. 예전에 사서 읽고는 까맣게 잊은 채 똑같은 책을 다시 사서 읽다가 “어라 아무래도 예전에 읽은 듯한데?” 하고 떠올리면서, “아름다운 책이니 다시 살 만하지” 하고 여기는 길이 하나요, “칫, 돈을 날렸잖아!” 하고 툴툴거리는 길이 둘입니다.


  마을에 책집을 여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일하며 돈도 벌고 아름다운 이웃이며 동무이며 글님을 만날 뿐 아니라,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보람까지 누리는 길로 바라볼 만해요. 힘들거나 지치는 날이 있을 테고, 책손이 뜸한 날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책집에 건사한 모든 책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나긋나긋 노래를 들려줍니다. “걱정은 언제나 걱정을 낳으니, 늘 노래를 낳는 노래를 불러 봐. 이 마을에 지은 이 사랑스러운 책숲을 그려 봐.”


  2011년 가을부터 2017년 봄을 앞둔 때까지 두 아이를 돌보며 건사한 살림을 바탕으로 찍은 사진을 추슬러서 조촐히 사진책을 여미어 보았습니다. ‘놀이하는 시골순이·시골돌이’ 모습을 담았는데요, 두 아이하고 뚝딱뚝딱 나무판을 큼직하게 짜서 사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진꾸러미를 포항 〈달팽이책방〉 한켠에 붙여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큼직한 사진판을 어떻게 보내나 한참 망설인 끝에 손수 들고 가 봅니다. 집에서 마을 앞으로 들고 나오는데 땀이 납니다. 시골버스에 겨우 실어서 읍내로 나오고, 읍내에서 순천으로, 순천에서 다시 포항으로 시외버스를 갈아탈 적에는 짐칸에 싣습니다. 포항에서 버스를 내리고서 아무래도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택시 일꾼은 〈달팽이책방〉 있는곳을 못 찾고 빙글빙글 돕니다. 아무튼 어깨 빠질 만큼 묵직한 ‘사진 나무판’ 석 자락을 용케 짊어지고서 어여쁜 마을책집에 이르렀습니다.


  책집지기님이 건넨 홍차를 마시면서 숨을 돌립니다. 사람들이 자가용을 모는 까닭을 조금은 어림할 만합니다. 이런 큰짐을 시외버스나 기차나 택시를 갈아타면서 낑낑대자면 꽤 힘들겠지요. 그러나 저는 우리 두 아이를 온몸으로 돌보았어요. 천기저귀에 아이 옷가지를 잔뜩 짊어졌고, 유리병을 챙겼고, 주전부리나 도시락을 건사해서 다녔어요. 바리바리 꾸린 짐에 아이들이 다리가 아픈 티를 내면 덥석 안거나 업으며 걸었는데요, 안기거나 업힌 아이들이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 주니, 이 노래로 기운을 새로 내면서 한 발짝 두 발짝 내딛었어요.


  새삼 돌아보지만, 이런 걸음이었기에 지난 2016년에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같은 책을 써낼 만했습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숲바람을 먹고 뛰놀도록 돌보는 시골살림을 꾸리면서 쪽틈을 내어 가까스로 조금 읽은 책이 아직 아이들이 없던 무렵 혼자 숱하게 책집마실을 다니며 읽던 책하고 댈 수 없도록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웠네’를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이란 몇 마디로 간추렸습니다.


  사진판을 한켠에 걸고, 사진책을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이제 어깨가 풀리고 손에 기운이 돌기에, 포항으로 오는 길에 새로 쓴 동시를 깨끗한 종이에 옮겨씁니다. 어여쁜 〈달팽이책방〉에 바치는 노래예요. 살몃살몃 골마루를 거닐면서 《산딸기 크림 봉봉》(에밀리 젠킨스 글·소피 블래콜 그림/길상효 옮김, 씨드북, 2016)을 구경하고 《내가 사랑한 여자》(공선옥·김미월, 유유, 2012)를 들추고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니시야마 마사코/김연한 옮김, 유유, 2017)을 기웃거립니다. 《다시 또 성탄》(황벼리, 작은눈, 2015)을 넘기다가 《식물생활》(안난초, 2016)을 쥡니다. 사진잔치를 펴려고 들고 온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가벼운 등짐에 담을 책이 하나둘 쌓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짓고 가꾸는 살림치고 안 예쁜 살림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소꿉놀이를 비롯해서, 할매들 밭자락이며, 할배들 논두렁이며, 〈달팽이책방〉 같은 마을책집이란 마을 한켠에서 가만히 노래하면서 숲바람을 끌어들이는 상냥한 숨결이라고 느껴요.


  포항이라는 고장은 〈달팽이책방〉이 있기에 어깨를 펴면서 즐겁게 하루를 맞이할 만하지 싶습니다. 책 한 자락하고 찻물 한 모금이 어우러진 이곳은, 달팽이처럼 달달하고 달곰하겠지요. 책집이 조촐히 깃든 마을은 달팽이마냥 차근차근 아름다이 빛나는 걸음걸이가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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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제주에는 책밭이 있습니다 (2019.11.30.)


― 제주 〈책밭서점〉

제주도 제주시 중앙로 195-3

064.752.5126.



  이제 제주는 서울 다음으로 마을책집이 많은 고장입니다. 제주가 ‘책고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러나 예전부터 제주를 관광도시 아닌 ‘책고장’으로 가꾸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 사람은 제법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씽씽 달리며 바다하고 오름을 둘러보는 제주가 아닌, 자전거로 그저 한 바퀴를 빙 도는 제주가 아닌, 볼거리·먹을거리를 넘어 ‘삶자리·숲자리’를 헤아리도록 북돋우는 책고장으로 거듭날 적에 비로소 제주사람도 뭍사람도 마음에 넉넉한 숨결을 건사할 만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가 저한테 “제주를 어떻게 생각하셔요?” 하고 물으면 대뜸 “제주에는 〈책밭서점〉이 있습니다.” 하고 대꾸했습니다. “네? 책 뭐라고요? 서점이요?” 하고 되물으면 “제주 〈책밭〉을 모른다면 아직 제주를 모른다는 뜻이고, 제주마실을 안 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덧붙이지요. 이런 말에 “책방이라면 어디에든 있잖아요? 굳이 제주에까지 가서 책방에 가야 하나요?” 하고 되묻는데 “바다라면 제주 아니어도 있고, 오름하고 똑같지 않아도 봉우리나 숲이나 마을은 제주 아니어도 수두룩합니다. 왜 제주마실에서 〈책밭〉이 대수로운가 하면, 이곳 〈책밭〉은 제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헌책집이자 제주스러운 빛을 돌보려는 손길로 두고두고 이 고장을 사랑한 숨결이 깃든 터이면서, 제주에 있는 대학교나 신문사조차 다루지 못하는 제주살림을 아는 배움자리이자, 어느 제주 글꾼도 쓰지 않은 제주스러운 멋하고 이야기가 흐르는 쉼뜰이거든요.” 하고 보태어 말합니다(〈책밭〉이 마지막 제주 헌책집이 된 뒤에 새로 연 헌책집이 있습니다).


  돈이나 이름으로 마을책집을 꾸미는 분이 더러 있겠지만, 오롯이 마음하고 손길하고 눈빛으로 마을책집을 가꾸는 분이 한결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돈이나 이름이 있어서 마을책집을 열었다가도, 이름나거나 잘 팔리는 책이 아닌, 속이 야무지고 빛나는 책을 하나둘 만나면서 생각을 틔운 분이라면, 어느새 ‘책집을 빛내는 길’이란 바로 마음 + 손길 + 눈빛 + 다리품인 줄 알아채리라 생각해요.


  헌책집 〈책밭서점〉은 바로 이 네 가지가 어우러진 책터이자, 책뜰이요, 이름 그대로 ‘책밭’입니다. 저는 2002년에 드디어 〈책밭〉에 첫마실을 하고서 2006년에 살짝 얼굴을 비춘 뒤에 2010년에 큰아이를 이끌고 찾아온 뒤인 2019년 11월 끝자락에 이르러 겨우 다시 찾아왔습니다. 2019년에는 비행기삯을 내준 분이 있기에 찾아왔지요.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런데 오랜만에 오시고도 또 책부터 보시네요.” “그러게요. 책집에 오면 그 책집에서 저를 기다리면서 부르는 책을 바라보느라, 막상 책집지기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네요.” “책이야 다른 곳에서도 언제라도 살 수 있지 않아요?” “그렇기는 하지요. 그런데 〈책밭〉에는 〈책밭〉지기님이 고운 손길로 건사하신 아름다운 책이 있기에, 다른 어느 책집에 가도 〈책밭〉에 있는 책을 만날 수는 없어요. 아무리 똑같은 상품인 책이라 해도 〈책밭〉지기님 손을 탄 책은 다르구나 싶어요.”


  제가 제주사람이라면 틈이 나는 대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서 이 책집으로 마실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즐겁거든요. 언제나 새롭게 보살핀 책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살이 향긋하거든요. 네, 빛살이 향긋하고, 책집을 오가는 길이 즐겁습니다. 배우고 나누고 생각하고 얻고 건네면서 지피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습니다.


  인천 사는 형한테서 마침 살림돈을 얻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책값으로 얼마를 덜어내어 쓸 만한가 하고 어림합니다. 《표준 고등말본 교사용 지도서》(정인승, 신구문화사, 1956)하고 《實業補習學校 農業敎科書 特用作物篇》(朝鮮總督府, 1931)는 꼭 고르자고 생각합니다. 《人間 톨스토이》(로맹 로오랑/박태목 옮김, 자선사, 1954)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의 鬪爭》(아돌프 히틀러/이윤환 옮김, 신태양사, 1961)을 쥐면서 ‘어쩌면 한국에 거의 처음 알려진 《나의 투쟁》일는지 모르잖아?’ 하는 생각에 망설입니다.



이제 히틀러의 자서전을 번역 출간하는 것은, 그의 생애를 시인하는 값싼 영웅주의 때문이 아니라, 독재자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독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이, 그 광적이고 자인한 실태를 실감 있게 폭로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서문에도 언급한 바와 같다. (332쪽/옮긴이 말)



  1961년에 나온 《나의 투쟁》은 독일책을 옮겼을까요, 일본책을 옮겼을까요? “Mein Kampf”를 일본에서는 “わが鬪爭”으로 옮겼습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나는 싸운다”나 “우리는 싸운다”라든지 “싸웠다”라 해야 알맞겠지요. 《찬란한 아침, 추억의 자서전》(마리안 앤더슨/최영환 옮김, 여원사, 1966)은 고를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선 채로 책을 죽 읽으니, 나중에 이모저모 알아보니, 메리언 앤더슨 님은 ‘흑인으로서 첫 오페라 가수’가 된 분이라 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하여튼 내가 소련에서 노래한 것은 다른 어떠한 나라에서 노래한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의 연주여행은 나같은 흑인일지라도 미국에서는 천성의 재주를 살려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135쪽)



  제가 고맙게 읽은 사전 가운데 《한국속담사전》이 있습니다. 1993년에 나왔는데요, 《韓國 俗談의 妙美》(김도환, 제일문화사, 1978)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진작부터 이렇게 애쓴 보람이 차근차근 무르익어 도톰한 속담사전으로 열매를 맺었군요. 1978년에 처음 나온 책은 거의 안 알려지거나 못 읽혔지 싶습니다.


  김수남 님이 남긴 사진책 가운데 《한국의 탈춤》(김수남, 행림출판, 1988)은 아직 장만하지 못했는데 오늘 만납니다. 살림돈 허물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少年非行의 精神醫學的 考察》(서울가정법원, 1964)을 보고, 사진책 《꽃》(공병우, 공안과의원, 1978)을 봅니다. 그리고 《김환기 1913-1974》(브리태니커, 1978)를 보면서 다시금 살림돈 무너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첫판은 ‘1978.8.31.’이고, 두벌판은 ‘1980.12.1.’이라고 합니다. 첫판이 아니라서 값이 떨어진다고 여길 분이 있을 텐데, 외려 두벌판이기 때문에 ‘첫판에 그치지 않고 더 찍은’ 줄 알 수 있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꾀한 ‘김환기 회고전(1975.12.3.∼12.30.)’ 그림꾸러미인데 단단하고 알뜰하게 엮었지 싶습니다.


  더 고르고 싶은 책이 있으나, 오늘 함께 움직이는 분들이 있어서, 이제는 책을 그만 살펴야 합니다. 혼자 움직인 길이라면 책집지기님하고 이야기도 할 텐데, 이야기할 틈이 없습니다. “사장님, 살림돈을 여투어서, 오늘 못 챙기는 책을 다음에 꼭 장만하고 싶습니다. 그 책들이 부디 그날까지 이곳에 있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이 먼저 가져가셔야겠지요. 아, 생각해 보니 저 스스로도 헤매네요. 그 책을 알아보는 눈밝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에, 그 책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머물면서 제가 살림돈을 여투어 장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

  제주에는 책밭이 있습니다. 마을책집이자 제주책집입니다. 밭을 일구는 책지기님 일터이자 제주살림을 고이 아끼며 건사하는 손길이 흐르는 곳입니다. 제주사람이며 뭍사람이 제주라는 고장을 ‘관광을 넘어 삶·사랑·살림으로 숲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꿈’을 담은 책터입니다. 그래요, 제주에는 책밭이 있어, 제주라는 고장이 환합니다. 제주에 책밭이 있는 동안 저는 앞으로 새롭게 제주마실을 할 날을 손꼽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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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숲을 헤엄친 깃털 (2020.6.8.)


― 부산 〈동주책방〉

부산 수영구 과정로15번길 8-1

https://www.instagram.com/science_dongju



  부산 연산동에 새로 움튼 헌책집 〈글밭〉에서 길을 나섭니다. 헌책집을 한 곳 들렀으니 새책집도 한 곳 들르고 싶습니다. 부산마실을 하며 어느 곳을 찾아가면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한테 이야기꾸러미를 든든히 챙길 만할까 하고 헤아리니 〈동주책방〉이 마음에 꽂혔어요. 〈글밭〉으로 걸어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골목을 걷습니다. 후끈후끈한 여름볕이 매우 좋습니다. 이 후끈볕을 맨몸으로 받으며 걸으니 그야말로 즐겁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열일곱 살에 너나들이랑 나눈 말이 있어요. “넌 눈부시지 않니? 너만 멀쩡한가 봐.” “응? 햇살이 따갑다고 이맛살을 찡그리면 더 눈부셔. 그냥 해를 바라보면 괜찮던데.” 너나들이가 들려준 한 마디는 그 뒤로 ‘해를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다스리면 즐거운가를 이끌어 주었어요.


  골목을 걷는 동안 이 둘레 초·중·고등학교 어린이랑 푸름이가 무리를 짓고 어깨동무를 하고 깔깔대며 걷는 소리가 쩌렁쩌렁 퍼집니다. 아이들 입에서는 “아, 더워! 더워!”란 말이 끝없이 흐릅니다. 어쩌면 유월볕은 이 부산에서 무척 덥다고 여길 만하지요. 그런데 ‘덥다’고 자꾸 말하기 때문에 참말로 자꾸 덥고 끝없이 덥다가 못 참겠도록 더더더 덥지 싶어요.


  저는 한여름에도 굳이 그늘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한여름에도 땡볕자리에 가만히 서서 해를 온몸으로 받기를 즐깁니다. 하나도 안 덥거든요. 고맙지요. 겨울엔 겨울볕이 반갑고 여름엔 여름볕이 사랑스럽구나 싶어요.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면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햇볕이며 햇살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이제 부산경상대 앞에 다 옵니다. 54 시내버스를 탑니다. 아까 시내버스를 타다가 그만 걸상 모서리에 무릎을 세게 찧었는데 아직 찌릿찌릿합니다. 어릴 적에도 걸상 모서리에 가끔 무릎을 찧고 주저앉은 적이 있는데 쉰 살이 가까운 이 나이에도 무릎을 찧네 싶군요.


  어느 골목에 마을책집이 깃들었으려나 하고 헤아리며 걷습니다. 부산은 집이 빼곡하고 길이 좁은데, 〈동주책방〉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아파트 꽃밭이 옆으로 제법 넓습니다. 부산이지만 부산스럽지 않은, 퍽 아늑하면서 조용한 데에 책집이 있네요.


  파랑하고 공룡이 어우러진 책집에 닿습니다. 가만히 여닫이를 당겨 들어갑니다. 이모저모 알뜰하게 손질하고 돌본 티가 물씬 흐르는 빛을 느낍니다. 얼마나 깊고 넓게 ‘자연·생태’ 책을 살폈으면 이만하게 꾸밀 수 있을까요. 책시렁 한켠이며 책 한 자락이며 즐겁고 따사로이 어루만진 숨빛입니다.


  큰책집도 작은책집도 아닌 마을책집이기에 이처럼 꾸미고 돌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길을 일구면서 배우고 느끼고 맞아들인 기쁜 눈물웃음을 고이 건사한 몸짓이기에 이러한 마을책집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백 살이 넘었지 싶은 《Familiar wild flowers》 같은 책을 살살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넘깁니다. 풀꽃을 아끼는 눈빛으로 엮은 이 도감을 언제쯤 장만하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Flowers of the farm》도 넘깁니다.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런 책이 꽤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책이 안 나오다시피 합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전문스럽게 치우거나 멋져 보이는 사진·그림으로만 엮으려 합니다. 삶자리나 마을에서 문득 바라보고 즐겁게 마주하고 동무할 상냥한 ‘풀꽃 그림꾸러미’가 드물어요. 어린이 눈썰미나 눈높이로 다룬 풀꽃 그림책이 없다시피 하달까요. 스웨덴 분인 엘사 베스코브 님이 1800년대 끝무렵부터 1900년대 첫무렵에 빚은 그림책은 자연생태 그림책이 아닌 이녁 딸아들을 담아낸 그림책입니다만, 이 그림책에 깃든 풀꽃나무가 얼마나 따사롭고 아름다운지 몰라요. 꼼꼼하게 담아내어도 나쁘지 않으나, 이보다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즐거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마음이 되고서 풀꽃나무를 붓끝으로 옮길 적에 아름답게 나눌 풀꽃책 하나가 태어나지 싶습니다.


  곱게 깃털을 붙인 펜은 다음에 마실하면서 장만하자고 생각하며 《고래책》을 들여다보고 《내가 더 커!》도 천천히 읽습니다.


  이 책도 저 책도 마음에 들지만 오늘 다 사들여서 고흥으로 챙겨 가기는 어렵습니다. 이모저모 끙끙거린 끝에 《개복치의 비밀》(사와이 에쓰로/조민정 옮김, 이김, 2018)을 쥐고, 《시선들》(캐슬린 제이미/장호연 옮김, 에이도스, 2016)을 쥡니다. 저녁에 길손집에 들면 《시선들》부터 읽을 생각입니다. ‘the collected badges of birds’ 가운데 ‘검은머리물떼새’하고 ‘물총새’ 둘을 장만하기로 합니다. ‘참새’를 뒤늦게 보았는데, ‘참새’는 부디 다음에 마실할 때까지 남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빕니다. 이러고서 ‘책 하나 천바구니’까지 더 고릅니다. 여느 때에도 늘 어깨로 가로지르는 천짐을 둘 몸에 매달고 사는데, 하나를 더 매달 생각입니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서 등짐에 챙긴 ‘마을책집 사랑하기’ 꾸러미가 있습니다. 〈동주책방〉 책집지기님한테 이 꾸러미를 드립니다.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이란 책에 담은 ‘책나무’ 그림으로 걸개천을 하나 찍었고,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에 그림을 담아 준 사름벼리 어린이 연필그림까지 섞어서 꽃종이를 네 가지 찍었어요. 온나라 모든 마을책집이 마을에서 ‘책나무’가 되고, 이 책나무는 시나브로 책숲이 되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나무 곁에 책집 있고

 책집 옆에 숲이 있고

 이 둘레에 집을 짓고

 집집이 어울려 마을로


  문득 떠오른 넉줄글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마을책집이란 나무 곁에 있는 쉼터이지 싶습니다. 이 책집으로 찾아오면서 숲을 느끼고, 이 숲을 느끼는 마음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가꾸는 즐거운 눈망울로 자라나지 싶어요. 그냥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마을이 아닌, 숲바람을 마시고 함께 노래하는 발걸음으로 보금자리가 하나둘 피어나서 저절로 태어나는 마을이라면 기쁘겠어요.


  찌릿거리는 무릎을 쉬려고 걸상에 앉습니다. 책집지기님은 스무 살 무렵부터 ‘내 책집’을 지피려는 꿈을 키우셨다고 합니다. 즐겁게 하는 다른 일이 한 가지 있고, 즐겁게 돌보는 책집이 한켠에 있고, 즐겁게 마주하는 이웃이 둘레에 있는 삶길이시네 싶어요.


  우리가 저마다 도서관이나 책집을 따로 하나씩 꾸린다면 꽤 재미있겠네 싶습니다. 우리가 꾸릴 도서관이나 책집은 커야 하지 않고, 책이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눈빛을 밝혀서 갈무리한 책으로 이야기를 꽃피우는 자리이면 되어요. 나라 곳곳에 마을책집이며 마을책숲(마을도서관)이 십만 곳이나 백만 곳쯤 있다면 참 재미나겠지 싶습니다. 서로서로 나들이를 다니고, 서로서로 다 다른 눈빛으로 가꾼 다 다른 책살림을 만나면서 서로서로 배우고 알려주는 마을길이 된다면 이 나라가 어느 만큼 살 만한 터전으로 거듭나리라 봅니다.


  책집은 대단해야 하지 않습니다. 빨래집(세탁소)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할 수 있어요. 빵집 꽃집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옷집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할 수 있지요. 머리집이나 문방구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할 만하고, 셈틀집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할 만합니다. 출판사이면서 책집이 되어도 좋고, 나들가게나 술집이면서 책집을 나란히 해도 아기자기하겠지요. 숲을 헤엄친 깃털이 나부끼는 〈동주책방〉을 이다음에 찾아올 날을 손꼽으면서 이제 길손집으로 갑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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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쪽빛책뜰 (2020.6.9.)

― 부산 〈인디고서원〉


부산 수영구 수영로408번길 28

051.628.2897.

www.indigoground.net



  사전짓기라는 길을 가지 않았다면 그저 숲에서 조촐하게 하루를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때에는 나무를 읽고 풀을 읽고 하늘을 읽고 바람을 읽다가 노래를 부르면서 맨발에 맨손으로 숲을 누비고 살겠네 싶어요. 사전짓기를 하는 터라 숲 곁에서 지내면서도 큰고장으로 책집마실을 다닙니다. 사전이라는 책에 담을 말을 살펴야 하고, 사람들이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그냥 쓰는 숱한 말을 ‘풀이하거나 풀어내어 다루’어야 하거든요. 요즈막에 ‘자살당하다’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뭔 소리인가 갸우뚱했는데 ‘자살이 되도록 몰렸다’라든지 ‘자살로 보이도록 시달렸다’는 뜻이더군요.


  한국은 ‘어린이·푸름이 자살률’이 무척 높습니다. 어르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일쑤입니다만 꽃피울 겨를이 없이 꺾이는 어린이·푸름이는 자꾸 늘어납니다. 돌림앓이를 둘러싸고서 아직도 교육부에서는 ‘교과서 진도+대학입시’만 바라봅니다. 왜 아이들을 시멘트덩이에 밀어넣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이 숲을 껴안는 길로 가도록 이끌지 않을까요. 왜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려 할까요. 왜 아이들 스스로 꿈을 지어 사랑을 가꾸도록 몸소 보여주면서 즐겁게 가르치고 함께 배우는 살림하고는 등질까요.


  엊저녁에 남천역 둘레 길손집에 묵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디고서원〉으로 찾아갈 생각으로 가까운 길손집에서 묵는데, 참 잘못 생각했더군요. 이곳에서 광안리란 곳이 가깝다고 하네요. 관광지인 바닷가에는 갈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기에 광안리가 어디 있는 줄 모르고 살았으니, ‘관광지하고 가까운 길손집’이라며 비싸게 부른 값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햇볕을 머금으면서 걷습니다. 아침 열 시가 안 되어 바깥에서 골목새 노래를 들으면서 동시를 씁니다. 이윽고 열 시를 넘고, 드디어 〈인디고서원〉 안쪽을 들여다봅니다. 손으로 찍은 벽돌로 칸칸이 쌓아올린 이 터전은 즈믄해를 바라보면서 지었다고 합니다. ‘즈믄책집’이로군요. 웬만한 나무는 으레 즈믄해를 삽니다. 이웃나라에는 여러 즈믄해를 살아낸 나무가 꽤 있어요. 한국은 숱한 싸움질하고 삽질 탓에 즈믄나무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고흥읍에는 즈믄살 가까운 우람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만, 고흥군청은 이 나무를 돌보거나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아요. 몇 해 앞서는 굵다란 가지를 함부로 쳐내고서 옆에 정자를 들여놓기까지 했습니다. 즈믄살 가까운 고흥읍 우람나무 둘레에 잔뜩 떨어진 담배꽁초하고 술병이란 슬프기까지 합니다.


  바깥에서 보면 나무걸상이 있고 꽃그릇을 놓은 느긋한 살림집 같은 〈인디고서원〉인데, 안으로 깃들면 알뜰살뜰 여민 어린이책이 1층에, 요모조모 꾸린 푸른책이 2층에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길목에는 높이 솟은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고, 2층에서 문득 창밖을 내다보면 질경이가 함초롬한 마당이 있어요.


  푸름이를 아끼는 손길로 돌보는 마을책집에 멧새가 깃들어 마을새가 됩니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차츰차츰 철이 들면서 마을지기가 될 테지요. 이 마을지기 푸름이가 한 올 두 올 엮는 이야기는 어느새 마을책이 될 테고요. 질경이 곁에 흰민들레가 어깨동무하면 참 곱겠구나 생각합니다. 고흥에 돌아가면 올해에 훑은 흰민들레씨를 이곳에 보내야겠어요.


  쪽빛인 책뜰을 돌아보다가 《세실의 전설》(브렌트 스타펠캄프/남종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8)이 눈에 박힙니다. 《인디고서원, 내 청춘의 오아시스》(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 궁리, 2018)는 오늘 여기를 일군 땀방울, 또는 사랑방울이 어떻게 출렁출렁 흐르면서 냇물이 되었는가를 다루었지 싶습니다.


  하늘을 담아 새파란 바다는 쪽빛입니다. 가없이 맑은 하늘처럼 그지없이 싱그러운 물빛은 ‘빛깔없음(투명)’이 아닌 ‘파랑’이지요. 새삼스럽지만, ‘쪽빛책뜰’이란, 이 책집을 드나들 어린이하고 푸름이뿐 아니라 어른들 마음에 어떤 빛깔이 물들면서 생각을 새롭게 씨앗으로 묻으며 아름다이 피어날 만한가 하고 살며시 귀띔하는 터전이지 싶어요.


  그나저나 부산시는 이곳에 여태 ‘훈장’을 안 주었다니 놀랍습니다. 부산시에서 알아보는 눈썰미가 얕은 나머지, 아니 아직 부산시에는 쪽빛마음이 옅은 탓에, ‘보람’을 어떻게 나누는가를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부산이란 고장에서 벼슬아치(공무원)가 되는 이들이, 또 교사로 첫발을 떼는 분들이, 《인디고서원, 내 청춘의 오아시스》를 길잡이책으로 읽고서 일밭을 일구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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