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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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이 드넓던 고장인데 (2015.11.28.)

― 인천 〈삼성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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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책집이 있어서 마을을 찾습니다. 이웃 여러 고을에 어여쁜 책집이 있으니 사뿐사뿐 나들이를 갑니다. 마을·고을이라는 터전은 사람이 모이면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마을은 숲정이를 품는 손길이 있어 푸르게 일렁이지 싶습니다.


옹기종기 담을 마주하는 보금자리가 있고, 집하고 집 사이에 작은가게가 들어섭니다. 가게가 하나둘 모여 저자가 생기고, 저잣거리에는 마을사람을 비롯해 어깨동무하는 다른 고을에서 찾아옵니다. 복닥복닥 발걸음이 늘고 속닥속닥 이야기꽃이 피면서 마을살이를 아로새기는 책집이 살며시 싹을 틔웁니다.


2015년 가을날 〈삼성서림〉을 찾아가면서 이 책집이 인천 배다리에서 걸어온 길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인천 배다리에는 한국전쟁 뒤로 헌책집이 하나둘 모였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옛 축현초등학교 담벼락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길장사로, 차츰 그곳에서 옮기거나 밀리며 창영동 쪽으로 왔다고 해요. 저는 1975년에 태어났으니 예전 일을 두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했고, 여러 헌책집지기님들 말씀으로 지난날을 어림합니다. 다만 동인천 굴다리 곁에 살던 동무한테 놀러가며 “어? 이런 데에 책방이 있네?” 했더니 동무는 “넌 몰랐냐? 하긴 너네 집은 신흥동이니까. 저쪽으로 줄줄이 더 많아.” 하고 대꾸한 일은 떠올라요. 1983년 즈음입니다. 그땐 헌책집 둘레로 책손이 우글우글했습니다.


인천은 갯벌이 넓습니다. 엄청나요. 썰물에 갯벌을 한 시간쯤 걸어도 끝이 안 보여요. 그런데 갯벌이 넓은 인천은 여태껏 이 갯벌을 파헤쳐 공장을 짓거나 아파트를 세우는 일만 벌였어요. 갯벌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살피지 않고, 갯벌을 어떻게 살리거나 사랑해야 하는 줄 깨닫지 않아요. 죽음바다가 된 시화호가 있어도 새만금에서 똑같은 짓을 벌였고, 송도나 영종섬도 매한가지예요. 갯벌이 있어야 뭍도 숲도 깨끗할 텐데, 이를 살피지 않고 드넓은 갯벌을 ‘돈’으로 바꾸는 데에만 힘을 쏟았어요. 그러고 보면, 갯벌을 올바로 알려주는 책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른한테 함께 읽혀야 하는구나 싶어요. 어른부터 갯벌 이야기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싶어요. 대통령한테 읽히고, 국회의원과 시장·도지사한테 읽혀야지 싶어요. 공무원한테도 읽히고 개발업체 사람들한테도 읽혀야지 싶어요.


글길을 생각해 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 하나 오롯이 일구기까지 오랜 나날을 기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모두 그렇지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도 그래. 모두 오래오래 품을 들이고 땀을 들입니다. 사랑을 쏟고 꿈을 그립니다. 책이란, 품이며 사랑을 들일 길을 찾는 일이 아닐까요. 책을 찾아나서는 책집마실은 사랑길을 헤아리려는 발걸음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노래하는 책을 마음으로 읽습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싶어 책을 손에 쥡니다. 하루를 씩씩하게 일구고 싶기에 책마실을 다닙니다. 사랑을 따사로이 품고 싶어 책에 깃든 빛살과 볕을 받아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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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개》(니콜라이 칼라시니코프/문무연 옮김, 학원출판공사, 1987)

《수정의 상자》(아젤라 투우린 글·델라 보스니아 그림/박지동 옮김, 문선사, 1984)

《소피가 학교 가는 날》(딕 킹 스미스 글·데이비드 파킨스 그림/엄혜숙 옮김, 웅진닷컴, 2004)

《the drama Bums》(Jack Kerouak, penguin book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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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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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말이 즐거운 삶으로 (2018.1.20.)

― 춘천 〈굿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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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서 하루를 묵으며 이야기꽃을 펴기로 했습니다. 〈굿라이프〉로 가기 앞서 〈경춘서점〉부터 들렀고, 이 헌책집에서 언제나 졸업사진책을 고마이 만나서 반가이 장만한다는 이야기를 저녁 모임자리에서 들려주니 놀라눈 눈치입니다. “졸업앨범이요? 그런 책도 헌책방에 나와요? 내 것도 아닌 다른 사람 졸업앨범을 뭐 하러 사요?” “사진을 하는 사람도 졸업사진책을 눈여겨보지만, 영화·연속극을 한다면 더더구나 졸업사진책을 봐야 해요. 생각해 보셔요. 1970년대 차림새나 얼굴 생김새를 어떻게 알아낼까요? 바로 졸업사진책이에요. 1950년대나 1930년대도 그래요. 그무렵은 이 나라에서 사진기 있던 집이 드물었고, 수수한 사람들 수수한 차림새는 언제나 졸업사진책에서 엿볼 만합니다.”


그런데 졸업사진책에 실린 아이들이 학교옷을 차려입으면 머리결이며 옷차림이 모두 엇비슷합니다. 얼굴 생김새는 좀 다르다지만 죄다 한 가지 틀에 매여요. 어떤 어른은 이렇게 똑같거나 엇비슷하게 보이는 모습이 보기좋다고 말합니다. 아마 흐트러지지 않아 보여 좋다고 여길는지 모르지만, ‘제복’을 입혀 똑같이 줄세우고 똑같이 틀에 가둘 적에는 홀가분하거나 사랑스러운 넋이 샘솟지 못합니다.


“요즘 사전 찾아서 읽는 사람 없지 않아요? 모르는 말은 네이버로 찾으면 되고요?” “사전뿐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요. 네이버한테 물어보면 숱한 사람들이 미리 갈무리해서 올린 글이 줄줄이 나오니, 따로 책을 안 사더라도 ‘알아볼 만한’ 대목은 웬만큼 찾겠지요. 그렇지만 남이 찾아서 갈무리한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한테 알맞을까요? 스스로 살펴서 읽고 헤아리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 마음에 얼마나 남을까요? 사전만 놓고 보면, 오늘날 사전은 뜻풀이가 거의 일본사전을 베끼거나 훔친 탓에 돌림풀이·겹말풀이에 갇히기도 했고, 너무 낡았어요. 제가 쓴 사전에 풀이한 대목하고 네이버 사전을 같이 놓고 살펴보셔요. 낯설거나 어려운 한자말만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기보다는, 늘 쓰는 가장 흔하고 쉬운 낱말이야말로 종이사전에 찬찬히 읽고 새길 적에 생각을 제대로 다스리고 펴는 길을 스스로 열 수 있다고 여겨요. 바로 이 때문에 굳이 종이책으로 낼 사전을 씁니다.”


이곳 〈굿라이프〉 지기님이 책상 하나에 제 사전만 몇 자락 올려놓았습니다. 제 사전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 놓고 바라보니 새삼스럽습니다. 춘천 이웃님한테 들려준 얘기처럼, ‘가장 쉬운 말’부터 사전에서 찾아보며 생각을 추스를 적에 ‘가장 빛나는 새길’을 스스로 알아낸다고 느껴요. 철학이란 이름이 되면 으레 딱딱하거나 어려운 일본 한자말이나 서양말을 쓰려 하는데, 그런 말로는 ‘갇힌 생각’에 머물지 싶어요.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수수한 말씨인 삶말을 쓰는 어른일 적에는 ‘열린 생각날개’로 피어나지 싶습니다. 책집 이름처럼 “즐거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즐거운 말”입니다. 노래하는 말이 노래하는 생각으로, 사랑스런 말이 사랑스런 생각으로, 꿈꾸는 말이 꿈꾸는 생각으로 날개를 폅니다.


《직장생활의 맛》(나영란, 기획공방, 2017)

《SEATTLE black and white + with colours》(GINA LEE, 2016)

《아현포차 요리책》(황경하·박김형준, 식소사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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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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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으로 읽다 (2017.12.3.)

― 청주 〈앨리스의 별별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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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책이 아니어도 즐길거리·읽을거리·볼거리는 많습니다. 어느 길을 즐겨도 아름답습니다. 영화·방송·유튜브는 가만히 지켜보면 됩니다. 저쪽에서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책은 언제나 스스로 읽어내지요. 저쪽에서 어떤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펴서 책으로 묶든, 이 책에 흐르는 알맹이·줄거리·사랑을 우리 스스로 알아내고 느끼며 생각해서 삭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책읽기란, 스스로 나서야 하고 스스로 배워야 하며 스스로 배운 살림을 우리 삶에서 다시 스스로 삭여 녹이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목에서 남다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책 고르기, 책 알아보기, 알아본 책을 사기, 산 책을 집으로 들고 오기, 들고 온 책을 읽으려고 짬을 내기, 짬을 내어 읽는 동안 머리를 바지런히 움직여 생각을 꽃피우기, 생각을 꽃피워서 알아낸 이야기를 삶으로 녹이기, 삶으로 녹인 이야기를 새롭게 가꾸어 즐겁게 하루를 맞이하기 …… 이 모두 남이 해주지 않고 손수 해요. 책읽기나 책숲마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새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몸소 펴는 작은 몸짓이 됩니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살려낸 새로운 사랑을 스스럼없이 이웃하고 새삼스레 펼치는 길이 바로 책읽기요 책숲마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다가 함께 걸어가기로 한 다른 사람이 책집에서 만납니다. 한쪽은 책집지기요, 다른쪽은 책손입니다. 〈앨리스의 별별책방〉에서 ‘별별’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저 ‘별잔치·별빛·별노래·별내음·별꽃’처럼 반짝이는 숨결을 떠올립니다.


책 한 자락이 너른 이야기마당으로 됩니다. 밭 한 뙈기가 너른 이야기터로 됩니다. 아이들 노래와 놀이 한 가지가 너른 이야기숲으로 됩니다. 밥 한 그릇과 말 한 마디가 너른 이야기판이 됩니다. 후꾸오카 마사노부 님은 무꽃에서 하느님을 보았다고 해요. 무꽃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면, 달맞이꽃에서도, 나팔꽃에서도, 분꽃에서도, 감꽃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을 볼 만해요. 아이들 눈꽃이며 어른들 눈꽃에서도 하느님을 읽고, 바람꽃이며 구름꽃에서도, 또 책꽃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비 날갯짓을 애틋이 바라봅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를 알뜰히 듣습니다. 글자락을 포근히 읽습니다. 하느님은 커다란 절집보다는 마을이웃 가슴팍에 있고, 돌멩이 하나랑 책 한 자락이랑 들풀 잎사귀에 있지 싶습니다.


문득 돌아보면 다른 눈치라고는 없이 책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자동차도 큰고장도 아파트도 텔레비전도 안 보고 싶어요. 졸업장도 자격증도, 몸매도 얼굴도 안 보고 싶습니다. 오로지 마음빛을 읽으면서 생각날개를 펴고 싶습니다. 청주 한켠에서 오늘을 별빛으로 읽도록 다리를 놓는 쉼터 앞으로 우람한 나무가 줄지어 섭니다. 우람나무랑 마을책집 둘레로 나무걸상을 동그랗게 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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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은 그만》(가자마 도루/문방울 옮김, 마음산책, 2017)

《교토대 과학수업》(우에스기 모토나리/김문정 옮김, 리오북스, 2016)

《제주 돌담》(김유정, 대원사, 2015)

《같이 살래?》(유총총, 푸른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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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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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한 자루 (2018.4.13.)

― 대구 〈서재를 탐하다〉



  어느 갈래이든 오래오래 파헤치면서 누린다면, 처음에는 풋내기였다 하더라도 시나브로 솜씨님으로 거듭나요. 깊은 눈길도, 너른 손길도, 고운 마음길도, 갓 태어날 적부터 품을 수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차근차근 가다듬거나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번쩍거리는 책집도 있으나, 꾸준꾸준 어루만지면서 차츰 빛나는 책집도 있어요. 하루아침에 날개돋친 듯이 팔리는 책이 있다면, 오래오래 천천히 피어나듯 읽히는 책이 있어요. 마을책집이란 ‘reflections’라는 만화영화 노래에 나오듯 ‘늦꽃’이기 마련이지 싶습니다. 늦게 피는 꽃이 한결 짙으면서 곱다고, 조금씩 책시렁을 늘리고 차분히 책모임을 펴면서 마을에 뿌리내리는 이 조촐한 터전이야말로 그 고장을 사랑하는 샘터이지 싶어요.


  〈서재를 탐하다〉에 찾아왔고, ‘우주지감’ 모임 분을 만납니다. 작은 일 하나를 바탕으로 이야기 하나를 엮어 찬찬히 들려주고 듣습니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이야기가 볼 만해요. 아이를 돌보면서 배운 살림을 들려주고, 아이랑 그림책을 읽는 동안 새롭게 되새기는 말넋으로 엮는 사전이란 책을 밝힙니다.


  스스로 찾아보거나 살펴보기에 깨닫습니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겪거나 마주하기에 알아차립니다. 남이 쓴 글을 읽기만 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책모임이란 자리는 스스로 찾아나서며 깨닫고 싶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펴면서 기꺼이 듣는 수다마당이라고 느낍니다.


  봄날 하늘빛이라면, 스스로 이 봄날에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어떠한 빛깔인가를 느껴요. 여름날 구름빛도 여름날에 스스로 구름을 바라보아야 어떠한 무늬인가를 느끼지요.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도 가을빛이나 겨울빛을 헤아릴 만하지만, 스스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온몸으로 부대낀다면 봄빛과 여름빛과 가을빛과 겨울빛을 제대로 알아보리라 생각해요.


  책에 깃든 줄거리도 스스로 온마음으로 만지며 넘기니 하나하나 헤아릴 테지요. 남들이 줄거리를 간추려 적은 글을 읽는다고 책을 알 수 있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 눈길에 따라 우리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비추어 우리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읽은 책은 천천히 우리 삶으로 녹아듭니다.


  애써 장만했는데 미처 못 읽는 책이 있을까요. 이런 책도 더러 있을 테고, 가끔은 이런 책이 쌓일는지 몰라요. 그런데 쌓이면 어떤가요. 미처 못 읽으면 어떻지요? 우리가 읽을 책은 언제라도 읽으면 됩니다. 오늘 못 읽었으면 다음에 읽고, 끝끝내 못 읽은 책은 나중에 아이들이 물려받아 읽어도 됩니다.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못 읽는 책은 먼먼 뒷날 누가 즐겁게 읽으면 되고요.


  책마루는 열린 책집이 됩니다. 책마루는 트인 책수다가 됩니다. 책마루는 다같이 만나는 놀이터가 되고, 대구라는 이 고장을 밝히는 촛불 한 자루가 됩니다.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나승위, 파피에, 2015)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호리베 아쓰시/정문주 옮김, 민음사, 2018)

《할머니가 물려주신 요리책》(김숙년·김익선·김효순, 장영, 2013)

《あるかしい書店》(ヨシタケシンスケ, ポプ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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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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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줘도 될까 (2013.5.5.)

― 서울 〈문화당서점〉


  역사는 학자만 캐낼 수 있을까요. 학자끼리 캐내는 역사란 어떤 이야기가 될까 요. 문화·교육·예술·사회·정치는 전문가만 해내는가 궁금합니다. 전문가끼리 벌이는 일은 어떤 이야기로 이을 만할까요. 오래오래 헌책집을 돌본 일꾼은 학자도 전문가도 글잡이도 아닙니다. 그런데 헌책집에서 다루는 책은 교과서·참고서·잡지를 비롯해 온나라를 넘나드는 깊고 너른 이야기를 담습니다. 헌책집지기는 ‘책을 읽을 틈’이 모자랍니다. 묻히거나 버려진 책을 캐내어 손질하고 닦은 다음에 책시렁에 놓기 바쁩니다. 다 다른 갈래에서 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책을 알맞게 알려주고 이어줍니다. 참고서랑 인문책에, 어른책이랑 어린이책을 다루고, 한글책 일본책 한문책 영어책 숱한 나라밖 책도 나란히 다루지요.


  헌책집지기 가운데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닌 이는 손에 꼽도록 드뭅니다. 학교 문턱을 안 밟거나 짧게 디딘 분이 수두룩합니다. 그저 책집에서 일하고 책을 만지며 스스로 찾아내고 알아내어 밝히고 깨달아 모든 알음알이를 둘레에 스스럼없이 나누는 헌책집지기라고 느껴요.


  〈문화당서점〉 지기님은 “그렇게 많은 책을 다루고 팔았는데도 아직 처음 보는 책이 많아요. 그런데 간혹 ‘내가 책을 좀 안다’고 말하는 분이 있더구만. ‘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백만 권이 아닌 천만 권을 읽었더라도 그보다 훨씬 많은 책이 있는데 어떻게 ‘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우리는 다 ‘책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학자님이 ‘책을 안다’면 굳이 뭣하러 우리 책방에 와서 책을 사가야겠어요? ‘책을 안다’면 이제 그만 봐야지. 책방에 온다는 소리는 ‘아직 책을 모른다’는 뜻이에요. 아직 책을 모르기에 더 겸손해야 하고, 책방에 오는 분들은 더 고맙게 배우려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고 으레 말길을 엽니다.


  〈문화당서점〉 지기님한테 아들뻘인 저한테 꼬박꼬박 ‘최 선생’이라 하면서 ‘책을 얕보면서 책을 안다’고 말하는 학자·전문가·지식인·교수 손님이 아쉽다고 이야기하셔요. “다 그분들이 필요해서 헌책방까지 와서 귀한 책을 사가는데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다들 ‘왜 이리 비싸냐’ 하는 말부터 해요. 배운 분들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랜책, 새책, 어린이책, 한문책, 영어책, 일본책, 문학책, 인문책, 사진책, 그림책을 고루 다루며 알찬 이곳에 찾아오면 쌈짓돈까지 헐고야 맙니다.


  “내가 최 선생한테 책을 너무 많이 팔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그래도 좋은 책을 가져가시면 나도 기분이 좋지.” 두 아이를 보시더니 “애들한테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줘도 될까? 그런데 어린이날에 아이를 헌책방에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가 있나? 허허.” 하십니다. 아이들하고 누릴 동화책·그림책을 한 꾸러미 고릅니다. 제가 볼 책은 몇 가지만 가볍게.


《심술북》(이정문, 송우출판사, 1993)

《기린 울음》(고영서, 삶이보이는창, 2007)

《사랑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4·26창작단, 힘, 1992)

《슬픈 날》(이기주, 내일을여는책, 1995)

《MASK, UNMASK》(전경애, 비봉출판사, 2010)

《無花果の木の下で》(嶋 行比古, 美術出版社, 1998)


* 알라딘 중고샵이 연신내역 앞에 들어선 이듬달, 〈문화당서점〉 지기님은 가게를 접으셨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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