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들이는 말



보안성 : 내가 군대에 들어가던 1995년은 삐삐가 한창 나돌며 손전화가 조금씩 퍼지는 무렵이었는데,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면서 중대마다 무전병을 이끌고 움직이는데, 이 무전기란 조금만 떨어지면 씨알조차 안 먹혔다. 감감하지. 그때 소대장은 남몰래 손전화를 켰고, 더듬이(안테나)가 뜨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주고받았다. 대대장은 소대장·중대장이 무전기를 안 쓰고 손전화를 쓰는지 알기는 했으나, 저 스스로도 중대에 뭘 시키고, 중대에서 소대에 뭘 시킬 적마다 무전기는 으레 먹통이기에 그냥 손전화로 시키기 일쑤였다. K-2도, M60도, 박격포도, 무반동총도, 날마다 닦고 기름을 먹이지만 정작 총알이 안 먹힐 만큼 낡았으니 “야, 우리, 싸움 나면 총도 못 쏘고 그냥 죽겠네.” “뭐, 저쪽(북녘)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고 수다. 책을 구경하기 어렵던 그곳이지만, 말미를 얻어 바깥을 다녀온 이들은 으레 책을 샅에 숨겨 들어왔고, ‘보안성’을 안 거친 책을 읽던데, 난 26달 동안 책 하나 못 읽고 뺑뺑이만 했다. 2020.9.2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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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책을 사들이는 말



그 책 :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만난다. 예전에 읽을 무렵 어떠한 빛줄기가 내 마음으로 스며들면서 환하게 피어올랐는가 하고 떠올린다. 지난 어느 날 이 책을 읽은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헌책집에서 새로 만난 그 책에는 ‘읽은 자취’가 없다. 손자국도 손때도 없이 그저 ‘묵은 나날 먼지’만 살짝 덮였다. 그래도 제법 깨끗하게 오늘까지 왔으니 고마운 셈일까. 읽히지는 못했으되 곱게 이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럭저럭 건사해 주다가 내놓아 준 그곳 사람들이 고맙다고 해야 할까. 어떻든 좋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울 한켠에서 1999년부터 스물두 해째 헌책집살림을 꾸리는 지기님이 캐낸 이야기꾸러미이다. 먼저 눈으로 알아보고, 다음으로 마음으로 읽고, 이윽고 두 손에 쥐어 살살 쓰다듬다가, 어느새 가슴에 품고서 묵은 먼지를 내 옷자락으로 닦는다. “넌 언제나 빛나는 책이란다.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한결같이. 넌 늘 사랑스러운 숨결이란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그곳에서나 똑같이. 이제 우리한테 오렴. 우리 책숲으로 가자.” 2020.9.2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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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씨앗책 (2020.9.23)

― 순창 〈책다방 밭〉


  논이랑 밭을 어울러 논밭입니다. 풀이 푸르게 일렁이는 풀밭입니다. 눈송이 소복소복 쌓여 눈밭입니다. 사람이 가득한 곳이라 사람밭입니다. 즐겁게 나누는 이야기로 시끌시끌한 이야기밭입니다. 서로 아끼며 환하게 웃음짓는 사랑밭입니다. 새롭게 지피는 생각을 씨앗으로 묻으며 고요히 깨어나는 마음밭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으면서 스스로 아름답고 즐거운 길이 되나 하고 새기는 생각밭입니다. 한지붕에서 어깨동무하며 함께 일하고 나누고 쉬고 노래하는 살림밭입니다. 이 온갖 삶을 갈무리하는 글밭입니다. 삶을 갈무리한 글을 이웃하고 널리 나누려고 하는 책밭입니다.


  전북 순창 시골자락에 깃든 〈책다방 밭〉으로 마실할 날을 손꼽다가 ‘책방 하는 농부’라고 하는 누리가게를 알았습니다. 곧바로 순창마실을 하기가 쉽지 않다면, 마음으로 먼저 누리가게를 만나자고 생각하며 누리마실부터 합니다. 요즈음은 다들 자동차를 몰아 하루치기로도 꽤 먼길을 다녀온다지만, 고흥 시골자락에서 순창 시골자락으로 시골버스를 두루 돌고 돌아서 찾아가자면 하루를 꼬박 써야겠지요. 어느새 한가위가 가까운 9월 끝자락은 날마다 무화과알을 조금씩 따서 누리고, 때로는 감알을 따서 누리며, 초피알을 훑어서 말리고, 붓꽃 씨주머니를 따서 나란히 말립니다.


  굵은 모과알을 따서 석석 썰어 달콤가루에 재우다가 생각합니다. 〈책다방 밭〉 ‘씨앗책’을 한 자락 받으면 좋겠어요. 누리가게에 올라온 ‘씨앗책’은 9월 이즈막이나 10월에 심을 만한 씨앗 두 가지에다가 ‘숨은책’ 하나가 꾸러미입니다. 숨은책이란 ‘수수께끼책’입니다. 무엇을 담았는지 미리 알려주지 않는 책이에요. 다만 하나는 틀림없을 테니, 순창 시골자락에서 흙살림을 가꾸는 길에 곁에 두면서 새록새록 반가이 이야기밭이 되는 책일 테지요.


  마당이며 뒤꼍에서 낮에는 나비랑 놀고, 밤에는 반딧불이랑 놉니다. 나무처럼 얌전히 서서 두 팔을 곧게 가지처럼 펴고 서면 나비는 어느새 팔등에 내려앉습니다. 반딧불이도 하늘하늘 푸르고 파랗고 하얗게 반짝이다가 살며시 머리에 내려앉지요.


  풀책(식물도감)이나 벌레책(곤충도감)을 뒤적여야 풀이나 벌레를 알 만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풀을 사귀고 벌레랑 동무하노라면 풀넋이랑 벌레넋을 마음으로 맞아들일 만해요. 앞으로는 어린이도 어른도 글책으로만이 아닌, 삶이며 온몸이며 마음이며 사랑으로 둘레를 마주하면서 지켜보면 좋겠어요. 풀책이나 벌레책에 적힌 이름을 외워도 나쁘지 않지만, 이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결을 헤아려 새롭게 만나면 오래오래 살가이 어울릴 만해요.


  호미질·삽질·낫질·괭이질 소리가 깃든 ‘씨앗책’이 한 톨 두 알 석 자락 넉 꾸러미 고루고루 퍼져 이 땅을 푸르게 물들이기를 바라요. 푸른별에 푸른책입니다.


책다방 밭, 누리가게 https://smartstore.naver.com/batt_sonen90

《정원가의 열두 달》(카렐 차페크 글·요제프 차페크 그림/배경린 옮김, 펜연필독약, 2019).6.20.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책숲마실 파는곳]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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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같이 읽는 그림책 (2018.3.8.)

― 전주 〈책방 같이:가치〉


  2018년 봄을 앞두고 ‘그림책공작소’ 지기님이 자동차를 몰다가 길에서 크게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마을책집에서는 ‘공작소장 돕기’로 ‘그림책공작소 그림책 팔기’에 나섰고, 이참에 전주마실을 해서 〈책방 같이:가치〉에서 그림책을 장만하자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며 그림책 말고 글책도 곧잘 읽지만, 그림책은 꾸준히 살피고 읽고 장만합니다. 그림책은 ‘0살부터 100살까지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삶을 새롭고 푸르게 마주하도록 상냥하게 이야기꽃을 지피는’ 책이라고 느끼기에 즐거이 만납니다. 앞으로 우리 집 아이들이 어른이 되더라도, 제 나이가 100살에 이르더라도 만화책이며 그림책을 꾸준히 읽을 생각이에요. 어린이 마음으로 삶을 노래하는 책은 누구나 같이 읽는 이야기꾸러미인걸요.


  하루치기로 전주에 다녀오려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습니다. 그림책을 주섬주섬 등짐에 챙기고서 순천을 거쳐 고흥으로 돌아오자니 한밤입니다. 찻삯을 제법 쓰고 길에서 꽤 오래 보냅니다. 여러 가지를 헤아리자면, 이 길돈을 책값으로 돌려 누리책집에서 쓰면 그림책 열 자락은 너끈히 더 살 만합니다. 그런데 마실을 나서며 생각을 차분히 추스를 겨를이 납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림책을 하나하나 느긋이 누립니다. 보금자리에 돌아간 다음 아이들하고 어떤 이야기랑 생각을 새롭게 펴면 재미날까 하고 더 생각날개를 팔랑입니다.


  마음꽃 열두 달을 노래하는 그림책처럼, 살림꽃 열두 달이나 시골꽃 열두 달을 갈무리해도 뜻있으리라 생각해요. 저는 열두 달 이야기를 동시로 쓰고 아이들은 열두 달 소꿉놀이랑 숲빛을 그림으로 담으면 새로운 책이 태어날 만하지 싶어요.


  모두 튼튼하기를 바라요. 다친 일이 있다면 몸을 천천히 달래면서 한결 든든하게 일어서면 좋겠어요. 빛나는 하루를 그리고, 밝은 마음이 되기를 빌어요.


《마음꽃 열두 달》(한태희, 한림출판사, 2017)

《어떡하지?》(팽샛별, 그림책공작소, 2017)

《사라지는 동물 친구들》(이자벨라 버넬/김명남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7)

《로켓 펭귄과 끝내주는 친구들》(예쎄 구쎈스/마리예 툴만/김서정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4)

《안녕하세요》(카타리나 소브럴, 그림책공작소, 2017)

《야호! 비다》(린다 애쉬먼·크리스티안 로빈슨/김잎새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6)

《실수왕 도시오》(이와이 도시오/김숙 옮김, 북뱅크, 2017)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허은미·김진화, 여유당, 2018)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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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겉을 봐서 모른다면 (2018.3.23.)

― 구미 〈삼일문고〉


  겉을 봐서 모른다면, 속을 보면 알까요? 속을 못 보는 눈길이라면 겉을 얼마나 제대로 보거나 알아차릴까요? 종이에 적힌 글씨를 훑는다고 해서 책읽기가 될까요? 종이에 글씨로 얹은 생각을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마음으로 담아내었는가를 헤아리기에 비로소 책읽기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요?


  구미마실을 하며 찬찬히 책시렁을 돌아보다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골랐고, 고흥으로 돌아가는 긴긴 시외버스에서 읽는데 무척 따분했습니다. 이 책은 막상 과학 이야기를 안 다룹니다. 박근혜 이야기만 다룹니다. 이럴 바에는 “저도 박근혜는 어렵습니다만”이라고 책이름을 붙여야 어울립니다. 여러모로 드러난 허술한 대목을 나무라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쪽이 아닌 너희 쪽이 저지른 잘못’을 나무라는 그 손길로 ‘너희 쪽이 아닌 우리 쪽이 일삼은 잘못’을 얼마나 나무랄 수 있을까요? 누구를 나무라려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이든 똑같이 나무랄 적에 비로소 ‘바르다’고 하겠지요.


  구미를 빛내는 마을책집인 〈삼일문고〉는 겉만 보아서 알 길이 없습니다. 책집을 알리는 판은 조그맣습니다. 책집 둘레로 딱히 도드라지게 꾸며 놓은 자리도 없습니다. 책집으로 들어서면 바깥(겉·길거리)에서 얼핏 보이던 모습하고 사뭇 달라서 놀랄 만합니다. 그러나 속꾸밈새보다도 책시렁마다 손길이 알뜰히 닿은 숨결을 읽어 본다면, 이 책하고 저 책을 알맞게 다스리려고 흘렸을 땀빛을 헤아린다면, 마을책집이 왜 마을책집인가를 어렴풋이 마음으로 느낄 만하지 싶어요.


  이곳은 조금 더 넉넉하다 싶은 자리를 한결 느긋하게 다스리는 마을책집입니다. 구미에 있는 〈책봄〉이나 〈그림책산책〉 같은 마을책집은 조촐하다 싶은 자리를 한결 포근하게 어우르는 마을책집이고요. 서로 다른 결로 서로 다른 살림을 가꾸고, 서로 다른 길로 서로 이바지하는 생각이 모입니다.


  만화책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은 제법 재미있기는 하지만 줄거리가 늘 똑같이 흐릅니다. 어쩌면 이 똑같은 줄거리를 조금 다르게 엮어 나가려 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똑같아요. 그린님이 선보인 다른 만화책조차 모두 똑같습니다. 이렇게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님 스스로 즐거울까 아리송해요.


  고른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듭니다. 왜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투덜거리나 하고 돌아봅니다. ‘설마 이런 책일 줄 몰랐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 ‘겉그림을 바라보며 속내를 못 읽었네’라든지 ‘꾸민 겉에 깃든 얕은 속살을 못 봤네’를 스스로 탓하려는 셈인지 생각합니다. 그래요, 저는 겉낯에 스민 속내를 어설피 읽었습니다. 흐드러지는 속알을 헤아리는 눈빛이 모자랐습니다. 겉을 봐서 모른다면 속을 봐도 모를 만해요. 겉을 얼핏 봐서 몰랐어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며 속을 하나하나 읽어내어 이 삶을 가꾸는 빛을 찾는 길이 되자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이정모, 바틀비, 2018)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4》(야마모토 소이치로/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2017)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지뵐레 펜트/이주민 옮김, 클, 2018)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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