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푸른그림 (2021.5.12.)

― 서울 〈나무 곁에 서서〉



  우리나라에 풀꽃두레(환경단체)가 제법 있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시골이라는 터전에서 숲을 품고 들에서 일하며 바다에서 놀던 무렵에는 따로 풀꽃두레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풀님이요 꽃님이자 숲님이고 들님에 바다님이면서 멧님이었거든요.


  시골을 밀어내어 서울을 넓히면서 풀꽃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자랍니다. 숲을 망가뜨리거나 바다를 더럽히는 일이 늘어나면서 풀빛으로 몸을 물들이는 사람이 깨어납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풀꽃두레는 시골 아닌 서울에 터를 두고 뿌리를 뻗습니다. 시골에서 싹트는 풀꽃두레가 없다시피 해요. 이러다 보니 풀꽃두레는 시골살이나 시골빛을 오히려 모르거나 등집니다. 옛 벼슬꾼뿐 아니라 새 벼슬꾼도 숲들바다를 짓뭉개지만 정작 아무런 목소리가 없고, 오히려 “멧자락 햇볕판”하고 “바다 바람날개(해상 풍력발전)”를 나라가 함박돈으로 밀어붙이도록 이바지합니다.


  서울 하늬녘에는 마을책집 세 곳 〈꽃 피는 책〉하고 〈호수책장〉하고 〈나무 곁에 서서〉가 이웃입니다. 세 곳은 들빛하고 물빛하고 멧빛으로 어우러지면서 다른 숨결입니다. 목소리로만 읊다가 빛바랜 적잖은 풀꽃두레와 달리, 이 마을책집 지기님이 일구는 ‘숲보’는 어린이하고 푸름이랑 어깨동무를 하면서 차근차근 걸어가는 푸른물결이라고 느낍니다.


  숲을 품고 노래하는 사람이 읽는 책은 숲책이 바탕일 테지만, 이보다는 언제나 하늘이요 해요 별이며 빗물이고 구름이자 바다이고 들녘에 풀벌레하고 새입니다. 굳이 종이에 얹은 풀책(식물도감)을 펴야 풀을 알 수 있지 않아요. 스스로 풀을 바라보고 훑고 혀에 얹고 씨앗을 받고 꽃을 누리면 저마다 다르면서 즐거이 풀을 익히고 사랑하는 길로 갑니다. 누가 붙인 이름을 외워야 새를 아끼지 않아요. 우리 나름대로 새를 지켜보고 동무하면서 새롭게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해는 어디에나 드리웁니다. 별은 어디에나 돋습니다. 마음을 뜬다면 해님을 맞아들이면서 해맑게 빛나는 몸으로 거듭납니다. 눈을 틔운다면 별빛을 받아들이면서 환하게 춤추는 마음으로 태어납니다.


  곁에 흐르는 바람을 느껴요. 곁에 곱살곱살 바람이 흐르도록 다독여요. 둘레에 피고 지는 꽃을 봐요. 마을에 송이송이 꽃이 피고 지도록 손길을 뻗어요. 사람이 심어서 자라는 풀꽃나무는 한 줌조차 안 됩니다. 풀벌레하고 새하고 짐승하고 비바람하고 해님에 별님이 심고 돌보는 풀꽃나무가 한가득입니다. 어린이하고 조그맣게 숲을 속삭입니다. 푸름이하고 새록새록 멧길을 맨발로 나들이합니다.


ㅅㄴㄹ


《철새, 생명의 날갯짓》(스즈키 마모루/김황 옮김, 천개의바람, 2018.10.26.)

《문장부호》(난주, 고래뱃속, 2016.11.21.)

《햇볕이 아깝잖아요》(야마자키 나오코라/정인영 옮김, 샘터, 2020.3.20.)

《소를 생각한다》(존 코널/노승영 옮김, 쌤앤파커스, 2019.12.2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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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노래 2021.6.22.

놀이하는 어린이 6 놀이사람



  어린이책은, 삶을 그리는 손길을 글이라는 이야기로 담는 책이라고 본다. 그림책은, 사랑을 그리는 꿈을 그림이라는 이야기로 엮는 책이라고 본다, 노래책(동시집)은, 살림을 그리는 숲을 노래라는 이야기로 짓는 책이라고 본다. 이 세 가지 책을 스스로 읽다가, 아이한테 읽어 주다가, 아이가 손수 읽고 누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처럼 생각했다. 우리말 ‘놀다’는 몸을 움직이는 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노을’이라든지 ‘노랗다·누렇다(땅)’하고 맞물리기도 하고, ‘노닥거리다’로 이어가기도 한다.


  놀이란 무엇일까? 곁에 무엇이 있어야 놀까? 아기가 문득 목을 가누고 눈망울을 어버이하고 맞추는 몸짓도 ‘놀이’가 된다. 어버이가 아이 발을 한손으로 모아서 세우는 몸짓도 놀이가 된다. 걸음마도 놀이요, 짝짜꿍도 놀이가 될 뿐 아니라, 맘마를 먹는 손짓까지 놀이에다가, 입을 벙긋해서 터뜨리는 말길까지 놀이라는 얼거리를 본다면, 놀이란 가장 쉽고 즐거우면서 수수한 우리 오늘이라고 느낀다.


  놀이는 남이 시켜서는 못 한다. 언제나 스스로 놀고, 놀잇감을 찾고, 놀이를 지으며, 놀이동무를 사귄다. 일은 어떠한가. 일은 남이 시켜야 하는가? 시키는 일이란 심부름이다. 스스로 하기에 ‘일’이다. 스스로 일어나는 몸짓이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놀이나 일은 모두 우리 마음에서 피어나는 몸짓이다.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빚듯 놀이를 같이하는 ‘놀이사람(인형)’이다. 놀이말은 참 쉽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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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빛 2021.6.22.

놀이하는 어린이 5 즐겁게 고졸



  나는 ‘고졸’이고, 곁님은 ‘중졸’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무학’이다. 바깥(사회)에서 보면 이렇다. 나는 열린배움터(대학교)에 들어갔으나 그만두었다. 곁님은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곁님 아버지 등쌀(입시지옥 압박)에 씩씩하게 그만두었다. 나도 곁님도 배움터를 그만두기로 하면서 마침종이(졸업장)를 거머쥐지 못하는 판이 되자, 나나 곁님이 아닌 “우리 어버이”하고 “곁님 어버이”가 큰일이 나더라. 마침종이 없이 삶을 누리고 살림을 짓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살아갈 마음을 두 어버이는 끝내 못 읽고 아직도 못 읽는다. 두 사람은 1990년대 한복판에 배움터를 떠났는데, 두 어버이는 이 대목을 여태 아쉽게 여긴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스스로 어린배움터(초등학교)에 발을 안 디뎠다. 딱 하루만 디뎠다. 두 아이 스스로 찾아가 보고서 “난 안 다닐래. 집에서 스스로 배울래.” 하고 가름했다.


  둘레에서는 ‘고졸·중졸·무학’으로 어떻게 일자리를 얻거나 돈을 버느냐고 걱정투성이. 나는 말한다. “돈부터 벌어야 하나요? 살림을 지을 줄 알고, 사랑을 나눌 줄 안 다음에야 돈을 벌어야 하지 않나요? 오늘날 다들 살림짓기와 사랑나눔을 모르는 채 돈부터 벌기에 이토록 나라가 어둡지 않나요?”


  어린이도 푸름이도 어른도 즐거울 노릇이다. 즐겁게 씨앗을 심고, 밭일을 하고, 설거지·빨래를 하고, 삶을 노래하면 된다. 즐거이 하루를 지어야 사랑이 싹튼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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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노래 2021.6.21.

놀이하는 어린이 4 입시지옥은 폭력



  열세 살이 저물던 1987년 겨울에 어머니가 “얘야, 너도 학원에 가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네? 학원이요? 그럴 돈 없잖아요?” “이제 중학생이 되면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다른 집에서는 벌써 다 하더라.” “에이, 다른 집에서 해도 우리랑 달라요. 돈도 아깝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는 대로 해야지, 먼저 중학교 과정을 학원에서 배우기 싫어요.”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다가 뒤처지지 않겠니?” “학원 안 가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진도를 못 따라간다면, 학교 잘못이에요.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갈 적에 저는 한글을 몰랐지만, 그냥 학교에서 뗀 한글로 잘 배웠잖아요. 영어나 수학도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배우면 돼요.” “엄마는 걱정되는데? 잘 생각해 봐.”


  며칠 뒤 “얘야, ○○ 알지?” “네.” “걔네가 대학생을 불러서 과외를 한대. 거기서 같이 배워라.” “과외면 더 비싸잖아요.” “워낙 이십만 원 내야 하는데, 한 사람 옆에 앉혀서 오만 원만 내기로 했어. 한 달만 해도 돼.”


  난 ‘고졸’이다. 고졸로 살며 아랑곳할 일이 없지만, 이 나라를 보면 “졸업장을 따니 다른 졸업장을 따려고 학교에 더 들어간다”고 느낀다. 자격증도 같다. 졸업장은 졸업장을 낳고, 자격증은 자격증을 낳는다. 이 고리를 안 끊으면 삶터가 엉망이다. “배움수렁은 주먹질(입시지옥은 폭력)”이다. 걱정은 걱정을 낳고, 사랑이어야 사랑을 낳는다. 어린이를 수렁에 밀어넣으면 아이는 죽음을 배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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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노래 2021.6.21.

놀이하는 어린이 3 때리고 맞다



  나는 대단히 많이, 참으로 자주, 맞으며 자랐다. 그때(1980년대)에는 다들 그랬다고 하지만, 그때(1980년대)까지 맞은 적 없이 자랐다고 하는 이웃이 제법 있다. 나는 그때(1980년대)까지 어린날을 보낸 사람이라면 모두 어른한테서 얻어맞고 막말을 듣고 시달리면서 자랐으리라 여겼는데, 아니더라. 어린이를 안 때린 어른이 그때(1980년)까지 꽤 있었을 뿐 아니라, 1950년대나 1930년대에도 어린이를 안 때린 어른이 퍽 있더라.


  거꾸로 헤아려 본다. 어른은 언제부터 어린이를 때렸을까? 1900년대로 접어들고, 이웃나라가 총칼을 쥐고 쳐들어오던 그무렵부터 어린이를 윽박지르고 때리지 않았을까? 흙을 짓고, 모든 살림을 손수 짓던 옛사람은 어린이를 ‘왜 때리지?’ 하고 알쏭하게 보았다고 느낀다. 삶터(사회)를 주무르는 힘꾼(권력자)이 사람들을 족치는 판이 되고, 배움터(교육기관·학교)가 선 1900년대 첫무렵부터 비로소 ‘어린이를 때리고 족치고 윽박지르는 짓’이 불거지고 퍼졌지 싶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가 되고부터 주먹으로 어린이를 때리는 짓은 수그러들지만, 배움수렁(입시지옥)에 가두는 짓은 그대로이다. 어린이한테 놀이할 틈을 안 주는 짓이 바로 주먹질(폭력)이다. 푸름이가 꿈이 아닌 셈값(시험점수)에 얽매이도록 내모는 짓이 바로 때림질이다. 아이를 사랑이 아닌 배움수렁에 밀어넣으면, 이 아이는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는 어른이 될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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