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뉘엿뉘엿 (2021.10.1.)

― 진주 〈동훈서점〉



  서울에서 혼자 살던 때에는 날마다 두서너 곳씩 책집마실을 다녔습니다. 서울은 어디를 가든 책집이 많았고, 이 책집에서 장만한 책을 저 책집으로 가는 길에 읽고, 저 책집에서 산 책을 그 책집으로 가는 길에 읽고는, 그 책집에서 맞이한 책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읽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보리술 두어 병을 챙겨요. 책벗하고 노는 날도 있으나 혼자서 책하고 수다를 떨며 즐거웠습니다.


  곁님을 만나 아이를 낳고 보니 책집마실은 고개 너머 고개입니다. 살면서 ‘책집마실을 안 하는 날’이 생겼고, 살림집을 시골로 옮기고 보니 ‘책집마실을 하는 날’은 손으로 꼽을 만큼 줄어듭니다. 시골엔 책집이 없으니까요.


  바깥일을 보러 나갈 적에 어떻게든 쪽틈을 내어 책집을 찾았습니다. 곁님·아이·풀꽃나무·해바람비한테서도 삶을 새롭게 읽는 눈을 뜨는 길을 맞아들이지만, 이곳에서 몸뚱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책집을 동무하고 싶거든요. 어느덧 작은아이가 열한 살을 넘어서는 2021년부터 집일을 아이들한테 맡기고서 이따금 느긋이 책집마실을 나섭니다. 이튿날 대구에 갈 일을 앞두고 여수책집을 먼저 찾고, 진주로 건너와 〈형설서점〉을 들르고서 〈동훈서점〉으로 넘어옵니다. 꼭두새벽에 길을 나선 몸은 뉘엿뉘엿 해질녘이 되니 꽤 고단합니다. 녹초가 되도록 걷고 책짐을 이고 온갖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밤을 맞이합니다. 책은 우리한테 어떻게 이바지하면서 삶을 헤아리도록 북돋울까요?


  마음을 틔우는 사람이라면 곁님 눈빛에 아이 눈망울을 지긋이 마주하면서 날개를 펼 줄 압니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라면 풀꽃나무한테 깃드는 벌나비랑 동무하면서 춤출 줄 압니다. 마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해바람비에 서린 숨빛을 고이 누리면서 스스로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를 터뜨릴 줄 압니다.


  곁님하고 아이를 마주하듯 책을 살핍니다. 풀꽃나무하고 벌나비랑 동무하듯 책을 읽습니다. 해바람비가 푸른별을 어루만지듯 새책도 헌책도 나란히 품습니다.


  스스로 별빛이 되는 사람이라면 손에 쥐는 책도 빛난다고 느껴요. 스스로 햇빛이 되는 사람이라면 손수 쓰는 글마다 반짝인다고 느껴요. 이름난 책을 찾으려고 책집마실을 하지 않습니다. 잘팔리는 책을 읽으려고 책집마실을 하지 않아요. 새롭게 마음으로 사귈 숨결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퍼져서 이곳을 노래하는가 하고 알아보려는 뜻으로 책집마실을 합니다. 한 손에 저녁놀을 담고, 다른 손에 붓을 쥡니다. 한 귀에 이야기를 담고, 다른 귀에 바람소리를 놓습니다. 책집을 찾아갈 틈을 내는 마음이라면, 살림집을 아끼는 손길을 뻗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ㅅㄴㄹ


《1929, 미국대공황》(F.L.알렌/신범수 옮김, 고려원, 1992.5.10.)

《아이러니》(D.C.Muecke 글/문상득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4.15.첫.1983.1.30.셋)

《笑劇》(Jessica Milner Davis/홍기창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12.20.)

《中國秘傳 形意拳》(佐藤金兵衛 글/구송령 옮김, 대아출판사, 1979.3.30.)

《표류교실 1》(우메즈 카즈오 글·그림/장성주 옮김, 세미콜론, 2012.12.28.)

《통일비빔밥》(신현득 글·이호백 그림, 재미마주, 2019.6.15.)

《한국 傳來 ‘옛날 이야기’ 集》(한국고전연구회 엮음, 지하철문고사, 1980.12.10.)

《음운론》(J.L.Ducher/오원교·이승대·양영숙 옮김, 신아사, 1983.10.30.

《익살꾼 성자 나스룻딘》(이드리스 샤아 엮음/이아무개 옮김, 드림, 2010.10.1.)

《DrangonBall Z 1》(Akira Toriyama/Lillian Olsen 옮김, VIZ media, 2008.3.첫/2016.4.여덟)

《디즈니 그림명작 20 길 잃은 뱀비》(신동운·장수철 글, 계몽사, 1982/1986.3.30.중판)

《디즈니 그림명작 42 용감한 사냥군 히아와타》(유겨환 글, 계몽사, 1982/1986.5.30.중판)

《디즈니 그림명작 44 사랑스런 딱정벌레차》(이종욱 글, 계몽사, 1982/1986.5.30.중판)

《디즈니 그림명작 54 더크 할머니와 게으름장이들》(석용원 글, 계몽사, 1982/1986.5.20.중판)

《디즈니 그림명작 55 행복한 퐁고와 퍼디》(이종욱 글, 계몽사, 1982/1986.5.20.중판)


글.사진 : 숲노래(최종규)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에서 서재도서관을 꾸리고 숲살림을 짓습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이 쓰고 남긴 글을 갈무리했고, 공문서·공공기관 누리집을 쉬운 말로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곁책》,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내가 사랑한 사진책》, 《골목빛》, 《자전거와 함께 살기》, 《사진책과 함께 살기》, 《책숲마실》 같은 책을 썼습니다. hbooklov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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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2021.7.9.)

― 인천 〈문학소매점〉



  일본이 총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억누를 적에, 고장마다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로 가른 이름을 썼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으레 ‘중구’였습니다. 그들이 차지한 나라에서 어느 고장에 밀려들어 마을을 바꾸려 하며 ‘총칼잡이를 가운데에 둔’ 셈입니다. 인천이나 부산을 가만히 보면 ‘중구가 가운데가 아니라 할’ 만합니다. 지난날에는 인천도 부산도 그리 안 넓었습니다. 조그마한 고장이 차츰 넓게 뻗자 ‘가운데 아닌 왼쪽’에 치우친 자리인데 ‘중구’요, 오른쪽 아닌 왼쪽이나 가운데에 있는데 ‘동구’란 이름입니다.


  ‘동서남북’도 ‘구(區)’란 이름도 걷어치울 만합니다. 일본 총칼(제국주의) 찌꺼기이거든요. 인천 남구는 ‘미추홀’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인천 동구라면 ‘배다리’로, 인천 중구라면 ‘싸리재’로 고칠 만합니다. ‘미추홀골·배다리골·싸리재골’ 같은 이름이 어울려요. ‘골←區’입니다.


  동쪽이 아닌 ‘동인천역’하고, 밑쪽이 아닌 ‘하인천역(인천역)’ 사이에 깃든, 가운데 아닌 ‘중구청’ 곁에 〈문학소매점〉이 태어났습니다. 인천은 이 둘레를 ‘문화관광특구’처럼 내세우지만, 막상 중국집하고 장삿집을 빼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스러운 껍데기로 꾸미고서 ‘근대문화유산’이라 하더군요.


  우리는 새마을바람이 일기 앞서까지 인천조차 ‘풀집(초가)’이 있었습니다. 일본 총칼잡이가 세운 집도 ‘근대문화유산’에 넣을 만하지만, 이 작은고장에서 손수 집을 짓고 살림을 돌본 수수한 사람들이 돌본 골목마을하고 골목집이야말로 ‘근대문화유산’이라고 느껴요. 하루에 대여섯 벌씩 골목을 슥슥 쓰는 할매할배 몽당빗자루야말로 ‘근대문화유산’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골목집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습니다. 그리고 작고 좁아요. 골목아이는 여름겨울 안 가리고 ‘덥고 추운 집’에서 빠져나와 골목을 달리면서 놉니다. 인천 벼슬꾼(공무원)이 책상맡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골목사람으로 살며 골목빛을 헤아린다면, 이곳은 천천히 빛나는 살림터로 나아갈 만합니다. 책도 이와 같아요. 글보람(문학상)을 받아야 글꽃이지 않아요. 오늘 이 터전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가다듬은 글을 차곡차곡 여미기에 글꽃입니다.


  글(문학)도 살림(문화예술)도 없이 시끌벅적한 허울뿐이던 인천 가운데(중구) 아닌 싸리재골 한켠에 조촐히 골목꽃을 돌보며 골목책집으로 이어가는 〈문학소매점〉이리라 생각합니다. 책이란 대단하지 않습니다만, 숲하고 사람 사이에 살그머니 있는, ‘사이’라서 얼결에 ‘가운데’에 있는, 멋스런 이야기꾸러미입니다.


ㅅㄴㄹ
















《모던인천 시리즈 1 조감도와 사진으로 보는 1930년대》(김용하·도미이 마사노리·도다 이쿠코 엮음, 토향, 2017.8.15.)

《소설가의 사물》(조경란, 마음산책, 2018.8.25.)

《살려고 서점에 갑니다》(이한솔, 이한솔, 2020.11.8.)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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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2021.10.3.)

― 부산 〈파도책방〉



  어제 대구에서 이야기꽃을 마치고서 고흥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부산을 거치기로 했습니다. 부산·고흥 사이는 하루에 시외버스가 둘 있습니다. 몇 해 앞서까지는 넷이었다가 둘이 줄었습니다. 나라(정부)에서는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말라며 시외버스를 줄인다고 밝히는데, 일하며 움직이는 사람은 늘 움직입니다. 시외버스를 줄일 노릇이 아니라 오히려 늘려야 ‘틈새두기에 이바지’할 테지요. 더구나 시외버스를 줄이는 바람에 부릉이(자가용)를 장만하는 사람이 늘어나, 길이 더 막힙니다. 곰곰이 보면 나라에서는 부릉이를 더 팔려고 얕은꾀를 씁니다. ‘전기차 덧돈(보조금)’이 어마어마합니다. 뚜벅이(보행자)야말로 숲사랑(친환경)인데, 참 엉뚱한 나라길(국가정책)입니다.


  새벽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오고, 지하철을 갈아타고서 보수동에 닿습니다. 이른아침에 책골목을 조용히 거닙니다. 부산시는 바닥돌을 바꾸고 껍데기를 꾸미는 데에만 돈을 썼습니다. 책이 왜 책인 줄 하나도 모르는 탓입니다. 겉을 번드레하게 꾸미거나 이름난 사람이 써야 책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을 잘 꾸며도 알맹이가 없거나 허술하면 종이뭉치입니다. 아무리 이름난 사람이 써도 줄거리를 베끼거나 훔치면 장삿속입니다.


  책은 속으로 읽습니다. 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책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눈길을 가꾸려고 읽습니다. 책은 너랑 내가 서로 어떻게 다르면서 같은가 하는 수수께끼 같은 사랑을 스스로 알아차려 삶을 노래하려고 읽습니다. 〈파도책방〉에 머무르며 여러 가지 책을 누립니다. 판이 끊긴 아름다운 그림책을 읽고, 예전에 살림꾼 어머니가 읽던 달책에 곁달린 책을 폅니다. 1962년에 나온 어느 일본책에 ‘부산 경문서림’ 쪽종이가 남았습니다. 아스라한 자취를 눈여겨보는 눈길이 있을 적에만 문화예술재단에서 일하도록 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책·문화·예술’을 다루는 벼슬자리(공무원)에 서려면 적어도 이레마다 사흘씩 책집마실을 하는 매무새여야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아름책이어도 오래오래 새책집에 깃들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아름나라가 아니거든요. 아름마을에 아름손길에 아름눈빛으로 가득한 터전이라야 아름책이 오래오래 반짝입니다. 헌책집이란, 반짝이는 아름책을 새롭게 만나서 삶넋을 곱게 북돋우는 징검다리이기도 합니다. 잘팔리는 아름책도 있지만, 사라진 아름책도 많습니다. 사랑받는 아름책도 있고, 사랑을 못 받고 사라진 아름책도 많아요. 아름책을 한아름 품고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ㅅㄴㄹ


《新制 英文法 (改訂重版》(小野圭次郞/科學社 英語部 엮음, 과학사, 1952.11.1.첫/1957.1.25.고침)

《겨우살이硏究》(김익달·박재서 엮음, 학원사, 1966.11.1.)

- 《주부생활》 20호(1966.11.) 별책부록

《병아리 飼育法》(한국축산기술연구회 엮음, 송원문화사, 1967.10.15.)

《鉢もの園藝》(편집부 엮음, 主婦の友社, 1958.2.25.첫/1962.2.1.23벌) 

- “釜山 耕文書林 TEL 6568”에서 전화번호를 지우고 “(2) 0362”로

《케테 콜비츠》(카테리네 크라머/이순례·최영진 옮김, 실천문학사, 1991.2.30.)

《세계의 애송시》(천양희 엮음, 청하, 1989.5.20.)

《안자이 미즈마루》(안자이 미즈마루·MOOK 편집부/권남희 옮김, 씨네21북스, 2015.5.15.)

《꼬마 다람쥐 얼》(돈 프리먼 글·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2010.11.18.)

《아빠는 하나 아기는 열》(베네딕트 게티에 글·그림/조소정 옮김, 베틀북, 2000.8.14.)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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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짓는 (2021.10.3.)

― 부산 〈우리글방〉



  우리나라 책골목은 부산 보수동 한 곳입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책거리는 여럿 있되, 책집으로 마을을 이룬 데는 그야말로 부산 보수동뿐입니다. 일본 도쿄에 ‘간다’가 있습니다만, 도쿄 간다도 ‘책거리’일 뿐, ‘책골목’이지는 않습니다. 온누리에 참으로 드문 책골목인 부산 보수동인데, 정작 부산시·부산 중구청·보수동사무소·부산문화재단은 이러한 책터를 알뜰살뜰 여미는 길에는 하나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채 2021년까지 흘렀습니다.


  여러 나라 책거리 이야기를 들며 부산 보수동이 얼마나 엄청난 곳인지 밝히면, 둘레에서는 “아니, 그런데 부산시는 왜 그래요?” 하고 물어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울에 ‘청계천 책거리’가 있을 적에도 마음을 쓴 적이 없습니다. 청계천이 스러져 갈 적에 비로소 ‘얼굴갈이(간판 교체)’만 여럿 했고, 제대로 책살림을 북돋우는 길은 아예 없다시피 했어요. 그나마 ‘책집 길그림(책방 지도)’에 돈을 조금씩 댄 고장(지자체)이 차츰 생겼고, 서울에는 〈서울책보고〉를 열었습니다.


  부산에는 부산다우면서 부산에만 있는 아름빛이 꽤 많습니다. 다른 고장도 매한가지인데, 정작 고장지기(지자체장)나 벼슬아치(공무원)는 이 대목을 거의 모릅니다. 고장지기는 줄서기로 뽑혔고, 벼슬아치는 ‘책읽기 아닌 셈겨룸(시험)’으로 자리를 꿰찼을 뿐이거든요. 책을 읽은 사람이 고장지기 자리에 앉지 않고, 벼슬아치 일을 맡지 않으니, 부산뿐 아니라 다른 고장도 엇비슷합니다.


  보수동 헌책집이 똘똘 뭉쳐서 2005년부터 책잔치를 꾀할 적에 쉰 곳이 넘던 책집이지만, 해가 갈수록 확 줄어들 뿐 아니라, 책골목 한켠은 막삽질(재개발)로 무너졌고, 끔찍하게 시끄럽고 어지럽습니다. 이동안 부산 벼슬아치는 팔짱을 꼈어요.


  모든 글은 사람이 짓습니다. 모든 옷밥집은 사람이 짓습니다. 모든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짓습니다. 글도 책도, 집살림도 나라살림도 ‘수수한 사람’이 짓습니다. 힘·돈·이름이 있는 사람이 글을 짓거나 책을 짓지 않아요. 힘·돈·이름이 있는 이들은 돈장사(상업주의)만 짓습니다. 힘·돈·이름으로 태어난 잘난책(베스트셀러)에 사람들이 쏠릴수록 책마을도 책골목도 빛을 잃습니다.


  멀리 보거나 숲을 모르는 이를 안 부르기를 바라요. 곁에 아름다이 흐르는 숨빛을 읽는 이웃하고 마주할 적에 책빛이 피어납니다. 〈우리글방〉을 둘러보며 생각합니다. 이곳을 찾아와서 찰칵놀이만 하고 나가는 젊은이가 많아도 안 나쁩니다. 어디나 구경꾼은 있어요. 구경꾼한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책사랑이한테 마음을 기울이면서 어린이 눈빛으로 이곳을 손수 돌보면 부산은 되살아날 만합니다.


ㅅㄴㄹ


《the Changing face of TIBET》(Pradyumna P.Karan,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76)

《즐거운 우표수집》(김갑식, 한국우취연합, 2006.3.27.)

《조중사전》(편집부 엮음, 조선외국문도서출판사·중국민족출판사, 1993.2.28.)

《마산시가도》(정일지도, 2000.4.)

《양산시》(정일지도, 2003.)

《縣別道路地圖 46 鹿兒島縣》(昭文社, 1996.1.)

《裝幀談義》(菊地信義, 筑摩書房, 1986.2.25.)

《インテリア》(田中健三, 保育社, 1971.1.5.첫/1975.5.1.두벌)

《藥草裁培》(박재희·정용복, 화학사, 1972.2.5.)

《新版 標準 國語 四年上》(文部省 엮음, 敎育出版株式會社, 1981.4.10.)

《新しい國語 6上》(大石初太郞·阪倉篤義, 東京書籍株式會社, 1972.7.10.)

《동녘 7호》(임우근 엮음, 부산문화회, 1988.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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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2021.8.11.)

― 구례 〈섬진강 책사랑방〉



  두 다리로 살아가기에, 늘 때를 살핍니다. 마을 앞에 언제 시골버스가 지나가는가를 살피고, 이 시골버스로 읍내에 간 다음, 어떤 탈거리로 마실을 다녀올 만한가를 어림합니다. 부릉이를 몰지 않으니 늘 때를 보고, “이러다가 놓치겠구나” 싶어 아슬아슬하게 서두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는 고작 1분을 못 맞추는 바람에 한나절을 꼼짝없이 길에서 서성여야 하거든요.


  낱말책을 지으니, 밑글로 삼을 책을 자꾸자꾸 살핍니다. 여태 건사한 책으로도 어마어마하다는 말을 듣지만, 으레 “글쎄요?” 하고 시큰둥히 대꾸합니다. 여태 읽거나 건사한 책보다는 앞으로 읽거나 건사할 책이 많은 줄 느끼거든요.


  여태까지 쌓은 책꾸러미가 많은들 안 대수롭습니다. 오늘까지 이룬 열매가 커다랗더라도 안 대단해요. 그저 그럴 뿐이고, 늘 새롭게 한 발짝을 디딥니다. 많이 읽었기에 더 잘 알아차리지 않아요. 배움끈이 긴 이웃 가운데에는 외려 눈이 멀거나 눈가림을 하는 분도 꽤 있습니다.


  많이 읽기에 눈이 밝지 않아요. 많이 알기에 눈이 높지 않아요. 많이 했기에 눈이 맑지 않아요. 스스로 밝고 싶다는 마음을 심기에 밝습니다. 스스로 바람이 되어 높이높이 날고 싶기에 높아요. 스스로 빗물이며 샘물처럼 맑고 싶다고 꿈꾸기에 비로소 맑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어린이를 살며 놀기에 어린이로서 맑고 밝으며 높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다움을 잃거나 잊으면 ‘애늙은이’ 소리를 들으면서 안 맑고 안 밝으며 안 높습니다. 어른·어버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책을 더 읽거나 더 살피거나 더 써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 손발로 지으며 즐거이 나누기에 아름답습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는 이제 집어치웁시다. “즐겁게 아름답게 사랑스럽게”로 오늘부터 함께 천천히 걷기를 바라요. 시골집에서 고흥읍을 거쳐 순천을 지나 구례에 닿아 신나게 걸어 〈섬진강 책사랑방〉에 닿습니다. 닿자마자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서 “얼마쯤 남았나?” 하고 돌아봅니다. 구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느긋이 둘러보겠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살짝 걸치더라도 고마우면서 즐거워요. 오늘 이곳에서 만난 책을 한아름 짊어지고서 새길을 느긋이 갈고닦자고 생각합니다.


  더 크지 않아도 누구나 책숲(도서관)입니다. 종이(사서 자격증)가 없어도 누구나 책숲지기(도서관 사서)입니다. 아이 손을 잡고 웃는 어른이라면 모두 책숲이요 책숲빛이자 책숲지기입니다. 오랜 책을 되넘기며 새로운 오늘을 그립니다.


ㅅㄴㄹ


《소년세계위인전기전집 9 안데르센》(루우머 고덴/장경룡 옮김, 육영사, 1975.1.1./1981.1.1.7벌)

《古代의 滿洲關係》(이용범, 한국일보사, 1976.4.25.)

《颱風》(셰익스피어/김재상 옮김, 서문당, 1974.10.1.)

《透明人間》(H.G.웰즈/박기준 옮김, 서문당, 1973.2.10.)

《맑은 눈 고운 마음》(김한룡 엮음, 명성사, 1981.5.10.)

《韓國의 書誌와 文化》(모리스 쿠랑/박상규 옮김, 신구문화사, 1974.5.1.)

《韓國의 山水》(문일평, 신구문화사, 1974.5.1.)

《삼국유사》(일연/김영석 옮김, 학원사, 1989.5.20.)

《비계덩어리》(모파상/방곤 옮김, 서문당, 1972.6.5.)

《꽃 속에 묻힌 집》(이오덕·이종욱 엮음, 창작과비평사, 1979.1.25.)

《이티 E.T.》(윌리엄 코츠윙클/공문혜 옮김, 한벗, 1982.12.5.)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유은실, 창비, 2013.2.15.)

《꿀벌 마야의 모험 외》(본젤스/정성환 옮김, 금성출판사, 1984.1.30.개정신판)

《6학년 3반 청개구리들》(최승환, 편암사, 1988.10.1.)

《현대일본사진가》(와따나베 쯔도무/홍순태 옮김, 해뜸, 1988.3.30.)

《美術과 生活 2호》(이용철 엮음, 미술과생활사, 1977.5.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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