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꾸덕살 (2022.9.27.)

― 인천 〈아벨서점〉



  어머니 손은 언제나 누러면서 딱딱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조차 쉬는 날이 없이 일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이따금 심부름을 맡기지만 따로 집안일을 거들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혼자 짊어지려 하면서 “넌 공부나 해.” 하고 핀잔했습니다. 짝꿍이 쉬잖고 일할 적에 다른 짝은 무엇을 할 적에 서로 아름다우면서 즐거워서 사랑일까요? 집안일도 집밖일도 가를 수 없습니다. 모든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면, 일나눔(가사분담)이 아닌 두레랑 품앗이여야 알맞지 싶어요.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착착 박였습니다. 새벽부터 일하고, 살림을 건사하고, 자전거를 달려 책집마실을 다녀오고, 잠자리에 들기 앞서까지 책을 읽고 종이에 글을 쓰노라면 손가락도 손바닥도 쉴 겨를이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배움길을 온 언니가 어느 날 “‘굳은살’? 그게 뭐야? 아, 이건 ‘꾸덕살’이라고 하지. ‘굳은살’이란 말이 어딨냐?” 하고 나무랍니다. “꾸덕살이라고요? 그런 말이 있어요?” “허허, 넌 우리말을 배운다면서 우리말도 모르니?” 다시 꾸지람을 듣습니다.


  가만 보면 ‘꾸덕살’이라고도 하지만 ‘옹이’라고도 합니다. ‘옹이’는 나뭇가지 한켠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마치 나무처럼 단단하게 잡힌 살점을 빗대기도 하고, 마음에 멍울처럼 잡힌 아픈 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저는 1992년부터 제대로 책숲마실을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서른 해 남짓 온나라 책집을 돌면서 바라보노라면, 헌책집지기는 모두 손마디에 옹이나 꾸덕살이 잡혔습니다. 요 몇 해 사이에 새롭게 태어난 마을책집지기 가운데 손마디에 옹이나 꾸덕살이 잡힌 분은 드뭅니다. “책을 만졌다”고 하려면 “흙을 만졌다”고 할 여름지기처럼 손마디도 손발바닥도 나무처럼 옹이가 잡힐 테지요. 〈아벨서점〉 책지기 손마디를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아벨지기님 이 손이 책을 만지고 살린 숨결입니다.”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늙음은 죽음길이되, 철듦은 살림길입니다. 나이만 먹으면 늙은몸이요, 철이 들면 어른빛입니다. 끝이란 꽃이니, 몸을 내려놓고서 삶을 쉬는 길은 꽃으로 피어나 씨앗을 남기는 사랑이에요. 그저 ‘늙음’만이라면 틀림없이 끝입니다. 겉보기로 허름하기에 ‘끝으로 가는 책’이지 않아요. 모든 헌책은 옹이가 맺힌 손마디로 쓰다듬는 숨결을 받고서 새롭게 읽히는 꽃씨로 거듭납니다. 반들반들한 새책을 안 싫어합니다. 다만 꾸덕살로 쓰고 엮어 꾸덕살로 읽는 책을 조금 더 즐길 뿐입니다.


ㅅㄴㄹ


《베스트문고 129 비밀일기》(S.타운젠드/안종설 옮김, 삼중당, 1987.9.20.첫/1990.4.10.중판)

《舊約聖經에서 본 障碍者》(나이또 토시히로/박천만·김경란 옮김, 한국장애자 전도협회, 1989.11.30.)

《방언 연구》(안토니 훼케마/정정숙 옮김, 신망애출판사, 1972.6.1.첫/1991.6.15.중판)

《의산문답》(홍대용/이숙경·김영호 옮김, 꿈이있는세상, 2006.4.15.첫/2006.11.1.2벌)

《잘해 주지 마! 1》(마츠야마 하나코/김재인 옮김, 애니북스, 2012.8.16.)

《잘해 주지 마! 2》(마츠야마 하나코/김재인 옮김, 애니북스, 2012.8.16.)

《정음문고 68 사랑의 交響樂》(G.펠레그리니/이성삼 옮김, 정음사, 1974.5.20.첫/1982.11.30.중판)

《꼴찌 강아지》(프랭크 에시/김서정 옮김, 마루벌, 2008.1.26.)

《광대열전》(김명곤, 예문, 1988.12.31.)

《꿈의 작업》(스트레폰 카플란 윌리암스/노혜숙·오명선 옮김, 청하, 1988.7.20.)

《花壇づくり》(脇坂誠, 保育社, 1969.3.1.)

《드래곤볼 22》(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서울문화사, 1993.9.25.2벌)

《드래곤볼 29》(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서울문화사, 1993.10.1.3벌)

《엘살바도로 맹그로브 숲의 아이들》(조은숙, 명문미디어 아트팩, 2018.10.1.)

《옛날에 어떤 생쥐가…》(인도 우화/이미림 옮김, 분도출판사, 1978.첫/1997.7벌)

《별아기》(오스카 와일드 글·파이어나 프렌치 그림/김영무 옮김, 분도출판사, 1983.첫/1995.4벌)

《내꺼야!》(레오 리오니/서명희 옮김, 분도출판사, 1987.첫/1996.6벌)

《잠잠이》(레오 리오니/이영희 옮김, 분도출판사, 1980.첫/1995.6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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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 (2022.8.28.)

― 제주 〈책대로〉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건너옵니다. 저녁빛이 돌기 앞서 책집을 들르고서 길손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산들보라 씨, 너희 숲노래 씨는 집을 떠나 밖으로 일하러 나올 적에는 언제나 책집에 다닌단다. 오늘은 이 한 곳만 들르고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려고 해.” “음,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제주시 골목을 걸어서 〈책대로〉에 닿습니다. 지난해에 찾아간 자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자리를 옮겼군요. 책집지기님은 〈책대로〉를 2021년 11월부터 새터로 옮겼다고 합니다. 새터는 예전보다 작다고 말씀하시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작다기보다 알뜰하면서 고즈넉한 골목빛이 흐르는 곳입니다. 예전 자리는 큰길하고 가깝지만 부릉부릉 오가는 쇳덩이가 둘레에 많았다면, 새터는 큰길하고 조금 멀면서 마을 안쪽으로 포근히 안깁니다.


  요 몇 달 동안 한자 ‘민(民)’이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짚고 돌아보았습니다. 둘레에서는 ‘국민·시민·서민’에 ‘민중·민초·인민’ 같은 한자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저는 ‘민’이 들어간 모든 낱말이 껄끄럽습니다. 한자 ‘민(民) = 눈먼 사람 = 우두머리·힘꾼한테 눈을 빼앗긴 나머지 장님으로 살아가는 사람 =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니 ‘민 = 종(노예)’인 속내요 밑뜻입니다. ‘국민 = 나라종(국가노예)’이고, ‘시민 = 서울종(도시노예)’이고, ‘인민 = 무리종(집단노예)’입니다. ‘민주·민주주의’는 “종(노예)이 살아가는 틀”을 가리킬 텐데, 우리는 “눈을 힘꾼한테 빼앗긴 채 끌려가는 굴레”가 아닌 “스스로 눈뜨고 살림짓고 사랑하는 새길”로 나아갈 적에 위아래 담벼락을 허물면서 힘·이름·돈을 모두 물리치는 어진 숨빛으로 거듭나겠지요.


  한자말이나 영어가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들(우두머리·힘꾼·글바치)은 무시무시한 굴레를 낱말마다 숨겨서 사람들을 길들이려 할 뿐입니다. 숱한 한자말이며 영어이며 어려운 낱말은 그들이 우리를 가두려는 ‘말굴레(언어지옥)’입니다.


  요즈막에 자꾸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인데, ‘시골아이’뿐 아니라 ‘시골어른’도 ‘사라질 판(멸종위기종)’입니다. ‘착한어른’과 ‘참한어른’도 사라질 판이요, ‘착한아이’와 ‘마음껏 뛰노는 아이’도 사라질 판이라고 느껴요.


  삶을 누리고서 멍울만 키우면 미움이 자랍니다. 삶을 맛보고서 사랑을 키우면 기쁘게 나누는 살림꽃이 핍니다. 티없는(솔직한) 마음이 잘못(죄)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워요. 티없는(솔직) 마음을 티있는(안 솔직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잘잘못으로 가르고 말아요. 이제는 누구나 새말을 품고 새빛으로 노래할 때입니다.


ㅅㄴㄹ


《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이영문, 양문, 1999.2.28.)

《숨은 질서를 찾아서》(R.파인만/박병철 옮김, 히말라야, 1995.7.12.)

《제주문화자료총서 8 제주여성문화》(문화예술과·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도, 2001.12.10.)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 글·파트리스 세르 그림/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0.1.10.첫/2007.11.30.고침1벌)

《위대한 탄생 19 벽장 속의 괴물》(머서 메이어/이현주 옮김, 보림, 1989.9.15.첫/1995.3.15.15벌)

《오늘 날씨는 물》(오치 노리코 글·메구 호소키 그림/김소연 옮김, 천개의바람, 2020.1.20.첫/2021.9.1.2벌)

《香港, 路面電車の走る街》(永田幸子 사진·小柳 淳 글, 春陽堂, 2015.6.20.)

《Stormy, Misty's Foal》(Marguerite Henry 글·Wesley Dennis 그림, Scholastic, 1963.)

《하급반 교과서》(김명수, 창작과비평사, 1983.5.25.)

《쿠바혁명사》(레오 휴버만·스위지, 지양사, 1984.9.25.)

《군부독재, 그 붕괴의 드라마》(니코스 풀란차스/강명세 옮김, 사계절, 1987.8.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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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곳에 (2022.8.29.)

― 제주 〈나이롱책방〉



  작은아이한테 묻습니다. “오늘은 새벽 일찍 움직여 오름 한 곳을 올랐고, 〈책밭서점〉 할아버지를 만났고, 밥도 먹었고, 어떠니? 더 걸을 수 있니?” “아직 걸을 만해요.” “아직 걸을 만하다면 힘들다는 뜻?” “음, 더 걸어 봐요.”


  늦여름해가 지는 제주시 한복판을 걷다가 버스를 탑니다. 안골목으로 깃들어 〈나이롱책방〉 앞에 섭니다. 작은아이가 “아버지, ‘나이롱’이 무슨 뜻이에요?” “나이롱? 음, 여러 가지일 텐데, 숲노래 씨는 ‘나는, 이제부터, 삐삐롱스타킹이다.’ 하고 생각해 볼래.”


  디딤칸을 밟고 천천히 들어섭니다. 한쪽에 우리 짐을 내려놓습니다. 책집을 닫을 때까지 얼마 안 남지만, 이곳에서 저녁나절 책내음을 맡고서 길손집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합니다. 걸상에 앉은 작은아이한테 ‘월리’ 그림책을 건넵니다. 꼬물꼬물 그득한 사람밭 그림 사이에서 ‘월리’를 찾는 그림을 들여다보는 작은아이는 기운을 조금 차립니다. “아버지, 이 책 재미있는데요? 히히.”


  그러나 ‘월리’는 이곳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쉬우나 이다음에 다른 데에서 만날 수 있을 테지요. 한글판 ‘월리’는 다 판이 끊긴 듯하나 영어판으로 장만하자고 생각합니다.


  아이 곁에서 함께 ‘월리’를 들여다보다가, ‘포카혼타스’ 펼침책을 넘기다가, 그림을 잘 그려야 할 까닭이 없고, 일을 잘 해내야 할 까닭이 없듯, 글을 잘 써내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어버이 노릇을 훌륭히 해내야 하지 않아요. 아이도 어버이도 다리가 아프면 쉬고, 지치면 일찍 자고, 풀밭에 드러누워 구름바라기나 별바라기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즐겁습니다.


  우리는 “글을 못 써도 된다”도 “글을 잘 써야 한다”도 아닌, “그저 삶을 마음에 담아서 생각이라는 씨앗으로 돌보고서 고스란히 말로 들려주는 모습 그대로 옮기는 글”이라면 넉넉하구나 싶습니다. 언제나 “그냥 쓰면 다 아름다운 글”일 테지요. 아이하고 뭔가 남다르게 하루를 보내려 하기보다, 그저 같이 걷고 놀고 얘기하고 쉬고 잠들면 느긋합니다.


  작은아이가 묻습니다. “우리 잠자는 곳에 버스 타고 가면 얼마나 걸려요?” “음, 30분쯤.” “음, 그러면 우리 택시 타고 가요.” “힘들구나.” “아니, 힘들지는 않은데, 그냥.”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낮하늘빛은 파랗고 밤하늘빛은 까맣습니다. 파랑이랑 까망 사이에는 하양 보라 빨강 노랑 풀빛이 있습니다. 온누리 어디서나 무지개를 품을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POCAHONTAS Pop-up book》(Kathryn Siegler 꾸밈/Vaccaro Associates·Eric Binder 그림/Rodger Smith 여밈, Disney Press, 1995.)

《꽃이 온 마음》(조민경, 커넥티드코리아, 2022.4.15.)

《모나미 153 연대기》(김영글, 돛과닻, 2019.11.14.첫/2020.8.31.2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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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새 (2022.9.20.)

― 남양주 〈블랙버드북숍〉



  남양주라는 고장에 오늘 첫발을 떼었습니다. 이 고장에 있는 책집을 마실하려고 왔습니다. 먼저 〈곰씨네 그림책방〉에 들렀고, 〈블랙버드북숍〉으로 찾아갑니다. 두 곳 사이는 멀지 않습니다. 풀꽃나무 곁을 걷거나 골목을 지난다면 걸어갈 만한 길인데, 높다란 잿집(아파트) 둘레를 거쳐야 하기에 썩 걸을 만하지 않습니다. 잿집을 잔뜩 올린 곳은 어디나 뚜벅이를 보기 어렵습니다.


  남양주 시내버스 가운데 하나인 ‘땡큐11’ 버스를 탑니다. ‘땡큐11’이라는 이름은 재미있기는 하되, 우리말로 ‘기쁨11’이나 ‘고마움11’이나 ‘웃음11’처럼 지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벼슬꾼(공무원)뿐 아니라 여느 일꾼(회사원)은 이름을 우리말로 지어서 누구보다 어린이한테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듯싶습니다. ‘어른 아닌’ 나이든 이들도 매한가지인 마음일 테고요.


  맨발로 땅을 디디고, 맨손으로 흙을 살살 쓰다듬고서, 흙 쓰다듬은 손으로 나무줄기를 어루만지면, 나무가 무척 반깁니다. 이 얼거리를 아는 분이 있으나, 모르는 분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는 어린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주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이 별과 이 땅에 어떤 마음을 씨앗으로 심는 말짓일까요?


  어마어마하거나 놀랍거나 훌륭하거나 멋진 일을 뽑아내거나 해내야 하지 않아요. 조그마한 말씨랑 몸짓을 사랑으로 돌볼 일입니다. 누구나 보금자리에서 집안일부터 즐겁게 스스로 건사할 일입니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개고, 빨래를 하고, 비질하고 걸레질을 하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일노래·놀이노래를 부르고, 사뿐사뿐 모든 걸음걸이를 춤사위로 누리고, 우리 땅을 돌아보고, 별빛을 헤아리고 햇볕을 머금고 빗물을 마시고 냇물에 손발을 담그면서 푸나무를 아낄 하루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걷습니다. 잿집 사이에 야트막하게 작은숲이 남았습니다. 새로 심은 듯한 거리나무는 아직 작고 가늘고 여립니다.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나면 이 거리나무는 마을을 새롭게 밝힐 테지요. 〈블랙버드북숍〉 앞에 서는데 안 열렸습니다. 살짝 다른 볼일을 보러 비우신 듯합니다.


  등짐을 내려놓습니다. 어제 새로 쓴 노래꽃 한 자락을 옮겨적습니다. 부릉거리는 쇳소리 사이로 바람이 나뭇잎을 살랑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부릉이(자동차)가 없어도 뭇목숨은 살아갈 수 있으나, 나무가 없으면 다 죽습니다. 잿집이 아니어도 살림할 수 있으나, 꽃과 벌나비와 새가 없으면 몽땅 죽습니다.


  바느질에도, 손으로 쓰는 글에도, 한 땀 한 땀에는 언제나 손길에 서리는 즐거운 바람이 스밉니다. 숲빛으로 한 줄씩 적은 글을 나누는 이웃이 늘기를 빕니다.


ㅅㄴㄹ


《쉬운 말이 평화》(숲노래 밑틀·최종규 글, 철수와영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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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집마실을 하며 찍은 사진을

한동안 거의 못 씁니다.

예전 하드디스크가 잠들었거든요.


인스타그램에 걸친 사진을

몇 자락 살리면서,

다른 사진을 조금 곁들입니다.


남양주 책집마실을

새롭게 누릴 날을

손꼽아 보는 마음입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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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들 (2022.9.20.)

― 남양주 〈곰씨네 그림책방〉



  부천에서 새벽을 열며 오늘은 남양주를 마실하자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먼길일 테고, 남양주를 들러 서울로 가면 밤에는 고흥에 돌아갈 수 있어요.


  책집을 찾아가면서 어느 곳이든 멀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어느 책집으로 마실을 하든 ‘그곳에 그 책집이 있는 뜻’을 길에서 물씬 느끼는 하루입니다. 고흥서 가까운 순천책집조차 길에서 한나절 남짓 보내야 다녀오는데, 이동안 빈책(공책)을 펼쳐 노래꽃(동시)에 얘기꽃(동화)을 씁니다. 책 몇 자락쯤 시외버스랑 시골버스에서 가볍게 읽어요.


  모든 아름다운 책은 우리가 쉬고 싶을 적에, 눈을 씻고 싶을 적에, 마음을 달래고 싶을 적에, 무엇보다 이 삶에서 사랑이 무언지 다시 생각하고 싶을 적에, 숲이 없는 매캐한 서울 한복판에서 왜 사는가를 되새기고 싶을 적에, 부드러이 말동무로 곁에 있구나 싶어요. 시골사람이라면 굳이 종이책을 곁에 품지 않아도 풀꽃나무랑 동무하고 해바람비랑 이웃하면서 삶빛을 읽어낼 수 있어요.


  전철로 한참 달립니다. 버스로 갈아탑니다. 뚜벅뚜벅 걷습니다. 남양주 〈곰씨네 그림책방〉에 닿습니다. 마침 책모임이 있는 날 같습니다. 바깥 골마루에서 기다립니다. 햇빛이 환하게 드는 싱그러운 자리에 마을책집이 있습니다.


  글을 담은 책을 살핍니다. ‘글’이라는 허물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노래로 피어나리라 봅니다. ‘문학’이라는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면 노래가 되리라 봅니다. ‘시’라는 이름을 벗을 수 있다면 바로 노래로 나아가리라 봅니다. 남을 구경한 모습을 옮길 적에는 노래하고 멉니다. 그리 멀잖은 지난날 누구나 부르고 나누며 아이들이 물려받아 새로 부르던 노래는, 늘 스스로 짓는 삶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울고 웃은 오늘입니다. 그림이며 빛꽃(사진)을 담은 책도 매한가지입니다. 이름값이나 허울이 아닌 숨결하고 손빛으로 여미고 지어 나누는 꾸러미입니다.


  읽히려고 짓는 책이 아닌, 나누려고 짓는 책입니다. ‘남이 알아주기(인정받고픔)’를 바라는 마음은 배움터살이(학교생활)를 오래 하며 ‘셈겨룸(시험성적)’에 기대고 길들어야 하는 틀로 보내느라 몸에 뿌리박게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배움터를 안 다니거나, 배움터를 훌훌 털어내야, 종잇조각(졸업장·자격증)이 아닌 삶길을 보고 살림결을 가꾸고 사랑씨앗을 심어요.


  지난날에는 서울도 남양주도 너른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부릉부릉 매캐하며 빽빽한 잿마을이어도, 길꽃에 풀벌레노래를 만나고 구름밭에 햇살을 느낄 적마다 너른빛을 새록새록 돌아봅니다. 책짐을 다시 짊어지고 길을 나섭니다.


ㅅㄴㄹ


《하늘을 나는 마법약》(윌리엄 스타이그/김영진 옮김, 비룡소, 2017.2.24.첫/2019.9.3.3벌)

《깃털》(이자벨 심레르/이정주 옮김, 재능교육, 2014.12.5.첫/2021.1.18.8벌)

《푸른 시간》(이자벨 심레르/박혜정 옮김, 하늘콩, 2018.10.12.)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김주희 글·신민재 그림, 길벗스쿨, 2008.12.9.첫/2017.6.30.16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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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집마실을 하며 찍은 사진을

한동안 거의 못 씁니다.

예전 하드디스크가 잠들었거든요.


인스타그램에 걸친 사진을

몇 자락 살리면서,

다른 사진을 조금 곁들입니다.


남양주 책집마실을

새롭게 누릴 날을

손꼽아 보는 마음입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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