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 이야기'입니다. 경제신문에 이러한 이야기를 써서 실을 수 있으니 무척 재미있고 뜻있다고 느낍니다 ..


..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아름답게 살고 싶어



  일본 영화 〈별이 된 소년(星になった少年)〉은 지난 2005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디브이디가 나오지 않았으나, 이 영화로 만든 이야기는 《아기 코끼리 란디와 별이 된 소년》(페이지,2006)이라는 책으로 한국말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1992년에 스무 살 나이로 ‘별이 된’ 아이 이야기를 다루는데, 책과 영화에 나오는 이 아이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동무한테서 따돌림을 받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한테서 놀림을 받습니다. ‘별이 된’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헤아리거나 살피는 동무라든지 이웃이 거의 없었어요.


  ‘별이 된’ 아이는 중학교를 다니다가 태국으로 홀로 떠납니다. 코끼리 조련사가 될 뜻으로 혼자서 씩씩하게 ‘태국 코끼리 학교’를 다닙니다. 그러고는 태국사람이 아닌 외국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코끼리 조련사가 됩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온 이 아이를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코끼리 조련사로 살아가려는 이 아이 마음을 읽는 어른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태국말을 가르칠 일도 없고, 코끼리 한살이를 들려줄 일도 없으며, 숲을 가꾸는 길을 알려줄 일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그저 시험성적만 따집니다.


  코끼리는 풀을 먹습니다. 코끼리를 돌보는 조련사는 코끼리가 잘 먹는 풀을 알아야 합니다. 코끼리는 풀을 아주 많이 먹습니다. 여느 들이나 밭에서 거두는 남새로는 코끼리를 먹이지 못합니다. 너른 숲이 있어야 하고, 깊은 멧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코끼리 조련사를 하자면 숲과 멧골과 들과 냇물을 모두 잘 알아야 하며, 풀과 나무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기생수》라는 만화를 그리기도 한 일본 만화가 이와아키 히토시 님이 그린 《히스토리에》(서울문화사,2004∼2013)를 보면, 역사를 읽는 ‘다른 눈길’이 돋보입니다. ‘전쟁과 정벌과 영웅’이라는 틀로 역사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삶과 마을과 사랑’이라는 틀로 역사를 바라봅니다. 정치집권자가 부리는 전쟁이라든지 정벌로 이곳저곳이 뒤숭숭하달지라도, 정치집권자 또한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정치집권자가 먹을 밥은 시골사람이 짓습니다. 정치집권자가 지내는 도시와 온갖 건물과 집은 시골사람이 짓습니다. 만화책 《히스토리에》에는 지난날 세계역사라고 하는 틀에서 한 번도 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떠한 나날이었고 마음이었으며 꿈과 사랑이었는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정치집권자 자리에 선 이들이 얼마나 허울이 가득했고, 정치집권자한테 끌려서 전쟁소모품이 되어야 하는 군인이란 모두 얼마나 덧없는가를 밝힙니다.


  몇 천이나 몇 만이나 몇 십만이라 하는 전쟁소모품이란 무엇일까요. 이 많은 사람들은 왜 군인이 되어 창이나 칼을 들고 누군가를 죽여야 할까요. 전쟁소모품이 되는 사람들은 왜 태어나야 했을까요.


  “걱정 말아요. 분명히 잘 될 거야. 이 마을은 살아남을 거예요. 고마워. 고마워. 이제까지 한 번도 제대로 말해 본 적 없지만, 고마워. 날 동료로 삼아 줘서(4권 63∼64쪽).” 작은 마을을 윽박지르면서 모조리 불살라 죽이려는 ‘작은 집권자가 거느린 군대’를 앞에 두고, 만화 주인공이 혼잣말을 합니다. 만화 주인공은 ‘전쟁 미치광이’한테 군인 숫자나 무기로 맞서지 않습니다. 마을사람이 하나도 안 다치도록 하면서 ‘작은 집권자’를 끌어내려 ‘저쪽 전쟁소모품’인 군인들도 덜 다치게 하면서 ‘전쟁을 빨리 끝낼’ 길을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전쟁은 생각조차 안 하면서 작은 마을을 사랑스레 가꾸는 시골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마음을 기울일 만한 슬기란 있을까요? 아무렴, 있습니다. 생각을 하면 이러한 슬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생각을 안 하면 언제까지나 이러한 슬기를 못 찾아냅니다.


  온 나라에 민주와 평등과 자유와 평화가 서리면서 남북녘이 아름답게 하나되는 길을 슬기롭게 찾을 수 있을까요? 아무렴, 찾을 수 있습니다. 돈벌이나 재개발이나 정치권력 따위를 헤아리지 않으면, 이러면서 참다운 민주와 평등과 자유와 평화만 헤아린다면 슬기로운 길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어제 공방 식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 ‘설계’, ‘제작’, ‘운용’ 3가지 중 어떤 단계가 가장 즐거운가, 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이구동성 ‘제작’이라더군요(6권 28쪽).” 머리만 쓰는 일은 삶을 빛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거두어 다시 씨앗을 심는 일이 삶을 빛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맛나거나 값진 밥을 사먹어야 삶이 빛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거둔 뒤 스스로 제 땅에 씨앗을 심어서 남새를 거두고, 나물을 뜯어서 함께 누릴 때에 비로소 삶이 빛납니다. 하루하루 스스로 삶을 지어야 사랑이 태어나요. 날마다 스스로 생각을 지어야 꿈이 자랍니다.


  기계를 부려 똑같은 틀로 잔뜩 지은 아파트에서 살 때하고, 스스로 땀을 들여 씩씩하게 지은 집에서 살 때하고, 어느 쪽이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이 될까 헤아려 봅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아파트에서 살 때하고, 마당을 열 평이나 스무 평이라도 누리는 집에서 살 때하고, 어느 쪽이 삶을 사랑스레 돌보는 길이 될까 생각해 봅니다. 마당조차 없으니 나무를 심을 땅조차 없이 지내는 아파트하고, 식구들이 마당이나 텃밭에 나무 몇 그루 심을 수 있는 집하고, 어느 쪽이 삶을 즐겁게 누리는 길이 될까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게 살 때에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게 살지 않으면서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스럽게 살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럽게 살지 않으면서 사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돈이 있다면 돈이 있을 뿐입니다. 이름값이 있다면 이름값이 있을 뿐입니다. 힘이 세다면 힘이 셀 뿐입니다. 돈이나 이름이나 힘은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이 아닙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웃음이나 이야기가 아닙니다. 춤이나 노래가 아닙니다.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즐겁습니다. 기쁘게 춤을 추는 사람이 기쁩니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이 넉넉하고 너그럽습니다.


  아이들이 성적표에 꽤 높은 점수를 숫자로 찍어야 삶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성적표 숫자에 매달려 하루 내내 시멘트 교실에 갇혀 지내야 한다면 삶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학교는 아주 작아야 합니다. 학교는 아이들만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르면서 즐거운 삶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이끌 때에 학교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누구나 늘 함께 다니면서 날마다 삶을 새로 배우고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학교입니다. 예전에는 보금자리와 마을이 ‘보금자리와 마을’이면서 ‘배움터’요 ‘삶터’였습니다. 4347.8.1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내가 짓는 노래



  ‘흙’을 없애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이 땅에 뒤덮으면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떨까요? 잘 생각해 보셔요. 흙길이 아닌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이라면 자동차가 달리기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에서는 아무 싹이 못 돋습니다. 시멘트길에서는 나무가 자랄 수 없고, 아스팔트길에서는 꽃이 필 수 없습니다. 오직 흙으로 된 곳에서만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핍니다.


  논에 시멘트를 덮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이 죽습니다. 밭에 아스팔트를 덮으면 어떻게 될까요? 밭이 죽어요. 요즈음은 논도랑에 시멘트를 부어서 물이 잘 빠지도록 하기 일쑤입니다. 논에 시멘트를 덮으면 논이 죽는데, 논도랑이 흙도랑 아닌 시멘트도랑으로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볍씨를 심은 데만 흙이고 논도랑과 논둑은 시멘트라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 사회는 1970년대부터 불어닥친 새마을운동과 함께 도시와 시골 모두 흙을 없애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들이붓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디이든 자동차가 다니기 좋은 길’을 뚫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디이든 나무와 풀과 꽃이 자라기 좋은 흙’을 살리거나 북돋우거나 가꾸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에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널리 퍼질 무렵부터 아이들이 골목이나 고샅에서 뛰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골목)에서나 시골(고샅)에서나 그야말로 재미나고 즐겁게 뛰놀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놀이터(골목·고샅)를 빼앗겼어요. 어른들이 만들어 어른들이 타는 자동차한테 빼앗겼어요.


  아이들한테서 놀이터(골목·고샅)를 빼앗은 어른은 대통령이나 군인이나 경찰 따위가 아닙니다. 바로 ‘아이를 낳은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한테서 놀이터를 빼앗았습니다. 아이들이 더 멀리 더 느긋하게 다니도록 자동차를 몬다고 하지만, 하루 가운데 자동차를 타고 움직일 때보다 놀아야 할 때가 훨씬 깁니다. 학교이든 일터이든 굳이 자동차를 안 타도 됩니다. 걸어서 다니면 됩니다. 한두 시간쯤 얼마든지 걸을 만합니다. 예전에는 한두 시간뿐 아니라 서너 시간도 넉넉히 걸었습니다. 집과 학교(일터)가 십 킬로미터쯤 떨어졌어도 걸어서 오갔어요. 자가용이든 버스이든 전철을 탈 일이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두 다리를 바라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골목과 고샅 빈터를 자동차한테 빼앗기고 경운기한테 빼앗깁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놀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학원에서 대입시험지옥에 빠져듭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2000)를 읽으면, “큰 소리로 떠들자, 소리는 유치원 창문으로 날아갔어요. 유치원 나무들이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먼 데 산으로 강으로 날아가 산벚나무랑, 조밥꽃나무랑, 찔광이나무랑, 참나무랑, 보리둑나무랑 모두 들었어요. 시냇물 고기들도, 그리고 아마 하늘의 별님들도, 달님도 들었을 거예요(26쪽).”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또야 너구리’는 기운 바지를 입고 싶지 않았다는데, 또야 너구리 어머니는 또야한테 ‘기운 바지를 입으면 나무가 한결 잘 자라고 물고기도 더 즐겁게 놀며 하늘에 있는 별도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또야 너구리는 너구리 유치원에 가서 유치원 선생님과 동무들한테 이 이야기를 해요. 모두들 이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서 노래를 부릅니다. 큰 소리로 떠들듯이 하하하 웃고 노래합니다.


  나이 마흔 줄을 넘긴 어른이라면 아마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디에서나 노래가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골목과 고샅에서 놀면서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가 아니라, 아이들끼리 놀면서 스스로 즐기는 ‘놀이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들이 놀이노래를 부르던 때에는 어른들은 일하면서 스스로 즐겁게 ‘일노래’를 불렀어요.


  민속학자는 ‘놀이노래’를 ‘전래동요’라는 한자말 이름으로 가리키고, ‘일노래’를 ‘노동요’라는 한자말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늘 노래일 뿐입니다. 삶이 즐거우니 저절로 샘솟는 노래일 뿐입니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풀을 뜯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동생을 보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놀던 지난날에는 누구나 노래를 부르던 삶입니다. 좀 가난하다거나 좀 꾀죄죄하게 보였을는지 몰라도, 누구나 서로서로 아끼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던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날 삶을 그려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멀끔한 옷차림에 번듯한 자가용을 몰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눈부신 아파트에 번쩍거리는 불빛이 가득한 도시에서 문화와 여가를 누리지요. 그러면, 이런 문명사회에 어떤 노래가 흐르는가요. 오늘날 사람들은 ‘작곡가’나 ‘가수’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노래를 짓지 않습니다. 작곡가나 가수는 돈을 벌려고 노래를 지을 뿐, 삶을 가꾸려고 노래를 짓지 않습니다.


  흙이 사라지면서 삶이 사라집니다. 흙과 삶이 사라지니 아이들은 놀이터를 빼앗기며, 어른들은 쳇바퀴를 도는 쥐처럼 ‘일상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힙니다. 어떻게 살 때에 즐거울까요? 어떻게 삶을 가꿀 때에 아름다울까요? 스스로 바꾸려 하지 않으면 하나도 안 바뀝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흙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도 안 바뀝니다. 고속도로를 새로 늘리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고속도로’도 뜯어서 없애고, ‘있는 찻길’도 뜯어서 치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뛰놀 빈터를 마련하고, 나무가 우거질 숲을 돌볼 노릇입니다.


  권정생 님은 동화를 빌어 “밤뻐꾸기가 우는 밤이면 할머니 혼자 마당에 거적을 깔아 놓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별이 총총 나와 있습니다. 타작 마당에 콩알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의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는 걸까요(58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마당에 거적을 깔고 별바라기를 하는 할매는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시골 할매는 시골에서 텔레비전을 볼 뿐입니다. 도시 할매는 불빛이 너무 밝아 밤별을 볼 수조차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별바라기가 사라지는 한국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별바라기이든 해바라기이든 사랑바라기이든 꿈바라기이든 노래바라기이든 놀이바라기이든, 모두 잊거나 잃은 채 따분한 하루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를 지어서 우리 스스로 불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4347.8.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음을 읽는 동무



  마음이 맞는 동무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서로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압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느낌으로 마음을 읽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늘 생각하고 떠올리면서 마음으로 사귑니다.


  죽이 맞는 동무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서로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 수 있지만, 서로 입으로 말을 나누면 한결 깊고 넓게 이야기꽃을 피을 수 있는 줄.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으나, 서로 편지를 써서 주고받으면 가슴 가득 따사롭고 환한 빛이 솟아올라 삶이 대단히 즐거운 줄.


  네가 나한테 마음이 맞는 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라듯이, 너도 내가 마음이 맞는 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네가 나한테 마음을 열고 다가올 적에 기쁘며 웃음이 터지듯이, 내가 너한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적에 기쁘면서 웃음이 터져요.


  동무 사이뿐 아니라, 어버이와 아이 사이에서도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갈 때에 그야말로 즐겁습니다. 곁님과 나 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살림을 가꿀 적에 더없이 즐겁지요. 테두리를 넓혀, 내가 낯과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지구별 이웃하고도 마음을 열어 사귈 수 있으면, 우리가 깃든 이 지구별에 따사로운 사랑과 아름다운 꿈이 넘실거리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사람과 나무 사이에서, 사람과 새 사이에서, 사람과 풀 사이에서, 사람과 사마귀 사이에서, 사람과 물고기 사이에서, 사람과 풀벌레 사이에서, 사람과 숲짐승 사이에서, 서로서로 마음을 열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지구별은 한껏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어린이책 《비발디》(어린이작가정신,2014)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노르웨이에서도 ‘따돌림’이 있군요. 노르웨이쯤 되는 나라라면 학교에서 따돌림이 없을 만하겠다 싶었으나, 아니로군요. 평화로우면서 아름답게 나아가려는 나라에서도 학교에서만큼은 아이들이 모두 즐겁지는 않군요.


  아무 까닭 없이 따돌림을 받는 아이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천진하게 타이라를 바라보면, 타이라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요. 타이라에게는 하나뿐인 친구예요. 눈으로 이야기하는 친구(36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고양이하고뿐 아니라 나무하고도 말 없는 말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구름하고도, 무지개하고도, 냇물하고도 말 없는 말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학교 따돌림’을 돌아봅니다. 으레 ‘집단 따돌림’이라 말하지만, 이 이름은 옳지 않다고 느껴요. ‘학교 따돌림’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만 가면 얄궂게 여리거나 아픈 아이들을 따돌리고 맙니다.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학교는 무엇을 할까요?


  학교는 경쟁을 붙입니다. 학교는 시험을 치릅니다. 학교는 등수를 매깁니다. 이웃돕기나 두레나 품앗이로 나아가는 학교가 아니라, 의무교육 이름으로 모든 아이들을 숫자로 줄을 세워 대학입시지옥으로 내모는 데가 학교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따돌림’을 합니다. 학교를 다니며 높은 점수를 받는 아이조차 다른 아이한테 따라잡힐까 걱정과 근심을 하다가 점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학교에서 이웃돕기를 가르치거나 보여준다면 따돌림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두레와 품앗이를 하면서 삶을 가르치거나 보여준다면 따돌림도 괴롭힘도 목숨끊기도 불거질 일이 없습니다.


  ‘학교 따돌림’을 받는 아이가 안타까운 무척 가녀린 아이 하나가 이녁 어버이한테 아주 어렵게 말문을 엽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아버지가 말했어요. 페트라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만약 타이라에게 발길질했던 아이가, 페트라가 고자질한 걸 알게 되면 어떡하죠? 그러면 그 아이는 페트라에게도 발길질할 게 틀림없었어요(79쪽).” ‘페트라’라는 아이는 어린이책 《비발디》에서 학교 따돌림을 받지는 않아요. 그러나, 학교 따돌림을 받는 ‘타이라’ 다음으로 가녀린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저보다 여린 동무를 지켜 주고 싶으나, 마음 한켠에는 이러다가 나까지 따돌림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페트라네 아버지는 이 대목까지 살피거나 읽지 못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학교를 세워서 무엇을 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무엇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지 되짚을 노릇입니다.


  교과서 진도를 잘 나가거나 아이들 직업교육을 잘 이끈다고 해서 교사 노릇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거나 대학등록금을 보태 준대서 어버이 노릇이 끝나지 않습니다.


  어린이책 《비발디》를 읽다 보면, “타이라는 네 살부터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바흐와 비발디의 음악을 들었어요. 다른 음악도 좋지만, 타이라는 바흐와 비발디의 음악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음악이 있다면 우리는 말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43쪽)’.”와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말수가 엄청나게 줄어든 아이는 ‘말 없는 말’을 꿈꿉니다. 학교에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말을 한 마디도 못 하는 아이는 차라리 ‘말 없는 삶’을 바랍니다. 서로 마음으로 마음을 읽기를 바라요. 서로 사랑으로 사랑을 읽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서로 꿈으로 꿈을 읽기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나비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나 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까요? ‘사람 말’이 아닌 ‘지구별 이웃끼리 나눌 마음’을 헤아리기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는 누구나 풀잎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람 한 줄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 때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리 기나긴 ‘사람 말’이 서로 오간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무척 오랫동안 토론을 하건 토의를 하건, 마음을 열며 말을 꺼내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담지 않은 채 세월호 피해자한테 읊는 사과글이 얼마나 가슴으로 스며들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담지 않으며 읊는 사과글도 사과글이 될는지 궁금해요. 마음을 열 때에 비로소 이웃과 동무를 사귀고, 마음을 안 열 때에 아무런 이웃이나 동무를 못 사귑니다. 마음을 열 때에는 내 몸에 깃든 넋과 만나지만, 마음을 안 열 때에는 내 몸에 어떤 넋이 깃들었는지 생각조차 못 하기 마련입니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한 사람이 읽는 책


  날마다 신문이 나옵니다. 신문은 날마다 온갖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날마다 아침이 밝습니다. 동이 트는 하늘은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침저녁으로 노래하는 새와 풀벌레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하늘과 해와 구름을 보면서, 또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신문에도 있지만, 나무 한 그루한테도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켜서 보는 방송에도 있지만, 풀 한 포기한테도 있습니다.

  해마다 오월이면 붓꽃을 누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도 붓꽃을 보고, 마을 어귀에서도 붓꽃을 봅니다. 노랗게 봉오리를 올리기 앞서 푸른 잎사귀만으로 붓꽃인 줄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붓꽃을 늘 쳐다보니, 다른 데에서도 여린 줄기와 꽃대와 씨방을 볼 적에도 붓꽃인 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장미는 붓꽃이 피고 질 무렵 천천히 봉오리를 벌립니다. 소담스러운 봉오리를 볼 때마다 언제나 놀랍니다. 이 가느다란 줄기에서 어쩜 이렇게 커다란 꽃송이를 내놓을 수 있니.

  장미꽃이나 동백꽃은 꽤 오랫동안 꽃내음을 베풉니다. 그리고, 어느새 톡 떨어집니다. 꽃이 지고 난 장미나무나 동백나무는 썰렁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자라지 않아요. 줄기를 힘차게 올리고, 잎사귀를 푸르게 벌리면서, 한결같이 푸르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내뿜으면서 자랍니다. 꽃은 꽃대로 볼 만한 나무이면서, 꽃이 없을 적에는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를 기쁘게 노래하는 나무라고 느낍니다.

  아마 백만 사람은 나무한테서 꽃을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읽히는 책이란, 꽃과 같은 숨결이리라 느낍니다. 꽃이 아닌 잎사귀나 줄기나 가지나 뿌리를 읽는 사람도 있어, 어떤 책은 백 사람이 읽거나 천 사람이 읽곤 합니다. 때로는 열 사람이나 한 사람이 읽는 책이 있어요.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면 널리 꽃내음을 나누어 준다고 할 만합니다. 깊이 사랑받는 책이라면 깊이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지 싶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이 선보인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북멘토,2014)라는 책을 읽다가 “구럼비 해군기지 공사장을 따라 이렇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세운 이스라엘을 욕하다가 우리 땅에서 이런 풍경을 본다(64쪽).”와 같은 대목을 곰곰이 새깁니다. 그렇지요.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있습니다. 아니, 한국에서는 꽤 예전부터 ‘분리 장벽’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전국체전을 할 적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골목집 많은 동네’ 앞에 높다랗게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보기 안 좋다’고들 했습니다. 1986년과 1988년을 앞두고는 참으로 많은 골목동네가 깡패와 전투경찰과 공권력 주먹질에다가 군화발에 사라졌습니다. 제주섬에 만든다는 해군기지 때문에 또 ‘높다란 울타리’가 생긴다는데, 나는 내 고향 인천에서도 ‘높다란 울타리’를 여러 해 보았어요. 지난 2006년이었는데, 작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작은 골목동네 한복판에 인천시청에서 너비 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내려고 몰래 토지수용을 했고 몰래 철거까지 마쳤어요. 뒤늦게 산업도로 계획을 알아낸 ‘남은 동네사람’이 이를 반대하려고 했지만 힘이 닿지 않았는데, 산업도로 계획을 반대하는 동네사람이 늘고 또 늘어나니, 인천시청에서 한 일은 높다란 울타리 세우기였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은 “한국 사진가의 위안부 할머니 사진이 정작 한국 사진계에서 외면당하는 현실. 차라리 이것이 자본의 문제라면 사진가들은 사회적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는 자신의 의무도 책임도 명예도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다(142∼143쪽).” 하고 덧붙입니다. 한국사람이 찍은 한국 이야기를 정작 한국 사진가들이 등을 돌린다고 해요. 그래요, 그렇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성노예로 고단한 삶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들 이야기는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가 찾아올 무렵부터 비로소 불거졌어요. 이때에 이 할머님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말씀을 들으며 한국과 지구별에 이 이야기를 알리려고 한 사진가는 매우 드뭅니다. 사진가뿐 아니라 지식인도 퍽 드물었고, 사진가와 지식인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 또한 이러한 이야기에 그닥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도 이녁 삶이 바쁘다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귀여겨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사진가만 탓할 일은 없다고 느껴요. 사진가를 탓하기 앞서 이 나라 얼거리가 뒤틀렸어요. 뒤틀린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고 학문을 하며 이것저것 배운 사람들이 뒤틀린 몸짓으로 뒤틀린 일을 하는 모습은, 어쩌면 매우 마땅한 흐름일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아름다움을 못 보고 자랐으니까요. 어린 날부터 사랑스러움을 못 느끼며 컸으니까요.

  입시지옥인 한국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몸가짐이 배는 아이들입니다. 입시지옥이 끝나고 대학교에 다니더라도 취업지옥이 기다리기에, 다시금 동무를 동무로 삼지 않는 매무새로 젖어드는 아이들입니다. 언제나 점수따기에 숫자싸움만 하던 아이들이 ‘몸뚱이만 어른이 되’어요. 피가 튀기는 싸움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기자가 되거나 사진가가 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상엽 님은 “사진기자들은 경쟁하듯 문제 있는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이는 무분별하게 지면화되고 있다. 이들 대다수 기자의 심리에는 공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242쪽).” 하고 덧붙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헤아려 봅니다. ‘공리’란 무엇이고 ‘공리주의’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공리주의’를 “(1) 모든 일에 개인의 공명(功名)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나 태도 (2)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에 두는 사상”으로 풀이합니다. 사진기자뿐 아니라, 대통령과 시장과 군수와 교장과 교감을 비롯해, 여느 어른과 아이 모두, ‘내 밥그릇’이 아닌 ‘우리 마을’을 헤아리도록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읽을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쓸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백만 사람을 섬기는 일이 한 사람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한 사람을 섬기려 하면서 백만 사람을 짓밟는다면?

  나무와 같은 책이 되고, 열매와 씨앗과 같은 책이 되며, 꽃과 잎사귀와 같은 책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아이한테 선물하기


  우리들은 늘 선물을 합니다. 무엇이든 선물합니다. 때로는 기쁨을 선물하고, 때로는 슬픔을 선물합니다. 때로는 밥을 선물하고, 때로는 굶주림을 선물합니다. 어느 선물이든 선물입니다. 더 나은 선물이나 덜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다만, 배부름이 아닌 배고픔을 선물한다면 괴로울 수 있습니다. 배고픔이 아닌 배부름을 선물한다면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이때에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배고픔을 선물받는 느낌은 어떠한가요? 배부름을 선물받는 느낌은 어떠한가요? 이 느낌 그대로, 내 이웃한테 내가 무엇을 선물하는지 헤아려 보셔요. 나는 이웃한테 무엇을 선물하는 삶인가요. 내가 아는 이웃과 모르는 이웃한테, 내가 이름과 얼굴을 아는 이웃한테, 또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웃한테 무엇을 선물하는 삶인가요.

  어른은 아이한테 언제나 선물을 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학교를 선물하기도 하는데, 그냥 학교가 아닌 ‘입시지옥 학교’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들은 투표권을 손에 쥐고 교육감을 뽑습니다. 교육감이 누가 뽑히는가에 따라 ‘입시지옥 학교’는 더 끔찍해지기도 하고, 덜 끔찍해지기도 합니다. 다만, 어느 누가 교육감이 되더라도 ‘입시지옥 학교’는 안 사라집니다.

  대통령을 잘 뽑으면 ‘입시지옥 학교’는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통령과 교육감을 우리가 투표권을 손에 쥐고 뽑듯이, 교장이나 교사도 우리가 투표권을 손에 쥐고 뽑을 만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과 교육감과 시장과 군수와 구청장까지 우리 손으로 뽑듯이, 아이들이 하루 내내 지내는 학교를 맡는 우두머리인 교장도 우리가 뽑아야 옳은 일은 아닐까요. 아이를 늘 마주하는 교사도 우리가 뽑아야 옳은 일은 아닌가요.

  그림책 《스미레 할머니의 비밀》(어린이작가정신,2011)을 읽습니다. 일본사람 우에가키 아유코 님이 글과 그림을 빚었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스미레 할머니’는 나이가 많이 들어 눈이 어둡습니다. ‘아직 젊은’ 할머니일 적에는 스스로 바늘귀에 실을 꿸 수 있었으나 ‘꽤 늙은’ 할머니가 된 뒤에는 혼자서 바늘귀에 실을 꿰지 못해요. 언제나 이웃을 불러서 실을 꿰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스미레 할머니는 바느질을 잘하기로 소문났어요. 옷은 물론 앞치마며 쿠션, 커튼까지 뭐든지 잘 만들어요(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스미레 할머니뿐 아니라, 우리 둘레 거의 모든 할머니는 바느질을 잘하십니다. 우리 둘레 거의 모든 할머니는 바느질뿐 아니라 살림을 아주 잘하십니다. 밥도 잘하시고, 떡도 잘 빚으시며, 국도 맛나게 잘 끓이셔요. 게다가 할머니 손은 약손이에요. 할머니가 살살 어루만지면 아픈 데가 말끔히 낫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 이렇게 놀라운 빛이었을까요? 할머니는 언제부터 이처럼 바느질이건 살림이건 밥이건 떡이건 국이건, 게다가 약손 노릇에다가 텃밭에다가 모든 일을 척척 잘하셨을까요?

  그런데, 하나를 더 헤아리면, 할머니는 가방끈이 짧아요. 우리 둘레 거의 모든 할머니는 예부터 학교 문턱은 밟은 일이 아주 드뭅니다. 할머니는 글을 학교에서 익힌 일조차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우리 둘레 참 많은 할머니는 혼자서 조용히 글을 익히시곤 했고, 아주 빨리 익힐 뿐 아니라, 편지도 참 멋지게 씁니다.

  할머니도 아이로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으로 살면서 어느덧 할머니 나이가 됩니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 지구별에서 저마다 어떤 빛으로 하루하루 일굴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또 이녁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고운 사랑을 날마다 받아먹으며 살지 않았을까요.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될 적에도 사랑스럽고, 사랑을 늘 받아먹다가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는 어른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될 적에도 한결같이 사랑스러우리라 느껴요.

  다시 말하자면, 아이와 어른은 같습니다. 아기와 할머니는 같습니다. 아이와 어른도 똑같이 맑은 빛이고, 아기와 할머니도 똑같이 밝은 숨결입니다.

  “할머니와 친구들은 거미가 살고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로 갔어요. 직박구리가 부탁했어요. ‘거미야, 실 좀 나누어 주렴.’(25쪽)”과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개구리하고 도란도란 속삭입니다. 직박구리하고도, 거미하고도, 들과 숲에 깃든 모든 목숨하고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할머니가 되었기에 이처럼 거미나 직박구리나 개구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모르나, 가만히 보면 아이들도 거미나 직박구리나 개구리하고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거미나 직박구리나 개구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 잊었을 뿐이에요. 우리 스스로 잃었을 뿐이에요.

  참새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안다면, 참새와 함께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터전으로 마을과 집을 가꿉니다. 들풀과 나무하고 이야기를 섞을 줄 안다면, 들풀과 나무랑 함께 푸르게 살아가도록 즐거운 터전이 되게끔 마을과 집을 가꾸지요. 그렇겠지요. 우리들은 이웃하고 오순도순 마을을 가꿉니다. 우리들은 동무하고 알콩달콩 삶을 짓고 사랑을 길어올려요.

  선물은 낯익은 사람한테만 하지 않습니다. 선물은 낯선 사람한테도 함께 합니다. 씨앗을 심는 손길이 선물하는 손길입니다. 나무를 함부로 베는 손길이 선물을 함부로 짓밟는 손길입니다.

  천성산 지킴이가 되었던 지율 스님은 내성천 지킴이로 살아갑니다. 천성산 꼭대기에 있던 군부대가 떠난 뒤, 천성산 꼭대기에 처음으로 올라간 지율 스님은 그곳에서 늪을 보았다고 해요. 지구별에서 보기 드문 무척 아름다운 늪이 천성산에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런 늪을 군부대는 그동안 함부로 짓밟았고, 정부에서는 고속철도를 놓는다면서 마구 파헤쳤어요. 더 들여다보면, 우리 정부는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놓고, 국립공원 옆에 골프장이나 공장을 쉽게 허가하며, 아름다운 시골마을에 핵발전소를 짓습니다. 그곳이 아니면 고속철도나 고속철도를 어디에 놓느냐고도 하고, 골프장과 공장과 핵발전소를 안 지으면 어떡하느냐고도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봐요.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선물은 고속철도나 고속도로여야 할가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골프장과 공장과 핵발전소밖에 물려주지 못하나요.

  아름다운 삶을 물려주면서 착한 사랑을 선물로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빕니다. 고운 꿈을 물려주면서 참다운 사랑을 선물로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빕니다. 아이들은 돈이 아닌 사랑을 바라요. 아이들은 부동산이 아닌 사랑을 기다려요. 4347.7.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보 2014-07-07 16:06   좋아요 0 | URL
마음에 확 와닿는 말씀이네요,
제가 류가 어릴적에는 정말 사랑으로 잘 키우려 노력했는데 요즘 너무너무 욕심 많은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닥달만 하고있으니 또 반성하고갑니다,

숲노래 2014-07-07 17:07   좋아요 0 | URL
욕심이라고 하지만
그 마음에는 늘
사랑이 짙게 깔리면서
다 함께 늘 웃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칠월 칠일... 양력이지만,
즐겁게 하루 누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