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음을 읽는 동무



  마음이 맞는 동무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서로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압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느낌으로 마음을 읽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늘 생각하고 떠올리면서 마음으로 사귑니다.


  죽이 맞는 동무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서로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 수 있지만, 서로 입으로 말을 나누면 한결 깊고 넓게 이야기꽃을 피을 수 있는 줄.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으나, 서로 편지를 써서 주고받으면 가슴 가득 따사롭고 환한 빛이 솟아올라 삶이 대단히 즐거운 줄.


  네가 나한테 마음이 맞는 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라듯이, 너도 내가 마음이 맞는 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네가 나한테 마음을 열고 다가올 적에 기쁘며 웃음이 터지듯이, 내가 너한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적에 기쁘면서 웃음이 터져요.


  동무 사이뿐 아니라, 어버이와 아이 사이에서도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갈 때에 그야말로 즐겁습니다. 곁님과 나 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살림을 가꿀 적에 더없이 즐겁지요. 테두리를 넓혀, 내가 낯과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지구별 이웃하고도 마음을 열어 사귈 수 있으면, 우리가 깃든 이 지구별에 따사로운 사랑과 아름다운 꿈이 넘실거리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사람과 나무 사이에서, 사람과 새 사이에서, 사람과 풀 사이에서, 사람과 사마귀 사이에서, 사람과 물고기 사이에서, 사람과 풀벌레 사이에서, 사람과 숲짐승 사이에서, 서로서로 마음을 열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지구별은 한껏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어린이책 《비발디》(어린이작가정신,2014)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노르웨이에서도 ‘따돌림’이 있군요. 노르웨이쯤 되는 나라라면 학교에서 따돌림이 없을 만하겠다 싶었으나, 아니로군요. 평화로우면서 아름답게 나아가려는 나라에서도 학교에서만큼은 아이들이 모두 즐겁지는 않군요.


  아무 까닭 없이 따돌림을 받는 아이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천진하게 타이라를 바라보면, 타이라는 모든 것을 잊어버려요. 타이라에게는 하나뿐인 친구예요. 눈으로 이야기하는 친구(36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고양이하고뿐 아니라 나무하고도 말 없는 말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구름하고도, 무지개하고도, 냇물하고도 말 없는 말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학교 따돌림’을 돌아봅니다. 으레 ‘집단 따돌림’이라 말하지만, 이 이름은 옳지 않다고 느껴요. ‘학교 따돌림’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만 가면 얄궂게 여리거나 아픈 아이들을 따돌리고 맙니다.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학교는 무엇을 할까요?


  학교는 경쟁을 붙입니다. 학교는 시험을 치릅니다. 학교는 등수를 매깁니다. 이웃돕기나 두레나 품앗이로 나아가는 학교가 아니라, 의무교육 이름으로 모든 아이들을 숫자로 줄을 세워 대학입시지옥으로 내모는 데가 학교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따돌림’을 합니다. 학교를 다니며 높은 점수를 받는 아이조차 다른 아이한테 따라잡힐까 걱정과 근심을 하다가 점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학교에서 이웃돕기를 가르치거나 보여준다면 따돌림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두레와 품앗이를 하면서 삶을 가르치거나 보여준다면 따돌림도 괴롭힘도 목숨끊기도 불거질 일이 없습니다.


  ‘학교 따돌림’을 받는 아이가 안타까운 무척 가녀린 아이 하나가 이녁 어버이한테 아주 어렵게 말문을 엽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아버지가 말했어요. 페트라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만약 타이라에게 발길질했던 아이가, 페트라가 고자질한 걸 알게 되면 어떡하죠? 그러면 그 아이는 페트라에게도 발길질할 게 틀림없었어요(79쪽).” ‘페트라’라는 아이는 어린이책 《비발디》에서 학교 따돌림을 받지는 않아요. 그러나, 학교 따돌림을 받는 ‘타이라’ 다음으로 가녀린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저보다 여린 동무를 지켜 주고 싶으나, 마음 한켠에는 이러다가 나까지 따돌림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페트라네 아버지는 이 대목까지 살피거나 읽지 못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학교를 세워서 무엇을 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무엇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지 되짚을 노릇입니다.


  교과서 진도를 잘 나가거나 아이들 직업교육을 잘 이끈다고 해서 교사 노릇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거나 대학등록금을 보태 준대서 어버이 노릇이 끝나지 않습니다.


  어린이책 《비발디》를 읽다 보면, “타이라는 네 살부터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바흐와 비발디의 음악을 들었어요. 다른 음악도 좋지만, 타이라는 바흐와 비발디의 음악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음악이 있다면 우리는 말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43쪽)’.”와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말수가 엄청나게 줄어든 아이는 ‘말 없는 말’을 꿈꿉니다. 학교에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말을 한 마디도 못 하는 아이는 차라리 ‘말 없는 삶’을 바랍니다. 서로 마음으로 마음을 읽기를 바라요. 서로 사랑으로 사랑을 읽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서로 꿈으로 꿈을 읽기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나비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나 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까요? ‘사람 말’이 아닌 ‘지구별 이웃끼리 나눌 마음’을 헤아리기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는 누구나 풀잎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람 한 줄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 때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리 기나긴 ‘사람 말’이 서로 오간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무척 오랫동안 토론을 하건 토의를 하건, 마음을 열며 말을 꺼내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담지 않은 채 세월호 피해자한테 읊는 사과글이 얼마나 가슴으로 스며들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담지 않으며 읊는 사과글도 사과글이 될는지 궁금해요. 마음을 열 때에 비로소 이웃과 동무를 사귀고, 마음을 안 열 때에 아무런 이웃이나 동무를 못 사귑니다. 마음을 열 때에는 내 몸에 깃든 넋과 만나지만, 마음을 안 열 때에는 내 몸에 어떤 넋이 깃들었는지 생각조차 못 하기 마련입니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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