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이웃과 주고받는 말



  찔레꽃이 하얗습니다. 오월로 접어든 시골마을에 찔레꽃이 곳곳에 피어납니다. 오월로 접어들기 앞서 사월 끝자락까지 골짜기나 숲에 등꽃이 알록달록 피었습니다.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가는 길에 으레 등꽃을 보았고, 대문 위쪽으로 등나무 덩쿨이 뻗도록 한 집에서도 곧잘 등꽃을 보았어요.


  찔레꽃은 찔레나무 줄기에서 봉오리를 터뜨립니다. 찔레나무는 들과 숲에서 자랍니다. 예전에는 시골집 울타리로 곧잘 뻗기도 했으나, 이제 찔레나무를 울타리로 삼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삼는 집도, 싸리나무를 울타리로 삼는 집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울타리를 시멘트로벽돌로 쌓습니다. 꽤 예전부터 살던 시골집이라면 돌울타리가 그대로 있으나, 돌울타리는 보기 안 좋다면서 허물어 없애고 시멘트벽돌을 세우는 집이 많아요. 전원주택은 쇠그물로 된 울타리를 세우곤 합니다.


  나무 울타리가 사라지니, 봄이 되어도 온갖 꽃이 흐드러지지 않습니다. 나무 울타리를 세우지 않으니, 달마다 달라지는 꽃빛과 잎빛을 누리지 않습니다. 나무 울타리를 놓지 않기에, 숲정이를 보살피지 않고, 집 안팎에 나무가 자라도록 보듬지 않습니다.


  나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지만, 날이 갈수록 이 나라에서 나무가 사라집니다. 나무가 없으면 우리 삶은 그예 무너지지만, 학교에서도 책에서도 관공서에서도 나무를 사랑하는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교과서로 가르치지만, 정작 나무를 가르치는 일이 없어요.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를 신문·방송에서 날마다 다루지만, 막상 나무를 다루는 일이 없어요.


  오늘 어떤 나무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오늘 어떤 들꽃이 피었구나, 하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없어요. 우리는 이웃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하고 어떤 삶을 노래할까요.


  이오덕 님은 《우리 문장 쓰기》(한길사,1992)라는 책을 선보인 적 있습니다. ‘우리 문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글’을 쓰자는 책입니다. 영어로 된 글이나 일본 한자말로 된 글이나 중국 한자말로 된 글이 아니라, ‘우리 글’로 쓰자는 책입니다.


  “김유정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그 글월들의 길이가 길든지 짧든지 거기 나타난 이야기말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옛이야기말에서 지난때를 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고, 이 점에서 김유정의 소설문장은 우리들 이야기말의 전통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고 하겠다(107∼108쪽).”와 같은 대목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우리 글, 그러니까 우리 말은 ‘지난때(과거 시제)’를 잘 안 씁니다. 지난때를 쓰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얼마든지 나눕니다. 이와 달리 서양말은 ‘과거·현재·미래’라 하면서, 때를 똑똑히 나누지요. 게다가 서양말에는 ‘현재진행형’도 있어요.


  한국말에는 토씨가 있으나 서양말에는 토씨가 없습니다. 서양말에 없는 토씨인데, 한국말을 서양말로 옮기면 이 ‘토씨’를 어떻게 밝혀야 할까요. 밝힐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토씨를 밝히지 않는 틀로 이야기를 엮어 서양말로 옮깁니다. 거꾸로 생각할 때에도 똑같아요. 한국말에는 관사도 정관사도 없어요. 그러나 서양말에는 이런 관사가 있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관사요 서양말에 있는 관사이지만, 서양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관사 없이’ 얼마든지 이야기를 엮어요.


  한국말에는 ‘그녀’가 없어요. ‘그女’는 일본사람이 서양말을 옮기면서 지은 낱말이고, 이런 낱말을 한국 지식인이 함부로 끌어들였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국사람은 ‘그녀’ 같은 낱말이 없어도 영어 ‘she’를 얼마든지 한국말로 옮겨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 헤아리면, 전라도 사투리를 영어나 일본말로 어찌 옮기겠어요. 훗카이도 사투리나 웨일즈 사투리를 한국말로 어찌 옮기겠어요. 못 옮깁니다. 그러나, 서로서로 요모조모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빛내면서, 저마다 다른 사투리를 저마다 다른 겨레말로 알맞게 풀거나 옮기지요.


  《우리 문장 쓰기》라는 책은 우리가 학교나 마을이나 집이나 사회나 신문·방송이나 여느 책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제대로 깨닫지 못한 ‘우리 글’을 슬기롭게 돌아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이웃과 주고받는 말을 아름답게 가꾸자는 이야기를 속삭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아주 어렵게 설명하는 수사법이란 것을 전혀 모르면서도 어른들이 말하는 그 모든 방법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 아이들이 이런데, 어른들이 글쓰기를 재주로 익히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삶과 말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76쪽).”와 같은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요. 글솜씨를 부리거나 말재주를 부린다고 해서 글이나 말이 뛰어나지 않아요. 이야기를 담아야 글이 즐겁고 말이 싱그럽습니다. 사랑을 실어야 글이 반갑고 말이 빛납니다.


  어느 아이도 글솜씨를 부리며 글을 안 써요. 그러나 오늘날 입시교육은 논술을 아이들한테 억지로 가르쳐요. 아이들이 글솜씨를 부리도록 내몰아요. 지난날 독재정권과 함께 한때 몰아치던 웅변이란 무엇인가요. 바로 말재주를 부려서 아이들이 바보스러운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소리만 빽빽 지르도록 내몰았어요.


  글은 삶글을 쓸 때에 아름답습니다. 논술이 아닌 삶글을 쓸 우리들입니다. 말은 삶말을 할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웅변이나 연설이 아닌 삶말을 할 우리들입니다.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껏 살려서 나눌 글이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곱게 가꾸거나 일구면서 환하게 웃는 이야기를 어깨동무하듯이 나눌 글이요 말입니다.


  찔레꽃은 찔레꽃빛입니다. 하얗게 맑은 찔레꽃은 찔레꽃빛입니다. 찔레꽃 가까이에 서면 찔레꽃내음이 온몸을 감쌉니다. 환하면서 눈부신 오월이 고이 드러나는 찔레꽃입니다. 찔레꽃이 피면서 논을 갑니다. 찔레꽃내음을 맡으며 논이랑 밭에서 오순도순 일합니다. 찔레꽃이 들과 숲을 포근히 감싸면서 오월이 아름답습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찬찬히 영그는 복숭아알을 바라봅니다. 매화알도 푸른 빛깔이 이쁘장하게 굵습니다. 낮에는 제비가 하늘을 가르고, 밤에는 소쩍새가 또랑또랑 노래해요. 4347.5.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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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어떤 소리를 듣는가



  사월에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이니 마땅히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개구리는 삼월부터 깨어나는데, 삼월에는 드문드문 개구리 소리를 듣고, 사월이 되면서 비로소 소리가 늘며, 사월 끝무렵에는 소리잔치가 이루어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구리 소리입니다.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아침부터 한낮 사이에는 개구리 소리가 살짝 잦아듭니다. 해가 기우는 저녁부터 개구리 소리는 커다란 소리물결이 됩니다.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기에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분들은 사월에 개구리 소리를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오월이 되거나 유월이 되어도 도시에서는 개구리 소리는커녕 개구리 뒷다리조차 구경을 못할 수 있어요.


  톰 새디악 님이 쓴 《두려움과의 대화》(샨티,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톰 새디악 님은 미국에서 돈과 이름을 무척 크게 거머쥔 영화감독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돈도 이름도 내려놓으면서 새로운 두 가지를 어루만지려고 한다고 해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전용헬기까지 타고 다니던 영화감독이 돈과 이름을 살포시 내려놓고는 다른 길을 걷도록 할까요?


  톰 새디악 님은 이녁이 쓴 책에서 “역사상 인간이 오늘날처럼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던 시대는 없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그 즉시 우리 컴퓨터의 스크린이나 텔레비전 수상기, 심지어 휴대폰에까지 전 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에 딸려온 메시지들은 우리가 주목해 주기를 간청하고 … 가짜로 살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저자가 될 수 없다(55∼5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분이 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아주 마땅한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신문이고 방송이고 인터넷이고 온통 그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일어나고 먹고 자고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지내는데, 어느 일 하나가 터지면 이 모두를 까맣게 잊고 ‘커다란 일’ 하나에만 매달려야 하는 듯이 내모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사월에 개구리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아무리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전쟁이 터지건 불이 나건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입니다.


  삼월부터 풀이 돋고 꽃이 피듯이, 사월에는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먹을 곡식과 열매를 얻고자 씨앗을 심습니다. 슬플 때에는 슬피 울면서 씨앗을 심어요. 기쁠 때에는 기쁘게 웃으면서 씨앗을 심어요. 사월에 손을 놓지 못합니다. 오월에도 손을 놓지 못합니다. 오월에는 오월대로 우리를 기다리는 들빛이 있습니다. 유월에는 유월대로 우리 손길을 바라는 들바람이 있습니다. 칠월에는 칠월대로 우리 손품을 누리고 싶은 들내음이 있어요.


  그런데, 사월 어느 날,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았어요. 배가 가라앉으면서 선장과 승무원 여럿이 몰래 빠져나왔어요. 배에 탄 수백 아이와 어른을 그대로 둔 채 선장과 승무원 여럿은 제 몸만 건사했어요. 바닷속에 잠긴 수많은 사람들 주검은 아직 건지지 못해요. 바닷속에서 슬픈 소리가 울려요. 배가 가라앉으면서 배에 탄 사람들 슬픈 소리가 퍼져요. 그렇지만, 이 슬픈 소리에 귀를 닫은 어른들이 많아요.


  톰 새디악 님은 “성장의 신은 행복, 삶의 질, 만족, 성취감, 삶의 의미 혹은 목적 지수 같은 것은 측정하지 않고 단지 하나 ‘수익’만 측정하고 따진다. 수익이 높으면 경제는 잘 굴러가는 것이고, 수익이 낮으면 배가 침몰중이니 바로잡아야 한다. 수익이란 물론 돈을 뜻한다 … 삶이라는 더 큰 장부에서 보면 화학물질에 노출돼 더 이상 곡식을 수확할 수 없는 땅과 진폐증으로 가장을 잃은 가족이 곧 고통스러운 진짜 손실로 기록된다(132, 1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바닷속에 가라앉아 목숨을 잃는 사람이 이백을 넘고 삼백에 이르려 합니다. 너무 끔찍합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목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끔찍합니다. 왜 이 목숨은 바닷속에 잠겨야 할까요. 왜 이 목숨은 안타깝고 애틋하게 떠나야 할까요.


  이백 사람이 죽기에 스무 사람이 죽을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스무 사람이 죽기에 두 사람이 죽을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죽기에 두 사람이 다칠 때보다 더 슬프지 않습니다. 죽어도 슬프고 다쳐도 슬픕니다. 삶과 죽음은 숫자로 따질 수 없습니다. 수백 사람이 죽기 앞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적부터 제대로 살폈어야 할 일입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 앞서 처음부터 올바로 살폈어야 할 일입니다.


  배가 왜 가라앉았을까요? 돈 때문입니다. 배가 가라앉은 뒤에도 터무니없는 일이 왜 곳곳에서 불거질까요? 돈 때문입니다. 밑뿌리를 살피면 모두 돈 때문입니다. 어른들 스스로 이 사회를 돈으로 굴러가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돈에 미친 사회’에 내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바닷속에 잠겨 죽고 맙니다. 그리고, 바닷속에 아니더라도 입시지옥에서 죽습니다. 해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입시지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백 수천 아이들 이야기는 신문에도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뜨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치여 죽는 아이들도 아주 많은데, 이 아이들 이야기 또한 언론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가라앉은 배에서 죽은 아이보다 입시지옥 때문에 괴로운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가 훨씬 많습니다.


  ‘더 많은 아이가 죽었’으니 그 일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도 많은 아이가 사고로 죽고 입시지옥 때문에 죽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돈바라기’입니다. 돈이 아니면 안 되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대통령이 ‘재난관리국’을 만들라느니 더 힘을 실으라느니 한다고 해서 아이가 안 죽을 일이 없습니다. 괜스런 공무원이 더 늘어나고 공문서만 더 생길 테지요. 사회를 고치고 교육을 뜯어고치며 문화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입시지옥으로 치닫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꾸는 배움터가 되어야 합니다. 돈으로 계급과 신분을 가르는 사회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품앗이와 두레로 즐거운 마을살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두려움과의 대화》라는 책을 쓴 갑부 영화감독이던 톰 새디악 님은 돈과 이름을 내려놓고 ‘사랑’과 ‘꿈’ 두 가지를 찾으려 한다고 밝힙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사랑과 꿈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돈과 이름이 춤추는 사회는 그악스럽습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빛낼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4347.5.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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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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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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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손길을 타며 환한 꽃


  시골에서 살아간다고 언제나 새와 벌레와 개구리한테 둘러싸여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텔레비전을 켜거나 라디오를 틀면 새노래도 벌레노래도 개구리노래도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산다지만 으레 자가용이나 짐차나 경운기를 몰면 들과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일할 적에 농약을 뿌리느라 부산할 적에도 노래를 못 듣습니다. 농약을 뿌리려고 경운기나 기계를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퍼집니다. 촤아아 농약 흩날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퍼집니다. 농약을 맨몸으로 뿌리는 시골 할매와 할배도 있지만, 농약을 뿌릴 적에는 으레 수건과 긴옷으로 친친 감쌉니다. 둘레에서 흐르는 소리를 모두 닫습니다. 게다가 농약을 치면 이 둘레로 어떤 새도 벌레도 개구리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레이철 카슨 님이 “조용한 봄”을 부르짖은 지 예순 해가 훨씬 지났습니다. 곧 일흔 해가 되는군요. 참말 오늘날 시골은 “조용한 봄”입니다. 아니, “고요한 봄”입니다. 아니, “쥐 죽은 봄”입니다. 아니, “소리와 노래가 사라진 무섭고 끔찍한 봄”입니다.

  요즈음은 숲정이가 남지 않습니다. ‘숲정이’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가리킵니다. 이제 이런 낱말은 쓰임새를 잃습니다. 참말 마을 가까이에 숲이 사라지니까요. 마을 가까이 빈터나 수풀을 그대로 두지 않으니까요. 마을 할배는 마을과 맞닿거나 가까운 빈터나 수풀에 신나게 농약을 뿌립니다. 풀씨가 날린다며 몹시 싫어합니다.

  그런데 말입지요, 끝겨울과 첫봄이 되면 다들 나물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가요. 이제 시골 할매도 예전처럼 나물캐기를 안 하지만, 냉이와 쑥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갑니다. 생각해 보셔요. 여느 때에는 엄청나게 농약을 뿌려대고서 냉이랑 쑥은 캐려고 들과 숲으로 간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대고 무슨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는 이 땅에다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셈인가요.

  학교에서 숲을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시골학교에서조차 숲을 안 가르칩니다. 어제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를 다녀오는데, 면소재지 고등학교 머스마 넷이 빈 깡통을 아무 데나 휙 던집디다. 너무 어이없어서 자전거를 세우고 네 아이를 불렀습니다. 깡통 주으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보는 앞이니 깡통을 줍더군요. 그러나, 내가 다시 자전거를 몰고 옆을 지나가니 곧바로 깡통을 길에다가, 아니 시골 면소재지 작은 밭뙈기에다 버립니다. 나는 자전거를 다시 멈추어 이 아이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네가 깡통 버린 데는 ‘바로 네 마을이요 네 고향’이라고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조차 안 합니다.

  송민혜 님이 쓴 《처음 손바느질》(겨리,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마음이 아파 책을 읽습니다. “제 쓰임이 있는 소품들이라면 아이가 늘 곁에 두고 쓰면서 엄마 사랑을 담뿍 받을 수 있어요(1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저밉니다. 시골 면소재지 고등학교 아이는 어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을까요. 저희 집 마당에다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릴까요. 저희 집 밭이나 논에다 빈 깡통이나 병을 함부로 던질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쓰레기 버리지 마라’ 하고 가르치거나 얘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왜 버리지 말아야 하고, 쓰레기가 무엇이며,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거나 얘기하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더 나아가, 시골에서조차 시골아이가 흙을 느끼거나 알도록 가르치거나 얘기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요즈음 몇몇 학교에서는 ‘학교 텃밭’을 일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교일 뿐입니다. 모든 학교가 텃밭을 일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학교도 모내기로 바쁜 철에 모내기를 거들지 않습니다. 피사리나 가을걷이로 바쁜 철에 피사리나 가을걷이를 거들지 않습니다.

  “느리게 / 한 땀 두 땀 // 빛깔 고르고 / 바늘땀 더하는 재미 // 손꽃 핀다(1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쓸쓸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손으로 풀을 뽑으며 손으로 낫을 들어 나락을 베지 않고서야 흙도 풀도 나무도 숲도 들도 알 수 없습니다. 뙤약볕을 받으며 밭에서 땀을 흘리지 않고서야 햇볕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비를 맞으며 나물을 뜯지 않고서야 비와 풀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땅 아이들은 가을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바쁜가요. 이 땅 대학생은 가을에 학교잔치를 하거나 취직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벅찬가요. 가을에 가을빛을 누리면서 흙내음 맡을 줄 아는 어른(교사·부모)과 아이(학생)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봄에 봄빛을 즐기면서 풀내음 맡을 줄 아는 사람이 늘면 좋겠습니다.

  손바느질 이야기를 들려주는 송민혜 님은 “청 자투리를 밑으로 덧대고 위쪽으로는 해진 올을 그대로 살려 수를 놓았더니 꽃 한 송이 곱게 피었답니다(31쪽).” 하고 손꽃을 노래합니다. “아이는 자르고 엄마는 바느질, 사이좋게 뚝딱. 안 입는 옷과 자투리 천으로 만든 장식줄(70쪽).” 하면서 손빛으로 춤춥니다. 말 그대로 손길을 타면서 환한 꽃입니다. 꽃 한 송이는 우리 손길을 따사롭게 받으면서 사랑스럽게 피어납니다. 풀 한 포기는 우리 손길을 넉넉하게 받으면서 푸르게 자랍니다. 나무 한 그루는 우리 손길을 살가이 받으면서 싱그러이 큽니다.

  손으로 밥을 짓습니다.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손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손으로 쓰다듬고, 손으로 머리를 감기며, 손으로 아이들 발을 씻깁니다. 손으로 집을 짓지요. 손으로 옷을 깁지요. 손으로 물레를 잣고, 손으로 절구를 빻아요. 손으로 부침개를 부치고, 손으로 닭둥지에서 달걀을 주으며, 손으로 제비한테 인사합니다.

  “작은 종이 하나에도 내 이야기 곱다시 담고 싶다(11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 삶은 작은 눈빛 하나로 밝습니다. 우리 사랑은 작은 손빛 하나로 포근합니다. 우리 꿈은 작은 말빛 하나로 그윽합니다.

  면소재지 머스마는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면소재지 초등학교 아이한테도 과자봉지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 얘기할 적에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어른이 알려주어도 코앞에서만 줍는 척하고 이내 손을 뒤로 가져가서 슬쩍 떨어뜨리더니 모른 척하더군요. 우리 손은 서로 사랑하려는 손이요, 우리 손은 아름다운 꿈을 지으려는 손입니다.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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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삶을 사랑하는 하루



  배가 한 척 가라앉았습니다. 배에는 오백 사람 가까이 탔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삼백이 넘었다고 해요. 배는 처음부터 와장창 무너지듯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아이와 어른 모두 걱정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배가 한참 기울고 나서야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바닷속에 잠긴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뒤집힌 배에 갇힌 채 바닷속에 잠겨야 한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배가 기우뚱하며 말썽이 생겼을 때에 왜 사람들을 재빨리 바깥으로 내보내어 살리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비가 내립니다. 사월에 내리는 비는 촉촉하며 포근합니다. 삼월에 꽃이 피었다가 진 매화나무에는 매화알이 푸르게 굵습니다. 매화나무에 이어 모과나무에 꽃이 피고, 모과나무에 이어 느티나무에 꽃이 핍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나 벚나무를 잔뜩 심어 봄꽃잔치를 하니, 벚꽃이 지면 마치 꽃이 다 진 줄 여기곤 하는데, 탱자나무는 요즈음이 한창 꽃철입니다. 탱자꽃이 질 무렵에는 찔레꽃이 피고, 찔레꽃이 질 무렵에는 밤꽃이 피어요. 사이사이 오리나무에 꽃이 피고 등나무에 꽃이 핍니다. 치자나무에 꽃이 피며 감나무에 꽃이 피어요. 겨울을 난 동백나무와 닥나무와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면,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꽃철입니다.


  마쓰나리 마리코 님이 그리고 고향옥 님이 옮긴 그림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청어람미디어,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기쁜 일이 있을 적에 조용히 숲에 가서 벚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고 합니다. 기쁜 마음을 담아 나무를 심고 기쁜 웃음으로 나무를 보듬으면서 기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쓰다듬으며 나무에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6쪽)” 하는 모습처럼, 늘 나무한테 말을 걸면서 하루하루 가꾸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가이 말을 걸 때에 나무가 더 푸르게 자랍니다. 우리가 웃음 어린 손길로 쓰다듬을 때에 나무가 더 굵게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가 곁에서 노래하며 즐겁게 뛰놀고 일할 때에 나무가 잎을 찰랑이면서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꽃도 이와 같아요. 따사롭게 웃으며 바라보면 꽃은 더욱 곱습니다. 풀도 이와 같아요. 따스하게 웃으며 톡톡 끊으면 더욱 맛있습니다. 사람한테도 이와 같을 테지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 적에 싫을 수 있을까요?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할 적에 거북할 수 있을까요? 깔깔 웃으며 이야기꽃 피울 적에 못마땅할 수 있을까요?


  꼭 사월 오일에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우리 모두 언제나 나무를 심어요. 기쁜 일이 있으면 씨앗을 얻어 들과 숲에 뿌려요. 늦봄에 모내기를 하면서 하하호호 웃어요. 도시에 살더라도 시골로 봄일을 거들려고 찾아가요.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나와 살림을 꾸린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마다 싱그러운 바람과 햇볕을 누리면서 함께 일하러 마실을 가요.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섭니다. 빗방울이 또르르 구르는 풀잎을 바라봅니다. 빗방울을 머금는 꽃송이를 톡 건드립니다. 이 비가 그치고 둠벙이 늘거나 논마다 물이 고이면 개구리가 즐겁게 알을 낳겠지요. 개구리알은 곧 올챙이로 깨어나고, 올챙이는 씩씩하게 자라 개구리로 태어나겠지요. 새로 깨어난 개구리는 여름에 흐드러진 노래잔치 베풀겠지요.


  열여덟 살이 되어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물여덟이나 서른여덟 살에 비로소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흔여덟이나 쉰여덟 살에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을 가로지르면 무척 시원합니다. 자동차로 들길을 달려도 즐거울 테지만, 자전거로 숲길을 달리거나 두 다리로 마을길을 걸어도 즐겁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새로운 삶을 느끼고 싶어 먼 뱃길을 달립니다. 과자 한 점을 사먹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면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동무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험공부에서 며칠 홀가분하고, 어버이 품을 떠나 동무들끼리 지내면서 삶과 사랑과 살림에 새롭게 눈뜹니다. 삶을 사랑하는 하루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하루입니다. 삶을 가꾸는 하루입니다.


  그림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나이들어 몸져눕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하고 숲마실을 가고 싶으나, 할아버지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는 홀로 숲으로 가면서 생각합니다. “벚꽃 산의 벚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할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많은 벚꽃, 벚꽃, 벚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22쪽).”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아이 손을 잡고 숲을 돌아봅니다. 멋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잔치를 바라보며 빙긋 웃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이제부터 참말 아이는 할아버지하고 숲으로 올 수 없습니다. 혼자 숲으로 와야 하고, 혼자 나무한테 말을 걸어야 합니다. 혼자 풀놀이를 해야 하며, 혼자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아이는 한 살 두 살 먹으며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마음이 맞는 짝꿍을 만나 살림을 꾸립니다. 어른 두 사람은 사랑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가 자라 다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새롭게 짝꿍을 만나 살림을 꾸릴 테고, 곧 아이를 사랑으로 낳겠지요.


  할아버지는 이녁 할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아 숲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가꾸어 이녁 아이한테 다시 곱게 사랑을 물려줍니다. 숲은 수많은 아이와 할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아 오래오래 푸르게 빛납니다. 수많은 아이와 할아버지는 숲에서 푸른 바람을 즐겁게 받아마시면서 한결같이 아름다운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가 그친 땅에서 봄풀이 새롭게 돋습니다. 유채꽃이 노랗게 한들거리는 둘레에 모시풀이 올라오고 쑥줄기가 활짝 벌어집니다. 차가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은 몹시 춥습니다. 차가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어버이도 매우 춥습니다.


  삶이 흘러 새로운 삶이 찾아옵니다. 사랑이 흘러 새로운 사랑이 피어납니다. 이야기가 흘러 새로운 이야기가 자랍니다. 시든 풀잎으로 누렇던 겨울들이 새로 돋은 풀잎으로 새빛이 됩니다. 풀씨는 긴긴 겨울을 견디어 봄에 하나둘 깨어나며 흙을 어루만집니다. 아픈 이들 눈가를 쓰다듬는 풀싹이고, 슬픈 이들 손을 꼬옥 붙잡는 풀꽃입니다. 마당 한쪽에서 자라는 흰민들레 꽃송이에 입을 맞추며 비손합니다. 4347.4.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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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누구나 풀을 먹는다

 


  시골집이 아침부터 시끄럽습니다. 이웃 할배가 아침부터 기계를 들고 풀을 베기 때문입니다. 이웃마을 너머 골짜기에서 찻길을 넓힌다며 숲에 우거진 나무를 잔뜩 베기 때문입니다. 마을 곳곳에서 기계를 써서 풀을 베는 소리가 윙윙 울립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동안 이 시끄러운 소리에 새들이 모두 놀라 어디론지 숨습니다. 새가 숨으니 시골에서 새소리가 끊어집니다.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니, 골짜기에서도 숲짐승과 새가 모두 떠납니다. 숲에서 살던 짐승과 새도 모두 놀라겠지요. 놀랄 뿐 아니라 무섭고 두렵겠지요. 꽤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는 데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톱 소리가 우리 마을로 울려퍼집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어느 누구도 기계로 풀을 베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낫으로 풀을 베었습니다. 게다가 지난날에 풀을 벤 까닭은 소한테 먹이려는 뜻입니다. 또는, 나물로 삼으려고 호미로 캐거나 손으로 꺾거나 뜯었어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은 시골에서는 나물을 먹을 만한 ‘입’이 없습니다. 늙은 어른 두 사람이 나물밥만 먹더라도 도무지 이 많은 풀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늙은 어른 두 사람이 소를 건사하기란 어렵습니다. 소를 써서 논밭을 가는 시골이 거의 없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몸으로 소를 몰 수도 없습니다. 소를 내다 판다 하더라도 한두 마리 키워서는 돈이 안 맞습니다.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디로 가나 시골사람 스스로 풀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시골은 어디에서나 풀을 끔찍하게 여기고 손사래치며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이 쓴 《잡초의 재발견》(우물이 있는 집,2013)이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생물학자가 쓴 이 책은 1950년에 첫 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나오기는 했으나, 나올 적마다 거의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2013년에 새 옷을 입었는데, 요즈음은 얼마나 사랑받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은 “잡초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거나 바람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광물질과 영양분을 저장함으로써 다른 식물들이 그것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토양의 상태를 유지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학자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시골마을 ‘농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여길까요? 학자님은 “돌려짓기 농법에서 잡초는 토양이 경질층을 부수어 농작물 뿌리가 깊은 곳에서 양분을 흡수할 수 있게 한다. 잡초는 토양을 섬유화시켜서 비옥하게 만들며 그렇게 땅속의 동식물엑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흙과 풀을 지켜보고 살핀 끝에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농학을 가르치거나 살피는 교수와 학자는 어떻게 여길까요? 이런 생각을 하거나 이런 말을 들려주는 전문가나 지식인은 있을까요? 농협 일꾼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요? 농약 회사와 비료 회사 일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요즈음 으레 ‘채식’과 ‘육식’을 말합니다만, 오롯한 ‘고기먹기(육식)’란 없습니다. 소이든 돼지이든 풀을 즐겨먹거든요. 닭도 풀과 풀벌레를 즐겨먹어요.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기는 거의 다 ‘풀을 먹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풀짐승이 풀을 못 먹습니다. 풀짐승이 풀이 아닌 사료를 먹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고기 한 점을 장만하거나 밥집에 가서 고기를 시켜서 먹는다 할 적에 ‘풀을 먹고 살던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풀 아닌 사료와 항생제만 먹고 살아온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투성이입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풀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하고 ‘사료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가 맛이 다른 줄 알리라 생각합니다. 풀밭에서 풀이랑 풀벌레를 먹고 자란 닭하고 공장에서 잠을 못 자고 항생제와 사료만 먹고 자란 닭하고 맛이 얼마나 다른데요. 시골집에서 흙을 밟고 뛰놀던 닭 한 마리를 잡으면 어른 너덧 사람이 먹어도 푸짐할 만큼 살점이 나오는데, 맥주집에서 먹는 튀김닭 한 마리는 몇 사람이 어느 만큼 먹을 만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풀을 풀답게 가르치거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업고등학교’가 거의 모두 사라졌습니다. 흙살림을 가르치는 농업고등학교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대학입시에만 매달릴 뿐, 아이들이 스스로 텃밭을 일구도록 도울 생각이 없고, 학교급식도 학교텃밭에서 남새를 얻지 않아요. 도시내기는 도시에서만 살도록 하는 얼개요, 시골내기는 시골 떠나 도시로 가도록 하는 틀입니다.


  “자연은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완전한 책이었다(41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숲에서 책을 읽고,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서 삶을 읽으며 꿈을 키우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개구리와 풀벌레가 베푸는 노래잔치를 귀여겨듣는 이웃은 어디에 있나 궁금합니다.


  우리 시골집에서 도시로 마실을 갈 적에 시외버스는 여러 시간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러 시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서울로 가노라면, 고속도로 옆으로 펼쳐진 숲이나 멧자락을 보곤 합니다. 이때 어디에서나 ‘시멘트로 만든 물골’을 만납니다. 큰비가 내리면 빗물이 이 물골로 흘러내리도록 놓았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골이 있으면 멧자락이 무너지지 않거나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외려 이런 물골 때문에 멧자락이 무너지거나 흙이 쓸려 내려갑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요.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비가 퍼붓고 태풍이 지나가더라도 멧봉우리는 낮아지지 않습니다. 가랑잎이 지고 풀줄기가 삭으면서 새로운 흙이 되거든요. 나무뿌리와 풀뿌리가 흙을 단단히 붙잡기 때문에 어떤 빗물에도 좀처럼 흙이 쓸리지 않아요. 풀을 모조리 베고 나무를 함부로 베었다면? 이러면서 시멘트 물골을 낸다면?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잡초밭 안의 나무들이 바깥쪽의 나무들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수원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질비료 세례를 심하게 받았던 과수원의 토양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린 채로 버려져 있었다(61쪽).” 같은 이야기는 이웃 일본에서 ‘기적의 사과’를 거둔 할배가 보여주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국사람은 아직 하나도 못 깨달으며 풀을 죄 ‘잡초’로 여기며 때려죽이기만 합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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