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5 ‘-의’ 안 쓰려 애쓰다 보면



  어쩐지 갈수록 ‘나의’를 책이름에 넣는 분이 늘어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노래꽃(동시) 가운데 〈고향의 봄〉은 첫머리를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엽니다. 이원수 님하고 오랜 글벗인 이오덕 님은 “내가 살던 고향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짚었고, 이원수 님도 바꾸어야 맞다고 여기면서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익숙하게 쓰는데 어쩌지요?” 할 뿐, 스스로 바꾸지 못 하였습니다.


  잘 쓰든 잘못 쓰든, 입에 붙고 손에 붙은 말씨를 털기는 만만하지 않을 만합니다. 그런데 “익숙하니 못 바꾸겠다”고 여기면 앞으로도 잘못을 고스란히 퍼뜨리겠다는 뜻입니다. 총칼을 앞세워 우리나라로 쳐들어온 일본은 우리말·우리글을 짓밟으면서 일본말·일본글만 쓰도록 억눌렀어요. 때로 치면 1910∼1945년이라지만, 일본 총칼무리는 더 일찍 이 나라에 스며들었기에 마흔∼쉰 해에 걸쳐 일본말·일본글에 길들고 익숙했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뒤에도 일본말·일본글을 그대로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우리로서는 1945년 8월 15일이 ‘풀려남(해방)’이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뚝딱 씻거나 털었을까요? 아닙니다. 글바치는 1946년에도 1948년에도 “그동안 익숙하게 쓴 일본말·일본 한자말을 왜 나쁘다고 여기느냐?”고 따졌어요. 1953년에도 1960년에도 1975년에도 1985년에도 1990년에도 1994년에도 “일본 한자말을 굳이 털어내야 하지는 않잖은가?” 하고 되레 따졌지요. 2000년으로 넘어선 오늘날에는 일본말씨인지 일본 한자말인지 아예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림 속 나의 마을 → 그림으로 남은 마을 . 우리 마을을 그리다 . 우리 마을 그림

나의 외국어, 당신의 모국어 → 나는 바깥말, 그대는 겨레말 . 나는 이웃말, 너는 우리말

나의 두 사람 → 나와 두 사람 . 내 사랑 두 사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내가 디딘 문화유산 . 내가 본 문화유산 . 내가 찾은 문화유산 . 내가 만난 문화유산


  책이름에 스민 ‘나의’는 어떻게 손질하면 어울릴까요? 일본 글바치는 영어 ‘my’를 ‘私の’로 옮겼습니다.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온 뒤로 우리나라 글바치는 ‘私の’를 ‘나의’로 옮겨서 퍼뜨렸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익힙니다. 아이로서는 ‘넘어지기가 익숙하’니까 늘 넘어져야 할까요? 넘어지던 몸짓을 털어내고서 신나게 뛰고 달리고 걷는 새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일본말씨나 일본 한자말을 그냥 쓰는 말버릇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우리말을 등지는 버릇입니다. 우리는 우리말씨하고 우리 낱말이 있으니, 우리말씨를 살피고 우리 낱말을 헤아릴 노릇일 뿐입니다. 우리한테 우리말이 없으면 일본말이건 영어이건 받아들일 만합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아직 없는 말이 있으면, 우리 나름대로 생각을 기울여 처음으로 새로 지을 만합니다.


  모든 말은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이라면 말이 없어도 서로 알아볼 뿐 아니라 즐겁습니다. 마음이 맞든 안 맞든,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렷하게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소리에 얹어 나누면서 태어나는 말’입니다.


  글이란, ‘마음을 소리에 얹어 나누면서 태어난 말을 눈으로도 볼 수 있도록 담은 그림’입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글쓰느냐란, 어떻게 마음을 기울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나의 종이들 → 나와 종이 . 나랑 종이 . 내 곁에 종이 . 나를 스친 종이 . 내가 만진 종이 . 나한테 온 종이 . 내가 읽은 종이

나의 투쟁 → 나는 싸운다 . 나는 싸웠다 . 싸운 길 . 싸우다 . 우리 싸움 . 우리는 싸운다


  아무렇게나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여기는 분은 “되도록 ‘-의’를 안 쓰려고 애쓰”십니다. 애쓰기란 안 나쁩니다. 다만, 안 쓰려고 애쓰면 오히려 자꾸자꾸 ‘안 쓸 말씨’나 ‘안 쓰고 싶은 말씨’를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씨를 안 쓰겠다고 마음에 두기보다는, 스스로 새롭게 살려내면서 즐겁게 쓸 말씨에 마음을 기울이는 길이 그야말로 우리말·우리글을 북돋우리라 봅니다.


  글을 쓰면서 “‘-의’를 안 넣으려 노력하면” 오히려 자꾸 ‘-의’를 생각하느라 어느새 ‘-의’를 쓰고 맙니다. 그러니 굳이 애쓰지(노력하지) 않으시기를 바라요. 글자락에 ‘-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쳐다보느라 정작 글을 글답게 여미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어느 글을 쓰든 ‘다섯 살 어린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마음이자 눈빛’으로 서 보기를 바랍니다. 일터에서 글(보고서)을 내든, 글꽃(문학)을 여미려고 하든, 언제나 ‘다섯 살 어린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마음이자 눈빛’일 적에 그야말로 글결이 살아나면서 빛납니다.


나의 자전거 → 내 자전거 . 자전거 . 우리 자전거 . 짝꿍 자전거

나의 작은 집 → 이 작은 집 . 우리 작은 집 . 작은 집

나의 작은 헌책방 → 작은 헌책집 . 이 작은 헌책집 . 나와 작은 헌책집

나의 작은 화판 → 내 작은 그림판 . 작은 그림판 . 이 작은 그림판


  다섯 살 어린이하고 이야기하려는 마음이라면, 허튼 생각이나 어설픈 길이나 엉성한 마음을 글로 옮기지 않아요. 다섯 살 어린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라면, 일부러 어렵게 써야 할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글자랑을 부리지 않고, 글멋을 내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글을 어렵거나 딱딱하게 쓴다면, 자꾸 ‘의·적·화’ 같은 일본말씨에 젖어들거나 물들거나 길든다면, 바로 ‘누가 읽을 글’인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말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려는 마음이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일본말씨를 함부로 안 쓰겠지요. 더구나 어쭙잖게 치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장난도 안 할 테고요.


  글을 쓰지만 막상 ‘글’이 아닌 ‘보고서·리포트·논문·서류·양식·질의응답서·회신·PPT·자료……’처럼 자꾸 뭔가 이름을 따로 붙이면서 스스로 ‘높은 글’을 써야 한다고 여기기에 일본말씨나 옮김말씨(번역체)가 불거집니다. 보고서나 리포트나 논문을 쓸 적에도 다섯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면, 이 나라 배움길(학문)은 알뜰살뜰 빛나리라 봅니다.


나의 바람 → 나는 바란다 . 내가 바라는 . 내 꿈 . 바란다 . 꿈

나의 사과나무 → 내 능금나무 . 우리 능금나무 . 능금나무

나의 여름 → 여름 . 내가 누린 여름 . 여름을 살다 . 여름에 . 여름날 . 여름 이야기

나의 원피스 → 내 치마 . 내 한벌옷 . 내 꽃치마 . 내가 지은 옷 . 치마


  우리가 쓰는 글에서 ‘의·적·화’만 글에서 털어낸대서 끝나지 않습니다.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중국 한자말이 넘실거리고, 얄궂게 끌어들인 영어가 너울거립니다. 그러니 ‘다섯 살 어린이가 나한테서 말을 배우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결을 추스르듯 글결을 다독이면, ‘-의’도 ‘-적’도 ‘-화’도 처음부터 아예 쓸 일이나 까닭이 없습니다.


  ‘의·적·화’를 안 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의·적·화’를 더 생각하는 얼거리입니다. ‘의·적·화’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고, ‘우리가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나눌 즐거운 살림빛’에 온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면 넉넉하고, 이렇게 하면 말빛이 아름다이 피어납니다.


  우리 여름입니다. 우리 옷입니다. 우리 꿈입니다. 나와 두 사람입니다. 나랑 두 사람입니다. 나하고 두 사람입니다. 내가 지은 옷입니다. 내가 입는 옷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옷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으면 됩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면 됩니다. 서로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즐겁게 나아갈 생각을 스스로 짓고 나누기를 바랍니다. 바라기에 바람을 이루고, 가을바람처럼 봄바람처럼 싱그러이 어루만지는 숨결로 피어납니다.


  덧붙여 ‘바라다·바람’을 ‘바래다·바램’으로 틀리게 쓰는 분이 꽤 있더군요. 꿈을 그리듯 ‘바라다·바람’을 말로 풀어내지 않을 적에는 그만 ‘빛바래다·빛바램’으로 기울고 말아요. 빛바래는 마음이나 말이나 글이 아닌, 빛나는 바람을 담은 말이며 글을 누구나 살려쓰면서 활짝 웃고 노래하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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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2023.8.5.

말꽃삶 14 이해, 발달장애, 부모, 폭력



  요즈음 푸름이가 ‘저미다’라는 낱말을 모른다고 어느 이웃님이 푸념을 하시기에, ‘슬라이스’라는 영어가 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푸름이 스스로 부엌살림을 안 하기에 모를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부엌일을 하고 부엌살림을 익히면서 손수 밥살림을 헤아리는 나날이라면 ‘저미다’뿐 아니라 ‘다지다·빻다’가 어느 자리에서 쓰는 낱말인지 알게 마련이고, “가루가 곱다”처럼 쓰는 줄 알 만하고, “가늘게 썰다”처럼 써야 알맞은 줄 알 테지요.


  말은 늘 살림살이에서 비롯합니다. 살림살이란, 삶을 누리거나 가꾸려고 펴는 손길이 깃든 길입니다. 스스로 하루를 지으면서 누리거나 다루거나 펴는 살림·살림살이인 터라,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어버이나 어른 곁에서 함께 살림을 맡거나 소꿉놀이를 해보면서 말길을 열어요. 살림이 없이는 말이 없습니다. 살림을 짓고 나누고 익히고 펴는 사이에 저절로 말길을 뻗습니다.


  ‘고약하다’라는 오랜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으레 어른이 씁니다. 어린이나 푸름이가 쓸 일은 드뭅니다.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 사람을 가볍게 나무랄 적에 ‘고약하다’라는 낱말을 써요. “네가 떼를 쓰는 짓이 고약하단다”처럼 쓰는 말입니다. “철없이 함부로 꽃을 꺾거나 잠자리랑 나비를 괴롭히니까 고약하지”처럼 써요.


  또래나 동무나 동생을 들볶거나 때리거나 놀리는 짓도 ‘고약합’니다. 그래서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철든 어버이’나 ‘어진 어른’이 이따금 나무라면서 가볍게 들려주는 말씨인 ‘고약하다’를 들으면서 매무새를 다스려요.


 고약하다 곱다


  고약하지 않은 매무새란, 고운 매무새입니다. 곱지 않은 매무새란, 고약한 매무새예요. 찬찬히 철이 드는 길에 곱게 피어납니다. 철딱서니가 없이 굴기에 아직 고약합니다. 고약한 채 뒹굴면 그만 ‘고얀놈’ 소리를 듣는데, ‘고얀놈’이란 ‘고린(고리다·구리다)’ 틀에 사로잡힌 몸짓입니다.


  고약한 버릇에 고이기에 고립니다(구립니다). 고이지 않고 고르게 흐를 줄 알아야 ‘곱’지요.


  그렇다고 ‘고분고분’ 따라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철을 가릴 줄 알 적에 비로소 곱게 눈뜨면서 고요히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요. 곱게 고요히 피어나는 숨결이기에 철이 드는 어른으로 서고, 철을 제대로 살피거나 가누거나 다스리면서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오늘 하루를 누리고 나눕니다.


 느리다 느림보 느림꽃


  늦게 피는 꽃이 있습니다. 일찍 피는 꽃이 있어요. 곰곰이 보면 ‘늦꽃·이른꽃’이라기보다 ‘다 다른 꽃’입니다. 꽃은 그저 꽃이에요. 저마다 알맞게 피어날 철을 헤아려서 즐겁게 눈을 뜰 뿐입니다.


  둘레(사회)에서는 으레 ‘발달장애’ 같은 일본스런 한자말을 쓰더군요. 왜 어린이한테 ‘발달장애(또는 발달지연)’란 이름을 씌워야 할까요? 왜 어린이를 이런 눈으로 가두려 하나요? 다 다른 아이는 다 다르게 자랍니다. 아홉 살까지 엄마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열 살까지 이불에 오줌을 쌀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럴 뿐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동무나 동생을 때린다면, 자꾸 바보스러운 짓을 저지른다면, 이런 철없는 버릇을 따끔하게 나무라거나 부드러이 타이를 줄 알아야 어버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안 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본 짓’을 따라합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동무나 동생을 때리지 않아요. ‘때리는 몸짓이나 손짓’을 어디에선가 봤으니 따라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막말(욕)을 생각해 내어 쓰지 않습니다. 둘레에서 막말을 일삼으니까 잘 듣고서 따라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철없이 따라하거나 흉내내는 짓’을 본다면,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곧바로 다잡아야지요. 똑같은 말을 숱하게 되풀이하면서 차근차근 알려줄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잘못을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일’ 못지않게 ‘참하고 곱고 착한 몸짓하고 매무새’란 무엇인가를 어버이하고 어른이 먼저 보여줄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막말을 따라한다고 나무랄 수 있되, 우리 스스로 먼저 아무렇게나 아무 데서나 막말을 불쑥 내뱉지 않았는지 뉘우칠 노릇입니다. 또한 아이들한테 보여준 그림(영상과 영화)에 주먹질(폭력)하고 막말(욕)이 쉽게 흐르는데 그냥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뉘우쳐야지요.


  언뜻 보자면 ‘발달장애 = 느리다(느림보)’일 텐데, 이제는 눈길을 바꿀 만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느림꽃’으로 마주할 수 있어요. 어느 아이는 삼월꽃처럼 일찍 피어나고, 어느 아이는 칠월꽃처럼 느긋이 피어납니다. 모든 꽃이 굳이 삼월에 피어야 하지 않습니다. 칠월뿐 아니라 팔월에 피어도 되어요.


  우리가 먹는 쌀밥은 벼가 맺은 열매인 낟알입니다. 낟알을 얻으려면 나락꽃(벼꽃)이 펴야 하는데, 나락꽃은 팔월 한복판에 이르러야 맺습니다. 가만 보면 나락꽃은 ‘느림꽃(늦꽃)’일 테지만, 그저 ‘나락꽃’이라고만 이름을 붙여요.


 생각꽃 마음꽃


  아이를 낳았기에 ‘어버이(부모)’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바라보고 살펴보면서 즐겁고 착하고 참하면서 아름답게 물려받을 매무새에 살림을 가꾸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밥을 차려 주기에 어버이일 수 없어요. 옷을 갈아입히거나 일하여 돈을 벌기에 어버이라 하지 않습니다. ‘어른’도 매한가지예요. 나이만 먹고 몸집이 크기에 어른일 수 없습니다. ‘어진’ 사람이기에 어버이에 어른입니다. 어진 사람으로서 사랑을 아름답게 펴기에 어른이요, 이런 어른이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보금자리를 푸르게 가꾸면서 풀꽃나무를 고르게 품을 줄 알아서 어버이라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철마다 다르고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어른들은 철을 익히고 읽으면서 스스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어른이나 어버이란 이름이 어울리려면 ‘생각꽃’을 피워서 ‘생각씨앗’을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물려줄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어른하고 어버이 곁에서 ‘생각씨앗’을 물려받아서 새삼스레 가꾸고 돌보아 마음밭을 일구고 마음씨를 다스리기에 마음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마음씨 = 마음씨앗’입니다. ‘솜씨(손씨) = 손으로 짓는 씨앗’입니다. ‘말씨 = 말로 나누고 짓고 펴는 씨앗’입니다.


  잘 헤아릴 노릇입니다. 어른이란, 먼저 핀 꽃입니다. 어린이란, 나중 피는 꽃입니다. 어버이란, 앞장서서 피는 봄꽃입니다. 아이들이란, 느긋하게 함께 걸어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놀이하면서 즐거운 여름꽃에 가을꽃입니다.


 알다 읽다


  ‘이해(理解)’를 하려고 애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자말이기 때문에 안 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말 ‘알다’하고 ‘읽다’를 헤아리면서 스스로 철이 들고 어른스러울 줄 알 노릇이라고 봅니다. ‘알’에서 깨어나듯 눈뜨는 길이 ‘알다’입니다. 알차게 나아가려는 ‘알다’입니다. 물결이 일듯 온누리 ‘일’을 ‘익히’면서 차곡차곡 받아들이려고 하는 ‘읽다’입니다. 눈으로 슥 훑는대서 ‘읽다’이지 않아요. “일을 익히려는 길”인 ‘읽다’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른입니까? 우리는 어진 넋입니까? 우리는 어버이입니까? 우리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숲을 품는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지을 줄 아는 얼입니까? 우리는 말 한 마디에 마음마다 피어날 꽃씨를 심으면서 생각을 반짝반짝 일으킬 줄 압니까?


  아이가 둘레를 슬기로우면서 즐겁게 읽고서 스스로 꽃으로 피어나는 길을 앞장서서 보여줄 적에 어른이요 어버이입니다. 아이가 물려받거나 배울 만한 삶이나 살림이 없다면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그저 주먹질(폭력·아동학대)입니다. 주먹질이란, 주먹으로 때리는 짓이기도 하지만, 삶·살림·사랑을 못 보여주거나 안 가르치는 바보짓도 가리킵니다. 어린이한테 숲빛으로 사랑을 물려주지 않는 굴레살이도 ‘주먹질(아동학대·폭력)인 줄 깨달을 수 있으면, 우리나라는 아름답게 거듭날 만하리라 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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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3 전쟁용어 씨앗



  예부터 어른들은 비를 ‘비’라고 하면서 ‘비’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고 살피고 돌아보고 헤아리는 밑틀을 마련했습니다. 어린이 스스로 마음을 북돋우라는 뜻으로 삶·살림을 수수한 말씨로 담아서 살며시 들려주고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비를 바라보면 ‘빛납’니다. 빗방울마다 빛이 나요. 막상 빗방울을 손바닥에 얹으면 그저 물방울이지만, 구름에서 땅으로 내려오려고 하늘을 가를 적에는 ‘반짝이는 빛줄기’를 그립니다.


 바다랑 비


  바다가 있기에 비가 있습니다. 바닷물이 아지랑이라는 몸을 거쳐서 구름을 이루다가 빗방울로 이 땅에 드리웁니다. 이쯤은 어린배움터에서조차 가르칩니다만, ‘바닷물 = 아지랑이 = 구름 = 물방울 = 빗물’이라는 대목을 찬찬히 짚어서 ‘말’을 ‘마음’에 담도록 알리지는 못 한다고 느껴요.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울 적에 빛나는 빗방울을 받아 보면, ‘빈’ 물방울이곤 합니다. 바다에서 하늘로 아지랑이가 될 적부터 바닷방울(바다 물방울)은 몸을 비워요. 몸을 비워야 바다를 떠나 하늘로 오릅니다. 하늘로 오른 바닷방울은 가볍게 바람을 타다가 모이니 구름을 이뤄요. ‘구름’은 하늘에서 바람을 구르듯 다닌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구름 = 하늘을 구르는 물방울’이란 속뜻입니다.


  빛나고 빈 물방울인 ‘비·빗물·빗방울’인데, 이 비가 내리기에 들숲바다가 새롭게 푸르고 빛나요. 내릴 적에도 빛나고, 내려서도 빛내는 빗방울이에요. 촉촉히 적시는 구실을 하고, 뭍에 있는 모든 쓰레기를 쓸고 씻고 터는 구실까지 합니다.


  비가 훑은 하늘은 새파랗습니다. 비가 안 오면 매캐합니다. 이 하늘비를 바라본 옛사람은 ‘비(빗자루)’를 삼았어요. 빗물을 머금고 자란 싸리나무나 갈대를 꺾어서 찬찬히 묶으니 비(빗자루)가 태어납니다.


  우리 머리카락을 ‘빗질’을 하면 반드르르 빛납니다. 빗줄기가 하늘과 땅을 빗살로 쓸고 씻어서 반짝이는 새빛을 드리우듯, 머리빗으로 머리카락을 고르면, 머릿결이 빛나지요.


 빚다


  비·빗물·빗방울는 자잘한 것을 쓸고 치우면서 새터를 이룹니다. 이리하여 ‘비’를 바탕으로 ‘비 + 짓다(지음)’을 나타내는 ‘빚다’라는 낱말이 태어나요. ‘빚다’는 “물을 써서 반죽을 하여 꼴을 새로 이루다”를 나타낸다고 할 만합니다. ‘반죽’이란, 흙하고 물을 섞은 덩이예요. 물(빗물)이 있어야 새로 이뤄요.


  수수하게 쓰는 낱말 ‘비’입니다만, ‘빛·비다·빗·빗자루·빚다’가 얽힌 실타래를 엿봅니다. 여기에 ‘빚’도 생각할 만해요.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빚’이 있고, 누가 크게 도와서 얻은 빛(보람)을 ‘빚’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게릴라성 호우’라든지 ‘호우주의보’라든지 ‘우천·우비·우산·우수’라든지 일본말씨나 온갖 한자말이 떠돌고, ‘물폭탄’처럼 ‘비’를 깎아내리는 말씨가 나타나더니, ‘극한호우’라고 하는 끔찍한 말씨까지 나옵니다. 이처럼 삶도 숲도 마음도 푸른별도 등지거나 갉아먹는 말씨로는 ‘비’가 왜 비요, 비가 맡은 길을 읽거나 생각할 틈이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는 굴레(일제강점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웃나라가 놓은 굴레도 있지만, 한겨레 스스로 굴레(군사독재)로 가둔 적이 있어요. 이웃나라 굴레가 드리우기 앞서는 임금붙이(왕권)라는 굴레(조선 봉건사회)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굴레를 들여다보면, 힘꾼(권력자)은 힘말(한자·한문·일본말)로 사람들을 억눌렀어요. 요새는 조금은 날개(자유)를 찾았습니다만, 날개를 펄럭일 틈이 없이 영어가 새롭게 힘말(권력언어)로 춤춥니다.


  여러 굴레를 돌아보면, 모든 굴레마다 굴레말·사슬말이 함께 춤췄는데, 하나같이 싸움말(전쟁용어·군사용어)입니다. ‘게릴라성 호우’라는 말에 깃든 ‘게릴라’라든지, ‘물폭탄’이라는 말에 끼어든 ‘폭탄’을 봐요. 굴레말이자 싸움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저버리거나 이웃을 멀리하거나 사랑을 잊어버리도록 내모는 사나운 말씨예요.


  전쟁용어가 일상용어가 되면?


  오늘날 둘레를 보면 “전쟁용어가 일상용어가 되었”습니다. 옷을 두툼하게 입는 몸짓을 ‘완전무장’이라 하더군요. 마음이 사르르 녹을 적에 ‘무장해제’라고 해요. 못생긴 사람을 ‘지뢰’라 일컫기에 소름이 돋아요. 사람을 얼굴로 갈라치는 말씨도 사납지만, ‘꽝(지뢰)’이 터질 적에 얼마나 끔찍한가를 우리 스스로 너무 모르거나 잊어버렸구나 싶더군요.


  싸움말을 삶자리에서 마구 쓸 적에, 이 나라(정부)는 매우 반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싸움말을 삶말로 받아들이면, 사람들 스스로 “우리 넋과 마음을 ‘싸움팔이(정부 군수산업 육성)’를 뒷받침하고 넓히는 씨앗”을 심는 셈이거든요. 아무 말이나 쏘아댄다고 할 적에 ‘총질’이라고 말한다면, 또 ‘속으로 곪은 잘못’을 밝히는 사람더러 ‘내부 총질’이라며 손가락질을 한다면, 이런 말씨 하나가 ‘싸움팔이’를 키우는 끔찍한 씨앗으로 번집니다.


 씨앗공·씨앗구슬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얼추 1970년 무렵부터, 또는 1960년 즈음부터, ‘씨앗공’이라고 해서, 흙을 동글게 빚고 속에 씨앗을 놓고서 모래벌(사막)에 뿌리는 흙살림길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에서 왜 이런 흙살림길을 헤아렸는지는 어렵잖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스스로 저지른 싸움수렁에서 무너질 즈음 ‘벼락꽝(핵폭탄)’을 맞아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어요. 쑥대밭을 살리려고 참으로 숱한 사람들이 흙살림을 슬기롭게 여미려 했습니다. 이런 몸부림 가운데 하나가 ‘씨앗공’입니다.


  메마른 벌판을 천천히 풀숲으로 바꾸는 일에 이바지하는 씨앗공이에요. 이 씨앗공은 일본을 비롯해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널리 받아들였습니다. 씨앗을 ‘촉촉흙’에 감싸 놓기만 해도, 씨앗 스스로 기운을 내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거든요.


  그런데 이 씨앗공으로 벌판(사막)을 북돋우려는 흙길을 우리나라에도 받아들이려는 분들이 그만 ‘씨앗폭탄’이란 말을 함부로 퍼뜨립니다. ‘씨앗폭탄’이란 말을 마구 쓰는 분들은 ‘게릴라 가드닝’까지 하더군요.


  아주 끔찍합니다. 우리는 ‘폭탄’도 ‘게릴라’도 ‘전쟁’도 ‘독재’도 걷어내야 할 텐데요. 우리가 나아갈 곳은 숲일 테니 ‘숲말’을 생각하고 ‘살림말’을 나누면서 ‘사랑말’이 흐드러진 ‘사랑누리·숲누리·살림누리’를 이룰 일입니다.


  끔찍하고 사나운 미움씨앗으로 나아가는 죽음말 가운데 하나인 ‘씨앗폭탄(seedbomb)’입니다. 이런 죽음말·싸움말·미움말을 어린이한테 써서도 안 되지만, 어른끼리도 안 쓸 노릇입니다. ‘씨앗폭탄·물폭탄’처럼 바보스런 말씨를 치워내는 철든 어른으로 일어설 노릇입니다.


  씨앗공은 ‘씨앗구슬’이라 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눈을 뜨고 마음을 틔워 생각을 열 적에 비로소 온누리에 사랑이 싹틉니다.


 폭탄세일


  ‘물폭탄’이란 말씨는, 온누리를 씻어 주면서 들숲마을에 싱그러이 샘물을 대어 가뭄을 씻는 빗물을 나쁘게 바라보거나 멀리하도록 내몹니다. 이 죽음말은 어느새 곳곳에 번지니, ‘폭탄세일’이란 말씨로도 퍼집니다.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땅도 죽이고 푸른별도 죽이는 끔찍한 ‘꽝(폭탄)’을 마치 ‘죽임짓·죽임길’이 아닌 듯 덮어씌우는 노릇을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총칼(전쟁무기)을 여느 삶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바라보도록 내몰아요. ‘폭탄세일’ 같은 말씨를 우리가 스스럼없이 쓰고 듣고 입으로까지 말하면, 나라(정부)는 아무렇지 않게 ‘총칼 만들기(전쟁무기 개발)’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습니다.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간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에 쏘아대는 ‘꽝(폭탄·미사일)’은 하나에 1000억 원이 넘어가기도 하고, 웬만한 ‘꽝’은 아무리 값싸더라도 1∼10억 원이나 하게 마련이고, 이 비싼 ‘꽝’을 만들거나 건사하거나 다루는 일꾼(군인)을 두느라 또 어마어마하게 돈을 쓰지요. 살림 아닌 죽임으로 치닫는 데에 끔찍하도록 목돈을 쏟아붓는데, ‘폭탄세일’ 같은 말씨는 바로 이런 짓을 우리 스스로 무디게 바라보도록 길들이기도 합니다.


  둘레에 널리 퍼뜨리려는 뜻이라면 ‘퍼뜨리다’라는 낱말을 쓸 일입니다. 확 퍼뜨리려는 뜻이라면 ‘확’이라는 낱말을 쓸 일입니다. 꿈씨앗을 심으려 한다면 ‘꿈씨앗’이라는 낱말을 쓸 일입니다. 다른 낱말로 어느 일을 빗대려 할 적에는 ‘빗댐말’에 얄궂은 결이 있는지 살펴야 하고, 살림 아닌 죽음을 감추거나 숨기지는 않나 돌아볼 일입니다. 어린이한테 ‘장난감 총칼’이나 ‘물총’을 사주는 일조차 ‘작은 싸움놀이(전쟁놀이) 씨앗’입니다. 총칼을 다루는 짓은 ‘놀이’일 수 없습니다. 총칼이란 죽임짓이니까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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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2 밥꽃에 잘 먹이는



  ‘이기적(利己的)’은 우리말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저만 아는·나만 아는”이요, ‘나먼저·나부터’이고, ‘제멋대로·멋대로’라 할 만합니다. 이런 우리말을 바탕으로 ‘속좁다·얌체’라든지 ‘좁다·얕다’로 나타낼 만하고, ‘눈멀다·덜먹다’나 ‘어리석다·철없다’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본스런 한자말 ‘이기적’이나 ‘이기주의’가 이런 여러 우리말 뜻이나 결을 품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온갖 우리말을 알맞게 쓰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잊으면서 잃었다는 얘기입니다.


  처음부터 대뜸 “넌 어리석어!”나 “그대는 철이 없군요!”라 하면 얼핏 ‘이기·이기적·이기주의’하고 먼 듯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쉽고 바탕이라 할 “저만 아는”부터 차근차근 뜻을 짚으면서 말결을 이어가노라면 ‘어리석다·철없다’뿐 아니라, ‘밉다·샘바르다’로도 나아가고, ‘괘씸하다·건방지다·고약하다’로도 흘러요. 때로는 ‘길미꾼·깍쟁이’ 같은 말이 어울립니다.


  어른이 어른스럽게 아이 곁에서 말을 들려주면서 북돋울 적에는 한꺼번에 다 알려주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가지를 먼저 들려줍니다. 이다음에는‘이 한 가지 말’하고 비슷하지만 결이나 뜻이 살짝 다른 ‘두어 가지 말’을 들려주고, 차츰 가지를 뻗으면서 말나무를 살찌워요.


  말은 외워서 못 씁니다. 말은 살아가면서 씁니다. 말을 억지로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말은 ‘학습도구’가 아닙니다. 말은 서로 생각을 나누는 길에 이바지하는 씨앗입니다. ‘생각씨앗’인 말이요, ‘생각나무’로 뻗는 말입니다.


 영양만점·영양보충


  국립국어원 낱말책에조차 안 실은 일본스런 한자말 ‘영양만점·영양보충’을 짚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먼먼 옛날부터 아예 안 썼습니다. 이 말씨는 일본이 우리나라로 쳐들어와서 다스린 때부터 조금씩 쓰다가 어느새 확 퍼졌어요.


 영양만점 샐러드를 준비했다 → 맛찬 풀무침을 차렸다

 영양만점의 아침식사를 통해 → 맛진 아침을 먹으며

 영양만점의 요리를 만들어 → 맛밥을 차려 / 멋밥을 지어

 영양만점의 식단을 구성한다 → 맛깔진 밥차림을 한다


  “영양(營養)이 만점(滿點)이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몸에 이바지를 한다는 뜻일 텐데, 예부터 쓴 우리말을 돌아본다면, 수수하게 ‘좋다·뛰어나다·빼어나다·훌륭하다’라고 하겠습니다. 앞말 ‘영양’은 군더더기입니다.


  오늘날에는 더 잘게 나누어 나타낼 수 있고, 넓거나 깊게 파고들어 그릴 수 있습니다. 이럴 적에는 새말을 엮습니다. 이를테면 ‘맛꽃·맛밥·멋밥’처럼 엮을 수 있어요. 흔히 쓰는 ‘맛나다·맛있다·맛좋다’에 새뜻을 얹을 수 있고요. ‘맛깔나다·맛깔스럽다·맛깔지다’를 함께 쓸 만하지요. ‘맛지다·맛차다’를 나란히 써도 어울립니다.


  새롭게 나타내고 싶기에 새말을 엮을 수 있고, 예부터 쓰던 말에 새뜻을 보탤 수 있습니다. 또는 이 둘을 다 해보아도 되어요.


 아무래도 영양보충이 필요하다 → 아무래도 잘 먹여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영양보충이 필요하니까 → 푸른철에는 살찌워야 하니까


  우리는 예부터 “영양(營養)을 보충(補充)하다”가 아닌, “잘 먹다”나 “잘 먹이다”라 말했습니다. 흔히 쓰는 말을 널리 쓰면 어울립니다. 잘 먹거나 잘 먹인다고 할 적에는 ‘살린다’는 얘기이기에 ‘살리다·살찌우다·기름지다’를 쓸 만합니다.


  몸에 힘이 나도록 잘 먹이려는 길이니 ‘챙기다·챙겨먹다’나  ‘추스르다·높이다·올리다·끌어올리다’ 같은 낱말로 나타내어도 어울립니다.


내가 너한테 영양만점 메뚜기 수프를 끓여 줄게

→ 내가 너한테 메뚜기국을 맛나게 끓여 줄게

→ 내가 너한테 메뚜기국을 맛깔스레 끓여 줄게


  어떤 밥이든 맛나게 차리면 됩니다. 어떤 국이든 맛깔스레 끓일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잊으면 밥을 먹으면서 정작 ‘밥’이라는 낱말을 잊더군요.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는 영양만점의 음식이다

→ 한 끼로 훌륭하다

→ 끼니로 좋다

→ 맛찬 밥이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맞추어 먹는 밥을 ‘끼·끼니’라는 낱말로 가리킵니다. ‘밥’을 한자말로 ‘식사·음식’으로 나타내는 분이 있는데, 보기글처럼 “한 끼 식사”처럼 쓰거나 글자락 끝에 ‘음식’을 보태면 얄궂습니다. 겹말조차 아닌 겹겹말입니다. 한자말을 쓰더라도 ‘식사·음식’이 겹치고, “손색이 없는·영양만점의”가 겹칩니다. 단출히 “한 끼로 훌륭하다”나 “한 끼니로 알차다”라 하면 됩니다. “맛찬 밥이다”나 “맛깔진 밥이다”라 해도 되어요.


  글을 곱게 여미어 나누기에 ‘글꽃’입니다. ‘문학’이란 글꽃입니다. 말을 찬찬히 여미어 담기에 ‘말꽃’입니다. ‘사전’이란 말꽃입니다. 밥을 알차게 지어 누리기에 ‘밥꽃’입니다. ‘요리·식사’뿐 아니라 ‘영양·풍미’나 ‘레시피·조리법’이나 ‘미감·구미·식감’ 같은 일본스런 한자말을 우리말 ‘밥꽃’으로 품어낼 만합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라면, 어른으로서 어린이가 잘 살려서 쓸 말을 가다듬고 추스르고 갈무리하고 북돋우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흔하고 쉬운 말씨 하나부터입니다. 놀랍거나 대단한 말씨가 아닌, 누구나 여느삶에서 단출하게 쓰고 듣고 나누는 말씨에 마음씨를 담아서 꽃씨처럼 고이 심을 수 있기를 바라요. 씨앗일 말 한 마디입니다. 말재주나 글재주를 부리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가꾸고 돌보는 손길을 빛내면, 시나브로 ‘솜씨’를 이룹니다.


 밥나눔터


  둘레를 보면 ‘무료급식소·무상급식소’처럼 한자로 엮어서 이름을 붙이기 일쑤입니다. 누구나 기꺼이 맞아들여서 밥 한 그릇을 나누는 곳이라면, 이러한 뜻이며 결을 그대로 살려서 ‘밥 + 나누다 + 터’ 얼개로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다니는 배움터에서는 “밥을 누리는 터”라는 뜻을 담아서 ‘밥누리터’처럼 살짝 다르게 새말을 지을 만합니다.


  많이 먹으려고 하거나, 맛난 밥을 찾는다면 ‘밥샘’처럼 새말을 엮을 수 있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찾아온 사람은 ‘밥손’이라 하면 됩니다.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집을 누리는 길은 ‘의식주’보다는 ‘밥옷집·옷밥집·집밥옷’처럼 수수하고 쉽게 여밀 만합니다. 밥을 먹고 남은 것이라면 ‘음식물쓰레기’보다는 ‘밥쓰레기·밥찌꺼기·밥찌끼’라 하면 한결 나아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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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1 다른 다양성



  겉으로 치레하는 사람을 보면 ‘겉치레’라고 얘기합니다. 멋을 부리려는 사람한테는 ‘멋부린다’고 들려줍니다. 겉치레나 멋부리기에 얽매이는 사람을 마주하면 ‘허울’을 붙잡는다고 짚습니다.


  우리말 ‘허·하’는 말밑이 같습니다. 그러나 말밑은 같되 낱말이나 말결이나 말뜻은 다르지요. ‘허울·허전하다·허름하다·허접하다’하고 ‘허허바다’는 확 달라요. ‘하늘·함께·한바탕·함박웃음·함함하다·하나’는 더욱 다르고요.


  겉모습을 매만지려 하기에 그만 ‘허울스럽다’고 한다면, 속빛을 가꾸려 하기에 저절로 ‘하늘같다’고 할 만합니다. 이처럼 ‘허울·하늘(한울)’이라는 수수하고 쉬우며 오랜 우리말을 나란히 놓고서 삶을 바라보는 눈썰미를 돌보기에 ‘생각’이 자라납니다. 굳이 일본스런 한자말을 따서 ‘철학’을 안 해도 되고 ‘전문용어’를 쓸 까닭이 없습니다.


  ‘전문용어’를 쓸수록 생각이 솟지 않아요. ‘전문용어 = 굴레말·사슬말’입니다. 가두거나 좁히는 말씨입니다. 오늘날 숱한 ‘전문용어’는 거의 다 일본 한자말이거나 영어예요. 우리말로는 깊말(전문용어)을 짓거나 엮거나 펴려는 분이 뜻밖에 매우 드뭅니다.


  ‘허울·하늘’을 왜 삶말이자 깊말로 다루지 않을까요? 곰곰이 보면 “다루지 않는다”가 아니라 “다룰 줄 모른다”입니다. 무늬는 한글인 우리말을 쓰지만, 정작 속으로 하늘빛을 품는 수수하고 쉬우며 오랜 우리말을 모르기에 못 써요. ‘허울’이 왜 ‘허울’이고, ‘하늘’이 ‘하늘’이며, 두 낱말은 어떻게 비슷하면서 다르게 얽히고 같은 말밑인가를 찬찬히 짚어서 안다면, 이러한 ‘삶말’로 생각을 지피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한자말이나 영어를 쓰기에 잘못이지 않고,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말을 쓰든 한자말이나 영어를 쓰든, 말뜻을 찬찬히 안 짚거나 못 가눌 적에 얄궂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말 ‘다르다’를 한자말로는 ‘이상·수상·다양·차이·차별·특별·특수’로 옮겨서 쓰는 오늘날인데, 한자말 ‘이상·수상·다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대로 짚는 분은 참으로 적습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

이상(異狀) : 1. 평소와는 다른 상태 ≒ 별상 2. 서로 다른 모양

이상(異相) : 1. 보통과는 다른 인상이나 모양

이상(異常) : 1. 정상적인 상태와 다름 2.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름 3.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음

수상(殊狀) : 1. 여느 것과 다른 모양 2. 기이한 형상

수상(殊常) : 보통과는 달리 이상하여 의심스러움

다양(多樣) : 여러 가지 모양이나 양식

차이(差異) :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차별(差別) :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

특별(特別) :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특단

특수(特殊) : 1. 특별히 다름 2. 어떤 종류 전체에 걸치지 아니하고 부분에 한정됨 3. 평균적인 것을 넘음


  우리말 ‘다르다’는 ‘닮다·담다·닿다’하고 비슷하되 다릅니다. ‘닮다 = 같지 않지만 같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같아 보인다 = 다르다”는 이야기예요. ‘다르다’라 할 적에는 ‘너·나’로 가르거나 나눈다는 뜻이고, ‘닮다’라 할 적에는, 서로 가르거나 나누는  ‘너·나’이지만 자리에 따라 ‘나·너’요 숨결이 흐르는 사람이라는 대목에서는 같다는 뜻입니다. 또한 ‘담다’라 하면, 서로 비슷하거나 같다고 여길 만한 모습이나 결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닮거나 담는다고 해서 ‘같을’ 수 없어요. 닮거나 담으면 ‘다를’ 뿐입니다.


  닮거나 담기에 ‘닿는다’고 여길 모습이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닿으’려고 합니다. 서로 닿아서 ‘만남’을 이루니 ‘마음’이 자라서 ‘말’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닿다’는 ‘다다르다’하고 비슷하되 다릅니다. 재미난 말이지요. “다 닿았다”고 여길 수 있으면서 “다 다르다”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르게 있기에 ‘담’을 쌓아요. 우리로 아우르려 하기에 ‘울(울타리)’을 쌓지요. 달라서 가르려는 ‘담’이고, 안으면서 품는 ‘울’입니다. 그래서 ‘울 = 우리 = 너나하나’이기도 한데, ‘울·우리’를 사랑이 아닌 마음으로 쌓을 적에는 남남으로 갈려 서로 놈으로 손가락질하거나 등지기에 ‘가두리·짐승우리’ 같은 결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때와 곳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삶과 살림에 따라 다르고, 철과 눈빛에 따라 다른 말을 마음에 담아서 나누기에 생각이 자랍니다. 다른 줄 알아보기에 담아내려는 마음이 자라고, 담다 보니 닮기도 하지만, 서로 다다를 곳은 다릅니다.


  어느 책을 읽다가 다음 같은 글자락을 보았습니다. 이 글자락은 ‘다양’이라는 한자말을 제대로 못 가누었구나 싶습니다. 보기글을 손질해 보겠습니다.


[보기글]

“왜 다양성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야?” “원래 다양성이 있으면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법이야.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긴 하지.” “편하지도 않은데 왜 다양성이 좋다고 하는 거야?”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되니까.”


[숲노래 손질글]

“왜 다 다르면 귀찮은 일이 생겨?” “모든 사람은 달라. 그래서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르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지. 너랑 내가 달라서 서로 다르게 움직일 적에 귀찮을 수 있을까? 나는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고 너는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나면 귀찮을까? 아닐 테지? 우리는 다 달라서 서로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를 가만히 보면서 우리 스스로 새롭게 돌아보면서 즐거울 수 있어. 다 다르지 않다면 생각이 사라지지. 생각이 사라지면 남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고, 이러면 우리 삶이 사라져.”


  낱말만 손질하지 않고 ‘뜻·줄거리’까지 손질했습니다. ‘다 다르지 않아야 수월하다’고 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월하게만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고 여길 수 없기도 합니다.


  너랑 나는 몸도 힘도 다른데 발걸음을 똑같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알아듣기 수월하게 말할 적에 어리석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일은 어려워야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즐겁게 하면서 함께 웃고 노래합니다. 다 다른 사람과 다 다른 발걸음과 다 다른 매무새랑 몸짓은 서로 다른 줄 느끼면서 새롭고 즐겁구나 하고 이 삶을 깨닫는 길입니다.


  총칼로 사람들을 억누르던 지난날에는 중국집 같은 데에서 ‘주문 통일!’을 윽박지르곤 했습니다. 똑같은 밥을 시켜서 빨리 나오도록 하고, 빨리 먹고 나가자는 굴레이지요. 적잖은 배움터는 배움옷(교복)을 똑같이 입히고, 머리카락 길이까지 똑같이 자르려 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을 모두 똑같이 틀에 박아 놓는데, 이러다 보니 ‘다 다른 아이를 알아볼 길이 없’어서 ‘셈(숫자·번호)’을 붙여요. 다 다른 아이는 다 다른 이름이 있으나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부르는 끔찍한 사슬터(감옥)가 배움터(학교)였습니다. 사람이름이 아닌 ‘1번·2번·3번……’처럼 부르는 곳에는 어깨동무(평화)도 사랑도 없습니다.


  다 다르게 쓰는 말이란, 다 다르게 보는 눈이고, 다 다르게 살아가는 길이며, 다 다르게 꿈꾸는 사랑이고, 다 다르게 짓는 오늘입니다. 고장마다 고장말이 다르니, 서로 이웃으로 사귀고 만납니다. 아이어른이 서로 다르니, 저마다 다른 힘에 맞추어 저마다 즐겁게 살림을 하고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우리는 ‘다양성’으로 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상’하지 않고 ‘수상’하지 않으며 ‘특수·특이·특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저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가운데에는 ‘유난하다’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 ‘유난’이라는 우리말은 ‘윤슬’하고 맞물립니다. ‘유들유들’이라고도 하고, ‘반짝이는 결’을 가리키는 ‘유’라는 말밑이에요.


  반짝인다고 할 적에는 ‘돋보이다·도드라지다’이고, ‘돋다’처럼 새롭게 나오는 몸짓이라서 ‘유난’합니다. 이런 결을 담아 반짝이는 물살이라서 ‘윤슬’입니다. 윤슬도 이슬도 구슬도 ‘다른 빛’이기에 서로 다른 숨결을 담으면서 반짝이고 사랑스럽습니다. 다르게 반짝이는 빛을 마음에 품으며 철이 드는 사람은 ‘슬기’로운 길을 갈 테고, 이때에는 ‘어른’으로 큽니다.


  어른은,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윤슬처럼 반짝이고 다 다른 빛살을 어질게 품어서 스스로 철을 알아차린, 빛으로 깨달은 마음결로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다 다른 줄 알기에 ‘어른’이자 ‘철듦’이요, ‘슬기’이자 ‘어짊’이니, 스스로 다르게 아우르면서 하늘빛을 품는 ‘우리’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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