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2023.8.5.
말꽃삶 14 이해, 발달장애, 부모, 폭력
요즈음 푸름이가 ‘저미다’라는 낱말을 모른다고 어느 이웃님이 푸념을 하시기에, ‘슬라이스’라는 영어가 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푸름이 스스로 부엌살림을 안 하기에 모를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부엌일을 하고 부엌살림을 익히면서 손수 밥살림을 헤아리는 나날이라면 ‘저미다’뿐 아니라 ‘다지다·빻다’가 어느 자리에서 쓰는 낱말인지 알게 마련이고, “가루가 곱다”처럼 쓰는 줄 알 만하고, “가늘게 썰다”처럼 써야 알맞은 줄 알 테지요.
말은 늘 살림살이에서 비롯합니다. 살림살이란, 삶을 누리거나 가꾸려고 펴는 손길이 깃든 길입니다. 스스로 하루를 지으면서 누리거나 다루거나 펴는 살림·살림살이인 터라,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어버이나 어른 곁에서 함께 살림을 맡거나 소꿉놀이를 해보면서 말길을 열어요. 살림이 없이는 말이 없습니다. 살림을 짓고 나누고 익히고 펴는 사이에 저절로 말길을 뻗습니다.
‘고약하다’라는 오랜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으레 어른이 씁니다. 어린이나 푸름이가 쓸 일은 드뭅니다.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 사람을 가볍게 나무랄 적에 ‘고약하다’라는 낱말을 써요. “네가 떼를 쓰는 짓이 고약하단다”처럼 쓰는 말입니다. “철없이 함부로 꽃을 꺾거나 잠자리랑 나비를 괴롭히니까 고약하지”처럼 써요.
또래나 동무나 동생을 들볶거나 때리거나 놀리는 짓도 ‘고약합’니다. 그래서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철든 어버이’나 ‘어진 어른’이 이따금 나무라면서 가볍게 들려주는 말씨인 ‘고약하다’를 들으면서 매무새를 다스려요.
고약하다 곱다
고약하지 않은 매무새란, 고운 매무새입니다. 곱지 않은 매무새란, 고약한 매무새예요. 찬찬히 철이 드는 길에 곱게 피어납니다. 철딱서니가 없이 굴기에 아직 고약합니다. 고약한 채 뒹굴면 그만 ‘고얀놈’ 소리를 듣는데, ‘고얀놈’이란 ‘고린(고리다·구리다)’ 틀에 사로잡힌 몸짓입니다.
고약한 버릇에 고이기에 고립니다(구립니다). 고이지 않고 고르게 흐를 줄 알아야 ‘곱’지요.
그렇다고 ‘고분고분’ 따라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철을 가릴 줄 알 적에 비로소 곱게 눈뜨면서 고요히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요. 곱게 고요히 피어나는 숨결이기에 철이 드는 어른으로 서고, 철을 제대로 살피거나 가누거나 다스리면서 사랑으로 살림을 짓는 오늘 하루를 누리고 나눕니다.
느리다 느림보 느림꽃
늦게 피는 꽃이 있습니다. 일찍 피는 꽃이 있어요. 곰곰이 보면 ‘늦꽃·이른꽃’이라기보다 ‘다 다른 꽃’입니다. 꽃은 그저 꽃이에요. 저마다 알맞게 피어날 철을 헤아려서 즐겁게 눈을 뜰 뿐입니다.
둘레(사회)에서는 으레 ‘발달장애’ 같은 일본스런 한자말을 쓰더군요. 왜 어린이한테 ‘발달장애(또는 발달지연)’란 이름을 씌워야 할까요? 왜 어린이를 이런 눈으로 가두려 하나요? 다 다른 아이는 다 다르게 자랍니다. 아홉 살까지 엄마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열 살까지 이불에 오줌을 쌀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럴 뿐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동무나 동생을 때린다면, 자꾸 바보스러운 짓을 저지른다면, 이런 철없는 버릇을 따끔하게 나무라거나 부드러이 타이를 줄 알아야 어버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안 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본 짓’을 따라합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동무나 동생을 때리지 않아요. ‘때리는 몸짓이나 손짓’을 어디에선가 봤으니 따라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막말(욕)을 생각해 내어 쓰지 않습니다. 둘레에서 막말을 일삼으니까 잘 듣고서 따라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철없이 따라하거나 흉내내는 짓’을 본다면,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곧바로 다잡아야지요. 똑같은 말을 숱하게 되풀이하면서 차근차근 알려줄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잘못을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일’ 못지않게 ‘참하고 곱고 착한 몸짓하고 매무새’란 무엇인가를 어버이하고 어른이 먼저 보여줄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막말을 따라한다고 나무랄 수 있되, 우리 스스로 먼저 아무렇게나 아무 데서나 막말을 불쑥 내뱉지 않았는지 뉘우칠 노릇입니다. 또한 아이들한테 보여준 그림(영상과 영화)에 주먹질(폭력)하고 막말(욕)이 쉽게 흐르는데 그냥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뉘우쳐야지요.
언뜻 보자면 ‘발달장애 = 느리다(느림보)’일 텐데, 이제는 눈길을 바꿀 만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느림꽃’으로 마주할 수 있어요. 어느 아이는 삼월꽃처럼 일찍 피어나고, 어느 아이는 칠월꽃처럼 느긋이 피어납니다. 모든 꽃이 굳이 삼월에 피어야 하지 않습니다. 칠월뿐 아니라 팔월에 피어도 되어요.
우리가 먹는 쌀밥은 벼가 맺은 열매인 낟알입니다. 낟알을 얻으려면 나락꽃(벼꽃)이 펴야 하는데, 나락꽃은 팔월 한복판에 이르러야 맺습니다. 가만 보면 나락꽃은 ‘느림꽃(늦꽃)’일 테지만, 그저 ‘나락꽃’이라고만 이름을 붙여요.
생각꽃 마음꽃
아이를 낳았기에 ‘어버이(부모)’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바라보고 살펴보면서 즐겁고 착하고 참하면서 아름답게 물려받을 매무새에 살림을 가꾸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밥을 차려 주기에 어버이일 수 없어요. 옷을 갈아입히거나 일하여 돈을 벌기에 어버이라 하지 않습니다. ‘어른’도 매한가지예요. 나이만 먹고 몸집이 크기에 어른일 수 없습니다. ‘어진’ 사람이기에 어버이에 어른입니다. 어진 사람으로서 사랑을 아름답게 펴기에 어른이요, 이런 어른이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보금자리를 푸르게 가꾸면서 풀꽃나무를 고르게 품을 줄 알아서 어버이라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철마다 다르고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어른들은 철을 익히고 읽으면서 스스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어른이나 어버이란 이름이 어울리려면 ‘생각꽃’을 피워서 ‘생각씨앗’을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물려줄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어른하고 어버이 곁에서 ‘생각씨앗’을 물려받아서 새삼스레 가꾸고 돌보아 마음밭을 일구고 마음씨를 다스리기에 마음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마음씨 = 마음씨앗’입니다. ‘솜씨(손씨) = 손으로 짓는 씨앗’입니다. ‘말씨 = 말로 나누고 짓고 펴는 씨앗’입니다.
잘 헤아릴 노릇입니다. 어른이란, 먼저 핀 꽃입니다. 어린이란, 나중 피는 꽃입니다. 어버이란, 앞장서서 피는 봄꽃입니다. 아이들이란, 느긋하게 함께 걸어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놀이하면서 즐거운 여름꽃에 가을꽃입니다.
알다 읽다
‘이해(理解)’를 하려고 애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자말이기 때문에 안 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말 ‘알다’하고 ‘읽다’를 헤아리면서 스스로 철이 들고 어른스러울 줄 알 노릇이라고 봅니다. ‘알’에서 깨어나듯 눈뜨는 길이 ‘알다’입니다. 알차게 나아가려는 ‘알다’입니다. 물결이 일듯 온누리 ‘일’을 ‘익히’면서 차곡차곡 받아들이려고 하는 ‘읽다’입니다. 눈으로 슥 훑는대서 ‘읽다’이지 않아요. “일을 익히려는 길”인 ‘읽다’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른입니까? 우리는 어진 넋입니까? 우리는 어버이입니까? 우리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숲을 품는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지을 줄 아는 얼입니까? 우리는 말 한 마디에 마음마다 피어날 꽃씨를 심으면서 생각을 반짝반짝 일으킬 줄 압니까?
아이가 둘레를 슬기로우면서 즐겁게 읽고서 스스로 꽃으로 피어나는 길을 앞장서서 보여줄 적에 어른이요 어버이입니다. 아이가 물려받거나 배울 만한 삶이나 살림이 없다면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그저 주먹질(폭력·아동학대)입니다. 주먹질이란, 주먹으로 때리는 짓이기도 하지만, 삶·살림·사랑을 못 보여주거나 안 가르치는 바보짓도 가리킵니다. 어린이한테 숲빛으로 사랑을 물려주지 않는 굴레살이도 ‘주먹질(아동학대·폭력)인 줄 깨달을 수 있으면, 우리나라는 아름답게 거듭날 만하리라 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