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푸르게 : 푸르게 우거진 곳에서 지내면 아이도 어른도 마음이며 몸이 확 달라진다. 푸르지 않은 곳에서 지내면 아이도 어른도 마음이며 몸이 또 다른 길로 확 달라지지. 어느 곳이 우리 넋을 푸르게 가꿀까? 어느 곳에서 우리 넋은 ‘안 푸르게’ 될까? 2011.8.7.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경험일 뿐 : 겪어 보면서 달라질까? 겪는대서 달라질까? 아니지 싶다. 겪기에 달라진다기보다, 이제 그만 겪고서 새로운 길을 겪는 쪽으로 갈 뿐 아닐까? 신물이 나도록 겪었어도 그 신물나는 짓을 끊거나 멈추지 않는다면, ‘신물이 나는데에도 이 신물이 나는 마음으로도 거듭 겪는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겪지 않았는데에도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오늘 이 삶이 아닌 어제 그 삶에서 겪어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예전 삶에서 예전 몸으로 다 겪은 일은 굳이 이곳에서 다시 겪지 않겠지. 진보라느니 보수라느니 갈라서 툭탁거리지만, 이들 가운데 진보다운 진보나 보수다운 보수가 있는지 아리송하다. 둘 다 쇠밥그릇을 거머쥐고서 저희 자리를 얼마나 튼튼히 지키느냐 하는 담쌓기를 ‘해보는(겪는·경험)’ 길만 치닫지 싶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들 삶길이 수렁이나 벼랑인 줄 모를 수 있고, 그 수렁이나 벼랑이 오히려 짜릿짜릿하다면서 못 멈출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아닌 나는? 오늘을 본다. 새벽에 밝아 오는 빛을 본다. 바야흐로 깨어나서 노래하는 새를 만난다. 늦가을 마른풀은 매우 보드라워서 도무지 신을 꿸 수 없다. 맨발로 마른풀을 밟으면서 나무 곁에 선다. 감나무야, 넌 간밤에 무엇을 보았니? 모과나무야, 넌 지난밤에 어디를 돌아다녔니? 후박나무야, 넌 한밤에 어떤 별빛을 품었니? 내가 스스로 겪고 싶은 길이라면, 이 별에서 온갖 나무하고 마음으로 이야기하면서 나무마다 나무다움을 살살 북돋우면서 아끼고 싶은 하루라고 느낀다. 2018.10.20.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진화론·창조론 : (한국) 학교에서는 ‘진화론’ 하나만 가르치면서 ‘창조론’은 엉터리라고 몰아붙인다. 문득 궁금해서 사전을 뒤적이니, 사전에도 ‘진화론·진화설’은 올림말로 다루되 ‘창조론·창조설’은 아예 없다. 가만 보면 (한국) 학교는 외곬로 치닫는 교과서에 갇히기 일쑤이다. 아직 한국 학교만 양자물리학조차 거의 안 가르치다시피 하는데, 따지고 보면 못 가르칠 만하지 싶다. 양자물리학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길잡이라면 아이들한테 엉터리로 들려주거나 뜬금없는 지식을 퍼뜨릴 테니까.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모두 ‘론(論)’이다. 그저 ‘말’이나 ‘생각’일 뿐이란 소리이다. 나는 ‘진화론’을 거의 믿지 못한다. 왜 못 믿는가 하면,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 터전은 조금도 ‘진화·진보’를 못하지 싶으니까. 보라, 이 나라가 얼마나 진화하거나 진보했는가? 이 꼴을 진화나 진보로 여길 만한가? 그렇게 진화나 진보를 잘했기에 한국은 지구에서 자살율이 끔찍하게 높은가? 게다가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가장 많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가 한국인데, 무슨 얼어죽을 진화나 진보인가? 배움터가 배움터답게 나아가도록 틀을 마련하는 우두머리란 보이지 않는다. 고작 대학입시 틀을 바꿀 뿐이다. 대학교 앞에서 줄세우기 하는 데에서 멈출 뿐인 이 나라 얼마나 진화하거나 진보했는가? 독재자 몇을 끌어내렸더라도 ‘탈을 쓴 새로운’ 독재자가 바보짓을 그대로 잇는다면, 이는 진화도 진보도 아니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창조론’을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하나, “모든 삶은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누린다”고 느낀다. 내가 스스로, 네가 스스로, 우리가 스스로, 이 모든 지구라는 별을 지어서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지 싶다. 그러니 거듭거듭 생각한다. 어떤 나라를 짓고 싶니? 어떤 별을 짓고 싶니? 어떤 보금자리를 짓고 싶니? 어떤 나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사랑을 짓고 싶니? 2019.10.22.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센스 있는 사진 : 나더러 “센스 있는 사진을 찍으시네요.” 하고 말하는 분이 있어, 살짝 할 말을 잃었다. “센스 있는”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더라. 잘 찍는단 소리인지, 느낌이 있단 소리인지, 한때를 바로 잡아챈다든지, 사랑스럽단 뜻인지 종잡지 못했다. 그저 내가 대꾸할 수 있는 말은 하나. “저는 필름으로 사진을 배우던 사람이에요. 디지털 사진을 찍더라도 필름으로 찍듯 한 칸 한 칸을 모두 아끼면서 찍어요. 필름값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잘못 찍거나 엉성하게 찍고 말아 다시 찍는 일이 없도록 꼭 한 칸만 찍고서 끝내려는 생각이에요. 찍고 싶은 모습을 잘못 찍거나 엉성하게 찍으면 자꾸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해서, 다음 자리로 넘어가지 못해요. 우리가 찍을 모습은 끝도 없는데 한 자리에만 머무르면 새로운 모습도 새로운 길도 찾을 수 없어요. 언제나 한 칸 사진으로 한 가지 모습을 끝내고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즐겁게 걷자는 생각으로 찍을 뿐입니다.” 2019.10.22.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글쓰는 가시내 : 글쓰는 가시내가 늘면서 온누리가 차츰차츰 거듭난다고 느낀다. 그러나 ‘글만 쓰는’ 가시내가 차츰 늘면서 ‘글만 쓰던’ 사내로 꽉 차던 무렵처럼 좀 갑갑한 모습도 드러난다. 생각해 보라. 글은 가시내가 쓰든 사내가 쓰든 대수롭지 않다. 아이가 써도 되고 어른이 써도 된다. 그런데 여태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살림도 사랑도 삶도 숲도 멀리한 채, 오직 글만 쓰는’ 사내가 판친 터라 글밭이 엉망이었다고 느낀다. 글을 쓰고 싶다면 ‘글만 써서’는 아니될 노릇이다.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살림을 익힐 길이다. 왜 있잖은가, 성룡이란 사람이 배우로 나와서 찍은 영화 〈취권〉이 잘 말해 준다. 스승이란 이는 성룡한테 무술에 앞서 ‘살림’을 스스로 익히도록 가르쳤다. 이다음으로는 ‘사랑(고요한 평화를 바탕으로 짓는 따스한 마음)’을 스스로 익히도록 가르쳤지. 밥을 짓고 옷을 다듬고 집을 돌보는 길을 익히고서 글을 쓰면 된다. 짝짓기를 넘어, 온누리 숨결을 아낄 줄 아는 사랑이 되고서 글을 쓰면 된다. 스스로 오늘 이곳을 똑바로 보면서 신나게 노래하는 하루를 짓고서 글을 쓰면 된다. 서울에 머물지 않는 몸이 되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 삶터를 숲으로 일구는 길이 되면서 글을 쓰면 된다. ‘글만 쓰는’ 사람이 넘실거리면 제아무리 글쓰는 가시내가 늘더라도 온누리는 거듭나지 못한다. 2019.10.9.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