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그 사람 : 1999∼2000년에 출판사 영업부 막내일꾼으로 지내며, 2001∼2003년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장으로 일하며, 이러하든 저러하든 그때에는 꽤 나이가 적은 사내이다 보니, 언제나 술자리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이무렵 출판사 편집부 일꾼이나 사장은 으레 밤 열한두 시 즈음이나 새벽 한 시 언저리이면 달아난다. 이들은 이무렵 달아나면서 ‘영업부가 알아서 끝까지 챙기라’고 이른다. 영업부에서도 막내였으니 새벽 두어 시까지 곁을 지키면서 ‘제발 작가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깨어나서 집주소를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있기 마련. 겨우 넋을 차리고 집이 어디인가 말할 수 있구나 싶으면 어깨동무를 하고서 택시를 부르고, 같이 택시에 타서 그 ‘거나한 작가 선생님 집’으로 끌고 가서, 문을 어찌저찌 열고, 자리에 눕히고, 양말을 벗겨 주고, 웃옷 단추를 끌러서 숨통이 트이게 하고, ‘그나저나 난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하고 근심하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이곳이 어떤 마을인지 하나도 모르잖아?’ 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 여러 해 사이에 매우 지저분한 술버릇으로 영업부 막내일꾼이자 사전 편집장을 들볶은 이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무슨무슨 띠 시인이거나 화가이거나’였다. 그때 그분들은 왜 그랬을는지, 또 이제는 달라졌을는지, 또 그무렵 다른 데에서는 어떠했을는지 하나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는 어림해 본다. 부디 그분들이 어느 한 가지에 푹푹 절어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되기로 한다. 그 사람, 그분, 그 ‘작가 선생님’은 그때에 아직 철이 하나도 안 든 몸짓이었을 테니, 철이 안 든 모습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새기면서 내가 스스로 철이 들면서 나아가는 길을 곰곰이 짚기로 한다. 2019.10.2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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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광 무표백 종이·휴지 : 글을 그렇게 써대느라 종이를 그렇게 써대고 살면서도 종이를 어떻게 빚는가를 제대로 살핀 지 얼마 안 된다. 곁님이 문득 이야기를 했기에 비로소 깨달았는데, 나한테 핀잔을 하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책이며 글을 그렇게 껴안는 주제에 어떻게 연필 하나 종이 하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그렇게 안 쳐다볼 수 있었느냐고. 곰곰이 생각하니, 나 스스로도 놀라운 노릇이다. 어떻게 나는 종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또 종이에 어떻게 형광물질이나 표백제를 비롯한 화학약품을 그렇게 써대는 줄 하나도 안 헤아렸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천기저귀를 살피며 이때에 이르러서야 형광물질하고 표백제가 우리를 곳곳에서 둘러싼 줄 알아챘다. 곁님이 덧붙이지 않아도 갸우뚱한 일이 있다. 여느 흰종이가 몽땅 형광물질하고 표백제 범벅이라면, 형광물질이며 표백제를 안 쓴 누런종이(크라프트지 또는 똥종이 또는 갱지)가 값이 눅어야 할 텐데, 오히려 누런종이가 흰종이보다 비싸다. 흰종이는 값이 싸다. 우리는 더 값이 싸고 ‘하얘서 보기 좋다’는 말에 휘둘린 채, 어느새 ‘숲에서 살던 나무하고 가까운 숨결’인 누런종이하고 멀어진 오늘이 되었구나 싶다. 2007.5.1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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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그냥 : 어제 두 분한테 연필을 두 자루 빌려주었는데 못 받은 줄 아침에 깨닫다. 연필을 쓰려고 찾는데 여기도 저기도 없네. 그렇지만 여러 주머니에 연필을 늘 잔뜩 챙겨서 다니기에 두 자루를 돌려받지 못했어도 걱정이 없다. 내 손에서 사랑을 받던 연필은 어느 이웃 손으로 건너가서 새롭게 사랑을 받겠지. 앞으로 새로운 연필이 나한테 찾아올 테니,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이 있더라도 좋다.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은 어쩌면 깜빡 잊었을 테고, 어쩌면 글힘을 얻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내가 쓰던 연필을 이웃님한테 슬쩍슬쩍 드리고서 잊은 척해 볼까 싶기도 하다. 나야 새 연필을 장만하면 그만이니까. 내 곁에서 글힘이며 글사랑을 받은 연필이 고루고루 퍼지면, 글쓰기란 언제나 즐거운 놀이요 살림이자 사랑이라는 기운이 씨앗처럼 차츰차츰 퍼질는지 모른다. 2019.10.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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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했으니 : 어제 했으니 오늘은 잊거나 미룬다면, 오늘은 ‘죽은날’이 되기를 바라는 셈일까. 어제 하던 길을 오늘은 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쳇바퀴에 뒷걸음이 되기를 꿈꾸는 판일까.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인 줄 스스로 알아차리면서 날마다 번쩍 눈을 뜨는 기쁨을 누린 그때부터 신나게 새로 하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어제 한 멋진 길을 오늘은 새롭게, 어제 지은 아름다운 길을 오늘은 사랑스럽게, 어제 걸은 즐거운 길을 오늘은 휘파람을 불면서 늘 처음이라는 마음이 되어 하면 넉넉하다. 1993.12.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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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고 말하는 사람이 조용히 있도록,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입을 싹 다물도록 할 만큼 ‘깨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이때에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고 말하던 사람은 그이가 입으로는 ‘자유롭게’를 밝히고 다녔으나 막상 제대로 자유로운 적이 없는 줄, 홀가분한 길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 이녁이 나아 보이도록 꾸민 몸짓’이었네 하고 느끼기 마련이다. 자, 이런 판이 벌어진다면, 언제나 두 가지 다음 길이 드러난다. 첫째, 이제는 입으로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는 말을 더는 읊지 않고서 참다이 홀가분하게 노래하는 길을 간다. 둘째, 앞으로도 입으로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는 말을 끝없이 읊을 마음으로 저 ‘깨면’서 사는 사람을 시샘하거나 미워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려고 한다. ‘자유롭게’ 한 가지를 보기로 들었는데, 이 낱말을 ‘진보’라든지 ‘개혁’이라든지 ‘평화’라든지 ‘평등’이라든지 ‘친환경’이란 낱말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매한가지이다. 2001.7.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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