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시골버스를 안 타는 어른 : 예전에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로 일터를 다니는 여느 어른이 많았으나 요새는 으레 자가용을 몬다. 그래도 서울이라면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일터를 다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시골에서는 두 다리나 자전거나 버스로 일터를 다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다.


지난날에는 버스나 전철에서 어린이나 푸름이가 시끄럽게 떠들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거친말을 일삼으면 둘레 어른이 다독이거나 타이르거나 나무랐는데, 요새 시골에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어린이나 푸름이를 다독이거나 타이르거나 나무랄 어른이 없다시피 하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우르르 떠들고 우르르 거칠게 구는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다가가서 한마디를 하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란 없다고 할 만하다.


어린이나 푸름이는 먼저 어버이한테서 모든 말씨랑 몸씨를 받아들이고, 둘레 어른한테서 갖은 말씨랑 몸씨를 맞아들인다. 어린이하고 푸름이에 앞서 이들 어버이하고 배움터 길잡이를 탓할 노릇이겠으나, ‘떼지어 다니며 떼힘으로 시끄럽게 굴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거친말을 일삼아도 된다’고 여기는 이 아이들 가녀린 마음씨는 누구보다 이 아이들 스스로 마음이며 말이며 삶을 좀먹으면서 스스로 사랑길하고 동떨어진다는 대목을 깨닫지 않는, 그러니까 어린이하고 푸름이 탓을 빼놓을 수 없다.


어른이라면 모름지기 아이들하고 함께 움직일 노릇이다.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버스나 전철을 타는데, 어른이나 어버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버스나 전철을 안 타면 어찌 될까?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다니지 말자. 아이들하고 버스나 전철을 같이 타고서, 이 아이들이 버스나 전철에서 떼지어 무엇을 하고 어떻게 구는가를 지켜보고 사랑길로 이끌 수 있기를 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그대가 어버이라면. 2021.2.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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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해 : 때로는 첫밗에 눈부신 빛꽃(사진)을 얻는다. 그런데 철을 보내고 해를 보내면서 꾸준히 담노라면, 한 해가 넘어갈 무렵 더없이 눈부신 빛꽃을 얻는다. 이렇게 두 해째 보내고 세 해째 맞이하면, “아, 내가 찍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빛꽃이 다 나오는구나.” 하는 열매를 얻는다. 그리고 네 해를 보내고 다섯 해를 맞이하면, 어느 날 문득 “그래, 난 이곳에서 이 빛을 담고 싶었어.” 하는 빛꽃을 얻는다. 이다음으로 여섯 일곱 여덟 아홉 해를 지나 열 해째에 이르면 “어, 내가 찍었는데 내 빛꽃을 보며 눈물이 나네.” 하는 열매를 얻고, 이때부터 열 해를 보내면서 스무 해를 맞이하는 동안 꾸준히 빛꽃으로 담으면 그저 웃음이 사랑처럼 피어나는 빛꽃을 찍는다. 간추리자면, 스승이나 대학교나 강의나 길잡이책은 없어도 된다. 처음에는 세 해, 다음에는 다섯 해, 그리고 열 해, 이다음은 스무 해, 이렇게 스스로 삶으로 녹이면 다 된다. 빛꽃(사진)이나 글이나 그림 모두 매한가지요, 살림살이도 똑같다. 스무 해를 몸이랑 마음으로 살아낸 뒤에는, 이제 모두 홀가분하게 다룰 수 있다. 20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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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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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일에 닫은

서울 혜화동 〈혜성서점〉이 있습니다.

1985년에 혜화동에 새로 연 헌책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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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책집은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찍었는데,

2011년에 닫으셨기에 더 찍을 수 없었습니다만,

다섯 해째인 2005년에 이르러

비로소 제가 담고 싶던 그림을

담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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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집 앞 나무가 바람에 살랑이며 해를 먹는,

그리고 책집지기 자전거하고

책손 자전거가 나란히 선

고요하면서 아늑한 어느 날 모습이에요.

이 모습을 담으려고 다섯 해를 드나든 셈이라고

해도 좋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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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찍은 사진이니

충북 충주에 있는 이오덕 어른 살던 집에서

서울 혜화동까지 자전거로 4시간 30분을 

한숨도 안 쉬고 달린 끝에

이 헌책집 앞에 닿아

숨을 가늘게 고르고서 담은 빛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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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은 ‘입시’인걸 : 나는 설민석이란 사람이 쓴 책을 하나도 안 읽고, 이이가 펴는 말을 하나도 안 듣는다. 나는 ‘입시 강의’는 터럭만큼도 가까이할 마음이 없다. 살림자취를 다룬 알찬 책을 챙겨 읽을 뿐이다. ‘그냥 강의’면 슬쩍 볼 테고, ‘삶을 다루는 이야기’라면 들여다볼 테며, ‘삶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노래’라면 곁에 두자고 생각할 테며,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이좋게 숲을 노래하는 마음빛’을 밝힌다면 차곡차곡 챙겨서 읽거나 듣겠지. 설민석 같은 사람을 ‘스타강사’라고 하던데, ‘대학입시에 맞추어 문제풀이를 잘하고 점수를 잘 따도록 쉽고 빠르게 이끄는 몫’을 한다는 뜻이겠지. 우리 삶터를 보면 배움수렁(입시지옥)에서 안 헤어나올 뿐 아니라, 나라에서는 아예 부추기고, 여느 사람들은 아이들을 이 배움수렁에 밀어넣어서 어떻게든 마침종이(졸업장)를 거머쥐어 벼슬아치(공무원)를 시키려고 애쓴다. 이런 물결이 ‘스타강사’를 만들어 내고, 이 스타강사는 일터를 차리면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슬금슬금 그들 일밭을 넓히지. 삶을, 삶자취를, 살림을, 살림자취를 차근차근 받아들이고 익혀서 온누리를 푸르게 가꾸려는 마음이 아닌, 장삿속으로 ‘입시 강의’만 하는 이들이 나아갈 마지막길은 뭘까? 2020년 12월에 설민석 이분이 잘 보여주는구나 싶다. 고등학교란 곳을 다니던 1991∼1993년에 늘 들은 말이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란 곳에 다섯 학기를 머물고서 그만두기까지 내내 들은 말이 떠오른다. “교과서를 믿으면 안 되지만, 교과서를 외우지 않으면 점수를 못 따.” 2020.12.23.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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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영 우유 : 내가 글을 올리는 누리글집에 ‘허경영 우유’를 알리려는 덧글을 누가 달았더라. 곰곰이 읽고 생각해 본다. 정 그렇다면 ‘허경영 치즈회사’를 차리면 되겠지? 아무 데나 덧글질을 하지 말고, 치즈회사 좀 차리시오. 우유 사서 치즈로 만들어 장사를 하시면 돈 많이 벌 텐데?


정치하고 종교는 독같다. 정치꾼이나 종교꾼은 언제나 그들 이름을 달달 외워서 사람들이 탈탈 털리게 내몬다. 그들은 사람들이 ‘제 이름’이 아닌 ‘그들(정치꾼·종교꾼) 이름’에 휘둘리도록 하면서 사람들 기운을 빨아먹는다. ‘허수아비(거수기·홍위병·빠)’가 왜 허수아비이겠는가? 스스로 이름을 버리고 그들 우두머리를 치켜세우니까 허수아비이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오직 하나이니, 그들이 아닌 우리 스스로이다. 그들(정치꾼·종교꾼) 이름을 외지 말자. 그들 이름을 머리에 담지 말고, 혀에 얹지도 말자. 언제나 우리 이름을 생각하고 말하고 나누자. 우리는 스스로 ‘내 이름’을 잊거나 잃을 적에 바보가 되고, 아프고, 얼이 빠지고, 힘이 없고, 삶이 사라진다. 만화영화 〈센과 치히로〉를 떠올릴 수 있을까? 유바마는 왜 치히로한테서 이름을 빼앗아 센으로 바꾸도록 하겠는가? 왜 숱한 사람들이 유바마한테 이름을 빼앗기면서 종살이를 하겠는가?


우리가 스스로 들꽃이며 물결이며 촛불로 ‘내 이름’을 건사할 적에, 우리는 스스로 돌볼 뿐 아니라, 우리가 있는 마을을 지키고, 우리가 어우러지는 이 푸른별을 가꿀 수 있다. 우두머리 이름은 잊자. 정치꾼이며 종교꾼은 치워내자. 그리고 ‘이름난 이’한테 휘둘리지 말자. 어떤 책을 읽겠는가? 베스트셀러 이름값을 읽겠는가? 스테디셀러 이름값을 찾겠는가? 베스트셀러이든 스테디셀러이든 똑같다. 우리는 대형출판사 책도 소형출판사 책도 아닌 ‘아름책(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으면 될 뿐이다. 이름난 이들이 쓴 이름팔이(+ 돈팔이) 책이 아니라, 삶을 사랑으로 짓는 슬기로운 이웃이 쓴 아름책을 곁에 두면서 ‘우리 이름’을 가꾸는 길을 스스로 찾아나서면 즐겁다.


모든 장사꾼은 이름팔이를 한다. 그러니 큰고장 곳곳은 ‘알림판(광고판)’이 흐드러지지 않는가? 왜 목돈을 들여 광고를 하는가를 생각하라. 우리 이름을 잊고 그 광고에 사로잡히도록 할 적에, 우리는 넋을 잃고서 그들한테 돈을 쓰고 마음까지 써버리고 말거든. 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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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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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큼 : 어릴 적부터 둘레에서 어른들은 으레 “땀흘리는 만큼 거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동무를 비롯해 숱한 어른들이 “땀을 옴팡 흘렸어도 손에 쥐는 보람이나 열매가 거의 없다시피 할 뿐 아니라, 통째로 빼앗기기까지 하는 일”을 수두룩히 보았다. 어른들한테 물었다. “땀흘리는 사람 따로, 단물 쪽쪽 빠는 사람 따로, 이렇지 않나요?” 이런 물음에 제대로 대꾸한 어른은 못 봤다. 참말 그렇다. 다들 고개를 휙 돌리거나 꿀밤을 먹였다. 이 나라 아름답다면, 이 나라가 올바르다면, 이 나라가 착하다면, 이 나라가 슬기롭다면, 이 나라가 참하고 상냥하다면, 이 나라가 어질다면, 이 나라가 고르다면, 이 나라가 멋스럽다면, 틀림없이 땀값대로 거두며 즐거우리라. 그러나 아무리 이 나라가 몹쓸짓 일삼는 이들이 벼슬이며 힘이며 돈이며 이름이며 거머쥔 채 끼리질을 일삼는다고 하더라도 ‘만큼’이라는 값을 흩뜨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땀흘리는 만큼 거둔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는 만큼 누리고 나눈다”고 생각한다. 누가 보기에 내 모습이 “땀흘리는 모습”일는지 모르나, 나는 땀흘리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오롯이 “사랑을 들이면서 즐겁게 일하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려는 모습”으로 나아갈 뿐이다. 2003.12.3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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