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책지기한테

 


  헌책방을 오래오래 일구신 책지기님한테 한 말씀 올립니다. 나는 이제까지 헌책방 책지기님 모두한테 더할 나위 없이 크고 너른 사랑을 받았습니다. 몇 만 권에 이르는 책을 헌책방에서 장만할 수 있었고, 따로 장만하지 않았지만 헌책방 책시렁을 두루 살피며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을 기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크고작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방이 문을 닫았습니다. 오래도록 지역문화를 지키던 씩씩하고 아름답던 책방마저 거의 모조리 문을 닫았습니다. 몹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헌책방도 참 많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퍽 많은 헌책방은 온 나라 곳곳에서 알뜰살뜰 책살림 여미십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책살림 빠듯하거나 어렵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헌책방 책살림 붙잡은 힘이란, 첫째 책을 만지는 즐거움이요, 둘째 새로운 책손한테 책을 잇는 보람, 이렇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움과 보람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마다 지역책방이 살아가자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책방이거나 헌책방이거나, 또 도서관이거나 다 똑같을 텐데요, 즐거움과 보람 두 가지를 늘 되새기면서 책살림 꾸려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마을빛(지역색)을 살리거나 북돋우는 길을 살피셔야지 싶습니다. 인천에서는 인천책을 갖추고, 부산에서는 부산책을 갖출 노릇입니다. 순천에서는 순천책을 갖추며, 춘천에서는 춘천책을 갖출 노릇이에요. 대형서점에 다 있고 인터넷서점 살피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더 싸게’ 사는데다가 ‘적립금 더 얹어’ 주는 그런 책들 말고, 참말 마을빛을 살리고 살찌우는 책을 우리 헌책방들 책시렁 한쪽에 곱게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책으로 들어온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를 갖출 수도 있어요. 그러나, 헌책방이건 새책방이건, 마을에서 씩씩한 마을책방으로 뿌리를 내리며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으려고 한다면,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를 넘어 ‘우리 책방으로 찾아오는 책손이 기쁘게 만나며 새롭게 배워서 아름답게 읽을 책’을 갖추도록 힘을 쓰시고 마음을 기울이셔야지 싶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아름답게 꿈꾸면서 사랑하고 싶기에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고 싶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담은 책을 찾아서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 서재를 채워 주는 장서가 아니라, 마을이웃 작은 책시렁에 곱게 놓이면서 삶빛 아름답게 밝힐 책을 일구는 데가 헌책방이요 마을책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고 하는 전문가나 독서라가 할지라도 ‘아직 모르는 책’이 있고 ‘아직 못 만난 책’이 있어요. 우리 헌책방 책지기님들은 바로 이렇게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아니라 책지기 스스로도 여태 구경하지 못한 새로운 헌책’을 알뜰살뜰 추스르고 갈무리하면서 책시렁을 환하게 빛내는 몫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징검돌 되는 마을책방으로서, 헌책방으로서, 책터로서, 책쉼터로서, 책이야기터로서, 삶자리로서, 가슴속에 책빛 맑고 밝게 보살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다 함께 즐겁게 책빛마실 다니도록 우리 곁에 있는 아름다운 헌책방이 고맙습니다. 4346.10.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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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빛마실


 

  책빛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 할 적에는 늘 책빛을 읽는다. 책에 서린 빛을 읽는다. 책에 감도는 빛을 읽는다. 책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읽는다.


  책빛을 읽는 마실을 한다. 책빛마실을 한다. 새책방을 다닐 적에도 도서관을 드나들 적에도 헌책방으로 찾아갈 적에도, 언제나 책빛마실이다.


  새롭게 돋는 빛을 누린다. 오랜 옛날부터 흐르던 빛을 바라본다. 앞으로 곱게 이어갈 빛을 헤아린다. 책에 서리는 빛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오며 일군 빛이다. 책에 감도는 빛은 사람들이 어깨동무하며 사랑하던 빛이다. 책에서 우러나오는 빛은 사람들이 알뜰살뜰 옹기종기 꾸린 살가운 이야기에서 샘솟는 빛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빛을 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빛을 그린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빛을 찍는다. 빛을 노래하고, 빛으로 춤춘다. 빛으로 이야기하며, 빛으로 밥을 차린다. 온삶 가득 빛살이 흐드러진다.


  책이란 무엇인가. 종이책이면 책인가. 전자책이 새로운 책으로 되는가. 삶이 없이 책이 태어날 수 있는가. 사랑이 없이 책을 쓰거나 읽을 수 있는가. 아름다운 삶도 삶이여 슬픈 삶도 삶이며 거짓으로 꾸민 삶도 삶이다. 모두 삶이며, 어느 이야기라 하더라도 책이 된다. 그러면, 전쟁도 사랑이 되는가. 미움과 주먹다짐도 사랑이 되는가. 아니지, 전쟁이나 미움이나 주먹다짐은 사랑이 아니지. 그런데 전쟁과 미움과 주먹다짐으로 얼룩진 삶을 책으로 쓰기도 하잖은가. 이런 책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을 느껴 어떤 사랑을 살찌울 기운을 얻을까.


  책을 펼쳐 삶을 읽는다. 아이들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쥐며 사랑을 읽는다. 맑은 물을 길어 정갈한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짓는 동안 책을 읽는다. 책을 선물하며 삶을 읽는다. 나무를 살며시 안고 풀밭을 맨발로 뛰놀며 책을 읽는다.


  가을바람 푸르게 분다. 산들산들 살랑살랑 나뭇잎 스치며 푸른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은 숲에서 태어났고, 온누리 고루 어루만지다가 새삼스레 숲으로 돌아가 조용히 잠든다. 나무야 나무야 푸르디푸른 나무야, 네 속살이 온통 책으로 태어나 우리한테 풀빛을 노래하는구나. 4346.10.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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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책시렁에서 내 책

 


  헌책방 책시렁에서 내 책을 만난다. 너, 누구한테서 읽히고 이리로 왔니? 너를 읽은 사람은 즐거운 마음이었니? 기쁘게 다 읽고 나서 너를 이곳에 곱게 데려다주었니? 앞으로 누가 너를 다시 즐거이 알아보면서 차근차근 읽을까. 내가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들은 누군가 즐겁게 장만해서 읽은 책이듯, 너 또한 누군가한테서 곱게 사랑을 받고서 이곳에 깃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 사랑스러운 손길을 탄 책들이 새롭게 사랑스러운 손길을 타기를 기다리는 헌책방 책시렁에서, 너 또한 고운 책빛을 흩뿌리면서 다소곳하게 잠들었구나. 머잖아 네 어깨를 톡 치면서 빙그레 웃을 책손 만나리라. 그날까지 고즈넉하게 단꿈을 누리렴. 4346.10.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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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용품과 재활용품

 


  새책방만 있는 문화는 1회용품 문화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책 하나를 한 사람만 읽고 더 읽히지 못하도록 책꽂이에 꽁꽁 가두어 모신다면, 이 책은 한낱 1회용품 물건하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새책방 곁에 헌책방이 있으면, 책은 재활용품 문화로 거듭납니다. 내 살림집에 건사한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헌책방에 내놓으면 이 책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 손으로 건너갑니다. 가난한 이웃이든 마냥 책이 좋아 새책방도 헌책방도 신나게 마실하는 책님이든, 책이 돌고 돕니다. 다른 책벗이 헌책방에서 장만해서 읽은 책은 또 헌책방으로 나올 수 있고, 이 책 하나 돌고 돌면서 수없이 되읽힙니다.


  도서관이라는 곳은 바로 책 하나 되읽히도록 이음돌 놓는 책터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도서관은 책 두는 자리를 새로 짓거나 늘리지 못합니다. 책은 날마다 새로 나오는데,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모두 장만하지 못하고, 모두 건사하지 못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뺀 다른 도서관은 꾸준히 ‘묵은 책은 버리’고 ‘새로 나온 책을 사들이’는 일을 하고야 맙니다. 도서관 곁에 헌책방이 없다면, 이 나라 도서관에서 버릴 수밖에 없는 슬프고 안타까운 책이 모두 종이쓰레기가 됩니다.


  꾸준하게 많이 팔리는 책이라면 몇 권쯤 종이쓰레기 되어도 다시 찍어 다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줄거리와 속살이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미처 사람들한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진 책은 몇 권이라도 종이쓰레기가 되면 자칫 두 번 다시 만날 길 없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100만 권 팔리는 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1000권 겨우 팔린 책도, 100권 가까스로 팔린 책도, 10권 힘겹게 팔린 책도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읽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처음 펴낸 책은 빚을 지고 혼잣돈으로 펴냈는데 몇 해에 걸쳐 고작 100권 남짓 팔렸다고 해요. 소로우 님은 이녁 삶을 책으로 써서 내놓고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아 이 빚을 갚느라 여러 해 고되게 일해야 했다고 해요. 이 책들을 도서관에서 버린다면, 이 책들을 받아줄 헌책방이 없다면, 아마 소로우 님 책은 앞으로도 제대로 빛을 못 받을 수 있었겠지요.


  삶은 1회용품이 아닙니다. 1회용품은 모두 쓰레기로 바뀝니다. 부엌칼도 도마도 빗자루도 쓰레받기도 1회용품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시 쓰고 또 쓰며 오래 쓰는 재활용품입니다.


  재활용품 파는 가게에서 사는 물건이 재활용품이 아니라, 우리가 꾸준히 곁에 두며 쓰는 물건이 모두 재활용품입니다. 바지 한 벌 열 해째 잘 건사해서 입는다면, 나는 바지 한 벌을 열 해째 재활용품으로 즐기는 셈입니다. 자전거 한 대 열 해째 잘 돌보며 탄다면, 나는 자전거를 탈 적마다 재활용을 하는 셈입니다.


  돌고 돌 때에 돈이듯이, 돌고 돌 때에 책입니다. 여러 사람이 골고루 누릴 때에 아름다운 돈이 되듯이, 여러 사람이 골고루 읽으며 스스로 이녁 삶을 살찌우는 징검돌로 삼을 적에 아름다운 책이 됩니다. 큰책방과 작은책방, 인터넷책방과 동네책방, 여기에 새책방과 도서관과 헌책방이 고루고루 골골샅샅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해야 책빛이 환하게 드리울 수 있습니다. 4346.10.1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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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15 12:44   좋아요 0 | URL
정말 새책방 옆에 헌책방이 있고, 더구나
도서관 옆에 헌책방이 있어야 함을, 함께살기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절감이 드네요.
저도 즐겁고 살뜰하게 읽은 책들을 꼭 소장할 책이 아니라면
부지런히 헌책방에 내놓으려 합니다~^^

숲노래 2013-10-16 14:57   좋아요 0 | URL
모두들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책빛도 삶빛도 환하게 드리운다면 좋겠어요~
 

책방 앞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책내음을 맡는다. 커다란 책방이건 작은 책방이건, 새책 다루는 책방이건 헌책 다루는 책방이건, 책방 앞에서는 책내음을 맡는다. 빵집 앞에서 빵내음을 맡고, 떡집 앞에서 떡내음을 맡듯이, 책방 앞에서는 나를 부르는 책내음을 맡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발걸음을 멈춘다. 아무리 바삐 어디론가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책방 앞에서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춘 뒤 때를 살핀다. 볼일을 보러 바삐 가야 하기는 하지만 1분이라도 쪼갤 수 있을까, 10분을 쪼개면 어떨까, 20분까지 쪼개면 너무 늦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빙그레 웃는다. 책방 문 열고 들어서면 나를 기다리던 책들이 즐겁게 웃을 테고, 책방 문 열고 들어설 틈이 없어 그대로 지나쳐야 한다면 누군가 다른 책손이 이녁 마음 기쁘게 채울 책들 떠올리며 방긋방긋 웃을 테지. 사람들은 배가 부를 적에도 웃고, 마음이 부를 적에도 웃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생각에 젖는다. 이 책방은 언제부터 이곳을 지켰을까, 이 책방은 앞으로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까,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책내음 흐르는 줄 느낄까,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녁 마을에 고운 책방 하나 있는 줄 얼마나 헤아릴까, 이 생각에 젖고 저 생각에 빠지다가, 아차 내 갈 길은 까맣게 잊었네 하고 깨닫는다. 다시 길을 걷는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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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09 00:51   좋아요 0 | URL
책방 앞,이란 제목과 정다운 글과 함께
책방 앞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흑백사진이 잘 어울립니다.^^
사진을 볼 줄 모르는 제게도 넓고 시원한 구도로, 책과 사람과 책방의
아름다운 조화가. ..어린날의 마냥 천진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들처럼
즐거운 꿈과 이야기 되어 흐르는 좋은 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숲노래 2013-10-09 01:05   좋아요 0 | URL
누구라도 사진을 보면 다 '사진을 보는 사람'인걸요.
사진이든 책이든 시이든 문학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머리에 담긴 이론이나 논리나 지식이나 형식으로는
도무지 읽거나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살필 수 없어요.

서울 창천동 린나이세거리 옆에 있는 헌책방인데,
김대중도서관 큰길 건너에 있는 곳이지요,
이 앞 거님길이 많이 깎였어요.
버스전용차선 만든다며 다른 데는 찻길을 깎는데,
여기는 거님길을 깎아 버렸지요.

이 사진을 볼 때면,
저 널찍하던 거님길이 1/3로 토막난 쓸쓸한 일이
떠오릅니다...

transient-guest 2013-10-09 01:18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진이에요. 마치 예전의, 제 기억속에만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같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네요.

숲노래 2013-10-09 07:37   좋아요 0 | URL
디지털사진기 없이 필름사진만 목걸이처럼 하고 다닐 적에 찍은 사진입니다. 나무와 하늘과 헌책방과 거님길과 자전거 모두 좋아서 ... 막상 이 사진은 나무 옆에 세운 제 자전거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초점과 조리개값 맞추며 들여다보다가 단추를 누를 즈음 저 내리막길에서 다른 자전거 한 대 씽하니 내려와서 곱게 담겨 주었어요. 저도 저분도 모르는 새 서로 찍고 찍혔어요 ^^;;;

그 자전거가 일으켜 준 바람이 transient-guest 님한테도 어떤 기억과 아름다움과 고향을 떠올려 주도록 이끌어 주었으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