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빛마실


 

  책빛을 읽는다. 책을 읽는다 할 적에는 늘 책빛을 읽는다. 책에 서린 빛을 읽는다. 책에 감도는 빛을 읽는다. 책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읽는다.


  책빛을 읽는 마실을 한다. 책빛마실을 한다. 새책방을 다닐 적에도 도서관을 드나들 적에도 헌책방으로 찾아갈 적에도, 언제나 책빛마실이다.


  새롭게 돋는 빛을 누린다. 오랜 옛날부터 흐르던 빛을 바라본다. 앞으로 곱게 이어갈 빛을 헤아린다. 책에 서리는 빛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오며 일군 빛이다. 책에 감도는 빛은 사람들이 어깨동무하며 사랑하던 빛이다. 책에서 우러나오는 빛은 사람들이 알뜰살뜰 옹기종기 꾸린 살가운 이야기에서 샘솟는 빛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빛을 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빛을 그린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빛을 찍는다. 빛을 노래하고, 빛으로 춤춘다. 빛으로 이야기하며, 빛으로 밥을 차린다. 온삶 가득 빛살이 흐드러진다.


  책이란 무엇인가. 종이책이면 책인가. 전자책이 새로운 책으로 되는가. 삶이 없이 책이 태어날 수 있는가. 사랑이 없이 책을 쓰거나 읽을 수 있는가. 아름다운 삶도 삶이여 슬픈 삶도 삶이며 거짓으로 꾸민 삶도 삶이다. 모두 삶이며, 어느 이야기라 하더라도 책이 된다. 그러면, 전쟁도 사랑이 되는가. 미움과 주먹다짐도 사랑이 되는가. 아니지, 전쟁이나 미움이나 주먹다짐은 사랑이 아니지. 그런데 전쟁과 미움과 주먹다짐으로 얼룩진 삶을 책으로 쓰기도 하잖은가. 이런 책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을 느껴 어떤 사랑을 살찌울 기운을 얻을까.


  책을 펼쳐 삶을 읽는다. 아이들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쥐며 사랑을 읽는다. 맑은 물을 길어 정갈한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짓는 동안 책을 읽는다. 책을 선물하며 삶을 읽는다. 나무를 살며시 안고 풀밭을 맨발로 뛰놀며 책을 읽는다.


  가을바람 푸르게 분다. 산들산들 살랑살랑 나뭇잎 스치며 푸른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은 숲에서 태어났고, 온누리 고루 어루만지다가 새삼스레 숲으로 돌아가 조용히 잠든다. 나무야 나무야 푸르디푸른 나무야, 네 속살이 온통 책으로 태어나 우리한테 풀빛을 노래하는구나. 4346.10.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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