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셔요 이정서 님, ‘독자’입니다



  이정서 님한테 한말씀 여쭙니다. 독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정서 님은 ‘섬뜩한 오해’로만 여기니, 독자라는 사람이 책마을에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독자가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책마을 책지기는 어딴 이야기를 책에 담을까 궁금합니다. 다른 번역가를 섬길(존중할) 줄 모른다면 아무런 번역문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독자가 차근차근 짚은 대목을 즐겁게 맞아들이지 않을 적에는 다른 누구보다 바로 이정서 님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문학을 번역하려 한다면, 아름다운 빛을 보고 느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지 싶습니다. 이정서 님이 앞으로 ‘독자’를 ‘책 즐김이’로 느껴서 ‘섬뜩한 오해’와 같은, 뭐랄까, 뜬금없는 ‘핑계(자기합리화)’는 멈추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빚는 ‘책사랑 한길’로 나아가시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4347.7.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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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움출판사 대표이자 <이방인>을 한국말로 옮긴 이정서 님이

내 알라딘서재에 '섬뜩한 오해'라는 댓글을 아주 길게 붙였는데

이 글을 올리니, 어느새 그 댓글을 지우셨다.


그러나, 댓글을 지웠다 하더라도

독자를 '가볍'거나 '우습'게 여기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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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를 쓴 정세기 님


  동시집 《해님이 누고 간 똥》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꼈다. 조금 더 어린이 눈길을 살피거나 헤아린다면 한결 아름답게 빛났을 텐데 하고 느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알았는데 이 동시집을 쓴 정세기 님은 이 동시집을 내놓을 적에 뇌종양으로 몹시 아픈 몸이었단다. 손으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입으로 읊어 옆에서 받아적었다고 한다. 동시집이 나오고 나서 몇 달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첫 동시집이 나오고 나서 꾸준히 동시를 생각하고 새롭게 쓰다 보면, 둘째 동시집이나 셋째 동시집이 얼마나 곱게 피어날까 싶었는데, 그만 첫 동시집이 마지막 동시집이 되었다.

  책상맡에 정세기 님 동시집을 한참 올려두었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삶자락을 동시를 생각하면서 보낸 셈이지 않은가. 어떤 넋이 손을 잡아서 이끌었기에 이분은 동시를 썼을까. 더군다나 손으로 쓸 수 없는 글을 입으로 읊으면서 내놓았을까.

  시골 군내버스가 지나간다. 마을 어귀로 군내버스가 지나가면서 부릉 소리를 낸다. 처마 밑에서는 새벽부터 새끼 제비가 재재재 노래를 하면서 어미더러 어서 밥 달라 말하고, 어미 제비는 알았다면서 새벽부터 먹이를 물어 나르느라 부산하다. 어젯밤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별도 달도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걷히면서 해를 볼 수 있을까. 4347.6.1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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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딸



  고승덕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고승덕이라는 사람한테 딸이 있는 줄 모른다. 그런데, 엊저녁, 2014년 6월 3일 저녁, 어느 분이 고승덕과 이분 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소식도 듣지도 보지도 읽지도 않아서 모르는데, 그분이 알려주시기를, 고승덕이라는 사람이 낳은 딸아이가 이녁 아버지는 국회의원은 될 수 있어도 교육감은 될 만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번쩍 하고 생각이 움직였다. 우와, 고승덕이라는 사람 딸아이는 얼마나 놀랍고 대단하며 훌륭한가! 고승덕이라는 사람은 이녁 딸아이를 얼마나 알뜰히 가르쳤는가! 그 딸아이는 이녁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볼 줄 알고 ‘똑바로’ 말할 줄 아는구나!


  고승덕이라는 사람은 교육감 후보에서 사퇴를 할까? 또는 교육감이 될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고승덕이라는 사람은 이번에 교육감 후보로 나오면서 이녁 딸하고 아주 깊디깊게 마음으로 사귀고 다시 만나며 서로 즐겁게 배우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나도 우리 아이를 똑바로 보아야겠고, 우리 아이도 나를 어버이로서 똑바로 보도록 이끄는 하루를 누려야겠다. 4347.6.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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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까는 인형



  나는 예전에, 그러니까 1994년에 ‘ㅈㅈㄷ 까는 인형’처럼 지낸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신문’을 몰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틈틈이 ‘신문배달 부업’을 하기만 했을 뿐, 신문이라는 종이뭉치에 깃든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나한테 신문이란 ‘방학을 맞이해서 부업으로 하면 돈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예나 이제나 똑같다. 신문배달을 하는 이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이야기’를 읽지 않는다. 그저 신문이니까 돌린다. 아니, 그저 직업이니까 이 일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어떤 신문이든 돌린다. ㅈㅈㄷ을 돌리는 신문배달부라 해서 ‘생각이 낮거나 바보스럽’지 않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돌리는 신문배달부라 해서 ‘생각이 높거나 훌륭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ㅈㅈㄷ을 받아보는 사람이라고 해서 ‘생각이 낮거나 바보스럽’지 않으며,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읽는 사람이라고 해서 ‘생각이 높거나 훌륭하’지 않다.


  내가 ‘ㅈㅈㄷ 까는 인형’처럼 지내던 때를 돌아본다. 그때 나는 ‘까는 일’에만 매달린 채,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바라보지 못했다. 엉터리에 쓰레기에 허접한 것을 까야 한다고만 여겼다. 이러다 보니, 나 스스로 흙탕물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흙탕물을 밝히려면 나 또한 흙탕물로 뛰어들어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흙탕물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흙탕물에 뛰어들어서 스스로 흙탕물투성이가 되어야 흙탕물을 알거나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어느 대목에서는 알거나 말할 수 있겠지. 코끼리한테 다가가서 코끼리를 만져야 코끼리를 어느 대목에서는 알거나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코끼리 귀를 만질 때에 코끼리를 말하거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코끼리 귀 만지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다만 그뿐이다. 코끼리한테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아서 ‘코끼리 모습을 제대로 본다’고 할 때에도 이러한 매무새가 좋거나 나쁘다거나 하고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뿐이다.


  ‘박근혜 까기’를 하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깔 만하니까 깔 뿐이다. 그래서, ‘박근혜 까기’를 얼마든지 차분하게 하면 된다. 다만, ‘까는 인형’이 되면 스스로 굴레에 갇혀서 빛을 못 볼 뿐이다. 까는 데에 허우적거리거나 바쁜 나머지, 정작 이녁 삶은 가꾸지 못할 뿐이다.


  잘 생각해 보라. 손가락질을 해야 ‘까기’가 아니다. 4대강사업을 비판하거나 밀양송전탑을 비판해야 ‘까기’가 아니다. 스스로 물질문명을 거스를 수 있으면서, 흙을 돌보아 자급자족을 이루며 언제나 웃음꽃으로 오순도순 살림을 가꾸는 아주머니 한 분 삶은 ‘새로운 눈빛으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공장 일꾼 한 사람은, 공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매무새로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일꾼은 그물을 던지고 걷어들이면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풀을 뜯고 나락을 거두는 시골살이를 조용하면서 아름답게 빛내면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뛰노는 맑은 몸짓으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4347.6.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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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횝커(Thomas Hoepker)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Thomas Hoepker’라는 분이 선보인 사진책을 구경한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느꼈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니 익히 보던 사진이다. 그렇구나, 이 사진들을 찍은 분 이름은 모르며 지냈지만, 이 놀랍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은 분 이름이 ‘토마스 횝커’였구나.

  이 사진책을 장만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에서는 장만하기 어려울 테고, 외국에서는 찾을 수 있을 테지. 앞으로 몇 해쯤 지나고 나서 이 사진책을 장만할는지 모르나, 찬찬히 이분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웠다. 토마스 횝커 님 사진책을 보면서, 사진책이란 참말 수없이 되읽는 책이라고 깨닫는다. 한 번 읽고 덮는 사진책은 사진책이 될 수 없다. 자꾸 보고 또 보고 싶도록 이끌어야 사진책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그렇지 않은가? 한 번 읽고 두 번 다시 안 읽는 글을 글이라 할 만한가? 한 번 보고 두 번 다시 안 보는 그림을 그림이라 할 만한가? 한 번 듣고 두 번 다시 안 듣는 노래를 노래라 할 만한가? 아름다우며 즐거운 노래이기에 수십 번이나 수백 번이 아닌 수천 번이나 수만 번을 들으면서도 언제나 새롭다.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이기에 수십 번이건 수백 번이건 고마운 마음이 되어 사진책을 다시 펼쳐서 넘길 수 있다. 4347.5.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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