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까는 인형
나는 예전에, 그러니까 1994년에 ‘ㅈㅈㄷ 까는 인형’처럼 지낸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신문’을 몰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틈틈이 ‘신문배달 부업’을 하기만 했을 뿐, 신문이라는 종이뭉치에 깃든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나한테 신문이란 ‘방학을 맞이해서 부업으로 하면 돈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예나 이제나 똑같다. 신문배달을 하는 이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이야기’를 읽지 않는다. 그저 신문이니까 돌린다. 아니, 그저 직업이니까 이 일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어떤 신문이든 돌린다. ㅈㅈㄷ을 돌리는 신문배달부라 해서 ‘생각이 낮거나 바보스럽’지 않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돌리는 신문배달부라 해서 ‘생각이 높거나 훌륭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ㅈㅈㄷ을 받아보는 사람이라고 해서 ‘생각이 낮거나 바보스럽’지 않으며,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읽는 사람이라고 해서 ‘생각이 높거나 훌륭하’지 않다.
내가 ‘ㅈㅈㄷ 까는 인형’처럼 지내던 때를 돌아본다. 그때 나는 ‘까는 일’에만 매달린 채,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바라보지 못했다. 엉터리에 쓰레기에 허접한 것을 까야 한다고만 여겼다. 이러다 보니, 나 스스로 흙탕물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흙탕물을 밝히려면 나 또한 흙탕물로 뛰어들어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흙탕물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흙탕물에 뛰어들어서 스스로 흙탕물투성이가 되어야 흙탕물을 알거나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어느 대목에서는 알거나 말할 수 있겠지. 코끼리한테 다가가서 코끼리를 만져야 코끼리를 어느 대목에서는 알거나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코끼리 귀를 만질 때에 코끼리를 말하거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코끼리 귀 만지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다만 그뿐이다. 코끼리한테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아서 ‘코끼리 모습을 제대로 본다’고 할 때에도 이러한 매무새가 좋거나 나쁘다거나 하고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뿐이다.
‘박근혜 까기’를 하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깔 만하니까 깔 뿐이다. 그래서, ‘박근혜 까기’를 얼마든지 차분하게 하면 된다. 다만, ‘까는 인형’이 되면 스스로 굴레에 갇혀서 빛을 못 볼 뿐이다. 까는 데에 허우적거리거나 바쁜 나머지, 정작 이녁 삶은 가꾸지 못할 뿐이다.
잘 생각해 보라. 손가락질을 해야 ‘까기’가 아니다. 4대강사업을 비판하거나 밀양송전탑을 비판해야 ‘까기’가 아니다. 스스로 물질문명을 거스를 수 있으면서, 흙을 돌보아 자급자족을 이루며 언제나 웃음꽃으로 오순도순 살림을 가꾸는 아주머니 한 분 삶은 ‘새로운 눈빛으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공장 일꾼 한 사람은, 공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매무새로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일꾼은 그물을 던지고 걷어들이면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시골 할매와 할배는 풀을 뜯고 나락을 거두는 시골살이를 조용하면서 아름답게 빛내면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뛰노는 맑은 몸짓으로 ‘박근혜 까기를 이루는 모습’이 된다. 4347.6.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