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100만 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 님 책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 님 책은 ‘여행 사진책’ 한 권만 장만했습니다. 이분 다른 책은 이웃님이 열 권 남짓 선물해 주어, 우리 도서관학교 책꽂이 한쪽에 얌전히 꽂아 놓은 적이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둘러싸고서 꽤 예전부터 ‘100만 권’이라는 이름이 달라붙었습니다. 이 ‘100만 권’이라는 숫자를 좀 새롭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100만 권”은 으레 ‘작가 한 사람 책을 한 군데 출판사에서 100만 권 팔아서 돈을 버는 일’로만 다룹니다. 이러한 일은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가꾸어 보아야지 싶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테두리를 넘어서, 우리는 “100만 권 1작가” 아닌 “1만 권 100작가”라는 밑바탕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싶어요. 한 작가 책만 한 군데 출판사에서 100만 권 팔아치워서는 책마을은 더 뒤틀리고 말아요. 백 군데 출판사에서 백 사람에 이르는 작가를 놓고서 백 가지 책이 나와 저마다 만 권씩 팔릴 적에 책마을이 바르게 서리라 느껴요.


  송인서적 같은 도매상은 ‘더 많은 책을 한 가지 책으로 잔뜩 팔 수 있는 큰 출판사’에 결재를 훨씬 잘 해 줍니다. 한 달에 백 권쯤 파는 작은 출판사 결재는 으레 미루거나 어음으로 돌리곤 하지요. 이런 얼거리는 앞으로 몽땅 갈아엎어야지 싶어요. 그리고 ‘책을 사고파는 숫자’라는 테두리에서도, “백 작가 만 권씩 백만 권”이 될 수 있는 터전을 닦아야 할 테고, 이렇게 밑바탕부터 제대로 다지면서 책마을을 살리는 길을 걸을 적에, 머잖아 “100만 권 100작가”를 이루는 한국 책마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백 사람에 이르는 작가가 저마다 100만 권을 사랑받도록 할 수 있고, 천 사람에 이르는 작가가 저마다 100만 권을 사랑받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작게 한 걸음부터 내딛으면 말예요. 2017.3.1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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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지지율과 천성산



  대통령이 되면 국가보안법부터 없애겠다고 한 이가 있으나 막상 대통령이 되고서 국가보안법을 안 없앴다. 이리하여 그 뒤 스무 해가 흐른 오늘날 우리는 참 그악스러운 모습을 여러모로 보고 겪는다. 대통령이 되면 자연생태를 지키겠다고 한 이가 있으나 정작 대통령이 되고서 자연생태를 망가뜨리는 길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그 뒤에 곧장 4대강 막개발이 이루어졌고, 이 삽질은 그치지 않는다. 지지율이 높다 한들, 대세론이 어쩌고 한들, 이들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나아질 낌새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보안법도 자연생태도 군대도 평화도 기본소득도 시골살림도 이들 마음속에 아직 제대로 깃들지 않았다면 누가 대통령 자리에 서도 똑같을밖에 없다. 2017년부터는 예방주사를 강제접종으로 바꾼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이나 미국에 견주어도 예방주사 성분이 안전하지 않은데 이를 놓고 제대로 살피는 보건행정은 여태 없다. 돈(경제)에 얽매이면서 평화와 숲과 시골과 살림과 이웃을 사랑하는 손길에 마음을 쏟지 못하는 정치라면, 이런 이들이 대통령 자리에 서서 어떤 일을 하겠나. ‘경제 살리기’를 하지 않아야 뒷돈을 먹이려는 정치가 사라지면서 경제가 산다. 경제 살리기를 핑계로 삼으면 언제나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정치와 경제마저도 모두 망가뜨리는 줄 깨달아야지 싶다. 삶과 살림을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가다듬으려는 마음이어야 비로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본다. 문재인이 대통령 비서로 일하며 ‘천성산 죽이기’와 ‘경제 살리기’를 나란히 일삼은 몸짓이 무엇을 끌어들였는가를 곱씹는다. 국가보안법은 나라를 지키지 않았고, 4대강 사업은 4대강을 살리지 않았다. 경제 살리기는 경제를 살리지 않았고, 의무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넣는다. 예방주사는 무슨 끔찍한 길로 갈까? 군대가 평화를 지켰는가, 아니면 군대가 부정부패와 폭력과 군사주의를 퍼뜨렸는가? 2017.2.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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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대학교수 이인화



  ‘류철균’이라는 이름을 쓰는 대학교수가 이화여대에 있다고 해요. 이녁은 글을 쓸 적에는 ‘이인화’라는 이름을 쓴다는데, 박정희를 우러르는 소설책을 당차게 내놓기도 했어요. 저는 이이가 무엇을 하든 쳐다볼 일이 없습니다. 박정희가 좋아서 박정희 머리카락을 핥겠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그러려니 할 뿐이에요. 그런데 이이는 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하고, 요즈막에 ‘정유라 특혜’를 준 교수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오르내려요. 이이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요? 최순실 옆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교도소는 남녀를 따로 모시니, 옆방에는 못 들고 한집에 들 수는 있으려나요? 아니면 앞으로도 대학교수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최순실 한 사람이 온 나라 구석구석을 잘 뒤집어 줍니다. 2017.1.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람과 책읽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37&aid=000014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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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선수 이재영



  터키에서 배구선수로 뛰는 김연경 님이 있습니다. 배구를 모른다면 왜 터키라는 나라에 가서 배구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지만, 터키 배구리그는 가장 셉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수일 때라야 비로소 터키리그에 들어갈 수 있고, 터키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받는 돈도 가장 높아요. 배구선수 김연경 님은 공격도 잘하지만 수비도 빼어나게 잘합니다. 두 가지를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지만, 이 두 가지를 시원시원 잘하는 배구선수가 바로 김연경 님입니다.


  한국에서 배구선수로 뛰는 이재영 님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프로선수가 된 지 세 해째인데, 처음에는 ‘공격만 잘하는’ 선수였어요. 이처럼 하나만 잘하는 사람을 놓고 ‘반쪽짜리’라 하지요. 그런데 배구선수 이재영 님은 프로선수로 세 해째 뛰는 요즈음 ‘수비를 가장 잘하는’ 선수로 거듭났습니다. 공격도 공격대로 잘하지만, 지난 이태 동안 뼈를 깎듯이 땀을 흘려서 ‘이녁한테 너무 못하던 수비’까지 훌륭히 해낼 만큼 달라졌어요.


  한 가지만 잘하기도 쉽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둘 다 잘하기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한 가지’를 내려놓고서 ‘제대로 못하는 다른 한 가지’를 잘하도록 뼈를 깎기가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잘하는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밥벌이가 되거든요.


  ‘잘 못하는 한 가지’를 잘할 수 있도록 하기까지 뼈를 깎아도 꽤 오래 걸릴 만해요. 그렇지만 잘 못하던 한 가지를 가다듬는 품은 어쩌면 한두 해나 두세 해쯤이면 넉넉할는지 모릅니다. 서너 해나 너덧 해라고 해도 ‘그리 길지 않을’ 수 있어요. 다섯 해나 열 해를 들여서 ‘잘 못하는 한 가지’를 ‘잘하도록’ 고칠 수 있을 테고요.


  문득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는 스무 살 언저리에 신문배달을 하며 오른손으로 신문을 넣었으나, 오른손을 다친 날에는 며칠 동안 ‘왼손으로 신문 넣기’를 해야 했어요. 그때 거의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아무래 ‘오른손으로 신문 넣는 일’을 잘하더라도 이 오른손이 다치면 말짱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하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일부러 왼손으로 수저질을 하고, 왼손으로 칼질을 하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왼손으로도 신문을 집어서 접고 던질 수 있도록 애썼어요. 얼추 여섯 달쯤 이렇게 하니 왼손으로도 신문을 잘 집어서 접고 던질 수 있더군요. 2016.12.27.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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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ㅂ씨



  미술평론가 ㅂ씨가 있습니다. 이분은 몇 해 앞서 나한테 ‘헌책방 사진’을 줄 수 있느냐고 물은 적 있습니다. 이분이 어느 매체에 실은 글로 책을 내는데, ‘헌책방’ 꼭지에서 내 사진을 쓰고 싶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한 장을 쓰든 열 장을 쓰든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 사진을 쓰실 적에는 ‘사진 사용료’를 주어야 하고, ‘사진 저작권’은 ‘사진을 찍은 나한테 있을 뿐, 사진을 사용하는 ㅂ씨한테 있지 않다’는 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책에 ‘사진 작가 이름을 밝혀야 한다’는 뜻으로 답장을 썼어요. 그랬더니 ㅂ씨는 사진 사용료를 주기 어렵다 했어요. 책에 ‘사진 작가 이름을 실을 수도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사진 사용료’란 십만 원이나 이만 원이나 그런 돈일 수도 있지만, 책이 나올 적에 책 두 권쯤 주어도 사진 사용료로 값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 사진을 써서 책을 내겠다고 하면서 막상 ‘사진 사용료로 책 두 권이나 한 권조차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내 사진을 쓰면서 내 사진을 썼다는 대목을 그 책에 밝히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내 사진을 이녁한테 줄 수 없다고 했어요. 이래저래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렇지요. 나로서는 미술평론가 ㅂ씨한테 ‘그렇다면, 책 한 권조차 주지 못한다는데 내 사진을 함부로 줄 수 없다’고, ‘무료 사용’을 바라신다면 ㅂ씨 스스로 헌책방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서 실으면 될 노릇이 아니냐고 대꾸할밖에 없습니다. 내가 찍은 헌책방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이녁 책에 쓰고 싶다면 마땅히 사진 사용료를 주고, 사진 저작권을 또렷이 밝혀야 할 텐데, 이 두 가지 모두 못하겠다면 나로서는 그분한테 어떻게 내 사진을 함부로 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노릇이에요. 이러고서 그 미술평론가 ㅂ씨하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이녁이 쓰는 글은 글삯을 받아서 책을 내면서, 이녁 책에 함께 쓰이는 사진을 놓고는 아무 대접을 해 주지 못하는 분이라면, 이분은 ‘출판·문화·평론·예술·사진’하고는 동떨어진 일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요새 ‘문단 성폭력’하고 얽혀 여러모로 말밥에 오릅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럴 만하네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2016.11.2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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