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55 :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고도 말합니다. 책을 읽어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아름답습니다. 책을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고도 말합니다. 내 마음을 옳고 바르게 가다듬도록 날마다 힘쓰지 않는다면 내 삶은 어느 하루라도 아름답기 어렵습니다.

 책이란 종이에 글을 찍을 때에 책이라 합니다. 종이에 글을 찍어도 얇은 종이에 찍어 날마다(또는 주마다) 내놓으면 신문이라 합니다. 종이에 글을 찍어도 다달이(또는 여러 달에 한 번) 내놓으면 잡지라 합니다.

 책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되새기면 ‘글을 모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야기꾸러미를 글로 담았고, 이렇게 담은 글을 낱권으로 묶어 책이라 하겠지요. 책 가운데에는 얇은 책이 있고 두꺼운 책이 있으며 여러 권짜리 책이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이어도 책입니다. 글이 없이 그림이나 만화나 사진으로 이루는 책이 있습니다. 글만 빼곡한 책이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이든, 글을 담든 그림을 담든 만화를 담든 사진을 담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책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을 때에 책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이로 묶은 책을 읽기도 하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하고 사귀면서 ‘사람책’을 읽는다고도 합니다. 사람책을 읽기 때문에, 꽃책이나 나무책이나 하늘책이나 바다책을 읽을 수 있겠지요. 봄에는 봄책을 읽고 겨울에는 겨울책을 읽습니다. 비가 오면 비책이요, 눈이 오면 눈책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넋을 살려 사랑책일 테고, 믿음을 건사하는 사람은 믿는 얼을 북돋아서 믿음책일 테지요.

 살림을 하는 사람한테는 살림책입니다. 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일책입니다. 놀이를 하는 사람한테는 놀이책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노래책이요, 춤을 추면 춤책입니다. 어느 책이 더 나은 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은 모자라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뜻이 있습니다. 책마다 값이 다릅니다.

 나로서는 내 하루를 아름다이 일구며 어여삐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손에 쥐는 책입니다. 아낌없이 사랑하는 내 삶이기를 바란다면, 나로서는 내 삶을 아낌없이 사랑할 넋을 보듬는 책을 바라봅니다. 심심풀이처럼 시간죽이기를 바란다면 심심풀이를 하는 책이나 시간죽이기를 하는 책을 바라보겠지요. 지식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지식책에 손이 갑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이름값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처세책이나 경영책이나 자기계발책에 손길이 갑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책을 읽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책을 종이책으로만 읽을 수 있고, 책을 사람책이나 삶책이나 자연책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책 하나에 사랑을 담으면서 살아갈 수 있고, 내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를 알뜰히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살림집을 아기자기하게 보살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4344.3.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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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에 보내는 글입니다) 

 

 책으로 보는 눈 154 : 반공문학과 친일문학

 요즈음에는 ‘반공문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공문학 따위를 써 보았자 읽을 어린이가 없을 뿐더러 부질없기 때문입니다.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닌 1980년대 끝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은 온통 반공문학투성이였습니다. 어른문학은 반공문학 울타리에 섣불리 갇히지 않았으나 어린이문학은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렇다고 이 나라에서 ‘친공문학’을 하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반공문학만큼이나 친공문학은 덧없습니다. 어떤 주의주장을 내세워 어린이한테 억지로 쑤셔넣으려고 하는 무서운 짓을 일컬어 문학이나 교육이라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착하며 슬기롭고 아름다이 자라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린이문학이 어른문학과 견주어 오래도록 찬밥처럼 내몰린 탓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아무래도 반공문학이 큰힘을 떨치면서 동심천사주의가 끝없이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 반공문학이든 친공문학이든 요즈음에는 찾아볼 길조차 없으나, 동심천사주의문학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나돕니다. 어린이문학이라면 그저 어린이문학이어야 할 텐데, 어린이를 어린이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동심천사주의를 비롯해 과학동화이니 철학동화이니 성교육동화이니 생활동화이니 하는 이름을 자꾸 덕지덕지 갖다 붙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요, 문학은 문학입니다.

 이 나라 어린이문학에서 반공문학이든 친공문학이든 동심천사주의이든 처음부터 등을 돌릴 뿐 아니라, 아이들이 아이들 삶을 사랑하며 착하게 어깨동무하도록 이끄는 문학을 했던 분은 이원수 님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몸이 아파 숨을 거두기까지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은 언제나 어린이 자리에 서서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원수 님조차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문학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로서는 너무 슬프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어린이문학을 홀로 꿋꿋하며 튼튼히 지킨 어른조차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문학을 했습니다. 1942년과 1945년 사이에 친일문학을 쓰셨으니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당신 얼굴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이원수 님은 다른 ‘친일문학 작가’하고는 달랐습니다. 다른 친일문학 작가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과 한국전쟁 뒤로도 권력자한테 달라붙으며 독재부역문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원수 님 한 사람은 마치 온몸으로 죄를 씻으려는 듯이 어린이문학 창작과 번역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낼 뿐 아니라, 젊은 어린이문학가들이 반공문학이나 동심천사주의문학이나 독재부역문학이 아닌 참다운 어린이문학을 하도록 돕거나 북돋았습니다. 이원수 님 땀과 씨를 받아 이오덕·권정생·임길택 같은 어린이문학 창작과 비평이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뿌리깊은 나무》 1980년 5월치 ‘털어놓고 하는 말’이라는 꼭지에서라도 이원수 님이 ‘친일문학 뉘우침’을 했어야 한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서슬퍼런 독재시절에 어린이문학을 외로이 지킨 사람한테 요즈음 같은 ‘자기고백(커밍아웃)’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원수 님은 목숨이 끊길 듯 말 듯하던 병원 침대에서 입으로 더듬더듬 마지막말을 남깁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 춥지도 않니? / 동동동 떠다니는 / 물오리들아 / 얼음장 위에서도 / 맨발로 노는 / 아장아장 물오리 / 귀여운 새야 / 나도 이젠 찬바람 / 무섭지 않다 / 오리들아, 이 강에서 / 같이 살자.” (4344.3.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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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3 : 사람을 쓰는 책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집에서는 어린 딸아이하고 책을 읽고, 집 바깥으로 나오면 멧골학교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우리 살림집 위쪽으로 멧길을 따라 올라가면 멧기슭에 이오덕학교가 있고, 이곳에서 어린이랑 푸름이하고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읽는 책은 어른인 제가 고릅니다. 어른인 제가 아이들하고 읽는 책을 고른다고는 하지만, 저 스스로 읽으며 참으로 좋다고 느낀 책이기에 아이들하고 함께 읽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찬찬히 읽으면서 마음이 넉넉해지거나 따스해진다고 느끼는 책을 아이들하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들 나이를 헤아리니, 아이들은 저보다 서른 살쯤 어립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푸름이는 저보다 스물세 살쯤 어립니다. 스물세 해 앞서나 서른 해 앞서를 돌아봅니다. 그무렵 나한테 책을 읽어 준 어른이 있었나 궁금합니다. 아주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었습니다. 어린 나한테 책을 읽어 주려는 여느 어른이나 학교 교사는 몹시 드물었습니다. 아니, 나한테뿐 아니라 내 동무한테도 책을 읽어 주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우리한테 하는 일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와 자습서와 문제집을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교과서부터 문제집까지 우리 머리에 쑤셔박습니다. 때때로 처넣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으며 손꼽힌다는 대학교에 우리들을 더 몰아넣어야 학교이름이 한결 빛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몽둥이를 옆에 끼든 주먹이나 손바닥이나 군화발로 우리를 꾸욱꾸욱 누르든 하면서 시험성적 잘 나오는 시험기계로 우리들을 길들였습니다. 이러니, 책 읽어 주는 어른은 없었어요.

 그런데, 멧골학교 아이들한테 《얘들아 내 얘기를》(새벗,1986)이라는 이원수 님 수필책을 한 꼭지씩 읽히다 보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내 국민학생 때 곧잘 들었다고 떠오릅니다. 어느 분인지 떠오르지 않으나, 공부 때에 우리가 졸립다 하거나 힘들어 하면 으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무렵에는 《얘들아 내 얘기를》에 실린 이야기인 줄 몰랐고,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어린이를 가르치는 어른이 맑으면서 힘찬 목소리로 들려줄 때에 졸음이 싹 가셨습니다. 그래서 멧골학교 어린이한테 이원수 님 동화도 함께 읽힙니다. 요사이에는 《골목대장》(한겨레아이들,2002)을 조금씩 읽힙니다. 어제 함께 읽은 동화에는 “아! 자유를 좋아할 줄 알고 독립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 앵문조는 훌륭한 새가 아닙니까? 갇힌 몸으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들 그게 행복한 생활은 아니겠지요(96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61년에 일제강점기를 되새기며 쓴 동화를 2011년을 살아가는 어린이가 깊이 받아들이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어린이들이 마음밭에 ‘착한 꿈을 키우고픈 어른이 뿌린 사랑씨’ 하나를 심을 수 있으면, 차츰차츰 자라며 나중에 알차며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으리라 믿어요. 책은 한 사람이 참말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북돋우고자 한 사람이 기쁘게(또는 슬프게) 살아온 땀방울을 담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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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2 : 사람이 쓰는 책


 《일본 만화 현대사》(요시히로 코스케 씀,융성출판사 펴냄,1998)라는 자그마한 책이 있습니다. 만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일본만화를 꽤 읽는다 하더라도 쉽게 읽기 힘든 책이니까 이런 책이 있는 줄 아는 분은 드뭅니다. ‘한국 현대사’조차 잘 모르거나 잘 안 살피는 흐름을 생각한다면, 한국 현대사조차 아닌 일본 만화 현대사 같은 책을 애써 찾아 읽으려는 사람이란 드물 수밖에 없겠지요. ‘한국 만화 현대사’ 같은 책조차 한국사람은 안 읽을 테지만, 이런 책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 만화 현대사》를 내놓은 출판사는 안 팔릴 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책을 기꺼이 옮긴 셈입니다. 틀림없이 이 작은 책 하나를 읽으며 우리들이 배우거나 살피거나 느낄 대목이 있으니 냈겠지요.

 이 책을 읽는다 해서 일본만화가 걸어온 발자취를 짚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만화밭이 어마어마하게 크거나 넓기 때문에 조그마한 책 하나로 일본만화를 밝힐 수 없습니다. 만화쟁이 한 사람이 걸은 길만 살펴도 두툼한 책 하나가 될 만하거나 넘치거든요. 얇은 책 하나로 일본만화를 다루려 한다면 아주 깊게 파헤쳐 두루 살피는 눈썰미여야 합니다.

 얇은 만큼 금세 책을 읽고 덮습니다. 그리 잘 쓴 책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글쓴이가 남자이다 보니 ‘남자 어린이’가 ‘남자 어른’이 되는 동안 좋아한 만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신문사 기자입니다. 기자라서 글을 못 쓰란 법이 없으나, 기자는 여느 사람들처럼 글을 홀가분하게 쓰지 못합니다. 기자 또한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과 삶과 만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신문 독자한테 많이 읽힐 글’에 매이기 일쑤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으레 교수·기자·학자·전문가·비평가·작가·교사·유명인사·정치꾼·연예인 들이기 일쑤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쌓아 돈을 벌거나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쓴 책이 책방을 뒤덮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 손에서 태어난 책·농사짓거나 기계를 만지는 일꾼 손에서 태어난 책·어린이나 할머니 손에서 태어난 책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쓰는 수수한 책은 싹틀 땅이 없습니다. 작은 사람이 쓰는 작은 책은 뿌리내릴 터전이 없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들이 지식을 다루는 책이 넘칩니다. 정보를 쌓은 사람들이 정보를 가득 담은 책이 쏟아집니다. 삶을 아끼는 책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책이나 살림을 어여삐 꾸리는 사람이나 흙을 알뜰히 일구는 사람이나 아이를 애틋이 돌보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쓰는 책을 마주하기 매우 힘듭니다.

 글쓴이 이름을 돋보이려는 책은 많습니다. 글쓴이 지식과 정보를 선보이려는 책 또한 많습니다. ‘일본 만화 현대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자 기대(30쪽)”를 나누려 하던 데즈카 오사무 님 넋이 튼튼한 뿌리가 되어 이루어졌다는데, 한국땅 책마을과 사람마을이란, 책터와 살림터란, 얼마나 사랑어린 꿈이나 아름다운 빛줄기가 감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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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1 : 사람을 읽는 책


 사람이 읽는 책은 사람을 읽는 책입니다. 사람을 읽지 못한다면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람은 책으로 사람을 읽어야지, 돈을 읽거나 지식을 읽거나 슬기를 읽거나 정보를 읽거나 시험문제를 읽거나 공식을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읽자면 읽기는 읽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읽는 사람은 사람다움이 아닌 돈과 지식과 갖가지 정보조각에 파묻혀 허우적댑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읽고픈 책을 읽기도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힙니다. 아이들은 책읽기가 놀이입니다. 책으로 읽는 책이라기보다 새로운 삶과 사람과 사랑을 마주하는 만남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책을 읽은 다음 느낌글을 쓰도록 시킨다든지 무엇을 느꼈느냐고 묻는다든지 합니다. 여기저기서 정보를 그러모아 ‘추천 명작 좋은 책’을 잔뜩 읽히려 합니다. 그러면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왜 ‘추천 명작 좋은 책’을 잔뜩 읽히려 하지요? 아이들이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이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빕니까? 아이들이 고운 사람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참다운 사람으로 자라기를 꿈꿉니까?

 어른들이 책을 읽습니다. 바빠서 책이란 거들떠보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고, 바쁘기 때문에 살짝 쉴 겨를에 즐겁게 책맛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쁠 때에는 틈을 내어 읽는 책입니다. 한갓질 때에는 신나게 즐기는 책입니다. 바쁘다고 밥을 거르거나 잠을 미룰 수 없습니다. 거른 밥은 나중에 곱배기로 먹기 마련이요, 미룬 잠은 나중에 몰아서 자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바쁘다며 책을 안 읽는 사람은 나중에 어찌 되나요.

 지식을 얻거나 돈벌 구멍을 찾거나 갖가지 정보조각을 그러모으자며 책을 읽는다면, 이는 책을 읽는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지식읽기·돈읽기·정보읽기입니다. 책읽기가 아닙니다. 사람을 읽을 때에만 책을 읽는다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읽을 수 없고, 사람을 읽지 않는다면 책읽기는 무시무시한 바보짓이 되고 맙니다.

 한 줄을 읽어도 책이고, 열 쪽을 읽어도 책이며, 한 권을 읽든 만 권을 읽든 책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도 사람이며, 만 사람을 만나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만 사람을 겉훑기로 사귀기보다는 한 사람을 옳으며 가까이 사귀는 일이 아름답다’고 머리로 헤아립니다. 참다운 동무 한 사람이 거짓스러운 동무 만 사람보다 훨씬 나으며 좋은 줄을 머리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참다이 읽는 책 한 권과 어설피 읽는 책 만 권은 어떠한가요. 지식으로만 읽는 백만 권하고 삶으로 읽는 책 한 권은 어떠하나요.

 헌책방에서 만화책 《아프리카의 꿈》(문계주 그림,서화 펴냄,1993)을 찾아서 읽습니다. 고등학생 때 벌써 읽은 만화이지만 새삼스럽다 싶어 다시 장만해서 읽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으로 다시 읽기도 하지만, 아예 새로 사서 다시 읽기도 합니다. 읽고픈 책이라면 두 번 세 번 사는 값이 아깝지 않습니다. 읽을 만할 뿐 아니라 선물하고픈 책이기에 여러 권 사서 우리 집 책꽂이에 넉넉히 갖추었다가, 틈틈이 만나는 좋은 벗님한테 기쁘게 선물하곤 합니다. 나한테 좋은 책이니까 언제나 새로 장만해서 거듭 읽은 다음 건사하고, 나한테 좋은 사람이니까 늘 새 마음으로 새로운 책을 선물합니다. 《아프리카의 꿈》 85쪽에 “나와 같이 (아프리카로 다시) 가자. 이제 다시는 널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속으로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버이와 다른 살붙이 모두 잃은 외로운 아이가 아프리카에 버려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아이는 아프리카 수풀에서 자연스레 하나되어 예쁘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이런 만화나 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4344.2.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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