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속의 벚꽃 下 - 완결
고우다 마모라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70



우리는 뭘 하며 사는 사람일까

― 미궁 속의 벚꽃 下

 고우다 마모라 글·그림

 도영명 옮김

 시리얼 펴냄, 2012.12.25.



  나는 시골에서 삽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시골에서 삽니다. 곁님도 시골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사니, 시골살이입니다. 시골에 보금자리를 두면서 시골을 누리는데, 조용하거나 호젓하게 숲이 깃들지는 못하고, 마을에서 지냅니다. 마을에서 지내면서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거나 어우러지는가를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가운데, 시골에 그대로 남아서 시골살이를 잇는 사람은 대단히 적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든 도시에서 나고 자라든,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지냅니다. 도시에서 더러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이 있으나 대단히 드뭅니다. 돈을 꽤 많이 모으지 않고서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할 만합니다. 집과 땅을 살 만한 돈이 있은 뒤에, 또는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시골로 가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지 않으려는 까닭은 아주 뚜렷합니다. 돈이 될 만한 일거리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려 하는 까닭은 아주 또렷합니다. 돈이 될 만한 일거리가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내 아버지가 목숨과 바꿔서 지킨 관음언덕인데, 거기 사는 녀석들은 마치 벌레라도 쫓아내듯 내 아내를 자살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50쪽)

- “카노가와 유키히코 씨는 같이 집단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점에서 가족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는 아직 젊으며, 그 인연이 존재한다면 분명 갱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구형된 ‘사형’에 대해 정상참작을 요구합니다.” (70쪽)




  시골에서 즐겁게 살려고 생각하면서 시골에 남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뒤 시골에 남는 사람이 참 드문데, 시골에 남더라도 왜 스스로 시골에 남아서 살아가려 하는가를 곰곰이 헤아리는 사람이란 더욱 드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시골이라 하더라도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서 시골살이를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교과서나 교육과정이나 교사가 아예 없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언제나 도시만 가르치거나 이야기합니다. 시골도 도시도 그저 ‘도시에 살아야 사람’인 듯 여깁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사람이 어찌 지내는지 모릅니다. ‘땅이 있어 밥은 안 굶겠지’ 하고 여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만, 시골에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릅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넋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직 하나, 돈을 버는 솜씨만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을 벌 줄 알고, 돈을 쓸 줄 압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거나 돈을 굴리는 길을 압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려서 쓰는 길을 압니다. 그뿐입니다.



- “본인의 희망대로 다시 태어나 제대로 된 인간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요. 후후.” “아, 그렇게 되는 대로 의견을 던지진 말아 주십시오. 지금까지 한 회의가 수포로 돌아가니까요.” “큭큭.” ‘뭐, 뭘 웃고 있는 거야. 사람 하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에 대해 얘길 하고 있는 중인데. 어,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거지? 우, 우린 대체 뭐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우린!’ (92∼93쪽)

- ‘재판관들은 아무것도 몰라! ‘집단의 악’에 해결방법 따윈 없으니까,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거란 걸. 해결방법이 있었다면 나도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었지.’ (99쪽)




  오늘날 도시사람은 집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밥을 짓는 길을 까마득히 모릅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에서 밥짓기를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되더라도, 대학교에서 누가 밥짓기를 가르치나요? 아무도 안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밥짓기를 배울 겨를이 있을까요? 입시지옥에 갇혀 골골대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고단한데, 언제 어떻게 밥짓기를 배우겠어요?


  오늘날 아이들은 스무 살이 넘든 서른 살이 넘든, 전기밥솥을 켜고 끌 줄도 모르기 일쑤입니다. 밥물을 어떻게 맞추는가도 모를 뿐 아니라, 가게에서 쌀값이 얼마나 하는 줄조차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가게에서 파는 쌀값이 얼마인 줄도 모르는데, 흰쌀과 누런쌀이 뭐가 다른가를 알 턱이 없고, 겨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나락과 씨나락과 볍씨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르며, 이삭이라든지 벼꽃이 무엇인지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보리와 쌀을 가를 줄 아는 아이는 얼마나 될까요. 콩이 가짓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아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콩밥뿐 아니라 옥수수밥이나 감자밥이나 고구마밥이나 당근밥이나 밤밥이나 무밥이나 콩나물밥이나 …… 온갖 밥을 지어서 남달리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아이는 얼마나 있으려나요.



- “잠깐 나 좀 보쇼, 재판장 양반! 재판장 양반. 잠자코 듣자 하니, 당신 말투는 마치 ‘사형’으로 정하도록 설득하려는 것 같잖소! 처음부터 ‘사형’으로 정해둔 것 같단 말이오!” “아, 아니. 결코 그렇지는.” “당신들 프로 판사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사형’으로 정해 뒀다면, 우리들 같은 법률 초짜를 일부러 불러내서 재판에 참가시키는 의미가 없는 거 아니오? 양형표 따위로 형량이 정해진다니, 당신들, 비싼 월급을 받는 주제에 진짜 편하게 일하는구만!” “무, 무례한 말씀은 삼가 주세요! 저희들은 피해자 및 가해자의 심정이나 증거,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감정을, 감정을 억누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쿠이 씨가 알기나 하세요?” “난 당신들 같은 엘리트가 아니니, 감정을 억누른다는 건 불가능해! 재판장 양반.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우리보다 위 또래인 학생들이 나라를 상대로 싸웠던 것처럼, 좀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싸우지 않았느냔 말이오? 재판장 양반. 당신, 혹시 뭔가를 겁내고 있는 건 아니오?” (126∼129쪽)




  삶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삶을 배우면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삶을 알아 사랑을 깨달으면 언제나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길을 걷습니다. 도시에서 소모품 노예처럼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짓는 길로 가지요. 그러니, 오늘날 사회는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도시에서 소모품 노예로 남아서 일삯(인건비)을 낮추도록 하려고 애씁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소모품이 다 닳으면 곧바로 다른 소모품으로 갈아끼울 수 있게끔 도시에 예비품(실업자)을 잔뜩 쌓습니다.


  삶을 배운 아이들이 굳이 도시에 남을 까닭이 없습니다. 삶을 배운 아이들이라면 도시에 남더라도 아름답게 마을살이를 가꿉니다. 중앙정부에 기대는 삶이라든지 중앙경제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마을 자치’와 ‘마을 공동체’로 나아갑니다. 삶을 배웠으니 마땅히 어깨동무와 이웃사랑을 하지요. 도시에서도 두레와 품앗이를 얼마든지 하지요. 이렇게 되면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됩니다. 그래서, 권력자와 기득권자는 아이들한테 삶을 안 가르치고 입시지식만 가르칩니다. 모든 아이들이 슬기로운 꿈과 생각을 버리면서 ‘대학바라기 기계’가 되도록 내몹니다. 이렇게 해야, 중앙권력이 바라는 대로 모든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거든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 중앙권력한테 무엇이 좋을까요? 권력을 지키고 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마을 자치를 하지 않으니, 중앙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손짓 하나로 권력을 누립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법이 없이 살던 아름다운 숨결’이지만, 도시에 모여 권력에 얽매인 노예가 되면서 ‘법에 붙들린 슬픈 소모품’으로 굴러떨어집니다.



- “나도, 나도 회사에서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나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난 당신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이봐. 이제 진실을 말해 줘! …… 같은 나이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에, 〈포레스트 걸〉의 팬이면서 둘 다 집단 괴롭힘을 당했지. 난 너랑 같은 편이야! 넌 혼자가 아니라고!” (175∼176쪽)

- “본인이 했다고 인정하면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범인으로 만들어지는군요. 우리가, 우리가 아무 죄도 없는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었다니. 이렇게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요?” (186쪽)




  고우다 마모라 님이 빚은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 下》(시리얼,2012)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짤막하게 끝맺는 이야기입니다. 앞권에서는 배심원 제도가 얼마나 바보스러우면서 우악스러운가를 보여준다면, 뒷권에서는 ‘배심원 제도’를 발판으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새로 짓는 길을 열 수 있는 모습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교훈을 받는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좋고 나쁨’이 없는 삶을 깨달아, 언제나 스스로 삶을 지을 때에 즐겁고 아름답다는 소리입니다.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은 말합니다. 사회에 갇힌 사람들은 저마다 수수께끼처럼 제 모습을 감춘 채 참다운 사랑을 잊거나 잃으면서 바보짓을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면서 참다운 사랑을 꿈꾸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웃는다고 말합니다.



- ‘그 녀석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되찾으려고, 그 녀석은, 그 녀석은 필사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 사건의 중요 인물들은 사회에서 뒤처진 그 세 사람은, 심야의 비밀통로 속에서 서로 어깨를 마주하며, 서로를 보듬으며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229쪽)

- “이게 지금의 세대입니다. 저희들은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 온 탓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타인과의 교류를 피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가공의 세계로 도망치곤 합니다. 이게, 이게 당신들이 만든 사회예요.” (232쪽)

- ‘만약 이 재판이라는 비일상을 접해 보고, 열심히 궁리해 보게 된다면, 일반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이후의 각자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지옥 같은 평의도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믿어도 되지 않을가? 재판에 참가한 경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심원 제도의 빛이 아닐까?’ (235∼236쪽)




  우리는 뭘 하며 사는 사람인가요?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요? 돈만 버는 기계인가요? 맛집이나 멋집을 찾아다니는 도시 나그네인가요? 소모품인가요 노예인가요, 아니면 스스로 사람인가요? 저마다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읽을 줄 아는가요? 예배당에 가거나 성경책을 뒤져야 하느님이 있다고 여기는가요?


  한국에는 《여검시관 히카루》와 《교도관 나오키》가 나온 적 있습니다. 한국에 알려진 고우다 마모라(고다 마모라) 님 세 번째 작품인 《미궁 속의 벚꽃》입니다. 책이름처럼 우리는 누구나 ‘숨겨진 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피어날 때를 기다리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름답게 피어나서 환한 꽃빛과 맑은 꽃내음을 둘레에 나누면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 “진실을 얘기해 줘. 난, 바로 너야.” (177쪽)



  법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은 없습니다. 학교가 설 데는 없습니다. 법이 아닌 삶이 있어야 할 뿐입니다. 대통령이 아닌 보금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학교가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쳇바퀴처럼 똑같이 되풀이하는 소모품 삶이 아닌,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짓는 삶이어야 합니다. 잠만 자는 부동산과 같은 아파트 같은 데가 아니라, 나무가 자라고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마당이 있는 보금자리여야 합니다. 온갖 농약과 비닐을 함부로 쓰는 마을이 아닌, 두레와 품앗이와 이웃사랑과 어깨동무로 아름다운 마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가 되는 까닭은 서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 되는 까닭은 서로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서 누구나 즐겁게 동무와 이웃이 될 수 있는 날을 꿈꾸면서 기다립니다. 4347.8.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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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속의 벚꽃 上 - 배심원제도의 빛과 어둠
고우다 마모라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69



누가 누구를 죽였을까

― 미궁 속의 벚꽃 上

 고우다 마모라(고다 마모라) 글·그림

 도영명 옮김

 시리얼 펴냄, 2011.7.25.



  전쟁이 터졌으면, 이쪽에서 저쪽을 죽이든 저쪽에서 이쪽을 죽이든 ‘죽인 짓’이 틀림없지만, 어느 쪽에서나 ‘죽인 잘못을 따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이기 때문에 서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전쟁이기 때문에 죽여도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허울을 쓴 채 서로 죽이기 때문에 자꾸 전쟁이 커지거나 이어집니다. 허울이 전쟁일 뿐, ‘사람 죽인 짓’은 똑같기 때문에,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서로 앙갚음을 할 마음만 가득합니다.



- ‘나, 난 방금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 이렇게까지 살인자가 될 만큼 망가져 버린 건가. 나란 놈은!’ (13쪽)

- ‘결국 갈 곳 없는 피리터가, 사회의 밑바닥을 떠도는 인간이 남을 처벌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는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27쪽)




  죽여도 될 사람이 있을 턱이란 없습니다. 죽어도 될 사람이 있을 까닭이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이라든지, 지구별에서 없애야 할 사람이 있을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있습니다. 눈을 뜨지 않기에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눈을 뜨지 않아서 마음을 열지 못한 탓에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헤아리자면, 여러 독재자가 있습니다. 독재자한테 빌붙어 여느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인 허수아비나 꼭둑각시가 있습니다. 독재자한테 빌붙은 허수아비나 꼭둑각시한테 잘 보이려고 바보짓을 한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재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던 공무원과 교사가 있습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저지르거나 일삼는 사람은 참말 바보스럽기 때문입니다. 바보스러운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부터 한겨레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옛말을 곱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만, 이 옛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예부터 한겨레는 ‘미운 아이’한테 떡을 더 주었을까요?



- ‘정말로, 정말로 내가 맡아도 괜찮은 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내가, 사람을 처벌한다니.’ (29쪽)

- “배심원 여러분은 이 형사사건을 각자의 인생경험에 비춰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53쪽)




  ‘미운 아이’나 ‘고운 아이’란 없습니다. 다만, ‘미운 아이’라 할 적에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 마음이 다친 아이들을 가리켜 ‘미운 아이’라고 에둘러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한테 사랑(떡 하나)을 자꾸 베푼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한 탓에 자꾸 바보스러운 짓을 저지르니, 이 아이들이 아무쪼록 앞으로 제대로 사랑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알도록 이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쥐었던 이들 가운데 참답게 ‘사랑’을 알거나 누리거나 나눈 사람은 거의 없지 싶어요. 사랑을 모르기에 허튼 짓을 저지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했기에 독재정권 서슬 퍼런 칼을 휘두릅니다. 사랑을 나눈 적이 없기에 우악스러운 토목개발과 새마을운동 따위를 밀어붙입니다.


  미운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몹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운 아이만 사랑하고픈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 한다면, 참말로 사랑이라 한다면,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한테만 나눌 수 없습니다. 참사랑이라 한다면, 다 함께 참삶을 이루도록 어깨동무를 하는 길로 나아가리라 느낍니다. ‘밉다·곱다’라는 틀을 씩씩하게 깨부순 뒤, 서로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길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사랑이 된다고 느낍니다.



- ‘지금부터 ‘집단의 악’을 말하려고 한다는 건, 이 여자애도 내부고발을 한 나랑 같은 배신자라는 얘긴데! 대체 왜 피고인 측의, 엄마를 죽인 남자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걸까?’ (116쪽)

- “집단 괴롭힘이 거짓말이라느니 뭐라느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 이 어린애 같은 인간아! 난 진짜 있었던 일을 말하러 온 것뿐인데. 어째서 너 같은 안경잡이 뚱땡이한테 이런 공격을 받아야 되는 건데!” (128쪽)



  고우다 마모라(고다 마모라) 님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 上》(시리얼,2011)을 읽습니다. 일본에 처음 생긴 배심원 제도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그려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배심원 제도가 드리우는 어두움과 빛을 나란히 밝히는 작품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심원이 되고, 어떤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리며, 판사는 어떻게 법을 다루고, 사회는 어떻게 흐르는가를 조용히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집단 따돌림’으로 기나긴 해에 걸쳐서 괴롭던 이가 ‘집단 따돌림을 일삼는 사람’을 죽인다면, 누가 누구를 죽인 셈일까요. ‘살인죄’란 무엇일까요. 집단 따돌림이 없었어도 살인이 있었을까요. 살인죄로 어느 한 사람을 다스린다면 집단 따돌림이 사라질까요.




- ‘자식을 지켜야 할 어머니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식에서 ‘사형’을 선고한 것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미 이 가족에겐 부모 자식 간의 애정 같은 건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170쪽)

- “각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을 제 자식에게 빼앗긴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집단 괴롭힘을 그만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175쪽)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은 ‘집단 따돌림’을 일삼는 이들이 ‘언젠가 앙갚음을 고스란히 받을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저마다 조금씩 품는데, 이 두려움이 차츰 커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더 모질게 집단 따돌림을 일삼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돌림받는 이가 앙갚음을 못 하게끔 더 모질게 밟고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한 사람을 누르면 ‘새로운 폭력’이 안 터질까요. 폭력으로 사람을 눌러서 ‘폭력이 더 없도록’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군대를 키우면 전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이웃나라에 있는 전쟁무기를 모조리 빼앗으면 전쟁이 없이 평화가 이루어질까요?


  만화책이 아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전쟁·폭력·살인·따돌림’ 따위는 언제나 함께 움직이는 얼거리인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과 살인과 따돌림은 바로, 군대뿐 아니라 학교와 회사와 모든 조직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군대가 있으면 되지, 경찰이 있으면 되지, 대통령이 있으면 되지, 뭐가 있으면 되지 …… 하면서, 정작 하나도 될 일은 없는데 스스로 눈을 감습니다.


  군대가 하는 일은 전쟁입니다. 전쟁은 폭력입니다. 폭력은 살인을 낳습니다. 살인으로 나아가는 따돌림입니다. 군대도 경찰도 없어야 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없어야 합니다. 문화도 과학도 없어야 합니다.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삶이 있어야지요. 생각이 있어야지요. 사랑이 있어야지요. 웃음과 노래와 이야기가 있어야지요. 우리는 이 땅에 ‘있어야 할 것’이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아름답습니다. 이 땅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 ‘있지 않아도 될 것’이나 ‘없어야 할 것’만 잔뜩 심은 채 바보짓을 저지르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4347.8.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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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 마을 이야기 1~7 세트 - 전7권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 2012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곱 권이 재빨리 나왔던

<우리 마을 이야기>를 읽은 지 꽤 되었으나

일곱 권 모두를 놓고 쓰는 느낌글은

오늘 마무리를 짓는다.


느낌글 하나를 섣불리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내 몸으로 삭히는 대로

내 마음으로 걸러서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썼다.


6권 이야기를 쓴 뒤

7권 이야기를 쓰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그동안 책상맡에 이 만화책을 놓으면서

자꾸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이 만화를 바탕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는

실마리를 풀어 보려 했다.


아무쪼록 이 만화를 제대로 읽어

삶을 슬기롭게 일구는 이웃들이 늘어나기를 빈다.



7권 :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 (2014.8.23.)

http://blog.aladin.co.kr/hbooks/7116573


6권 : 흙을 배우는 삶 (2013.11.6.)

http://blog.aladin.co.kr/hbooks/6677648


5권 : 삶·교육·꿈을 흙과 함께 (2013.2.22.)


4권 : 함께 살아가는 땅 (2012.11.17.)


3권 : 따뜻이 품는 가슴 (2012.9.13.)


2권 : 10년 걸린 밭, 10년 흘린 밥 (201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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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7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63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

― 우리 마을 이야기 7

 오제 아키라 글·그림

 이기진 옮김

 길찾기 펴냄, 2012.5.31.



  얼핏 잠이 들려고 하다가 찍찍 하고 제법 크게 우짖는 새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뜹니다. 아, 새로구나, 새가 한 마리 나무에 앉아서 놀다가 가는구나. 이 새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나무에 앉았을까요. 이 새는 어떤 먹이를 찾아 우리 집 둘레 나무에 앉았을까요.


  나무 한 그루는 천천히 자랍니다. 새가 앉았다가 가는 나무 한 그루는 천천히 자랍니다. 새 한 마리가 앉을 만한 나무라 한다면, 새 한 마리가 어른으로 큰 뒤 새끼를 낳아 새로서는 기나긴 삶을 모두 누리고 흙으로 돌아갈 만한 나날을 살았지 싶어요. 새 한 마리는 나무 한 그루가 갓 싹이 돋고 줄기가 오를 즈음부터 지켜보았을 테고, 흙을 돌아갈 무렵 나무 한 그루가 우람히 자란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을는지 모릅니다.


  새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만큼 잘 컸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나무는 새를 바라보며, 네 새끼들이 내 가지에 앉아서 쉬겠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우람하게 선 나무에 처음으로 새가 찾아와서 내려앉을 때부터 새와 나무 사이에 이야기 하나 태어납니다.



- 정부는 강제수용이라는 공권력을 들이밀었지만, 땅굴로 기어들어 가고 요새의 울타리에 쇠사슬로 몸을 묶어서 저항하는 반대동맹 사람들에게 그 어떤 손도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공단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듯이 우왕좌왕 요새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가져가거나 경호원들이 소년행동대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했고, 이른 아침에 출동한 불도저 앞에서 농성 하던 학생들을 기동대가 급습해 200명 넘는 부상자와 14명의 체포자를 내기도 했다. (5∼6쪽)

- “실컷 상대방을 두들겨패 놓고 이제 와서 뭔 놈의 대화여. 우리 농사꾼들이 그렇게 물렁하지는 않다 이거여.” “자자, 그래도 이삼 일은 애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잖여. 밭일도 어느 정도 돌보고 요새도 보강하자구.” (10쪽)




  나무가 있는 곳에서 사람이 살아갑니다. 나무가 없는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갈는지 모릅니다만, 사람은 으레 나무가 있는 곳에서 보금자리를 가꾸려 합니다. 섬에서든 뭍에서든, 이 나라에서든 저 나라에서든, 나무가 있을 때에 비로소 집이 섭니다. 그리고, 집이 한 채 선 뒤에 다른 집이 두 채 석 채 찬찬히 섭니다. 다른 집이 하나둘 새롭게 서면 어느새 마을이 섭니다. 서로 돕고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마을입니다. 한집 사람으로 지내는 마을입니다. 한마음이 되고 한몸이 되는 마을입니다. 기쁠 때에 함께 웃는 마을입니다. 슬플 때에 함께 우는 마을입니다. 서로 아끼면서 즐거운 마을입니다. 같이 도우면서 사랑스러운 마을입니다.


  이곳에 마을 하나가 서듯이 저곳에 마을 하나가 섭니다. 곳곳에 마을이 섭니다. 마을은 서로 가까운 자리에 서기도 하지만, 꽤 떨어진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마을은 없기 때문에, 마을마다 말이 다릅니다. 다만, 말이 아주 다르지는 않아요. 웬만큼 다릅니다. 이럭저럭 다르지요. 마을과 마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스스로 제 마을에서 쓰는 말로 이야기를 해요.


  내 마을에서 쓰는 말이기에 더 낫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이웃에서 지내는 마을더러 우리 마을에서 쓰는 말로 바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있는 마을도 우리 마을더러 우리 마을 말을 버리고는 저희 마을 말을 쓰라 할 수 없습니다. 다 다른 마을은 저마다 다른 마을빛을 건사하면서 마을살이를 이룹니다. 다 다른 마을은 서로서로 아름답게 살림을 꾸립니다.



- “선생님! 그렇게 걱정이라면 같이 싸워 주세요!” “요새에 들어가서 함께 싸워요! 다칠 염려는 없어요. 우리가 지켜 줄 테니까!” 30분도 안 돼서 선생들은 도망치듯 돌아갔다. 주위에서 비웃음이 일었다. 선생들은 말로만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했을 뿐, 결국 우리를 저버렸다. 아니, 우리가 선생들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12∼13쪽)

- “와타세 군. 그런 거 없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네. 젊은이들은 생각이 너무 과격해서 탈이란 말여.” “하지만 구와타 아저씨. 불도저로부터 어떻게 요새를 지킨단 말이에요?” “이 싸움은 무저항의 저항으로 간다. 그것이 동맹의 기본 방침이여. 놈들은 지금까지 요새 근처에도 못 왔어. 화염병 같은 걸 던져 봐라. 놈들한테 얼씨구나 공격의 구실을 주는 겨.” “구실이 있든 없든 곧 공격해 올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해요. 그때 허둥대 봤자 이미 늦습니다.” “화염병이 날아다니게 되면 그건 진짜 전쟁이여. 우린 마지막까지 농민다운 싸움을 한다.” (16∼17쪽)




  집이 있고 마을이 있은 뒤에 고을이 있습니다. 비슷한 마을이 곳곳에 모여 고을을 이룹니다. 고을로 아우르는 마을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어깨를 겯을 만큼 살갑거나 가까운 삶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터에 맞추어 저마다 다르게 삶을 가꿉니다.


  고을이 있으면, 고을을 지나 고장이 있습니다. 고장과 고장은 사뭇 다르다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경상도와 강원도는 사뭇 다르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사뭇 다릅니다. 꽤 높다란 멧줄기가 고장과 고장을 가릅니다. 퍽 깊고 넓은 냇물이 고장과 고장을 갈라요.


  우리 마을과 우리 고을로도 넉넉하면서 즐겁기에 굳이 이웃 고장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웃에서도 괜히 우리 고장으로 넘어오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제자리를 지킵니다. 서로서로 제길을 걷습니다.


  바다가 너른 고장이라서 숲이 너른 고장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멧골이 깊은 고장이라서 들이 넓은 고장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느 고장이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겨울이 더 춥든 여름이 더 덥든, 고장마다 사랑스러운 삶이요 나날입니다. 굳이 여러 고장을 하나로 뭉뚱그려야 하지 않아요.



- “사실, 놈들은 그와 다를 바 없는 거대한 폭력을 앞세워 공항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것에 비하면 화염병 정도는 새발의 피지.” “음. 어떤 폭력적인 방법이라도 쓰고 싶을 만큼 열 받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하고 있는 나쁜 짓과 우리들의 폭력을 비교하면 우리 쪽이 훨씬 덜 하다고,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사람을 해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이 말이에요. 뭐랄까,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 같아서, 왠지 버거운 일 같아서.” (19∼20쪽)

- 기동대는 어른들의 머리를 방패로 계속해서 찍어 내리고, 아이들을 움켜쥐고 끄집어 내팽개쳤다. 제2요새는 지옥 그 자체였다. (40쪽)

- “잘 알겄다! 아주 잘 알겄어! 이거이 네놈들의 수법인 게여! 우릴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여! 네놈들은! 오냐, 그렇다면 이쪽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여! 평생 기억해 주마! 오늘 일은!” (42쪽)




  스스로 즐겁게 살림을 가꾸는 사람은 ‘내 집’에서 모든 삶을 이룹니다. 맨 먼저 밥을 짓습니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밥을 지어서 이룹니다. 다음으로 옷을 짓습니다. 남한테서 얻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지어서 이룹니다. 그리고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을 적에는 이웃 손길을 받을 수 있으나, 혼자서도 너끈히 집을 짓습니다. 다만, 혼자 집을 지을 때에는 퍽 오래 걸리지요. 그러나, 오래 걸린다는 생각을 할 일이 없어요.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이루는 삶이니, 집을 천천히 지으면서 즐겁습니다. 조금씩 마무리를 짓는 집 모양을 살피면서 기쁩니다.


  스스로 즐겁게 살림을 가꾸는 사람이 ‘내 집’을 이루는 결대로 하나씩 모여 이루는 마을입니다. 그러니, 한 집만 있어도 이 한 집은 스스로 삶을 이룰 뿐 아니라, 스스로 삶을 이루는 집들이 모인 마을이니, 마을은 언제나 스스로 삶을 이루어요.


  모자랄 일이 없고 아쉬울 일이 없습니다. 집집마다 오순도순 지냅니다. 집집마다 사랑스러우면서 따사로운 노래가 흐릅니다. 노래가 흐르고 이야기가 태어나는 집이 모인 마을이니, 마을살이란 ‘온누리’라고 할 만합니다. 모든 것을 가장 넉넉하고 즐겁게 이룬 삶이니, 언제나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그러니까, ‘집’이라고 할 적에는, 스스로 모든 삶을 이루는 살림을 가꾼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찬 사람이 제금을 나서 지내는 터가 집이 아닙니다. 아파트 한 채나 다세대주택 한 자리가 집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이룰 수 있는 데가 집입니다. 커다란 장비를 써서 수만이나 수십만 채 집을 똑같이 찍어내듯이 만들어야 집이 아닙니다. 집은 나라에서 지어서 줄 수 없습니다. 집은 장사꾼이 지어서 팔 수 없습니다. 나라가 짓거나 장사꾼이 파는 것은 언제나 ‘부동산’이나 ‘재산’입니다.



-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거냐? 아무리 공단이라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던 게냐. 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게냐.” (46쪽)

- “이놈들아! 사람이 올라가 있는 나무를 베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 그러는 게여! 기동대! 네놈들이 그러고도 경찰이여! 어째서 저놈들을 살인죄로 체포하지 않는 거여!” (59쪽)

- 제1차 대집행에 성공한 적들은 앞으로 제2, 제3의 강제수용을 진행시킬 것이다. 거기에 우리 집이 있고 우리 밭이 있고 우리 마을이 있다. 부상자 1400명. 체포자 400명. 이 나라가 우리들의 땅을 빼앗아 간다는 건, 바로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74∼75쪽)

- “저주받을 게여, 반드시. 이 산리즈카를 지옥으로 만들었으니. 아무리, 콘크리트로 땅을 덮어 버린다 해도, 사람의 원한까지 묻어 버릴 수는 없는겨. 우리가 자자손손 이 한을 대물림할 테니께.” (76쪽)




 오제 아키라 님이 빚은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일곱째 권을 읽었습니다. 첫째 권부터 일곱째 권까지 천천히 읽었습니다. 일본 산리즈카 시골마을 사람들이 일본 정부가 밀어붙이려 하던 나리타공항 때문에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으며 힘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슬픔과 고단함이 듬뿍 묻어나는 만화책을 읽는 동안 내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저 산리즈카 사람들처럼 공권력 때문에 두들겨맞지 않으니, 그럭저럭 지낼 만할까요? 그렇지만, 우리 식구가 지내는 전남 고흥은 군수와 군청 공무원이 포스코와 손을 맞잡고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이태 앞서 이 싸움을 끝냈습니다만, 아직 불씨는 있어요. 게다가 고흥군 군수와 공무원은 다도해 국립공원 바닷가와 맞닿은 숲을 광주시 교육청에 강제수용을 해서 팔았어요. 그러고는 갑작스레 청소년수련원 공사를 밀어붙였지요. 아름드리 숲을 하루아침에 밀어 없앴습니다. 국립공원이던 곳을 조용히 풀더니 하루아침에 강제수용으로 팔았을 뿐 아니라, 숲도 바다도 몽땅 어지럽힙니다. 아름다운 바다라고 해서 해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전남 고흥 발포 바닷가를 찾아왔으나, 이제 아무도 발포 바닷가에 가지 않습니다. 청소년수련원 건물을 와장창 지으면서 숲과 바다를 모조리 어지럽히니,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져요. 다른 고장 사람들뿐 아니라, 고흥사람인 나조차도 아이들하고 발포 바닷가에 안 갑니다. 무시무시한 짐차가 수없이 오가는 길이 안 좋기도 하고, 바닷물이 공사장 때문에 더러워져요. 이런 곳에 갈 까닭은 없습니다.


  일본 산리즈카에서 일본 정부가 ‘덜 민주스럽게’ 몰아붙였으면, 나리타공항은 짠하고 금세 태어났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영종도와 용유도에서처럼 한국 정부가 ‘우악스레 강제수용을 해서 밀어붙’이면, 척하고 공항 하나 쉬 들어섭니다.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인천공항 반대’를 외쳤을까요. 예쁜 갯벌을 없애고 예쁜 섬을 밀며 예쁜 소금밭을 망가뜨리면서 공항을 지었을 뿐 아니라, 용유와 영종에 깃든 시골집을 모조리 없애고 아파트로 바꿉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민주’가 있을는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민주가 제대로 힘을 내지 않습니다. 아니,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민주에 눈길을 둘 겨를이 없습니다. 모두들 제 코가 석 자입니다. 사람들은 제 코가 넉 자요 닷 자입니다.



- “농사꾼은 말이여, 마을이 있기 때문에 농사꾼인겨. 농사꾼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겨. 마을사람들이 죄다 조건파가 된 그때 이미 이와야마는 할배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된 겨. 할배는 말이다, 마을이 짓밟힌 거에 대한 분노로 지금까지 버틴 게여. 공단에 땅을 팔건 안 팔건 상관없는 겨. 이미 처음부터 빼앗긴 거였어.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여.” (115쪽)

- 11명의 학생들이 올라탄 요새의 철탑이 크레인에 끌려 넘어졌다. 거기에 비축해 두었던 화염병에 불이 붙어 몇 사람이 불길에 휩싸였다. 기동대가 환성을 질렀다. 전장이 광기에 휩싸이고, 전쟁은 끝이 났다. (158쪽)

- 기동대는 우리에게 있어서 마을을 위협하는 냉철한 폭력장치일 뿐이었다. 그들과 부딪히면 반드시 몇 사람인가는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상처입었다. 때문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와 같은 가족이 있다거나 다정하게 아이들과 함께 놀며 즐거운 휴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은 채 산리즈카에 왔었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163쪽)




  경상도 밀양에서 송전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 한국에는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없는 모습을 잘 읽을 만합니다. 그런데, 밀양 송전탑에 앞서, ‘핵발전소’가 먼저입니다.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한국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신문·방송은 무엇을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글쟁이와 교사와 교수 같은 이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핵발전소를 처음 지을 적에 학교는 무엇을 했을까요.


  모든 언론과 학교는 중앙정부 권력을 등에 업고 ‘핵발전소는 깨끗하고 안전하며 돈이 적게 드는 전기’라고 떠벌였습니다. 가장 비싸며 가장 무시무시하고 가장 끔찍한 전기인 줄 가르친 학교는 없었다고 느낍니다. 핵발전소가 어떤 곳인지 낱낱이 밝히거나 알린 신문이나 방송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커다란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박을 돈이라면, 집집마다 ‘자가 발전’을 하는 시설을 갖추고도 돈이 아주 많이 남습니다. 집집마다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쓰도록 시설을 갖추는 데에 들이는 돈은 아주 적습니다. 게다가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흙도 바람도 물도 더럽히지 않습니다. 공장이나 아파트나 큰 건물에서도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쓰도록 하면 됩니다.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집집마다 만들어서 쓰는 전기가 남으면 이를 모아서 큰 건물이나 공장이나 아파트에 보낼 수 있어요. 이런 장치는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앙정부는 이런 일을 안 했고 아직도 안 하며 앞으로도 안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전기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면 ‘권력 통제’가 안 되어요. 커다란 발전소를 세워서 중앙정부가 ‘통제’를 해야 사람들을 마구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하면 전기만 뚝 끊어도 돼요. 도시에서는 전기와 가스와 물을 뚝 끊으면 아마 도시사람 모두 며칠 만에 모조리 죽을 수 있어요.



- 할머니네 집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없었다. 비겁한 눈속임으로 치러진 대집행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피붙이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고독한 할머니의 자그마한 논과 집을 국가가 무력으로 뿌리째 뽑아 앗아갔다. 아니, 빼앗긴 것은 그냥 논과 집이 아니다. 그곳은 할머니에게 있어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 작은 생명을 지켜 주는 단 하나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피곤할 때는 해님에게 인사하고, 빨래해 널고 목욕하고, 술 두 잔 정도 하고 자면……. (176∼177쪽)

- ‘나는 이제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항을 분쇄할 때까지 온힘을 다해 주세요. 공항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쩌면 결혼을 해서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나 나는 심지가 약해서 이 싸움을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네요. 보다 인간답게 살아 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정말로 국가권력이라는 것은 무섭네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농사꾼의 생명을 빼앗고 때리고 짓밟으니까요.’ (194∼195쪽)




  권력이 싫어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자급자족’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면서 삶을 가꾸는 일을 권력이 아주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을 줄 알면, 권력은 아무 힘을 못 써요. 정치권력뿐 아니라 경제권력도 힘을 못 씁니다.


  사람들이 밥이며 옷이며 집을 ‘회사에서 번 돈을 써서 가게에서 사다 쓰도’록 사회 얼거리를 짜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행정과 과학을 비롯한 모든 권력이 힘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모시와 삼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어 입는다면, 옷공장이나 옷회사는 모두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숲을 가꾸어 숲에서 나무를 몇 그루 얻은 뒤 집을 지으면, 건설회사와 자동차회사와 석유회사 모두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제 터를 집숲으로 가꾸어 밥을 손수 지어서 먹으면, 식품회사와 약품회사와 병원과 백화점뿐 아니라 모든 도시 얼거리가 무너집니다.


  권력은 도시를 지키려고 사람들한테서 ‘자급자족’이라는 열쇠를 빼앗습니다. 권력은 도시를 키워 사람들을 바보나 노예나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도시에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거나 전문직이 되거나 운동선수나 예술가 따위가 되어 돈을 버는 길’을 찾도록 이끕니다. 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밥·옷·집을 스스로 짓는 길을 안 가르칩니다.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은 밥이나 옷이나 집에 아이들이 눈길을 못 두도록 가로막습니다.


  더 헤아려 본다면, 인문책도 사람들한테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떤 인문책도 사람들한테 밥을 스스로 짓고 옷을 스스로 지으며 집을 스스로 지으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떤 인문학자와 철학자와 교육자도 사람들한테 밥·옷·집을 스스로 가꾸어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을 뿐더러, 말할 만한 슬기나 깜냥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는 인문책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나오는 인문책도, 그저 지식조각입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조각을 채우도록 이끌 뿐입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지식조각만 가득 채워서 스스로 밥도 모르고 옷도 모르며 집도 모르게 내몹니다. 사람들이 그저 돈을 벌어 돈으로 밥과 옷과 집을 사서 쓰도록 이끌듯이, 모든 인문책은 사람들이 ‘자꾸 새로운 인문책을 사서 새로운 지식조각을 머릿속에 쑤셔넣도’록 살살 꼬드깁니다.



- “거기서는 화학비료도 농약도 쓰지 않고 훌륭한 수확을 거두고 있더라.”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신기한 게지. 아니, 신기할 것도 아니여. 나도 요 몇 년 논과 밭의 지력이 떨어진 원인이 뭔지 생각하고 있었다. 흙이 점점 모래처럼 되고 작물도 생생함을 잃고 있어. 농약을 써도 안 써도 해충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여. 이러다가 논밭이 못 쓰게 되고 먹고살 수 없게 되면 투쟁이고 뭐고 다 소용 없는 겨 …… 그게 말여, 미생물농법이라던가, 유기농법이라던가, 퇴비 만들기부터 시작하는 손이 많이 가는 농사여. 보람이 있을 겨. 잘 봐둬라, 뎃페이. 내가 모두에게 이 농법을 전파시킬랑께. 산리즈카에서 공항 이상으로 가치 있는 농업을 만드는 거여.” (214∼215쪽)

- 그 후에도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형들이 긴 재판 끝에 혐의를 벗은 것은 그로부터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리고 정부가 무력으로 반대파를 탄압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21년 후인 1993년이었다. (226쪽)




  우리 마을을 지키는 힘이란, 우리 집을 지키는 힘입니다. 우리 집을 지키는 힘이란 우리 삶을 스스로 지키는 힘입니다. 밥 한 술을 뜰 적에 남이 내 몫을 먹어 주지 못합니다. 내 몫을 남이 먹어서 배가 부르다 하면 그이가 배가 부르지 내가 배부르지 않아요. 옷 한 벌을 입을 적에 남이 내 몫을 입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옷을 걸쳐야 따뜻합니다. 남이 내 옷을 그이 몸에 걸치면 그이가 따뜻하지, 내가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을을 지키려면, 먼저 내가 스스로 내 집을 가꾸는 슬기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오롯한 삶을 가꾸는 집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보금자리 하나’로 있을 때에, 내 이웃은 이웃 나름대로 저곳에서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요. 내가 있고 네가 있어서, 서로 이웃이 되어서, 천천히 마을로 거듭납니다.


  마을이란 사랑입니다. 집집마다 다 다르면서 모두 새로운 사랑이 있을 적에, 이러한 사랑이 하나로 모여 마을이 됩니다. 마을이란 노래입니다. 집집마다 다 다르면서 언제나 새로운 노래가 흐를 적에, 이러한 노래가 하나로 모여 마을이 됩니다.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는 산리즈카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중앙정부 권력에 맞서면서 스스로 ‘집을 지키’고 ‘삶을 가꾸’며 ‘사랑을 노래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기’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삶을 찾고 깨달아 스스로 사랑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입니다. 이 만화책을 읽는 분들이 마음을 따사롭게 덥히는 슬기를 얻을 수 있다면, 《아나스타시아》(블라지미르 메그레 씀) 여덟 권과 《람타 화이트북》(제이지 나이트 씀)을 나란히 읽으면서, 스스로 집숲을 가꾸는 길과 함께 마음길을 닦는 배움터로 찾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스스로 집을 이루어야 스스로 삶을 엽니다. 4347.8.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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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5 - 불꽃이 되어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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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62



평화시장에서 바라던 평화

― 태일이 5

 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09.2.23.



  1970년에 노동자 한 사람이 몸에 불을 붙여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물두 살 앳된 젊은이가 불길에 휩싸여 죽기 앞서 훨씬 앳된 노동자가 수없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역사책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적혔을까요. 통계청 자료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남았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를 다룬 적이 있을까요.


  1970년대에 사회부 기자를 하던 어느 기자는 1970년에 ‘터진’ 일을 취재하면서 ‘특종’을 노린 이야기를 이녁이 쓴 책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이는 그무렵에 ‘전태일 분신자살 후속보도 특종’을 내려고 온갖 짓을 일삼습니다. 신문사 부장이라는 사람은 ‘죽은 노동자가 남긴 일기장’을 찾아서 가져오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고, 사회부 기자는 병원과 전태일 식구가 살던 집 언저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드디어 찾아내고는 몰래 빼돌려서 신문사로 가져와서 특종으로 신문에 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전태일 일기장을 이소선 님한테 돌려주었을까요? 아무렴, 돌려주었으니, 만화책 《태일이》도 나오고, 이에 앞서 여러 가지 책도 나왔겠지요(그러나 전태일 님이 남긴 일기를 몰래 빼돌린 조선일보 기자는 일기장을 곱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일기장은 노동청으로 넘어갔고, 이소선 님이 노동청하고 싸운 끝에 겨우 돌려받았지만, 열 장 남짓 찢긴 채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1977년에 나온 《사회부 기자》(이상현 글,문리사 펴냄)라는 책에 38∼81쪽에 걸쳐 나옵니다. 전태일 님 일기를 빼돌린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였고, 이를 기사로 내어 크게 터뜨립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이상현 님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41쪽).” 하고 생각합니다. 이이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씁니다. 아무래도 1970년대라는 흐름이라면, ‘배운 이’가 ‘못 배운 이’를 깔보는 마음이 아주 마땅하다는듯이 퍼졌을 테며, ‘신문기자라는 권력자’와 ‘노동자라는 기계 부속품’ 사이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졌을 테니, 이런 말이 나올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조선일보 기자라고 할까요.



- ‘그때 장사광주리를 이고 떠나는 만원버스를 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주머니를 보았어. 결국 놓쳤지만!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웃는데 난 웃을 수가 없었어. 삶에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이 생존경쟁에 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 어머니가 떠올랐지.’ (17쪽)





  박태옥 님이 글을 엮고 최호철 님이 그림을 빚은 《태일이》(돌베개,2009) 다섯째 권을 천천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이 아닌 영화에서도, 또 전태일 평전에서도, 이소선 님이 들려주는 이녁 아이 이야기에서도, 전태일 님은 늘 한 가지를 바랐습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어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전태일 님은 ‘대학생 동무 한 사람’만이라도 있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살펴서 배우자니 너무 힘들었고, 막히는 대목에서 물어 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1960∼70년대라고 해서 대학생이 없었겠느냐 싶지만, 평화시장 노동자한테 동무가 되어 준 대학생은 그야말로 없었지 싶어요.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떤 대학생 동무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하거나 여린 사람들 곁에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있을까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가득한 시골마을에 젊은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함께 땀을 흘리거나 흙밥을 먹을까요?


  요새는 ‘농촌봉사활동’조차 거의 안 보이지 싶습니다.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에서 네 해째 지내는데, 이동안 ‘서울에서건 전라도에서건 대학생이 농활을 온 모습’을 아직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고흥에서 나고 자란 뒤 서울로 대학생이 되어 떠난 젊은이 가운데, 봄가을이나 여름겨울에 시골로 돌아와서 일손을 거드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뒤에, 아이를 낳은 뒤에, 시골로 돌아와서 들일을 함께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 ‘함께 일하지만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인 거야. 인간이라기보다는 일만 하는 기계 같은 존재 아닌가? 기계, 기계에는 영혼이 없어. 그러면 우린 뭐지? 영혼이 없는 인간? 인간의 탈을 쓴 기계? 그러다 고장이라도 나면 아주 쉽게 내다 버리겠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이야.’ (23쪽)

- “태일 군이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뭐라 하지 않겠지만 너무 세상을 비판적이고 삐딱하게 보는 것 같네.” “삐딱한 게 아니라 전 세상이 적어도 법대로, 상식대로 굴러가길 원할 뿐입니다. 근로기준법을 모든 공장에서 지키는 것처럼 말이죠.” … “세상은 때론 어쩔 수 없이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될 때가 있다네.” “희생이요? 작은 것들이요? 자신이 원하는 희생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강요된 희생이 싫을 땐 어쩝니까? 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제겐 신앙은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행복입니다.” (68∼69쪽)






  늦여름에 비가 내립니다. 늦여름에 여러 날 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일찌감치 이삭이 패어 고개를 숙인 나락이 있지만, 아직 꽃대가 오르지 않은 나락이 많고, 이제 막 꽃대가 올라 이삭이 패려는 나락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은 비가 와서는 안 되는 날씨라고 할 수 있어요. 해가 쨍쨍 내리쬐어 나락이 고소하게 영글도록 보듬어야 하는 날씨입니다.


  비가 오는 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늦여름에 내리는 비를 놓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이삭이 팰 즈음에 내리는 비가 벼한테 얼마나 나쁠는지 헤아리는 도시사람은,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며 시골을 이웃으로 여기는 사람’은 얼마쯤 될까요.



- “돈이 있으면서도 줄 돈을 안 주는 심보는 또 뭐야?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밀린 돈 못 받고 그만두면 돈 떼이는 게 여기 전통인가 했는데 오늘 정말 통쾌하다.” … “역시 뭉치면 안 되는 일이 없어. 전태일 회장의 밀린 임금도 받아 내고!” “사장들도 그걸 무서워하는 거라고. 우리가 똑똑해지고 뭉치는 거.” (108쪽)

- ‘기침 소리는 언제나 내 가슴을 찌른다. 지금도 많은 여공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 바꿀 수 있을 텐데.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세상에 평화시장의 현실을 알리고 고치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163쪽)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니 어깨동무를 하지 못합니다.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니,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하니, 이 땅에 사랑이나 평화가 깃들지 못합니다.


  슬기롭게 생각할 일입니다. 따사롭게 바라볼 일입니다. 즐겁게 노래할 일입니다.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할 신나는 삶터를 꿈꿀 일입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 전태일 님은 평화시장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랄 뿐 아니라, 막일을 하면서 막일판에서 몸을 쓰는 이웃들한테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사람들한테도 돈에만 얽매여 스스로 이녁 삶을 놓치거나 모르쇠하는 슬픈 굴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을 꾸리는 사장이 노동자 일삯을 떼먹거나 마구 부려먹는다면, 노동자만 고단하지 않아요. 사람을 마구 부리면서 괴롭히는 사람 스스로 마음이 낡습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합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 태일은 경쟁보다는 우애를, 가지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남들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198쪽)





  1970년 11월 13일까지, 독재권력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경찰과 군대 모두 노동자 삶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신문사 기자와 방송국 피디도 노동자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노동자 삶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요. 예배당 목사와 신부는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폈을까요.


  1970년에서 마흔 해가 훌쩍 지나간 오늘날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이곳과 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필까요. 그리고,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 삶을 얼마쯤 헤아릴까요. 덧붙여,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골골거리는데, 이러한 틀을 깨부수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쯤 있을까요. 멈추지 않는 핵발전소와 물질문명을 멈추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전처럼, 그러니까 1970년처럼, 오늘 우리는 서로 외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다만, 외롭지는 않을 뿐입니다. 외롭지 않은 데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요. 어깨동무를 하기를 바라요. 공장은 사장한테 남기고, 정치권력은 대통령한테 넘기고, 대학교는 교수들한테 남기고, 모든 발전소와 물질문명은 부자들한테 넘긴 뒤, 다 같이 도시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 스스로 삶을 스스로 짓고,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7.8.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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