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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속의 벚꽃 下 - 완결
고우다 마모라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70
우리는 뭘 하며 사는 사람일까
― 미궁 속의 벚꽃 下
고우다 마모라 글·그림
도영명 옮김
시리얼 펴냄, 2012.12.25.
나는 시골에서 삽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시골에서 삽니다. 곁님도 시골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사니, 시골살이입니다. 시골에 보금자리를 두면서 시골을 누리는데, 조용하거나 호젓하게 숲이 깃들지는 못하고, 마을에서 지냅니다. 마을에서 지내면서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거나 어우러지는가를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가운데, 시골에 그대로 남아서 시골살이를 잇는 사람은 대단히 적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든 도시에서 나고 자라든,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지냅니다. 도시에서 더러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이 있으나 대단히 드뭅니다. 돈을 꽤 많이 모으지 않고서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할 만합니다. 집과 땅을 살 만한 돈이 있은 뒤에, 또는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시골로 가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지 않으려는 까닭은 아주 뚜렷합니다. 돈이 될 만한 일거리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려 하는 까닭은 아주 또렷합니다. 돈이 될 만한 일거리가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내 아버지가 목숨과 바꿔서 지킨 관음언덕인데, 거기 사는 녀석들은 마치 벌레라도 쫓아내듯 내 아내를 자살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50쪽)
- “카노가와 유키히코 씨는 같이 집단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점에서 가족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는 아직 젊으며, 그 인연이 존재한다면 분명 갱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구형된 ‘사형’에 대해 정상참작을 요구합니다.” (70쪽)
시골에서 즐겁게 살려고 생각하면서 시골에 남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뒤 시골에 남는 사람이 참 드문데, 시골에 남더라도 왜 스스로 시골에 남아서 살아가려 하는가를 곰곰이 헤아리는 사람이란 더욱 드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시골이라 하더라도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서 시골살이를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교과서나 교육과정이나 교사가 아예 없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언제나 도시만 가르치거나 이야기합니다. 시골도 도시도 그저 ‘도시에 살아야 사람’인 듯 여깁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사람이 어찌 지내는지 모릅니다. ‘땅이 있어 밥은 안 굶겠지’ 하고 여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만, 시골에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릅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넋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직 하나, 돈을 버는 솜씨만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을 벌 줄 알고, 돈을 쓸 줄 압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거나 돈을 굴리는 길을 압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려서 쓰는 길을 압니다. 그뿐입니다.
- “본인의 희망대로 다시 태어나 제대로 된 인간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요. 후후.” “아, 그렇게 되는 대로 의견을 던지진 말아 주십시오. 지금까지 한 회의가 수포로 돌아가니까요.” “큭큭.” ‘뭐, 뭘 웃고 있는 거야. 사람 하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에 대해 얘길 하고 있는 중인데. 어,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거지? 우, 우린 대체 뭐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우린!’ (92∼93쪽)
- ‘재판관들은 아무것도 몰라! ‘집단의 악’에 해결방법 따윈 없으니까,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거란 걸. 해결방법이 있었다면 나도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었지.’ (99쪽)
오늘날 도시사람은 집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밥을 짓는 길을 까마득히 모릅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에서 밥짓기를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되더라도, 대학교에서 누가 밥짓기를 가르치나요? 아무도 안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집에서 어버이한테서 밥짓기를 배울 겨를이 있을까요? 입시지옥에 갇혀 골골대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고단한데, 언제 어떻게 밥짓기를 배우겠어요?
오늘날 아이들은 스무 살이 넘든 서른 살이 넘든, 전기밥솥을 켜고 끌 줄도 모르기 일쑤입니다. 밥물을 어떻게 맞추는가도 모를 뿐 아니라, 가게에서 쌀값이 얼마나 하는 줄조차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가게에서 파는 쌀값이 얼마인 줄도 모르는데, 흰쌀과 누런쌀이 뭐가 다른가를 알 턱이 없고, 겨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나락과 씨나락과 볍씨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르며, 이삭이라든지 벼꽃이 무엇인지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보리와 쌀을 가를 줄 아는 아이는 얼마나 될까요. 콩이 가짓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아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콩밥뿐 아니라 옥수수밥이나 감자밥이나 고구마밥이나 당근밥이나 밤밥이나 무밥이나 콩나물밥이나 …… 온갖 밥을 지어서 남달리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아이는 얼마나 있으려나요.
- “잠깐 나 좀 보쇼, 재판장 양반! 재판장 양반. 잠자코 듣자 하니, 당신 말투는 마치 ‘사형’으로 정하도록 설득하려는 것 같잖소! 처음부터 ‘사형’으로 정해둔 것 같단 말이오!” “아, 아니. 결코 그렇지는.” “당신들 프로 판사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사형’으로 정해 뒀다면, 우리들 같은 법률 초짜를 일부러 불러내서 재판에 참가시키는 의미가 없는 거 아니오? 양형표 따위로 형량이 정해진다니, 당신들, 비싼 월급을 받는 주제에 진짜 편하게 일하는구만!” “무, 무례한 말씀은 삼가 주세요! 저희들은 피해자 및 가해자의 심정이나 증거,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감정을, 감정을 억누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쿠이 씨가 알기나 하세요?” “난 당신들 같은 엘리트가 아니니, 감정을 억누른다는 건 불가능해! 재판장 양반.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우리보다 위 또래인 학생들이 나라를 상대로 싸웠던 것처럼, 좀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싸우지 않았느냔 말이오? 재판장 양반. 당신, 혹시 뭔가를 겁내고 있는 건 아니오?” (126∼129쪽)
삶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삶을 배우면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삶을 알아 사랑을 깨달으면 언제나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길을 걷습니다. 도시에서 소모품 노예처럼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짓는 길로 가지요. 그러니, 오늘날 사회는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도시에서 소모품 노예로 남아서 일삯(인건비)을 낮추도록 하려고 애씁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소모품이 다 닳으면 곧바로 다른 소모품으로 갈아끼울 수 있게끔 도시에 예비품(실업자)을 잔뜩 쌓습니다.
삶을 배운 아이들이 굳이 도시에 남을 까닭이 없습니다. 삶을 배운 아이들이라면 도시에 남더라도 아름답게 마을살이를 가꿉니다. 중앙정부에 기대는 삶이라든지 중앙경제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마을 자치’와 ‘마을 공동체’로 나아갑니다. 삶을 배웠으니 마땅히 어깨동무와 이웃사랑을 하지요. 도시에서도 두레와 품앗이를 얼마든지 하지요. 이렇게 되면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됩니다. 그래서, 권력자와 기득권자는 아이들한테 삶을 안 가르치고 입시지식만 가르칩니다. 모든 아이들이 슬기로운 꿈과 생각을 버리면서 ‘대학바라기 기계’가 되도록 내몹니다. 이렇게 해야, 중앙권력이 바라는 대로 모든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거든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 중앙권력한테 무엇이 좋을까요? 권력을 지키고 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마을 자치를 하지 않으니, 중앙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손짓 하나로 권력을 누립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법이 없이 살던 아름다운 숨결’이지만, 도시에 모여 권력에 얽매인 노예가 되면서 ‘법에 붙들린 슬픈 소모품’으로 굴러떨어집니다.
- “나도, 나도 회사에서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나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난 당신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이봐. 이제 진실을 말해 줘! …… 같은 나이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에, 〈포레스트 걸〉의 팬이면서 둘 다 집단 괴롭힘을 당했지. 난 너랑 같은 편이야! 넌 혼자가 아니라고!” (175∼176쪽)
- “본인이 했다고 인정하면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범인으로 만들어지는군요. 우리가, 우리가 아무 죄도 없는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었다니. 이렇게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요?” (186쪽)
고우다 마모라 님이 빚은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 下》(시리얼,2012)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짤막하게 끝맺는 이야기입니다. 앞권에서는 배심원 제도가 얼마나 바보스러우면서 우악스러운가를 보여준다면, 뒷권에서는 ‘배심원 제도’를 발판으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새로 짓는 길을 열 수 있는 모습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교훈을 받는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좋고 나쁨’이 없는 삶을 깨달아, 언제나 스스로 삶을 지을 때에 즐겁고 아름답다는 소리입니다. 만화책 《미궁 속의 벚꽃》은 말합니다. 사회에 갇힌 사람들은 저마다 수수께끼처럼 제 모습을 감춘 채 참다운 사랑을 잊거나 잃으면서 바보짓을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짓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면서 참다운 사랑을 꿈꾸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웃는다고 말합니다.
- ‘그 녀석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되찾으려고, 그 녀석은, 그 녀석은 필사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 사건의 중요 인물들은 사회에서 뒤처진 그 세 사람은, 심야의 비밀통로 속에서 서로 어깨를 마주하며, 서로를 보듬으며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229쪽)
- “이게 지금의 세대입니다. 저희들은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 온 탓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타인과의 교류를 피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가공의 세계로 도망치곤 합니다. 이게, 이게 당신들이 만든 사회예요.” (232쪽)
- ‘만약 이 재판이라는 비일상을 접해 보고, 열심히 궁리해 보게 된다면, 일반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이후의 각자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지옥 같은 평의도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믿어도 되지 않을가? 재판에 참가한 경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심원 제도의 빛이 아닐까?’ (235∼236쪽)
우리는 뭘 하며 사는 사람인가요?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요? 돈만 버는 기계인가요? 맛집이나 멋집을 찾아다니는 도시 나그네인가요? 소모품인가요 노예인가요, 아니면 스스로 사람인가요? 저마다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읽을 줄 아는가요? 예배당에 가거나 성경책을 뒤져야 하느님이 있다고 여기는가요?
한국에는 《여검시관 히카루》와 《교도관 나오키》가 나온 적 있습니다. 한국에 알려진 고우다 마모라(고다 마모라) 님 세 번째 작품인 《미궁 속의 벚꽃》입니다. 책이름처럼 우리는 누구나 ‘숨겨진 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피어날 때를 기다리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름답게 피어나서 환한 꽃빛과 맑은 꽃내음을 둘레에 나누면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 “진실을 얘기해 줘. 난, 바로 너야.” (177쪽)
법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은 없습니다. 학교가 설 데는 없습니다. 법이 아닌 삶이 있어야 할 뿐입니다. 대통령이 아닌 보금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학교가 아닌 마을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쳇바퀴처럼 똑같이 되풀이하는 소모품 삶이 아닌,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짓는 삶이어야 합니다. 잠만 자는 부동산과 같은 아파트 같은 데가 아니라, 나무가 자라고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마당이 있는 보금자리여야 합니다. 온갖 농약과 비닐을 함부로 쓰는 마을이 아닌, 두레와 품앗이와 이웃사랑과 어깨동무로 아름다운 마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가 되는 까닭은 서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 되는 까닭은 서로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구별에서 누구나 즐겁게 동무와 이웃이 될 수 있는 날을 꿈꾸면서 기다립니다. 4347.8.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