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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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4



어머니가 물려주는 노래

― 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글

 민음사 펴냄, 2004.7.10.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적에 아기는 어머니가 여느 때에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느긋하게 자라고 나서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새롭게 자라는데, 이동안 어머니가 아기한테 들려주는 말을 새삼스레 듣습니다.


  아기한테는 어머니 뱃속에서 지낼 무렵과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는 동안에 배우는 말이 새롭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목소리랑 손길을 나란히 누리면서 말을 노래처럼 듣다가,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눈길이랑 몸짓을 나란히 지켜보면서 말을 춤사위처럼 익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온 사랑으로 말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은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입니다.



.. 가난에 갇힌 것보다 /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 ..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



  말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찬찬히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따사로운 사랑노래를 물려주고, 아버지는 슬기로운 삶노래를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따사롭게 흐르는 사랑으로 노래와 같은 말을 물려주고, 아버지는 언제나 한결같이 기쁜 삶으로 웃음짓는 말을 물려줍니다.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이녁 삶을 새롭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으려 하는 어버이는 돈만 많이 벌어서는 안 됩니다. 아기는 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바라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게끔,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사랑을 한결같이 물려줄 수 있을 만한 너른 가슴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기 눈망울을 바라보셔요. 아기 눈망울은 오직 어버이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피자나 케익을 바랄까요? 아기가 떡이나 밥을 바랄까요? 아기는 오직 어머니 젖이랑 물을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젖이랑 물이랑 바람,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아기 몸은 씩씩하게 큽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지요. 바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노래로 불러서 물려주는 사랑스러운 말이 있어야 합니다.



..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 부드러움은 /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갓난쟁이한테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이야기책을 받아먹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만 받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옆에 누이고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동화책을 읽어 준다면, 아기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어버이는 아기가 일찌감치 영어를 잘 배우기를 바랄는지 모르나, 아기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기는 오직 한 가지 목소리만 듣고 싶습니다. 저를 이 땅으로 부른 어버이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으로 저를 바라보는가 하는 대목을 알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삶노래이면서 자장노래이고, 일노래이면서 놀이노래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때에 흔히 부르는 일노래를 귀여겨들은 뒤 저희끼리 놀면서 이 일노래를 놀이노래로 삼아서 부릅니다. 나중에는 일노래를 조금씩 바꾸어요. 노랫가락과 노랫말을 아이 나름대로 바꾸어 새로운 놀이노래를 짓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곁이나 둘레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모든 말을 다 받아먹으니까요. 아이들이 기쁜 눈망울로 아름답게 받아먹을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착하면서 참다운 말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야 하고, 어버이라면 누구나 가장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넋이어야 합니다.



..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 하냐”고요 ..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 사랑 안에 들어가 살고 싶어 / 사랑으로 이승을 건너고 싶어 .. (사랑)



  신현림 님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을 읽습니다. 사랑을 바라고, 사랑을 찾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신현림 님이 젊은 날에 쓴 시를 그러모은 책입니다(그렇다고 신현림 님이 이제는 ‘안 젊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은, 해뜰녘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해질녘에만 아프고, 해뜰녘에는 안 아플까요. 해질녘뿐 아니라 해뜰녘에도 아플까요.



.. 전쟁이나 대구 참사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은 / 어미가 막을 순 없지만 / 네가 그린 코끼리를 하늘로 띄울 수 있고 / 어미의 눈물로 한 사발 밥을 만들 수 있고 / 어미의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 희망의 폭동을 일으킬 수 있지 / 고향 저수지를 보면 나는 멋진 쏘가리가 되고 / 너를 보면 섬이 된단다 / 너라는 근사한 바다를 헤엄치는 섬 ..  (싱글 맘-엄마는 너를 업고 자전거 탄단다)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으면 ‘싱글 맘’ 이야기가 흐릅니다. 신현림 님은 가시내를 낳아 씩씩하게 이 아이와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이가 받아먹을 삶노래를 언제나 싱그러이 부르고, 아이와 함께 어른도 함께 누릴 사랑노래를 늘 해맑게 부릅니다.


  때로는 아픔이 사무쳐서 슬픈 노래를 부르지만,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음짓고는 씩씩하게 기쁜 노래로 고쳐서 부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기쁜 숨결로 거듭나려고 스스로 애씁니다. 이 땅에서 꿈꾸며 노래하는 예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온힘을 기울입니다.



.. 만화는 단추만한 구멍을 뚫어 여유로운 바람을 불어넣는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란 말에 사랑 받는 기분에 휩싸여 오전 열한 시에 쏟아지는 햇살같이 따뜻하고, 창밖 행인들이 아름다워 뵈는군. 시냇물엔 하얀 벚꽃잎이 쌓여 흐르고 봄바람에 보들보들 길이 미끄러지는군 ..  (순정 만화에 중독되겠네)


..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내가 있고 / 여자의 몸보다 사람의 몸이길 바라는 내가 있소 ..  (우울한 육체의 시-생각이 많은 몸)



  어머니랑 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래를 물려받은 아이는 새로운 어른으로 자랍니다. 새로운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다시금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새로운 아이를 낳습니다.


  어제만 바라본다면 슬픔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만 바라본다면 까마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에 이어 찬찬히 찾아올 모레를 바라본다면, 이 앞날을 눈물이나 슬픔으로만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발 새롭게 내딛을 모레에는 기쁜 웃음이 넘치도록 맑은 노래를 불러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는 노래를 불러야지요.


  사람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삶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말 한 마디는 사람노래이면서 사랑노래이고 삶노래입니다.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쇠가시울타리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답게 흐르는 무지개가 되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 나무마저 없다면 이곳은 딱딱한 피자 한 덩이요 / 삭막하오 요즘 사람들은 폭탄 같소 성이 나 있소 ..  (한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가 됩니다. 꽃씨를 심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됩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파란 숨결로 웃는 사람은 스스로 바람이 됩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이루는 꿈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삶을 짓는 어버이나 어른이라면, 가슴에 고운 꿈씨를 심기 마련입니다. 너와 내가 한넋이 되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삶을 이루고 싶은 꿈씨를 심습니다. 우리가 함께 큰 사랑이 되어 넉넉하게 웃음짓는 하루를 짓고 싶은 노랫말을 씨앗으로 심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스러운 말을 물려받은 나는 어느새 새로운 어머니가 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말을 이어받은 나는 어느덧 새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너와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활짝 웃음짓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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