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 시인선 R 3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95



시와 하룻밤

― 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11.30.



  새벽바람을 느끼면서 문득 눈을 뜹니다. 시골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설렁합니다. 설렁설렁 파고드는 바람을 느끼면서, 옆에 누운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고 자는가 하고 살핍니다. 이불을 뻥 걷어차고 자다가 새우처럼 옹크린 아이를 보면 반듯하게 눕힌 뒤 이불을 고이 여밉니다. 이불을 고이 여미어 주면 새우처럼 옹크린 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쥡니다. 밤새 수없이 잠을 깨면서 이불깃을 여미어 준 뒤, 조용한 새벽에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아침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갑니다.



..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  (주치의 h)


..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  (이파리의 저녁 식사)



  황병승 님이 빚은 시를 엮은 《여장남자 시코쿠》(문학과지성사,2012)를 읽습니다. 황병승 님이 쓰는 시를 놓고 ‘실험시’나 ‘현대시’라고 하는 문학비평이 있고, 이녁을 가리켜 ‘문제적 시인’이라고도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실험시나 현대시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나는 문학비평도 잘 모릅니다. 시집을 바라보면 시집을 읽고, 수필책을 마주하면 수필책을 읽으며, 동시집을 손에 쥐면 동시집을 읽습니다.


  곰곰이 보면, 아이들이 쓰는 글이야말로 ‘실험정신’이 가득하고, 언제나 새롭구나(현대시)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떤 굴레에도 안 갇히면서 글을 쓰니까 모든 글이 실험정신이 가득하다고 할 만하며,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낼 까닭이 없으니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글에 담는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글쓰기 학원을 다닌다거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정형 틀에 짜맞추도록 길들이면, 아이들 글에서도 실험정신이나 현대시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 산에 들에 진달래 개나리 피거나 말거나 / 봄을 선언하고 나는 봄 속에 갇혔습니다 ..  (사성장군협주곡)


..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  (여장남자 시코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황병승 님 이야기입니다. 황병승 님이 스스로 겪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요, 황병승 님을 둘러싼 수많은 이웃과 동무가 살아가는 하루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황병승 님이 두 다리를 딛고 선 이 땅에서 짓는 하룻밤을 갈무리한 이야기가 시집 하나에서 찬찬히 드러납니다.


  시는 글잣수를 착착 맞추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줄을 알맞게 띄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쉽게 맑은 낱말을 골라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숲이나 들이나 바다를 노래하는 가락에 실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는 사회를 나무라거나 정치를 꾸짖거나 진보를 외치려는 뜻을 담아서 쓸 수도 있습니다. 아픈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무 괴로워서 죽겠노라 하는 마음을 시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로 쓰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로 쓸 수 없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로 써서는 안 될 이야기는 없습니다.



.. 항상 떼쓰는 사람 이제 다른 시간이에요 당신의 붉은 뺨이 무서워요 새 사람을 만나세요 그만 그만해요 난 죽은 년이잖아요! 단 한 번뿐인 날이에요 날 잊기 위해서 모두들 몰려올 거라구요 ..  (그 여자의 장례식)


.. 나는 일어나지 않았네 꿈이겠거니 했지 자네도 알지 않나 생크림을 한 스푼 떠먹고 잠드는 습관 달콤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나는 계속 잤지 뭐야 잠결에 다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번엔 사부로였지 ..  (혼다의 오·세계五·世界 살인 사건)



  우리 집 다섯 살 작은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다가, 자동차끼리 쿵 부딪히게 해서 ‘사고가 났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여느 어른이 보기에 장난감 자동차는 깨지지도 망가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습니다. 아이 마음속에서는 두 장난감 자동차가 와장창 깨지거나 망가지거나 부서졌습니다. 아이는 이내 두 장난감 자동차를 한손에 쥐고 하늘로 날립니다. 사고가 난 자동차는 곧바로 말끔해졌고, 어떤 추진동력장치도 없이 하늘을 멋지게 납니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이가 누리는 하루를 헤아립니다. 노는 아이들은 저마다 새롭게 이야기를 꾸밉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신나게 놀면서 온갖 이야기를 마음껏 짓습니다.


  아이들 놀이짓은 모두 ‘실험정신’이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낡은 옛 틀에 맞추어서 놀지 않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이곳(현대)’에 맞추어 즐겁게 놉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분들은 어느 시는 서정시요 어느 시는 실험시라고 금을 긋지만, 굳이 금을 그어야 하지 않습니다. 평론을 해야 하니 금을 그을 테지만, 평론이 아닌 ‘시를 쓴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헤아리고 ‘시를 쓴 사람이 지은 삶’을 돌아본다면, 어떤 시이든 제 삶을 찬찬히 아로새기려고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작년 겨울의 일이었네 우리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연주할 수 없었다, 라고 말하면 너희는 오우,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지 ..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 처음으로 누이의 작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 차라리 쥐고 되고 싶었다 /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게 싫어 ..  (너무 작은 처녀들)



  황병승 님은 ‘여장 남자’일까요? 황병승 님을 둘러싼 이웃이나 동무는 ‘여장 남자’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여자처럼 꾸미는 남자’가 있고, ‘남자처럼 꾸미는 여자’가 있습니다. ‘나는 여자이고 싶은데 왜 남자로 태어났을까?’ 하고 끝없이 물으면서 괴로운 사람이 있고, ‘나는 왜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났는가?’ 하고 가없이 되물으면서 고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이러한 뜻이 있습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김없이 어떤 뜻이 있습니다. 괴롭거나 고단하지만, 아프거나 슬프지만, 이 삶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뜻을 찾고 길을 헤아립니다. 이 삶이 온통 가시밭길이지만, 이 가시밭길을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 걸음씩 새롭게 내딛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태어난 새 목숨일까요?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 보람을 누릴 새 숨결일까요? 어디에서 어떻게 살면서 어떤 곳을 바라보아야 내 마음에 기쁜 노래가 흐를 만할까요?



.. 이봐, 이 글은 지옥에서 적는 글. / 너는 끝까지 나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고 우기지만, 입술을 쫑긋거렸을 뿐 / 너는 너무 많은 술과 알약에 빠져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  (How does it feel?)


.. 우리는 이상하게 예쁘게 지구에 남아 / 밤 풍경을 바라보는 쓸쓸한 궤도에서 ..  (앨리스 맵map으로 읽는 고양이좌座)



  내가 스스로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내 삶은 날마다 지옥입니다. 내가 스스로 천국이라고 여기면 내 하루는 언제나 천국입니다. 내가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하면, 김치 한 조각이랑 찬밥을 먹으며 잔칫밥입니다. 내가 스스로 지겹다고 여기면, 잔칫상을 번듯하게 차렸어도 더없이 짜증스럽고 싫습니다.


  내 마음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삶을 짓도록 북돋우는 하느님이 곱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봅니다. 네 마음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네가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사랑을 짓도록 도와주는 하느님이 맑게 노래하면서 너를 바라봅니다.


  내 하느님과 네 하느님이 만납니다. 아침에 흐르는 멧새 노랫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두 하느님이 만납니다. 저녁에 퍼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같이 누리면서 두 하느님이 춤을 춥니다.


  시골에서 울려퍼지는 시골노래가 도시로 흩어집니다. 도시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시골로 번집니다. 하늘이 매캐하거나 뿌옇더라도 온누리를 가득 채우는 밤별은 눈부시게 빛납니다. 이곳에 앓아누운 할아버지가 있으면, 저곳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숨을 거둔 슬픈 이웃 할머니가 있으면, 저곳에 새로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는 기쁜 이웃 아이가 있습니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차근차근 읽으면서 삶노래와 사랑노래와 꿈노래를 가만히 부릅니다. 4348.5.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6-11-04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79993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8&aid=0003667793

황병승이라는 사람을 놓고 이런 대자보가 나왔다고 합니다.
별점을 1점으로 바꾸려다가
그래도 2점을 주는 쪽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