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얼굴 랜덤 시선 12
한영옥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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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4



시와 입술

― 아늑한 얼굴

 한영옥 글

 랜덤하우스 펴냄, 2006.4.10.



  아이가 어버이 볼에 입을 맞춥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어른과 어른이 입을 맞춥니다. 두 어른은 새로운 마음이 되어 볼이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입술은 그냥 입술일 뿐이지만, 이 입술과 저 입술이 만나서 새로운 숨결이 흐릅니다. 바람을 받아들이는 입은 언제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서 둘레에 따사롭거나 차갑거나 포근하거나 매몰찬 기운을 퍼뜨립니다.



.. 들나물꽃은 봄에 피네 / 산나물꽃은 여름에 피네 // 더러는 늦어져 / 여름에도 들나물꽃은 피지 / 가을에도 산나물꽃은 피지 ..  (꽃피는데)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입술이요, 미움을 외칠 수 있는 입술입니다. 꿈을 노래할 수 있는 입술이요, 아픔을 터뜨릴 수 있는 입술입니다. 참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입술입니다.


  어떤 입술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입술이 되어 하루를 여는가요? 서로서로 어떤 입술로 마주할 때에 기쁘거나 즐겁거나 서운하거나 섭섭할까요?



.. 보슬비 마알갛게 얼비치고서 / 국수나무 순 소복소복해지면 / 국수나무 순 삶아 먹고 / 내처 장대비 쏟아지고서 / 국수버섯 소복소복해지면 / 버섯국 끓여 먹으며 ..  (봄비로, 가을비로)



  한영옥 님 시집 《아늑한 얼굴》(랜덤하우스,2006)을 읽습니다. 조곤조곤 흐르는 삶노래를 읽으면서 내 얼굴은 내가 보기에 어떠한가 하고 헤아립니다. 집에 거울을 두지 않고, 어디 가서도 거울을 보지 않기에 내 낯빛이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다만,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내 낯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낯빛이 될 테고 슬플 때에는 슬픈 낯빛이 되겠지요. 아플 때에는 아픈 낯빛이 되다가는 고단할 때에는 고단한 낯빛이 될 테고요.


  반가운 사람하고 있으면 반가운 낯빛이 됩니다. 거북한 사람이랑 있으면 거북한 낯빛이 됩니다.


  문득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반갑게 여길 사람은 나를 반갑게 맞이할까요? 내가 거북하게 여길 사람도 나를 거북하게 마주할까요? 나를 마주해야 하는 이웃이나 동무는 내가 반가울까요, 거북할까요?



.. 목화 송이인 양 굴뚝에 들어가서 / 저녁 연기로 보송보송 다시 피는 / 그런 마알간 날은 만나는 얼굴마다 / 볼수록 목화솜처럼 푸근하여라 ..  (그런 마알간 날)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기에 낯빛을 잘 알지 않습니다. 낯빛은 ‘살갗 빛깔’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낯빛은 ‘마음 빛깔’을 나타냅니다.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은 환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아픔으로 얼룩진 사람은 파리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발그스름하게 따스한 낯빛입니다. 마음이 어둠으로 그득한 사람은 새까만 낯빛입니다.


  어느 곳에 깃들든 따사로운 보금자리라고 느끼는 마음이라면, 어느 곳에 깃들더라도 환한 낯빛이 됩니다. 어느 곳에 머물든 갑갑한 감옥이라고 여기는 마음이라면, 어느 곳에 머물든 새까만 낯빛이 됩니다.


  우리 낯빛은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 낯빛은 마음을 스스로 바꾸면서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기에 감추거나 숨기거나 바꾸는 낯빛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려 할 때에 비로소 바꿀 수 있는 낯빛입니다.



.. 눈 비비며 일어나 몇 걸음 하면 / 큰엄마 계시고 작은엄마 계셨다 / 사촌 언니랑 메뿌리 캐어가면 / 큰엄마 메떡 쪄주시고 / 사촌 동생이랑 소루쟁이 뜯어가면 / 작은엄마 소루쟁잇국 끓여주셨다 / 큰집 사시는 할머니는 쇠죽가마에서 / 뜨끈한 감자알 수북이 골라주셨다 ..  (홍초 잎사귀)



  시집 《아늑한 얼굴》을 생각합니다. 시를 쓴 한영옥 님은 이녁한테 아름답거나 즐거웠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포근한 말씨로 삶을 노래합니다. 시를 쓴 한영옥 님 스스로 아프거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까마득한 이야기를 되새길 적에는 그야말로 아프거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까마득한 말씨로 바뀌어 삶을 풀어놓습니다.


  싯말 하나는 억지로 꾸밀 수 없습니다. 이런 낱말과 저런 말투로 싯말을 엮더라도 속내를 감출 수 없습니다. 시는 문장기교나 수사법이 아닙니다. 시는 문예사조나 유행이나 흐름이 아닙니다. 시는 오로지 마음입니다. 싯말 한 마디는 언제나 마음빛이요 마음결이며 마음씨입니다.



.. 그가 없는 지금, /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 서로를 말아들이며 / 얼굴 속에 집어넣으려 애쓰고 있다 ..  (아슬아슬한 몸)



  그를 만나는 나는 그이 때문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그를 만나는 ‘내’가 있기에, 나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슬러서 시를 씁니다. 그를 만나기에 새롭게 노래하는 몸과 머리와 마음이 될 테지만, 그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바뀌거나 달라지는 것은 바로 ‘내’ 몸이요 머리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 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마주하는 ‘내(글쓴이)’가 스스로 시를 바꿉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거나 되새기는 ‘내(글쓴이)’가 바로 시를 새롭게 쓰는 숨결이고 손길입니다.


  사랑에 입을 맞추고, 삶에 입을 맞춥니다. 꿈자락에 입을 맞추고, 노랫가락에 입을 맞춥니다. ‘내(글쓴이)’ 입술은 사랑과 삶과 꿈을 노래와 같이 맞추면서 춤을 추고 싶은 마음입니다. 4348.5.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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