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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이생진 / 작가정신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시를 말하는 시 96
시와 섬노래
― 거문도
이생진 글
작가정신 펴냄, 1998.8.17.
섬은 바다로 둘러싸인 터전입니다. 뭍은 커다란 땅덩이입니다. 그런데 지구별을 통틀어서 헤아리면, 뭍도 바다에 둘러싸인 터전입니다. 제아무리 커다란 땅덩이라 하더라도 바다가 훨씬 넓어서 뭍을 널따랗게 껴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이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섬도 섬이고 뭍도 뭍인 셈입니다. 굳이 ‘섬’이라는 낱말을 지었다면, 조그마한 땅덩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뭍’은 커다란 땅덩이라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눈길을 넓혀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온누리를 헤아리면, 지구별은 대단히 작은 별입니다. 그야말로 가없는 온누리에 조그맣게 뜬 별조각입니다. 커다란 땅덩이 옆에 조그마한 섬이 있듯이, 드넓은 온누리에 조그마한 지구별이 있습니다.
..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 나는 구름 타고 가고 / 저는 바람 타고 오고 / 나는 끝없는 데로 가고 / 저는 끝없는 데서 오고 .. (시인과 갈매기)
이생진 님이 빚은 시집 《거문도》(작가정신,1988)를 읽습니다. 이생진 님은 거문도에서 고즈넉히 지내면서 시를 길어올립니다. 거문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아니면서 거문도에서 지냅니다. 거문도가 이녁 보금자리가 아니면서도 거문도에 머물면서 바닷바람을 마십니다. 그저 거문도를 마음으로 담아서 사랑하려는 손길이기에 거문도에서 시를 씁니다. 그예 거문도를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껴안으려는 하루이기에 거문도에서 시를 읊습니다.
.. 외롭다는 말을 꽃으로 한 거야 / 몸에 꽃이 필 정도의 외로움 / 이슬은 하늘의 꽃이고 외로움이지 / 눈물은 사람의 꽃이며 외로움이고 / 울어보지 않고는 꽃을 피울 수 없어 .. (혼자 피는 동백꽃)
이생진 님은 ‘성산포’를 노래하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젊은 날부터 ‘바다’를 노래했고, ‘섬’을 그렸으며, ‘갈매기’와 놀았습니다. 그러니, 《거문도》라는 시집을 내놓을 만합니다. 그러면, 거문도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거문도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이야기가 마음으로 하나둘 스며들었을까요.
“담쟁이덩굴이 소나무를 감고 /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구나 / 거기서 하늘이 보이느냐 / 줄기가 있으면 너랑 나랑 감고 올라가 / 하늘을 보자꾸나(가는 곳마다 무덤이)” 같은 이야기처럼, 섬에서 담쟁이덩굴을 보고, 소나무를 보며, 하늘을 봅니다. 담쟁이덩굴이랑 함께 하늘을 보고, 소나무랑 함께 바닷바람을 마십니다.
시 한 줄은 풀줄기처럼 뻗습니다. 시 두 줄은 풀꽃처럼 피어납니다. 시 석 줄은 하늘처럼 파랗게 열립니다. 시 넉 줄은 바닷내음을 물씬 실어나르는 바람처럼 흐릅니다.
.. 고개 넘어가다가 돌에 챘다 / 그래서 무릎에서 피가 났다 / 돌이 내게 돌 던질 리 없으니 / 이는 돌의 잘못이 아니라 / 내 잘못이다 하고 지나가니 / 아무 탈이 없다 .. (돌의 성품)
거문도에서 나고 자라서 늙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문도에서 나고 자랐으나 거문도하고 사뭇 먼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문도라는 이름을 한 번조차 못 들으며 사는 사람이 있고, 한두 차례 거문도를 마실한 적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삶이 흐릅니다. 어디에서나 우리 이야기가 흐릅니다. 거문도에서도 뭍에서도 다른 섬에서도 “쑥 냄새 풍기는 섬 / 가을걷이 한창인데 / 돌담 너머 쑥밭은 / 아직 철모르는 봄이다(동도 쑥 냄새)”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디에서나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볍씨를 심으며, 가을에 나락물결을 만나고, 겨울에 눈밭이 됩니다. 어느 고장에서나 봄에 쑥을 캐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과 소나기를 맞으며, 가을에 너른 하늘을 누리고, 겨울에 얼어붙은 별빛을 마주합니다.
섬에서 살며 섬노래를 부르고, 바다에서 살며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에서 살며 시골노래를 부르고, 서울에서 살며 서울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노래를 즐깁니다. 아이도 노래와 함께 놀고, 어른도 노래랑 같이 일합니다. 노래 한 마디를 읊으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 두 마디를 듣고는 신나게 춤을 춥니다.
.. 등대로 가다가 갯쑥부쟁이꽃을 만나 / 그 옆에 나란히 누워 / 엷은 가슴에 별을 묻고 자다가 들킨 기분 / 우리는 깨어나기 싫었다 .. (녹산 등대로 가는 길 2)
시집 《거문도》를 덮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부산’이나 ‘광주’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거문도에 뿌리를 내려서 사는 시인은 거의 없다시피 할 텐데, 시집 《거문도》는 섬노래가 되어 태어납니다. 서울에 뿌리를 내려서 사는 시인은 대단히 많은데 ‘서울’이라는 이름을 척 붙이면서 서울살이와 서울사람과 서울사랑과 서울내음을 곱게 삶노래로 부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아이가 태어납니다. 섬에서도 뭍에서도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아이가 자랍니다. 어버이는 어디에서나 어버이입니다. 모든 어버이는 모든 아이를 오직 사랑으로 돌봅니다. 모든 아이는 모든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거문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줄 두 줄 적은 싯말은 고요히 번지는 노래가 됩니다. 삶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마음으로 석 줄 넉 줄 쓰는 싯말은 어느새 환하게 퍼지는 노래로 거듭납니다.
나는 오늘 우리 보금자리에서 우리 집 두 아이랑 곁님하고 오늘 하루 부를 노래를 차분히 곱씹습니다. 두 아이는 아침부터 마당에서 앵두알을 훑습니다. 그저께까지는 시큼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달달한지, 두 아이 손이 멈출 새가 없습니다. 4348.6.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