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삶창시선 43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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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3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 집에 가자

 김해자 글

 삶창 펴냄, 2015.7.15. 8000원



  아침에 노래를 틀고 아이들하고 춤을 춥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학교나 유치원을 안 가니 하루 내내 집에서 노는데, 비가 쏟아지는 오늘은 방과 마루 사이에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놉니다. 아직 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늦여름인 만큼, 아침부터 노래하고 춤추면서 노는 아이들은 땀투성이가 됩니다. 자, 이제 실컷 땀을 흘렸으니 물놀이를 해 볼까? 씻는방으로 아이들을 몰아넣습니다. 두 아이 손에 수세미를 하나씩 쥐어 주고 욕조 벽이랑 바닥을 비비도록 시킵니다. 어제까지 물놀이를 하며 고인 물로 욕조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따순 물을 틉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니가 좋으면)



  아이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웃고 춤추면서 노래합니다. 아이들만 춤을 추라 할 수 없고, 아이들끼리만 노래하라 할 수 없습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하고 함께 놀고 함께 일하며 함께 밥을 먹습니다. 함께 호미질을 하고 함께 씨앗을 심으며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밥을 끓이고 달걀을 삶습니다. 내가 짓는 밥은 내 손길이 깃드는 밥입니다. 내 손길은 따스할 수 있고, 그야말로 따스할 수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웃는 소리를 내 가슴속에 알뜰히 담은 뒤, 이 기쁜 웃음을 씨앗으로 삼아서 새롭게 따스한 손길로 가다듬어 밥을 지을 수 있어요.



을지로 지하도에 집을 짓자 박스 위에 지붕을 세우고 구멍 뚫어 창도 만들자 창문에 모기장도 붙이자 박스 옆에 기역 자로 튀어나온 별채도 이어야지 비닐을 붙이면 빨래가 휘날리는 집 페트병에 더운 물 담아 애인처럼 안고 자자 (이승)



  김해자 님 시집 《집에 가자》(삶창,2015)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이 “집에 가자”라니, 이 얼마나 구수하면서 맛깔스럽고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더러, “자, 우리 집에 가자.” 하고 건네는 말은 얼마나 따스하면서 기쁘고 고마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갈 곳을 몰라 떠도는 사람더러, “자, 이제 집에 가요.” 하고 들려주는 말은 얼마나 상냥하면서 착하고 고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젠 돌아가고 말아야지, / 치렁처렁 목걸이와 제복과 억지웃음 벗어던지고 / 날카로운 하이힐 대신 청동거울을! / 계산기 대신 둥둥 북소리 같은 심장을! / 문서 대신 비와 구름이 머무는 밭을! (웅녀의 시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시험성적에 목이 매이다가 참말로 목이 매여서 목숨을 빼앗긴 아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애써서 대학교에도 갔지만, 힘써서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되었지만, 도무지 앞날이 환하게 보이지 않아서 눈물에 젖다가 밑바닥으로 고꾸라진 젊은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핵발전소와 송전탑에 고향마을을 빼앗긴 할매와 할배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큰도시에 수돗물을 댄다며 댐을 지어야 해서 고향마을을 떠나라고 하니 앞으로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시골 할매와 할배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일요일 없이 밤새 일하고도 라면 한 그릇 겨우 끓여먹는 공순이와 공돌이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따뜻한 어버이 품에 안기고 싶고, 포근한 이부자리에 눕고 싶고, 맑은 새소리와 싱그러운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제는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을 꿈꾸면서 살고 싶습니다.



시멘트처럼 단단한 흙을 닮아 뿌리는 이미 돌이 되어 가고 있더군요 어느 날 가지 끝마다 그렁그렁 붉은 눈들이 보이는 듯했어요 저도 몰래 소리를 질러 딸아일 불렀죠 잎 좀 봐, 이거 잎 맞지? 잎이 핀 것 같지? 얼버무리는 아이에게 잎이 아니어도 할 수 없지, 살아 있다 믿고 물을 주는 한 살아 있는겨,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죽은 나무에 물 주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려고 딸아이를 부른다는 김해자 님은 참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었을까요? 얼핏 보자면, 나무는 말라서 죽은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죽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깊디깊은 곳에서 고요히 잠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고,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며, 사랑 품은 마음길로 물을 주면, 앞으로는 ‘산 나무’가 될 테고 ‘웃는 나무’가 될 테지요.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 (어진내에 두고 온 나)


딱새 한 마리 마당 빨랫줄에 앉아 있다 / 내가 지나가려 하자 부리를 새우고 날개 퍼득였다 (날선 울음-새를 듣는 몇 가지 시선 5)



  시집 《집에 가자》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에 젖습니다. 이 시집은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하고 부르는 노랫가락 같습니다. 크지도 넓지도 않지만, 두어 사람 누우면 꽉 들어차는 조그마한 한칸방인 집이라 하더라도 ‘우리 집에 와서 한솥밥을 즐겁게 먹으렴’ 하고 부르는 노랫소리 같습니다.


  김치 한 접시에 간장 한 종지를 올린 밥상을 함께 나누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을 올린 단출한 밥상을 함께 나누자고 손짓하는 노래입니다.


  시란 늘 그렇겠지요. 사랑하는 마음을 시로 그립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꿈을 시로 그립니다. 사랑을 가슴에 살포시 담는 이야기를 시로 그립니다.



억수로 높대이 저마 지 혼자 툭 불거져서 머 우짤 끼라고 흙 다 뭉개고 산목심 다 주째삐고 조래 빳빳이 고개 쳐들고 나라님 같은 고압 자세로 와 자꼬 올라가쌓노 내가 나라한티 밥을 주라 카나 돈을 주라 카나 이래 농사짓고 살겠다는데 언제까지 없는 넘들만 개 잡드끼 잡들라 카노 (밀양아리랑)


사랑 시 한번 써보고 싶다 어둠 속에서 사이좋은 땅콩 두 알처럼 하나였을 때 꿈꾸며 서성이던 햇살 고운 아침, 전화가 왔다 (사랑 시는 못 쓰고)



  사랑은 연속극에 없습니다. 사랑은 영화에 없습니다. 사랑은 책에 없습니다. 사랑은 인터넷에 없습니다. 사랑은 신문에 없습니다. 사랑은 대중가요에 없습니다. 사랑은 학교에 없습니다. 사랑은 군대에 없습니다. 사랑은 늘 네 가슴하고 내 가슴에 있습니다. 네 가슴에서 샘솟는 사랑이 나한테 옵니다.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너한테 갑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만나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맺어서 사랑을 꿈꿉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손을 잡고서 사랑으로 삶을 짓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마주보면서 사랑으로 아기를 새롭게 낳습니다.



여덟 아이가 지하에서 석탄을 캐고 / 아홉 아이가 굴 깊숙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다 / 갱도에서 기어 나오며 아이들이 달리기를 한다 (거북손)


강은 어머니 실핏줄이오 나무는 팔다리라 생각하는 책 어머니 다칠세라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책 물의 파동 읽으며 조용조용 거북 껍데기 두드려 천지간에 감사드리는 책 약초를 캐거나 일용할 양식 구할 때 대지와 풀 나무에게 허락을 구하는 책 (영혼의 집)



  시집 《집에 가자》를 읽으면, ‘집에 못 가는 아이’ 이야기가 자꾸 흐릅니다. 한국에서,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지구별 곳곳에서, 그만 집에 못 가고 고꾸라진 아이들 이야기가 자꾸 흐릅니다.


  한국은 선진국일까요? 한국은 민주 나라일까요? 한국은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일까요? 그러면,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는 왜 이렇게 많을까요? 한국에서 애꿎게 목숨을 빼앗기는 아이는 왜 이다지도 많을까요?


  대학입시는 누구 때문에 있을까요? 대학교는 왜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공무원은 왜 있을까요? 군인이나 의사는 왜 있을까요? 돈은 왜 돈이 많은 데로만 몰리고, 돈이 없는 데로는 골고루 흘러가지 않을까요?



배가 잠기고 있어, / 내가 잠기고 있어, / 마침표 같은 건 찍지 마, 돌아오고 말 테니, / 꺾어도 가만있는 꽃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 증언도 못하는 새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고, / 반드시 사람으로, 난, 다, 시, 와, 야, 겠, 어, (김동협-2014년 4월 10일 09:10)



  오늘도 우리 시골집에서 두 아이는 하루 내내 뛰놀면서 땀을 흘립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나서 물놀이를 합니다. 물놀이를 마친 뒤 알몸으로 마루와 마당을 가로지릅니다. 배가 고프면 부엌으로 와서 수저를 듭니다. 배가 부르면 뒹굴거리면서 놀다가 콜콜 낮잠에 빠져듭니다. 낮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놀고, 다시 배가 고프면 “밥 주셔요.” 하고 부릅니다. 밥을 배불리 먹으면 새롭게 기운이 났으니 별이 뜨고 달이 돋는 밤까지 하하하 노래하면서 놉니다.


  오늘 이곳에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이 땅에서 아름답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아이를 생각하면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이 땅에서 아직까지 슬프고 고달프며 힘든 모든 아이를 그리면서 한솥밥을 먹습니다.


  김해자 님이 참말 ‘사랑 시’를 쓸 수 있는 이 나라가 되기를, 이 지구별이 되기를, 그야말로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가 흐르는 아름다운 한국과 지구별로 거듭나는 삶이 태어나기를 빕니다. 4348.8.2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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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어린 새
김명수 지음, 신민재 그림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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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4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

― 산속 어린 새

 김명수 글

 신민재 그림

 창비 펴냄, 2005.12.26. 8000원



  늦여름이 무르익는 새벽입니다. 새벽바람은 제법 서늘합니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는 이불을 주섬주섬 챙겨서 여미어 줍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자니까 아이들이 언제 이불을 걷어차는지 알고, 언제 이불을 여미어 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자는 아이들이 이를 갈면 얼른 손을 뻗어 볼을 톡톡 치고는 살살 어루만집니다. 예쁜 이는 예쁘게 두고 즐겁게 꿈꾸라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갈기를 멈추며 길게 하품을 하고는 냠냠 입맛을 다시면서 조용히 꿈나라로 다시 빠져듭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침에 끓일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를 한 조각 뜯어서 불립니다. 집식구 모두 꿈나라에서 노니는 동안 느긋하게 부엌일을 살피고는 내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꽃 보고는 몰라요 / 사과꽃은 하얘도 / 빠알간 사과 열리고 / 감꽃은 뽀얘도 / 붉은 감이 달리고 (꽃 보고는 몰라요)



  김명수 님 동시집 《산속 어린 새》(창비,2005)를 읽습니다. 아이들을 곱게 바라보는 마음이 동시 한 줄로 흐르고, 글쓴이 어린 날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동시 두 줄로 흐르며, 이 땅 아이들이 먼먼 옛날부터 가슴에 품은 숨결이 동시 석 줄로 흐르다가는, 오늘날 아이들한테 글쓴이가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동시 넉 줄로 흐릅니다.



민들레는 그럼 왜 민들레가 되었을까 / 진달래는 그럼 왜 진달래가 되었을까 // 불러 주고 불러서 / 민들레가 되었지. / 너와 내가 예뻐해서 / 진달래가 되었지 (누가 누가 지었을까)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알려면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표준말로는 ‘민들레’이지만 고장마다 가리키는 이름이 다 다릅니다. 수백 가지도 아닌 수천 가지 ‘이름’이 있는 민들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수천 가지 이름’이 어슷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꼭 하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다 다른 고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다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가리키는 이름은, 다 다른 삶터에 맞게 태어난 말로 다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민들레를 아끼지 않는다면 민들레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진달래를 아끼지 않는다면 진달래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아요.


  옛날부터 시골지기는 모든 이웃한테 저마다 다른 이름을 알뜰살뜰 붙여 주었어요. 거머리한테도 거머리라는 이름을 주고, 장구애비 물방개 소금쟁이 게아재비 미꾸라지 다슬기 개똥벌레 가재 같은 이름이 골고루 있습니다. 파리 모기를 비롯해서 벌이랑 나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벌하고 나비는 또 수많은 이름이 갈래갈래 있습니다.



조개는 / 제 껍질에 / 노을을 새긴다 (조개의 무늬)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도시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발을 밟고 지나간다든지 밀치고 지나가는 ‘여러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 보셔요. 아주 고단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도시에서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느끼기 마련이라, 우리 곁을 스치거나 밀치며 지나가는 ‘이웃이어야 할 사람’한테 아무 이름을 못 붙입니다.


  이는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들나물이나 들풀을 아끼는 손길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냥 농약을 뿌려대어 죽이니까요. 논이고 밭이고 온통 농약투성이가 되면서, 논에서 살던 수많은 이웃도 거의 다 죽어서 사라집니다. 논개구리 참개구리 무당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같은 이름은 아예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방아깨비 풀무치 여치 베짱이 같은 이름은 아예 들여다볼 틈도 없습니다. 이른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조금 들여다볼 뿐, 여름쑥이나 가을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쟁이 미나리 질경이 민들레 토끼풀 모두 숱한 ‘잡풀’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려 할 뿐입니다.



동생과 내가 잠도 깨기 전 / 아버지는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 쇠죽솥에 물을 붓고 / 불을 지피고 / 작두로 썰어 놓은 볏짚을 넣고 / 콩깍지를 한 삼태기 / 헛간에서 퍼 와 / 외양간 소를 위해 쇠죽 끓이시고 (겨울 아침 우리 집)


울바자에 내린 눈은 울바자 덮고 / 대숲에 내린 눈은 대숲을 덮고 (겨울날)



  동시집 《산속 어린 새》에서 흐르는 겨울날 모습은 아련한 옛모습이로구나 싶습니다. 쇠죽을 끓이는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쇠죽을 끓일 볏짚을 건사한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요즈음 벼는 하나같이 유전자를 건드려서 짜리몽땅하기에 짚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벼는 짜리몽땅할 뿐 아니라 짚이 아주 가늘고 힘조차 없어요. 무엇보다도 일소를 부리는 시골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울바자가 남은 시골집이 있기는 있을 테지요. 그러나 요즈음 시골마을은 어디를 가든 시멘트로 쌓은 블록담입니다. 수수깡 울타리라든지 탱자나무나 찔레나무 울타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이런 아련한 모습이 동시집 한켠에 살며시 깃듭니다. 이 동시집을 읽을 요즈음 어린이는 ‘울바자’가 무엇인지 모를 테고, ‘작두’나 ‘삼태기’를 구경할 일도 없다고 할 터이니, 뭔 얘기를 읊는 동시인지 하나도 모를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깃들기에, 아이들은 이 노래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누구나 겪고 살며 누리던 이야기이나, 이제는 ‘동시 한켠에만 유물처럼 남은’ 노래를 마음으로 그리도록 이끄는 조그마한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달맞이꽃 핀 마을에 어둠 내리면 / 모깃불 피어나는 마당 너머로 / 반딧불이 깜박이며 숨바꼭질하고 (박꽃 핀 마을에)



  도시에는 모깃불도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는 마당도 없고 밭뙈기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달맞이꽃을 심어서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요즈음 시골에서도 달맞이꽃을 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달맞이꽃도 숱한 ‘잡풀’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농약으로 태워 죽이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 태어나자 / 우리 할머니 / 시골에서 / 서둘러 올라오셨다. // 할머니가 / 내 동생을 가슴에 안고 / 함박웃음 지으며 / 노래하신다. (할머니의 노래)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즐겁습니다.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기에 웃음꽃이 핍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노래를 가슴으로 새기면서 기쁘게 뛰어놉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면서 씩씩하게 일하고, 아이는 어버이가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새끼 새도 어미 새도 숲이 있을 때에 둥지를 틀어 삶을 누립니다. 모든 새는 숲에 깃들어 숲노래를 부를 적에 싱그러운 숨결이 됩니다. 사람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림을 가꿀 적에 싱그러운 넋이 됩니다. 아이들이 숲을 책으로만 만나지 않기를, 아이들이 반딧불이나 무지개를 동영상으로만 들여다보지 않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이웃과 동무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도 곁에서 늘 숲을 사랑하고 흙과 바람과 빗물을 고마이 여길 줄 아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1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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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창비시선 52
송수권 지음 / 창비 / 198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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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1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

― 아도

 송수권 글

 창작과비평사, 1985.10.10. 8000원



  전남 고흥군에서는 2015년부터 ‘송수권 문학상’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여러 문학상을 보면 ‘작가가 죽은 뒤’에 작가 이름을 내거는 문학상을 마련한다고 하기에, ‘송수권 문학상’은 여러모로 파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송수권 문학상’은 송수권 시인이 마련한다거나 ‘송수권 문학관’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이 아닙니다. 지자체 군청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입니다. 이 대목도 파격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따로 문학관이 아직 없는데 문학상부터 생기는 셈입니다.


  전남 고흥군에서는 ‘송수권 문학상’에 상금으로 삼천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돈을 내거는 문학상인 셈입니다. 문학상을 마련한다면 한 번 주고 끝내는 일이 아닐 테니 앞으로도 이 문학상은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고흥군에서는 문학상과 얽힌 돈을 퍽 넉넉히 마련해야 하겠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문학상을 마련할 만큼 돈이 있다면, 문학상과 함께 문학관도 발빠르게 세우도록 힘을 모아야지 싶어요. 송수권 시인 문학을 기리거나 돌아보거나 살펴보거나 누릴 만한 자리(문학관)는 없이 문학상만 있어서는 문학을 아끼는 사람한테도, 고흥 지역 청소년한테도 ‘송수권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고흥에는 아무런 문학관이 없습니다. ‘천경자 전시관’이 고흥에 문을 열기는 했지만, 작품 관리 소홀 때문에 천경자 님 그림은 모두 고흥을 떠났고 전시관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지자체에 꼭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있어야 하지는 않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문학꽃을 피운 넋을 기리거나 이야기할 자리를 찬찬히 마련한다면 작은 시골마을 아이들 마음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낱말을 / 입안에서 요리조리 읽어보면 / 아, 구수한 흙냄새 / 초가집 감나무 고추잠자리…… / 어쩌면 저마다의 모습에 꼭두 알맞는 이름들일까요. (우리말)


여름날 아침은 달디단 이슬 한 모금에 / 우엉잎 속에 숨어 춤추는 달팽이 (가을바람 찬 바람)



  1985년에 나온 송수권 님 시집 《아도》를 읽습니다. 1985년이라면 고흥에서 다른 고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 아주 좁던 무렵입니다. 요즈음도 고흥은 한국에서 무척 외진 시골이지만, 1985년은 더욱 외진 시골이었고, 송수권 시인이 태어난 1940년 언저리는 그야말로 외진 시골입니다.


  고흥이 어느 만큼 외진 시골인가 하면, 고흥문화원에서 1983년에 ‘국민학교 부교재’로 엮은 《우리 고장 고흥》이라는 책을 보면,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흥에 한길이 나고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음.” 하는 연표가 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동방, 광주 교통 정류소가 생김.” 같은 연표에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녹동, 고흥, 벌교 간의 포장도로가 생김.” 같은 연표가 있어요.


  1920년대에 들어서도록 고흥이라는 고장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다닐 만한 ‘한길’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고갯길을 걷고 들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교통 정류소’가 생겼다니, 다른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주 멀었을 테지요. 어렵사리 벌교까지 걸어가야 다른 고장으로 갈 차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들어서니 비로소 ‘포장도로’가 고흥하고 벌교 사이에 났다고 해요.


  요즈음은 벌교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4차선’ 길이 놓였고, 이 길이 고흥에서는 가장 넓고 깁니다. 그런데 이 길이 놓인 지 고작 열 몇 해가 되었어요. 열 몇 해 앞서까지는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구불구불한 시골도로 2차선’이었습니다.



우리를 잘못 길들이고 잘못 가르친 역겨운 인물들, / 나는 오늘 이 무덤 앞을 지나가며 어려서 / 시골집 마당에 횟배를 앓으며 / 배고파 잦아진 목소리로 불러대던 / 우리 건국의 위인 제1호 리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 (그는 하와이로 쫓겨갔다가 거기서 죽고, 후에 다시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위인의 집)



  시집 《아도》에 나오는 ‘啞陶’는 ‘벙어리 +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벙어리 질그릇’이란 무엇일까요? 송수권 시인이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만, 1980년 전남 광주에서 이슬처럼 스러진 사람들 넋을 기리려는 마음을 ‘벙어리 질그릇’이란 말을 빌어서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아니,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사람들 입을 꿰매어 벙어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벙어리가 된 사람들은 언제나 흙을 빚으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흙을 갈고 아끼고 보듬으면서 밥을 먹었지요. 그러니 ‘벙어리 질그릇’이에요.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밟는 이들은 흙을 안 만집니다.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이들은 총칼만을 만집니다. 군홧발을 휘두르는 이들 곁에서 펜이나 붓을 들고 아양을 떠는 사람도 있었고, 아양쟁이는 벙어리가 안 되었으나 ‘제 말’을 할 줄 모르는 쓸쓸한 넋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 듬뿍 떠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 들밥 속에 있고 /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길 잔등에 있다 /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 쩌렁쩌렁 울리는 땅 /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아그라 마을에 가서)


흰 블라우스 초록 치마를 받쳐 입고 / 물찬 제비처럼 오월의 라일락 숲속에서 / 노래하는 남도의 계집들아 / 늬네들 모습 너무 이쁘고 환장해서 / 눈물이 날 것 같구나 (井邑詞)



  팔월 여름에 콩꽃이 피고 집니다. 밭 가장자리나 길가마다 콩이 자랍니다. 그리고, 고흥에서는 돌콩이 어느새 꼬투리를 매답니다. 돌콩은 사람이 심거나 뿌리지 않은 콩입니다. 돌콩은 스스로 꼬투리를 맺고는 스스로 퍼집니다. 바지런한 흙사람은 돌콩이 꼬투리를 맺을 무렵 돌콩을 그러모으는데, 미처 그러모으지 못하면 이듬해에 다시 그 자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손수 심은 콩을 거두고, 스스로 퍼진 콩을 거둡니다. 콩알을 훑고 콩밥을 짓습니다. 콩밥을 함께 먹고, 콩알이 자란 흙을 새삼스레 어루만집니다.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젖줄이요 숨통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흙에 계시고, 나무에 계시며, 바람과 구름과 제비 날갯짓에 계십니다. 그러니, 흙을 빚어 삶을 짓는 사람들 가슴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시지요.


  오동나무 잎사귀에도, 후박나무 잎사귀에도, 들밥에도, 샛밥에도, 찬물 한 그릇에도, 샘터에서 긷는 물 한 바가지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봄날에 날풀들 돋아오니 눈물 난다 /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의각시풀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풀이 돋습니다. 풀은 풀바람을 일으킵니다. 풀이 죽습니다. 농약을 맞아서 죽고, 시멘트에 파묻혀 죽습니다. 예부터 시골지기는 풀 한 포기를 함부로 뽑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군홧발과 함께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시골지기한테 농약사랑을 심어 주었습니다. 밭둑도 논둑도 소나 염소나 토끼가 먹을 풀이었지만, 이제 시골에서 소나 염소나 토끼를 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공장 같은 짐승우리(공장형 축사)’에서 ‘항생제가 가득 깃든 사료(공장형 사료)’를 먹는 소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시골사람 스스로 쇠무릎도 모시풀도 쑥도 골풀도 건사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짚으로 이을 일조차 없으니 볏짚을 살뜰히 그러모으지 않습니다. 짚으로 신을 삼지 않으니, 농협에서 내주는 ‘유전자 건드린(개량형) 난쟁이 볍씨’를 기계로 심어서 기계로 거둘 뿐입니다. 농협에서 심으라고 하는 요즈음 볍씨는 낫으로 베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락알은 많이 맺힌다고 해도 볏포기가 매우 짧기에 기계가 아니고는 못 벨 만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 만수무연 풍년 새야 / 가마솥에 누룬밥 / 아닥딱딱 긁어서 / 너 먹자고 농사 지었니? / 우리 먹자고 농사 지었지. (달노래)



  아주까리꽃이 암꽃과 수꽃이 사이좋게 피는 팔월 여름에 고들빼기잎을 뜯습니다. 시집 《아도》에 흐르는 풀이름을 하나하나 읊어 봅니다. 모두 고운 풀이요, 먼먼 옛날부터 시골지기 누구나 아끼던 풀이며, 아이들은 이 풀을 먹고 뜯으면서 자랐습니다. 풀각시를 지어서 놀고, 풀노래를 부르며 놀며, 풀밭에서 뒹굴며 놀았어요.


  풀밭에서 맨발로 놀던 아이는 자라서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는 기운찬 어른이 되었지요. 풀밭에서 풀노래를 부르며 놀던 아이는 자리서 논밭에서 들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멋진 어른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멋진 젊은 어른이 드뭅니다. 들밥과 막걸리를 나누는 두레나 품앗이는 자취를 감춥니다. 들노래 가락이 시골지기 가슴으로 스며서 《아도》라고 하는 시집이 태어났는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들노래 가락을 가슴으로 담아서 새로운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어린이나 푸름이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누가 왜 퍼뜨렸을까요? 사람은 저마다 제 고장에서 아름다운 마을지기로 살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하는데, 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서울이나 큰도시 언저리로만 가도록 내몰까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싱그러운 흙지기가 되는 젊은이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요?



어디서 왔는지 / 우리들의 도시 한복판에 / 오늘도 / 최루탄 개스가 왔다. (망월동 가는 길 2)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기념비가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교과서나 대학교가 없어도 시인은 언제나 시인으로서 삶을 노래합니다.


  흙이 있기에 질그릇을 빚고, 흙이 있기에 씨앗을 심어서 밥을 얻으며, 흙이 있기에 이곳에 집을 지어 살림을 가꿉니다. 흙을 믿고 아끼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먼먼 옛날부터 일군 이야기가 흘러서 오늘날 문학이라고 하는 꽃으로 피어납니다.


  이제 최루탄 가스가 아닌 싱그러운 시골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농약 냄새가 아닌 푸른 숲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묻히는 들꽃이 아닌,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눌리는 나무뿌리가 아닌, 오순도순 서로 사랑하는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도 나비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을 갉아먹습니다. 여름 막바지에 새로 깨어나는 나비를 만날 수 있겠지요. 4348.8.1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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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놈 -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27
김개미 지음, 오정택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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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3



재미난 문학을 읽어도 삶이 따분하다면

― 어이없는 놈

 김개미 글

 오정택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3.8.12. 9500원



  수저질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한참 동안 밥알을 흘리고 국을 쏟습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을 먹도록 아이는 도무지 수저질을 익숙하게 못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말 그대로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른 해나 쉰 해 동안 수저질을 한 어른도 곧잘 흘립니다. 마흔 해나 예순 해 동안 설거지를 한 어른도 가끔 그릇이나 접시를 깹니다. 아이들이 수저질이 익숙하지 못하거나 그릇을 깨는 일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제 막 삶을 배우고, 바야흐로 삶을 누리며, 차근차근 삶을 즐기는 아이들은 밥알을 흘리면서 신나게 밥을 먹습니다.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어이없는 놈)



  김개미 님이 빚은 동시를 그러모은 《어이없는 놈》(문학동네,2013)을 읽습니다. 김개미 님은 아이들이 학교와 집 사이에서 겪는 일을 재미나게 바라보면서 재미나게 풀어냅니다. 아이도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드러내기도 하고, 아이 사이에서도 언니랑 동생이 모두 사랑스러운 숨결이라는 대목을 넌지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나이가 많거나 몸이 크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하나입니다. 세 살 아이와 여섯 살 아이도 목숨은 하나예요. 할머니도 어머니도 목숨은 하나예요. 목숨이 둘인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 있는 목숨을 아름답고 즐겁게 누릴 때에 살가이 웃습니다.



앨범을 뒤적거리다 / 배꼽이 빠질 뻔했다 / 기저귀 하나 달랑 찬 /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아기가 / 양손에 과자를 든 채 /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옛날 사진)




  아이가 잘못을 하는 까닭은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잘못이 없습니다. 아니, 아이가 한 일은 ‘잘못’이나 ‘잘’로 따질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기에 서툴기 마련이고, 아이는 아직 잘 모르니 ‘모르는 대로 스스럼없이’ 할 뿐입니다. 아이는 그저 온갖 일을 겪어 보고 싶습니다. 


  국 그릇에 담긴 국을 숟가락으로 톡톡 쳐 보고 싶습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길목에 큰 돌을 놓아 보고 싶습니다. 나비 애벌레를 살며시 건드려 보고 싶습니다. 잠자리가 손가락에 내려앉으면 잡아 보고 싶습니다. 하늘로 훌쩍 뛰어올라 바람을 타 보고 싶습니다. 도서관이나 전철 같은 데에서도 신나게 달리거나 춤을 추어 보고 싶습니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가 / 화단 앞에서 뭔가를 주워 / 편지 봉투에 넣어 줬어요 / 내년 봄에 심으면 / 분꽃이 필 거라나 (이게 뭐야)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즐겁고 재미납니다.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놀지 못하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따분하거나 괴롭습니다.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아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억지스레 쥐어짭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동시를 들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들일 만한 동시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삶을 물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기쁘게 맞아들일 만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를 베풀 만할까요? 아이들이 사랑스러 껴안을 만한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당벌레를 한참 바라보다가 / 눈을 꼭 감으면 / 무당벌레가 눈 속으로 쳐들어온다 (무당벌레)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씨앗이랑 단추랑 돌이랑 돈을 제대로 못 가린다고도 합니다. 참말 그러할까 싶지만, 참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풀씨가 어떤 풀씨인지 낱낱이 알려주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참말 그러하겠구나 싶습니다. 시골에 살더라도 밭일이나 논일을 거들지 않으면 모르고, 논일이나 밭일을 거들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거들지 않으면 몰라요. 도시에서 집하고 학교하고 학원 사이만 오가는 아이라면 그야말로 풀씨를 제대로 알기 어려워요. 아마 도시에서는 어른들도 풀씨를 모르겠지요. 민들레라면 꽃대에 달린 씨앗을 보고 알는지 몰라도, 꽃대에서 뗀 뒤 솜털을 떼어내면 어떤 씨앗인지 모르리라 느껴요. 가을을 앞두고 길가에 잔뜩 피는 코스모스도 늦가을에 맺는 씨앗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무당벌레는 우리 눈으로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가슴으로 ‘살살 기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마음으로 ‘조용히 날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몸짓인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하루를 보내는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맞이합니다.


  즐겁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누린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즐겁거나 기쁩니다. 즐겁게 놀지도 못하고 기쁘게 노래하지도 못하는 하루를 보내면서 학원과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독후감 숙제로 여길 뿐입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아이들한테 이 동시집은 어떻게 스며들 만할까 궁금합니다. 재미나게 놀면서 ‘재미난 동시’를 읽을 수 있을까요? 잔뜩 짓눌린 채 시험공부만 하다가 독후감 숙제를 하느라 ‘재미난 동시’를 글로만 읽어야 할까요?




토란잎이 / 빗방울을 가지고 노네 / 투명한 구슬을 / 요리조리 굴리네 / 똥그란 구슬을 / 더 똥그랗게 만드네 (비 오는 날)



  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다른 집 아이들한테도 높임말을 써요. 그러나 높임말만 쓰지 않습니다. 높임말을 쓰다가 여느 말을 섞습니다. 여느 말을 쓰다가도 높임말을 섞어요. 어떤 말투로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에서 흐르는 생각을 나누어 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말하고 허물없이 듣습니다. 즐겁게 말하고 기쁘게 듣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무렵 어떤 넋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넋으로 자랄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마다 어떤 바람결이 묻어나는가를 살핍니다.


  내가 웃으면 아이들이 웃습니다. 내가 찡그려도 아이들이 웃습니다.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웃습니다. 아이들이 찡그려도 나는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웃고 싶은 사람이 웃고, 찡그리고 싶은 사람이 찡그려요. 아이들은 놀고 싶은 마음이니 언제나 즐겁게 놀고, 어른들은 씩씩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이니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길을 생각하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꾸립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읽어 보면, 여러모로 재미난 말놀이가 흐릅니다. 다만, 재미난 말놀이가 흐르다가 그칠 뿐, 다른 이야기로 뻗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를 시인 한 사람이 바꿀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삶을 배우는 길이 아니라, 대학교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학교교육을 시인 한 사람이 고칠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어린이문학은 사회도 학교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얼마든지 바꾸거나 고칠 수 있습니다. 글 한 줄에 담는 이야기로 아름다운 나라와 마을과 보금자리를 얼마든지 신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말놀이만 할 수 있는 동시가 아니라, 삶놀이를 할 수 있는 동시요, ‘말놀이 하는 재미’뿐 아니라 ‘삶놀이 나누는 기쁨’을 펼칠 수 있는 동시입니다. 꿈을 그리고 노래하면서 아이들한테 꿈과 노래를 알려줄 수 있는 동시예요.


  말놀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말놀이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을 담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말놀이를 재미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이요 동시라고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4348.8.9.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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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향고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0
정영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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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8



시와 풀내음

― 말향고래

 정영주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7.7.16. 7000원



  한여름으로 접어든 시골은 조용합니다. 여름철 무더위를 잊으려고 시골로 찾아온 손님이 북적이는 시골이라면 한동안 왁자지껄할 수 있고, 자동차 뜸하던 찻길에도 자동차가 제법 지나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골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농약 뿌리려고 경운기를 몰고 나오는 할매와 할배가 있으면, 농약이 논밭으로 퍼지는 소리가 울립니다. 농협에서 띄우는 농약살포 헬리콥터가 돌아다니면 꽤 먼 데까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퍼집니다.

  시골은 도시처럼 매미 우는 소리가 우렁차지 않습니다. 시골은 멧새 노랫소리하고 풀벌레 노랫소리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때때로 한낮에도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풀을 베다가 여러 소리를 듣습니다. 땀을 훔치면서 마루에 앉아서 쉬다가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밥을 지어 아이들을 먹인 뒤 한 차례 멱을 감고 평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신화가 된 고래의 늑골 하나 빼내어 / 내 빈 곳 채울 수 있다면 / 스스로 말향고래가 되어 심해까지 / 내려가 심장과 내장 뼈 마디마디 / 썩지 않을 기름으로 채울 수 있다면 (말향고래)



  정영주 님 시집 《말향고래》(실천문학사,2007)를 읽습니다. 고래 이야기라면 이제 철지난 옛이야기로 여길 만합니다. 고래잡이배는 뜨기 어렵고, 고래를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다큐영화 같은 데에서는 고래를 볼 테지만, 어른도 아이도 맨눈으로 고래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피노키오나 모비딕을 말할 적에 으레 고래를 떠올린다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고래를 얼마나 잘 이야기할 만할까요.



금목서가 왜 쓰러졌는지 모른다 / 쓰러지면서 진저리치며 터지는 / 꽃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 문득, 그제야 내가 오랫동안 / 뜨락에 나간 적이 없음을 알았다 (금목서)



  시골에서 풀내음을 맡습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내음을 맡을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풀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노래를 부를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풀내음을 맡고 싶어서 시골에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풀빛을 마주하면서 푸른 마음이 되고 싶기에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곧잘 깨닫습니다. 풀숨을 마시고 풀열매를 먹으며, 풀잎을 훑어서 즐기려는 뜻에서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으레 느낍니다.


  그러면 풀내음이란 무엇일까요? 풀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도시사람은 나무밭(수목원) 같은 데에 가서 일부러 ‘나무내음’을 쐬려고 합니다. 나무내음을 맡으면 여느 때에 배기가스나 온갖 지저분한 바람을 마시느라 고단한 허파가 싱그러이 살아난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이 맡으려고 하는 나무내음은 어떤 내음일까요? 나뭇줄기나 나무뿌리 내음일까요? 아마 이런 내음도 있을 테지만, 사람들한테 짙고 깊게 스며드는 나무내음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뭇잎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집에 오니 / 옷자락에 쐐기풀이 잔뜩 박혀 있다 / 숲 속 몇 마장 들다 나왔는데 (흔적)



  시집 《말향고래》는 예부터 사람들이 제 삶터에서 맡던 온갖 내음을 가만히 이야기합니다. 쐐기풀에 깃든 내음을, 숲에 서리는 내음을, 햇볕에 배는 내음을, 창문에 번지는 내음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흙길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맡습니다. 풀밭길을 걷는 사람과 시멘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맞이합니다. 숲길을 걷는 사람과 골목길이나 시내 한복판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냄새를 들이켭니다.



잘 달궈진 햇볕이 / 벽돌담을 넘어와 / 창문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뉘 고르는 여자)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시골에 젊은이도 어린이도 많았습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늙은 사람만 많습니다. 시골에서 젊은이와 어린이가 자취를 감추면서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고, ‘풀을 먹고 사는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면서, 밭둑이나 논둑에서 잘 자라던 풀을 성가셔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납니다. 여기에다가 1970년대부터 밀어닥친 새마을운동은 ‘풀을 뜯어서 먹지 말’고 ‘풀에 농약을 뿌려서 죽이라’는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한의사와 제약회사는 정갈하고 고즈넉한 시골이나 숲에서 자라는 풀을 얻어서 약으로 삼습니다. 시골사람은 이제 고들빼기나 소리쟁이나 부들이나 모시나 까마중이나 쇠무릎이나 질경이를 약으로 삼을 줄 모릅니다. 약으로 쓰던 슬기를 모두 잊었습니다. 망감도 하늘타리도 귀찮을 뿐이고, 댓잎이나 갈잎으로 바구니를 엮던 손길은 아주 끊어집니다.



찢어진 돌을 보았다 / 그 속으로 보타진 강이 흐르다 / 멈춘 것을 보았다 / 미처 이사 가지 못한 고라니와 / 바람에 넘어지는 숲과 / 돌아서 뒤채는 물 속에 / 머리카락 죄다 풀어헤치는 / 줄풀들의 울음소리가 / 갈라진 돌 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돌 속에 누워)



  시를 한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떠올립니다. 시를 두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그립니다. 시를 석 줄 읽으면서 아련하게 스미는 풀내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집을 덮은 뒤 우리 집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 베푸는 온갖 내음을 마십니다.


  다만, 풀내음을 맡더라도 틈틈이 낫질을 합니다. 걸어서 지나다닐 길은 있어야 하니까요. 모기가 너무 끓지 않도록 풀밭을 건사해야 하기도 하고요. 아이들 키보다 웃자란 쑥을 베거나 뽑아서 한쪽에 쌓으면, 쑥대가 땡볕에 잘 마르면서 고운 ‘짚내음’을 베풉니다.


  참말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소와 염소가 이 너른 풀을 신나게 먹었을 테고, 사람들은 소한테서는 소젖을 얻고 염소한테서는 염소젖을 얻었을 테지요. 풀을 먹는 짐승이 풀노래를 부르듯이, 풀을 아끼고 돌보던 시골사람은 풀바람을 쐬면서 풀밥을 먹고 풀잔치를 누렸을 테지요. 잠자리가 달맞이꽃에 가만히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4348.8.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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