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 창비시선 52
송수권 지음 / 창비 / 198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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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1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

― 아도

 송수권 글

 창작과비평사, 1985.10.10. 8000원



  전남 고흥군에서는 2015년부터 ‘송수권 문학상’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여러 문학상을 보면 ‘작가가 죽은 뒤’에 작가 이름을 내거는 문학상을 마련한다고 하기에, ‘송수권 문학상’은 여러모로 파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송수권 문학상’은 송수권 시인이 마련한다거나 ‘송수권 문학관’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이 아닙니다. 지자체 군청에서 마련하는 문학상입니다. 이 대목도 파격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따로 문학관이 아직 없는데 문학상부터 생기는 셈입니다.


  전남 고흥군에서는 ‘송수권 문학상’에 상금으로 삼천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돈을 내거는 문학상인 셈입니다. 문학상을 마련한다면 한 번 주고 끝내는 일이 아닐 테니 앞으로도 이 문학상은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고흥군에서는 문학상과 얽힌 돈을 퍽 넉넉히 마련해야 하겠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문학상을 마련할 만큼 돈이 있다면, 문학상과 함께 문학관도 발빠르게 세우도록 힘을 모아야지 싶어요. 송수권 시인 문학을 기리거나 돌아보거나 살펴보거나 누릴 만한 자리(문학관)는 없이 문학상만 있어서는 문학을 아끼는 사람한테도, 고흥 지역 청소년한테도 ‘송수권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고흥에는 아무런 문학관이 없습니다. ‘천경자 전시관’이 고흥에 문을 열기는 했지만, 작품 관리 소홀 때문에 천경자 님 그림은 모두 고흥을 떠났고 전시관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지자체에 꼭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있어야 하지는 않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문학꽃을 피운 넋을 기리거나 이야기할 자리를 찬찬히 마련한다면 작은 시골마을 아이들 마음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자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낱말을 / 입안에서 요리조리 읽어보면 / 아, 구수한 흙냄새 / 초가집 감나무 고추잠자리…… / 어쩌면 저마다의 모습에 꼭두 알맞는 이름들일까요. (우리말)


여름날 아침은 달디단 이슬 한 모금에 / 우엉잎 속에 숨어 춤추는 달팽이 (가을바람 찬 바람)



  1985년에 나온 송수권 님 시집 《아도》를 읽습니다. 1985년이라면 고흥에서 다른 고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 아주 좁던 무렵입니다. 요즈음도 고흥은 한국에서 무척 외진 시골이지만, 1985년은 더욱 외진 시골이었고, 송수권 시인이 태어난 1940년 언저리는 그야말로 외진 시골입니다.


  고흥이 어느 만큼 외진 시골인가 하면, 고흥문화원에서 1983년에 ‘국민학교 부교재’로 엮은 《우리 고장 고흥》이라는 책을 보면,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흥에 한길이 나고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음.” 하는 연표가 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동방, 광주 교통 정류소가 생김.” 같은 연표에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녹동, 고흥, 벌교 간의 포장도로가 생김.” 같은 연표가 있어요.


  1920년대에 들어서도록 고흥이라는 고장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다닐 만한 ‘한길’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고갯길을 걷고 들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교통 정류소’가 생겼다니, 다른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주 멀었을 테지요. 어렵사리 벌교까지 걸어가야 다른 고장으로 갈 차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들어서니 비로소 ‘포장도로’가 고흥하고 벌교 사이에 났다고 해요.


  요즈음은 벌교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4차선’ 길이 놓였고, 이 길이 고흥에서는 가장 넓고 깁니다. 그런데 이 길이 놓인 지 고작 열 몇 해가 되었어요. 열 몇 해 앞서까지는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구불구불한 시골도로 2차선’이었습니다.



우리를 잘못 길들이고 잘못 가르친 역겨운 인물들, / 나는 오늘 이 무덤 앞을 지나가며 어려서 / 시골집 마당에 횟배를 앓으며 / 배고파 잦아진 목소리로 불러대던 / 우리 건국의 위인 제1호 리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 (그는 하와이로 쫓겨갔다가 거기서 죽고, 후에 다시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위인의 집)



  시집 《아도》에 나오는 ‘啞陶’는 ‘벙어리 +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벙어리 질그릇’이란 무엇일까요? 송수권 시인이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만, 1980년 전남 광주에서 이슬처럼 스러진 사람들 넋을 기리려는 마음을 ‘벙어리 질그릇’이란 말을 빌어서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아니,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사람들 입을 꿰매어 벙어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벙어리가 된 사람들은 언제나 흙을 빚으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흙을 갈고 아끼고 보듬으면서 밥을 먹었지요. 그러니 ‘벙어리 질그릇’이에요.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밟는 이들은 흙을 안 만집니다. 군홧발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이들은 총칼만을 만집니다. 군홧발을 휘두르는 이들 곁에서 펜이나 붓을 들고 아양을 떠는 사람도 있었고, 아양쟁이는 벙어리가 안 되었으나 ‘제 말’을 할 줄 모르는 쓸쓸한 넋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 듬뿍 떠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 들밥 속에 있고 /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길 잔등에 있다 /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 쩌렁쩌렁 울리는 땅 /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아그라 마을에 가서)


흰 블라우스 초록 치마를 받쳐 입고 / 물찬 제비처럼 오월의 라일락 숲속에서 / 노래하는 남도의 계집들아 / 늬네들 모습 너무 이쁘고 환장해서 / 눈물이 날 것 같구나 (井邑詞)



  팔월 여름에 콩꽃이 피고 집니다. 밭 가장자리나 길가마다 콩이 자랍니다. 그리고, 고흥에서는 돌콩이 어느새 꼬투리를 매답니다. 돌콩은 사람이 심거나 뿌리지 않은 콩입니다. 돌콩은 스스로 꼬투리를 맺고는 스스로 퍼집니다. 바지런한 흙사람은 돌콩이 꼬투리를 맺을 무렵 돌콩을 그러모으는데, 미처 그러모으지 못하면 이듬해에 다시 그 자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손수 심은 콩을 거두고, 스스로 퍼진 콩을 거둡니다. 콩알을 훑고 콩밥을 짓습니다. 콩밥을 함께 먹고, 콩알이 자란 흙을 새삼스레 어루만집니다.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젖줄이요 숨통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흙에 계시고, 나무에 계시며, 바람과 구름과 제비 날갯짓에 계십니다. 그러니, 흙을 빚어 삶을 짓는 사람들 가슴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시지요.


  오동나무 잎사귀에도, 후박나무 잎사귀에도, 들밥에도, 샛밥에도, 찬물 한 그릇에도, 샘터에서 긷는 물 한 바가지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봄날에 날풀들 돋아오니 눈물 난다 /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의각시풀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풀이 돋습니다. 풀은 풀바람을 일으킵니다. 풀이 죽습니다. 농약을 맞아서 죽고, 시멘트에 파묻혀 죽습니다. 예부터 시골지기는 풀 한 포기를 함부로 뽑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군홧발과 함께 일어난 새마을운동은 시골지기한테 농약사랑을 심어 주었습니다. 밭둑도 논둑도 소나 염소나 토끼가 먹을 풀이었지만, 이제 시골에서 소나 염소나 토끼를 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공장 같은 짐승우리(공장형 축사)’에서 ‘항생제가 가득 깃든 사료(공장형 사료)’를 먹는 소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시골사람 스스로 쇠무릎도 모시풀도 쑥도 골풀도 건사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짚으로 이을 일조차 없으니 볏짚을 살뜰히 그러모으지 않습니다. 짚으로 신을 삼지 않으니, 농협에서 내주는 ‘유전자 건드린(개량형) 난쟁이 볍씨’를 기계로 심어서 기계로 거둘 뿐입니다. 농협에서 심으라고 하는 요즈음 볍씨는 낫으로 베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락알은 많이 맺힌다고 해도 볏포기가 매우 짧기에 기계가 아니고는 못 벨 만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 만수무연 풍년 새야 / 가마솥에 누룬밥 / 아닥딱딱 긁어서 / 너 먹자고 농사 지었니? / 우리 먹자고 농사 지었지. (달노래)



  아주까리꽃이 암꽃과 수꽃이 사이좋게 피는 팔월 여름에 고들빼기잎을 뜯습니다. 시집 《아도》에 흐르는 풀이름을 하나하나 읊어 봅니다. 모두 고운 풀이요, 먼먼 옛날부터 시골지기 누구나 아끼던 풀이며, 아이들은 이 풀을 먹고 뜯으면서 자랐습니다. 풀각시를 지어서 놀고, 풀노래를 부르며 놀며, 풀밭에서 뒹굴며 놀았어요.


  풀밭에서 맨발로 놀던 아이는 자라서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는 기운찬 어른이 되었지요. 풀밭에서 풀노래를 부르며 놀던 아이는 자리서 논밭에서 들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멋진 어른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멋진 젊은 어른이 드뭅니다. 들밥과 막걸리를 나누는 두레나 품앗이는 자취를 감춥니다. 들노래 가락이 시골지기 가슴으로 스며서 《아도》라고 하는 시집이 태어났는데, 이제 시골마을에서 들노래 가락을 가슴으로 담아서 새로운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어린이나 푸름이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누가 왜 퍼뜨렸을까요? 사람은 저마다 제 고장에서 아름다운 마을지기로 살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하는데, 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서울이나 큰도시 언저리로만 가도록 내몰까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싱그러운 흙지기가 되는 젊은이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요?



어디서 왔는지 / 우리들의 도시 한복판에 / 오늘도 / 최루탄 개스가 왔다. (망월동 가는 길 2)



  문학상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기념비가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문학관이나 전시관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입니다. 교과서나 대학교가 없어도 시인은 언제나 시인으로서 삶을 노래합니다.


  흙이 있기에 질그릇을 빚고, 흙이 있기에 씨앗을 심어서 밥을 얻으며, 흙이 있기에 이곳에 집을 지어 살림을 가꿉니다. 흙을 믿고 아끼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먼먼 옛날부터 일군 이야기가 흘러서 오늘날 문학이라고 하는 꽃으로 피어납니다.


  이제 최루탄 가스가 아닌 싱그러운 시골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농약 냄새가 아닌 푸른 숲바람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묻히는 들꽃이 아닌,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눌리는 나무뿌리가 아닌, 오순도순 서로 사랑하는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도 나비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을 갉아먹습니다. 여름 막바지에 새로 깨어나는 나비를 만날 수 있겠지요. 4348.8.1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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