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어린 새
김명수 지음, 신민재 그림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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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4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

― 산속 어린 새

 김명수 글

 신민재 그림

 창비 펴냄, 2005.12.26. 8000원



  늦여름이 무르익는 새벽입니다. 새벽바람은 제법 서늘합니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는 이불을 주섬주섬 챙겨서 여미어 줍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자니까 아이들이 언제 이불을 걷어차는지 알고, 언제 이불을 여미어 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자는 아이들이 이를 갈면 얼른 손을 뻗어 볼을 톡톡 치고는 살살 어루만집니다. 예쁜 이는 예쁘게 두고 즐겁게 꿈꾸라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갈기를 멈추며 길게 하품을 하고는 냠냠 입맛을 다시면서 조용히 꿈나라로 다시 빠져듭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침에 끓일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다시마를 한 조각 뜯어서 불립니다. 집식구 모두 꿈나라에서 노니는 동안 느긋하게 부엌일을 살피고는 내 새로운 하루를 엽니다.



꽃 보고는 몰라요 / 사과꽃은 하얘도 / 빠알간 사과 열리고 / 감꽃은 뽀얘도 / 붉은 감이 달리고 (꽃 보고는 몰라요)



  김명수 님 동시집 《산속 어린 새》(창비,2005)를 읽습니다. 아이들을 곱게 바라보는 마음이 동시 한 줄로 흐르고, 글쓴이 어린 날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동시 두 줄로 흐르며, 이 땅 아이들이 먼먼 옛날부터 가슴에 품은 숨결이 동시 석 줄로 흐르다가는, 오늘날 아이들한테 글쓴이가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동시 넉 줄로 흐릅니다.



민들레는 그럼 왜 민들레가 되었을까 / 진달래는 그럼 왜 진달래가 되었을까 // 불러 주고 불러서 / 민들레가 되었지. / 너와 내가 예뻐해서 / 진달래가 되었지 (누가 누가 지었을까)



  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알려면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표준말로는 ‘민들레’이지만 고장마다 가리키는 이름이 다 다릅니다. 수백 가지도 아닌 수천 가지 ‘이름’이 있는 민들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수천 가지 이름’이 어슷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꼭 하나를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다 다른 고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다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가리키는 이름은, 다 다른 삶터에 맞게 태어난 말로 다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민들레를 아끼지 않는다면 민들레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진달래를 아끼지 않는다면 진달래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아요.


  옛날부터 시골지기는 모든 이웃한테 저마다 다른 이름을 알뜰살뜰 붙여 주었어요. 거머리한테도 거머리라는 이름을 주고, 장구애비 물방개 소금쟁이 게아재비 미꾸라지 다슬기 개똥벌레 가재 같은 이름이 골고루 있습니다. 파리 모기를 비롯해서 벌이랑 나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벌하고 나비는 또 수많은 이름이 갈래갈래 있습니다.



조개는 / 제 껍질에 / 노을을 새긴다 (조개의 무늬)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름을 붙여 주지 않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도시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발을 밟고 지나간다든지 밀치고 지나가는 ‘여러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 보셔요. 아주 고단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도시에서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못 느끼기 마련이라, 우리 곁을 스치거나 밀치며 지나가는 ‘이웃이어야 할 사람’한테 아무 이름을 못 붙입니다.


  이는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는 들나물이나 들풀을 아끼는 손길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냥 농약을 뿌려대어 죽이니까요. 논이고 밭이고 온통 농약투성이가 되면서, 논에서 살던 수많은 이웃도 거의 다 죽어서 사라집니다. 논개구리 참개구리 무당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같은 이름은 아예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방아깨비 풀무치 여치 베짱이 같은 이름은 아예 들여다볼 틈도 없습니다. 이른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조금 들여다볼 뿐, 여름쑥이나 가을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쟁이 미나리 질경이 민들레 토끼풀 모두 숱한 ‘잡풀’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려 할 뿐입니다.



동생과 내가 잠도 깨기 전 / 아버지는 제일 먼저 일어나셔서 / 쇠죽솥에 물을 붓고 / 불을 지피고 / 작두로 썰어 놓은 볏짚을 넣고 / 콩깍지를 한 삼태기 / 헛간에서 퍼 와 / 외양간 소를 위해 쇠죽 끓이시고 (겨울 아침 우리 집)


울바자에 내린 눈은 울바자 덮고 / 대숲에 내린 눈은 대숲을 덮고 (겨울날)



  동시집 《산속 어린 새》에서 흐르는 겨울날 모습은 아련한 옛모습이로구나 싶습니다. 쇠죽을 끓이는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쇠죽을 끓일 볏짚을 건사한 시골집은 몇 채쯤 남았을까요? 요즈음 벼는 하나같이 유전자를 건드려서 짜리몽땅하기에 짚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벼는 짜리몽땅할 뿐 아니라 짚이 아주 가늘고 힘조차 없어요. 무엇보다도 일소를 부리는 시골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울바자가 남은 시골집이 있기는 있을 테지요. 그러나 요즈음 시골마을은 어디를 가든 시멘트로 쌓은 블록담입니다. 수수깡 울타리라든지 탱자나무나 찔레나무 울타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이런 아련한 모습이 동시집 한켠에 살며시 깃듭니다. 이 동시집을 읽을 요즈음 어린이는 ‘울바자’가 무엇인지 모를 테고, ‘작두’나 ‘삼태기’를 구경할 일도 없다고 할 터이니, 뭔 얘기를 읊는 동시인지 하나도 모를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깃들기에, 아이들은 이 노래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누구나 겪고 살며 누리던 이야기이나, 이제는 ‘동시 한켠에만 유물처럼 남은’ 노래를 마음으로 그리도록 이끄는 조그마한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달맞이꽃 핀 마을에 어둠 내리면 / 모깃불 피어나는 마당 너머로 / 반딧불이 깜박이며 숨바꼭질하고 (박꽃 핀 마을에)



  도시에는 모깃불도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는 마당도 없고 밭뙈기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달맞이꽃을 심어서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요즈음 시골에서도 달맞이꽃을 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달맞이꽃도 숱한 ‘잡풀’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농약으로 태워 죽이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 태어나자 / 우리 할머니 / 시골에서 / 서둘러 올라오셨다. // 할머니가 / 내 동생을 가슴에 안고 / 함박웃음 지으며 / 노래하신다. (할머니의 노래)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즐겁습니다. 너랑 나랑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기에 웃음꽃이 핍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노래를 가슴으로 새기면서 기쁘게 뛰어놉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를 물려주면서 씩씩하게 일하고, 아이는 어버이가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냅니다.


  새끼 새도 어미 새도 숲이 있을 때에 둥지를 틀어 삶을 누립니다. 모든 새는 숲에 깃들어 숲노래를 부를 적에 싱그러운 숨결이 됩니다. 사람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림을 가꿀 적에 싱그러운 넋이 됩니다. 아이들이 숲을 책으로만 만나지 않기를, 아이들이 반딧불이나 무지개를 동영상으로만 들여다보지 않기를, 언제 어디에서나 이웃과 동무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도 곁에서 늘 숲을 사랑하고 흙과 바람과 빗물을 고마이 여길 줄 아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1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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