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향고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0
정영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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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8



시와 풀내음

― 말향고래

 정영주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7.7.16. 7000원



  한여름으로 접어든 시골은 조용합니다. 여름철 무더위를 잊으려고 시골로 찾아온 손님이 북적이는 시골이라면 한동안 왁자지껄할 수 있고, 자동차 뜸하던 찻길에도 자동차가 제법 지나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시골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농약 뿌리려고 경운기를 몰고 나오는 할매와 할배가 있으면, 농약이 논밭으로 퍼지는 소리가 울립니다. 농협에서 띄우는 농약살포 헬리콥터가 돌아다니면 꽤 먼 데까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퍼집니다.

  시골은 도시처럼 매미 우는 소리가 우렁차지 않습니다. 시골은 멧새 노랫소리하고 풀벌레 노랫소리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때때로 한낮에도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풀을 베다가 여러 소리를 듣습니다. 땀을 훔치면서 마루에 앉아서 쉬다가 온갖 소리를 듣습니다. 밥을 지어 아이들을 먹인 뒤 한 차례 멱을 감고 평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신화가 된 고래의 늑골 하나 빼내어 / 내 빈 곳 채울 수 있다면 / 스스로 말향고래가 되어 심해까지 / 내려가 심장과 내장 뼈 마디마디 / 썩지 않을 기름으로 채울 수 있다면 (말향고래)



  정영주 님 시집 《말향고래》(실천문학사,2007)를 읽습니다. 고래 이야기라면 이제 철지난 옛이야기로 여길 만합니다. 고래잡이배는 뜨기 어렵고, 고래를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다큐영화 같은 데에서는 고래를 볼 테지만, 어른도 아이도 맨눈으로 고래를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피노키오나 모비딕을 말할 적에 으레 고래를 떠올린다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고래를 얼마나 잘 이야기할 만할까요.



금목서가 왜 쓰러졌는지 모른다 / 쓰러지면서 진저리치며 터지는 / 꽃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 문득, 그제야 내가 오랫동안 / 뜨락에 나간 적이 없음을 알았다 (금목서)



  시골에서 풀내음을 맡습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내음을 맡을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풀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풀노래를 부를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풀내음을 맡고 싶어서 시골에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풀빛을 마주하면서 푸른 마음이 되고 싶기에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곧잘 깨닫습니다. 풀숨을 마시고 풀열매를 먹으며, 풀잎을 훑어서 즐기려는 뜻에서 시골에서 사는구나 하고 으레 느낍니다.


  그러면 풀내음이란 무엇일까요? 풀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도시사람은 나무밭(수목원) 같은 데에 가서 일부러 ‘나무내음’을 쐬려고 합니다. 나무내음을 맡으면 여느 때에 배기가스나 온갖 지저분한 바람을 마시느라 고단한 허파가 싱그러이 살아난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이 맡으려고 하는 나무내음은 어떤 내음일까요? 나뭇줄기나 나무뿌리 내음일까요? 아마 이런 내음도 있을 테지만, 사람들한테 짙고 깊게 스며드는 나무내음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뭇잎이 베푸는 내음’입니다.



집에 오니 / 옷자락에 쐐기풀이 잔뜩 박혀 있다 / 숲 속 몇 마장 들다 나왔는데 (흔적)



  시집 《말향고래》는 예부터 사람들이 제 삶터에서 맡던 온갖 내음을 가만히 이야기합니다. 쐐기풀에 깃든 내음을, 숲에 서리는 내음을, 햇볕에 배는 내음을, 창문에 번지는 내음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흙길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맡습니다. 풀밭길을 걷는 사람과 시멘트길을 걷는 사람은 서로 다른 냄새를 맞이합니다. 숲길을 걷는 사람과 골목길이나 시내 한복판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냄새를 들이켭니다.



잘 달궈진 햇볕이 / 벽돌담을 넘어와 / 창문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뉘 고르는 여자)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시골에 젊은이도 어린이도 많았습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늙은 사람만 많습니다. 시골에서 젊은이와 어린이가 자취를 감추면서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고, ‘풀을 먹고 사는 집짐승’을 키우는 집이 사라지면서, 밭둑이나 논둑에서 잘 자라던 풀을 성가셔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납니다. 여기에다가 1970년대부터 밀어닥친 새마을운동은 ‘풀을 뜯어서 먹지 말’고 ‘풀에 농약을 뿌려서 죽이라’는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한의사와 제약회사는 정갈하고 고즈넉한 시골이나 숲에서 자라는 풀을 얻어서 약으로 삼습니다. 시골사람은 이제 고들빼기나 소리쟁이나 부들이나 모시나 까마중이나 쇠무릎이나 질경이를 약으로 삼을 줄 모릅니다. 약으로 쓰던 슬기를 모두 잊었습니다. 망감도 하늘타리도 귀찮을 뿐이고, 댓잎이나 갈잎으로 바구니를 엮던 손길은 아주 끊어집니다.



찢어진 돌을 보았다 / 그 속으로 보타진 강이 흐르다 / 멈춘 것을 보았다 / 미처 이사 가지 못한 고라니와 / 바람에 넘어지는 숲과 / 돌아서 뒤채는 물 속에 / 머리카락 죄다 풀어헤치는 / 줄풀들의 울음소리가 / 갈라진 돌 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돌 속에 누워)



  시를 한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떠올립니다. 시를 두 줄 읽으면서 풀내음을 그립니다. 시를 석 줄 읽으면서 아련하게 스미는 풀내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집을 덮은 뒤 우리 집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 베푸는 온갖 내음을 마십니다.


  다만, 풀내음을 맡더라도 틈틈이 낫질을 합니다. 걸어서 지나다닐 길은 있어야 하니까요. 모기가 너무 끓지 않도록 풀밭을 건사해야 하기도 하고요. 아이들 키보다 웃자란 쑥을 베거나 뽑아서 한쪽에 쌓으면, 쑥대가 땡볕에 잘 마르면서 고운 ‘짚내음’을 베풉니다.


  참말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소와 염소가 이 너른 풀을 신나게 먹었을 테고, 사람들은 소한테서는 소젖을 얻고 염소한테서는 염소젖을 얻었을 테지요. 풀을 먹는 짐승이 풀노래를 부르듯이, 풀을 아끼고 돌보던 시골사람은 풀바람을 쐬면서 풀밥을 먹고 풀잔치를 누렸을 테지요. 잠자리가 달맞이꽃에 가만히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4348.8.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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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물어본다 레디앙 시선 - 일하며 부르는 노래 1
곽장영 지음 / 레디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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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0



시와 땀방울

― 가끔은 물어본다

 곽장영 글

 레디앙 펴냄, 2015.6.25. 1만 원



  여름에 한손에 낫을 쥐고 풀을 베다 보면 어느새 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러면서 두 손은 흙물하고 풀물이 듭니다. 땀방울은 물로 씻으면 털어낼 만한데, 손에 배기는 흙물하고 풀물은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습니다.


  여름에 부엌에서 밥을 짓다 보면 어느새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온몸에는 밥내음하고 국내음이 퍼집니다. 여름에는 밥상을 차리고 나서 아이들더러 먼저 먹으라 이르고는, 찬물로 한 차례 씻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밥상맡에 앉을 만합니다.



평생을 가려온 / 나무 그늘을 벗어나고파 / 파란 하늘에 안기고 싶었던 (상사화)


한 달을 다 비워갈 때면 / 어김없이 / 찾아오는 편지가 있다 / 이번 달에 떼어 갈 돈을 / 자세히도 적어서 (빚쟁이의 행복)



  곽장영 님이 빚은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레디앙,2015)를 읽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하는 곽장영 님은 ‘일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진보정당’ 이야기를 싯말로 삭이고, 틈틈이 멧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마주한 숲바람 이야기를 싯말로 다스립니다. 술 한잔을 부딪히면서 돌아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이야기도 찬찬히 싯말로 녹입니다. 때로는 이녁 아이하고 벌이는 실랑이가 싯말로 태어납니다.



텔레비전 못 보게 한다고 / 아홉 살 난 / 아들놈이 애비를 / ‘나쁜 놈’이란다 // 어르고 달래고 / 한 대 쥐어박으며 / ‘그건 잘못했다’고 인정하래도 / 그럴 수 없단다 (전세 역전)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텔레비전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싶다든지 저것을 보겠노라느니 하면서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전기삯을 낼 적에 시청료를 안 냅니다. 있지도 않은 텔레비전 때문에 시청료를 물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바꾸라’면서 찾아오는 영업 일꾼이 있으나, 텔레비전을 아예 안 들인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영업을 할 길이란 없습니다.


  곽장영 님이 텔레비전을 놓고 아들내미하고 실랑이를 벌인 시를 읽다가 피식 웃으면서 생각에 젖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운다면, 아들내미하고 함께 시를 쓰면서 논다면, 집에서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글놀이랑 그림놀이를 즐기다가, 함께 집 바깥으로 나간다면, 싱그러운 멧봉우리 나들이를 아이하고 함께 누린다면, 이때에는 어떤 시가 태어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자다가 / 배고 고파 깨어서 / 김치 풀어 / 갱죽을 끓인다 (마늘)



  얼추 열흘 남짓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바람이 불었습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도, 비가 멎는다 싶으면 농약 헬리콥터가 떠서 항공방제를 합니다. 날이 맑다 싶으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약 헬리콥터가 시끄럽습니다. 비가 그쳐서 이불도 널고 빨래도 널려고 마음을 먹으나, 농약바람이 촤르르 부니까, 이불이나 빨래를 섣불리 마당에 널지 못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일을 마쳤는지 바깥이 조용하면, 아이들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뛰놉니다. 마당에서 놀던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잠자리 한 마리를 주워서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기 잠자리!” 그러네, 그런데 잠자리가 죽었구나. “그래, 잘 했어. 저기 꽃밭 흙에다 놓아 주렴.”


  아이들도 알리라 느낍니다. 나비하고 잠자리가 왜 죽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떴다 하면, 날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들던 새들이 왜 안 찾아오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뿌리는 동안 개구리가 왜 노래하지 않는지를.



이대로 가면 / 비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구름이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안개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미끄러운 바위가 될 수도 있겠다 (안개비, 운악산에서)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이 될 수 있고, 스스로 슬픈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구름도 되고 안개도 되며 바람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되거나 노래가 되거나 눈물이 되거나 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묻는 씨앗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심은 씨앗대로 천천히 자라서 피어납니다.


  이대로 가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미움이 될 수 있으나, 이대로 가면서 평화와 민주가 될 수 있습니다.



아파트 뒤 베란다 열고 /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더니 / 개구리들 합창을 하는구나 (오만 1)


개나리 진달래만 꽃인 줄 알았다 / 철쭉과 아카시아만 꽃인 줄 알았다 (함박꽃)



  개나리도 꽃이고 진달래도 꽃입니다. 달걀꽃도 꽃이고, 괭이밥 노란 봉오리도 꽃입니다. 한국사람이 먹는 쌀밥도 ‘나락꽃(벼꽃)’이 지면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제 지구별 누구나 즐겨먹는 빵도 ‘밀꽃’이 지면서 맺는 밀알을 빻아서 얻는 먹을거리입니다.


  서로 꽃 같은 목숨입니다. 서로 꽃다운 넋입니다. 내가 너를 아끼고, 네가 나를 돌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믿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서로 꽃 같은 목숨인 줄 깨닫는 자리에서 씁니다. 시 두 줄은 언제나 서로 꽃다운 넋인 줄 알아치리면서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써요.



한강은 밤이 없다 / 내게도 밤이 없다 (한강의 밤)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를 쓴 곽장영 님은 가끔은 누구한테 물어 볼까요? 아마 곽장영 님 마음속에 깃든 님한테 묻겠지요. 나도 으레 내 마음속에 대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얼마나 너른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고 옷을 빨아 주며 놀이를 함께 누리는 어버이로서 나는 얼마나 착한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고요히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하루를 지어서 즐거운 삶이 되도록 나아가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잠들면서 새삼스레 물어요. 오늘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 지으면서 즐거이 노래하는 삶이 되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묻습니다. 물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묻고 또 물으면서 두 걸음을 내딛습니다. 다시 묻고 새로 물으면서 세 걸음을 뻗고 네 걸음으로 이으려 합니다. 천천히 한 발짝씩 떼면서 시가 자라고, 찬찬히 두 발짝 세 발짝 잇는 동안 아름드리 숲이 깨어납니다. 4348.7.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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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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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0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꿈은 ‘사랑’

―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글

 나라말 펴냄, 2015.5.1. 1만 원



  거미 한 마리가 내 앞으로 줄을 드리우면서 내려옵니다. 거미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뒤 마음속으로 말을 겁니다. 얘야, 네가 이리 내려오면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손가락을 살그마니 뻗습니다. 거미가 줄을 드리우며 내려오다가 내 손가락에 톡 내려앉더니 깜짝 놀란 듯이 다시 줄을 당겨서 허둥지둥 위로 올라갑니다. 이 아이는 우리 집 한쪽에 거미줄을 치려고 한 듯합니다.


  거미를 눈여겨봅니다. 거미는 조금 뒤 다시 줄을 드리우고 내려오려 하지만,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거미가 내려오는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거미는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만한 자리로 옮겨 줍니다. 집 안쪽에 줄을 치지 말고, 집 바깥쪽에 줄을 치기를 바라면서 거미를 더 지켜봅니다. 아무래도 이 둘레에는 줄을 치지 못하겠구나 싶은지, 거미는 다른 곳으로 사라집니다.



땅에 무릎을 / 수백 번 꿇지 않고서야 / 어찌 밥상 차릴 수 있으랴 (먹고사는 일)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에 / 온 동네 새들이 야단법석이다 /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 아이구우, 이게 무슨! / 텃밭에 개미가 하도 많아 / 아내가 놓아둔 끈끈이에 / 개미는 안 붙고 / 참새 새끼 한 마리 붙어 파닥거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정홍 님이 일군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나라말,2015)를 읽습니다. 경남 합천 황매산 언저리 멧골자락에서 흙을 일군다고 하는 서정홍 님은 ‘농사꾼 시인’입니다. 또는 ‘시인 농사꾼’입니다. 서정홍 님한테서는 ‘농사꾼’이나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공장 일꾼으로 지낼 적에는 ‘노동자’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노동자 시인’이나 ‘시인 노동자’였고, ‘아버지 시인’하고 ‘시인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지내다가, 이제는 호젓하게 ‘농사꾼 시인’하고 ‘시인 농사꾼’으로 숲바람을 마시면서 지냅니다.



산골 마을에 남의 논밭 얻어 농사지으며 산 지 서너 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몸이 지쳐 밥 씹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달콤한 보약)


경운기를 몰고 / 산밭 아래 /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 잠시 물 한잔하신다 // ―어이쿠우, 시원타! /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산내 할아버지)



  시를 쓰는 서정홍 님은 시를 쓰려고 이 땅에 태어났을는지 모릅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지만, 서정홍 님이 마주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시’라는 이야기로 새로 태어납니다. 공장에서 붙잡은 기계도 시로 바라보고, 시골에서 맞잡은 연장도 시로 바라봅니다. 아이를 낳아서 곁님하고 함께 돌보는 동안 곁님하고 아이를 시로 바라볼 뿐 아니라, 들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꿈에서도 언제나 시를 그립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 다섯 살 개구쟁이 다울이가 / 살며시 다가와 묻습니다 //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 / 상추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상추와 강아지풀)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 도시에서 살다가 / 십 년 전에 산골에 들어와 /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 농사 나이로 열 살입니다 (산골 아이 구륜이 3)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예부터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살았습니다. 지구별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은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노래를 짓고 부르며 나누었습니다. 가수라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르고, 바닷일을 하며 바다노래를 불러요. 나물을 캐며 나물노래를 부르고, 길쌈을 하며 길쌈노래를 불러요.


  서정홍 님이 빚은 시집에서 흐르는 시는 모두 서정홍 님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이기에 쓰는 시가 아니라, 삶을 짓기에 쓰는 시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밥을 먹기에 쓰는 시입니다. 바람을 마시고 숲을 바라보면서 쓰는 시입니다. 햇볕을 쬐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쓰는 시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을 노래하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를 꿈꾸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이든, 도시에서 꿈꾸는 삶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게를 지고 / 이웃집 다랑논에 모판을 나르고 // 으스름히 해 질 무렵에 /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었습니다 (유월)


산밭에서 처음 딴 오이라며 / 아내가 내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 내게 준 오이를 / 다시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여름날)



  한여름으로 접어들면, 시골에서는 낮에 땡볕을 쬐며 일하기 힘듭니다. 가만히 서거나 앉아도 땀이 흐르거든요. 한여름에는 새벽 서너 시부터 일손을 놀려 아침에 쉽니다. 낮에 고즈넉하게 한숨을 돌리고, 햇볕이 누그러지는구나 싶을 때에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이 많거나 바쁘면 땡볕에 흙빛으로 까무잡잡하게 온몸이 타면서 일하지요.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이루는 시에는 땀내가 흐릅니다. 땀을 식히는 바람결이 감돕니다. 바람결에 싱그러운 숨결이 깃들도록 북돋우는 꽃빛하고 풀빛이 함께 섞입니다.


  오이를 따며 오이를 생각하는 노래를 부르고, 고추꽃을 보며 고추를 그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나락을 심으며 나락꽃이 피고 지며 나락알이 굵어지는 꿈을 꾸고, 나락을 베면서 나락알을 갈무리하여 겨우내 즐겁게 먹는 꿈을 꿉니다.


  노래는 고스란히 시가 됩니다. 꿈은 모두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노래는 어버이 입을 거쳐서 아이들 몸으로 스밉니다. 꿈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야기에 살을 입히면서 새삼스럽게 피어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새롭게 꿈씨를 심으면서 신나게 뛰놉니다.



지난 십 년, 내 가난한 삶과 함께 / 녹두밭으로 콩밭으로 수수밭으로 / 양파밭으로 마늘밭으로 생강밭으로 /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다닌 / 괭이가 비를 맞고 있다니! (괭이)



  마당에 천막을 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천막에서 놀고 싶다 하기에 천막을 칩니다. 천막을 치기 앞서 마당을 씁니다. 빗자루로 석석 쓰니, 여덟 살 큰아이가 “나도 거들어야지.” 하면서 빗자루를 가져옵니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나도 도와야지.” 하면서 광에서 깔개를 꺼냅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하고 누나가 비질을 마칠 때까지 평상에 앉아서 놉니다.


  우리 아이들 멋지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비질을 마무리짓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밀린 일을 조금 합니다. 이제 자전거를 손질해서 골짝마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하늘 높이 걸린 낮에 골짝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골짝노래를 부르자고 꿈꿉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친 뒤 갈아입을 옷을 챙깁니다. 멧새는 후박알을 따먹으려고 마당으로 찾아들고, 제비는 오늘도 바지런히 먹이를 잡아서 처마 밑으로 나릅니다.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삶은 언제나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황매산에서 부는 고요한 바람이 짙푸르게 골골샅샅을 보듬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부는 바람도 싱그럽게 이웃마을로 날아가고, 다른 고장에서 부는 상큼한 바람도 우리 마을로 반갑게 찾아옵니다. 4348.7.1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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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7-17 08:17   좋아요 0 | URL
이 책, 지금 막 구입했습니다.

숲노래 2015-07-17 09:58   좋아요 0 | URL
풀내음에 땀내음이 섞인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곧 누리시겠네요!!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문학동네 동시집 16
신현득 지음, 전미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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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2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아요

―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신현득 글

 전미화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0.12.8. 8500원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그림 그리고 싶어.” 하고 말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감판하고 그림종이를 내줍니다. 작은아이는 물을 쓸 수 있는 부엌바닥에 종이를 펼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다가 저도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종이뿐 아니라 부엌바닥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림놀이를 마친 뒤, 부엌바닥을 걸레로 훔칩니다. 부엌바닥을 더 깨끗하게 닦으라는 뜻으로 부엌바닥에 그림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두 아이는 갓난쟁이였을 적에 사흘이 멀다 하고 이불이 쉬를 누거나 똥을 발랐습니다. 기저귀를 갈랴 이불을 빨랴 그야말로 손이 쉴 겨를이 없었어요. 아기를 돌보는 집은 깨끗해야 하니까 이불을 자주 빨라는 뜻으로 그렇게 쉴새없이 이불에 쉬와 똥을 발라 주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 땅에서 / 뾰족 나온 / 우리나라 // 거기에 / 점 하나 찍으면 / 우리 마을 (점 속에 내가 있다)


한 바퀴 세계를 돌고 보면 /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길 // 북극에서 오는 길도, /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도 이 길이라죠 // 우리 집 골목에서 / 끝나는 길 (우리 집 골목길은)



  신현득 님이 빚은 동시를 모은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문학동네,2010)를 읽습니다. 1950년대부터 동시를 쓴 분이 바라보는 201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1950년대에 어린이를 바라보는 눈길하고 2010년대에 어린이를 헤아리는 눈길은 어느 만큼 다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 자리에서 바라보는 어린이 삶이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서 흐른다고 할 만합니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썼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나라와 아시아와 지구별을 넓게 살필 수 있도록 북돋우고 싶은 마음을 동시로 그리기도 했다고 느낍니다.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지 / 이쁘다고 이쁜이 / 순한 아기 순단이 / 야무진 차돌이 / 힘이 센 센둥이 (이름이란 그런 것)


내 이름은 김개나리야 // 전학 서류 가지고 찾아간 / 학교 이름도 / ‘개나리초등학교’였지 (개나리초등학교)



  아이들을 지켜보면 시가 샘솟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나 어른더러 시를 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기를 바라고, 함께 놀지 않더라도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면, 함께 노는 대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나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저희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새 놀이를 지어서 까르르 웃고 뒹굴고 달리고 뛰면서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함께 놀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시라고 한다면, 또 동시라고 한다면, 굳이 꾸며서 쓸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는 이야기를 쓰면 모두 동시가 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거이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쓰면 언제나 동시가 돼요.


  땀을 흘리면서 달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을 빨래터에서 함께 물이끼를 걷고 노는 이야기를 씁니다. 마당이랑 뒤꼍에서 풀을 뜯는 이야기를 씁니다. 철마다 달리 부는 바람을 마시면서 꽃을 보고 열매를 얻는 이야기를 씁니다. 심부름을 하고 살림을 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한테는 ‘학교’만 학교이지 않습니다. 집도 마을도 숲도 모두 학교, 곧 배움터입니다. 살아가는 터가 배우는 터요, 살아가는 터에서 사랑을 누립니다.



“어둠나라 개가 달을 먹네.” / 월식날 밤, 옛사람들이 / 달을 보며 말했지 (달을 먹는 개)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에 흐르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동시를 쓰는 할아버지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건네려고 하는가를 되새깁니다. 옛이야기는 먼 옛날부터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고,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또 아이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는 사이에 새로운 아이한테 들려줍니다. 달을 먹은 개 이야기도, 제비와 흥부 이야기도, 어린 개구리와 어미 개구리 이야기도, 베짱이 이야기도,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이 들려줍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아버지로 지냅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으로 우뚝 서면, 이 아이들은 새롭게 아이를 낳을 테고, 그때에 나는 할아버지로 지내면서 새로운 삶과 이야기를 지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하루가 삶으로 모이고, 이러한 삶이 이야기가 되며, 이러한 이야기가 사랑이 되어 흐릅니다.



돋아난 / 새싹을 / 손끝으로 / 톡, / 건드려 봐 // 놀라서 / 옴싹 / 움츠리지 (새싹 간질이기)


장독대 돌봐 놓고 / 둘레에 맨드라미, 봉숭아 몇 포기도 / 만져서 피워 주고 // 해거름에 해님은 배고프다며, 휘딱 / 저녁 먹으러 가 버렸어요 (해님은 손으로 장맛을 들여요)



  해가 뜨는 아침에 해를 바라보면서 놉니다. 햇볕이 뜨거운 낮이 되면 구름이 와라, 바람아 불어라, 노래하면서 놉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이 되면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놉니다. 별이 돋는 밤하늘을 그리면서 놀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크게 하품을 하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즐겁게 놀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이한테는 근심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신나게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나 어른한테도 근심이나 걱정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 어버이와 어른한테는 무엇이 깃들까요? 바로 사랑이 깃들어요. 어버이와 어른은 저마다 사랑을 가슴에 담고서 아이들을 어루만집니다. 이불깃을 여미면서 가슴을 토닥입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자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가슴속에 꿈을 품습니다.


  어버이와 어른은 사랑을 헤아리면서 삶이 기쁘고, 아이는 꿈을 지으면서 삶이 재미납니다. 동시는 사랑하고 꿈이 만나는 삶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납니다. 4348.7.5.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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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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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7



시와 삶

―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이경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9.25.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적에는 잎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애벌레한테는 잎을 배부르게 갉아먹어서 몸을 살찌우는 일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몸집을 불리고 불린 뒤에 허물을 벗어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고, 다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며, 이윽고 밥먹기를 그치려 해요.


  밥먹기를 그치는 애벌레는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자고 또 자고 다시 자면서 고요히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애벌레는 고치를 짓습니다. 애벌레는 고치에 깃들어 먼먼 옛날부터 ‘저(애벌레)를 낳은 어미가 했’듯이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서 꿈을 꾸고, 애벌레가 꾸는 꿈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누가 실바람으로 잔가지를 지나간다 / 지금 누가 저 황원에서 쓸쓸히 노래하고 있다 (저 깊은 강)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 / 사이프러스 나무 숲에 둘러싸인 궁전 (내 속의 알함브라)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는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온몸이 간지러울 뿐 아니라 쑤십니다. 몽툭한 다리가 사라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생깁니다. 더듬이가 생기고 날개가 돋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하던 몸은 날렵하면서 가벼운 몸으로 바뀝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애벌레는 한참 동안 몸과 날개를 말립니다. 첫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를 때까지 바람이 잠들며,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로 깨어난 나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풀밭이나 숲에 서면 온갖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길을 모아 풀줄기나 나뭇잎을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면서 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비가 날고,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자라요. 한쪽에서는 풀이랑 나무가 새 잎을 내놓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풀잎이랑 나뭇잎을 갉습니다.


  그리고, 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하늘을 날고,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릅니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먹는 새가 있고, 나비나 잠자리는 안 쳐다보는 새가 있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들바람이 불고 숲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랑한 건 그 남자 / 가 아니라 담요였네 언 몸 녹여주던 담요! / 그것의 부드러움 그것의 휘감김 그 가벼움을 / 사랑했네 그 밑의 따스함 그 밑의 어두움 그 밑의 / 은밀함 그 알몸 덮어버리는 폭력! (내가 사랑한 담요)



  이경림 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김정란 님은 시집 끝자락에 비평을 붙입니다. 김정란 님은 이경림 님 시를 놓고 “80년대에 등단했더라면, 그녀의 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경림의 시는 부서진 80년대의 대서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부활한 90년대의 소서사의 한 전형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김정란 님이 말하듯이, 참말 이경림 님 시는 1980년대에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똑같이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거나 넓게 알아보거나 사랑해 줄 사람이 적더라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아끼거나 가슴에 품을 사람은 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서사’이든 ‘소서사’이든, ‘서사(敍事)’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삶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뿐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들 이야기요, 권력자나 정치꾼 이야기뿐 아니라,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 이야기요, 도시에서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하는 골목사람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 산다는 건 / 마알간 잠의 밑바닥에는 바닥 모를 우물이 파이고 / 고통과 사랑과 그리움과 배반과……, / 진짜들은 늘 허공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토론토에서)


어머니를 속에 감춘 계집아이 하나와 / 계집아이를 속에 감춘 어머니 하나가 / 손잡고 갑니다 (숨은 모녀)



  삶은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삶은 언제나 오직 하나이기에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기에 삶은 늘 대단합니다. 1월 1일을 이틀쯤 누리거나 7월 1일을 안 누려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거나 열네 시간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서 자리에 눕느라 다른 일을 못 하더라도, 몹시 바빠서 쉴 겨를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은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맞아들이고, 똑같은 삼백예순닷새를 맞이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나날을 저마다 새로운 삶으로 누리니, 누구한테나 삶은 대단합니다.


  역사책에 남을 만한 일을 했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릴 만한 자리에 서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삶이 수수하면서 대단합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삶이 투박하면서 대단합니다. 거리낌없이 뛰노는 아이들 하루가 대단하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 삶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을 언제나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북돋우거나 예술을 살찌우는 몸짓이 되어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쓰기에 시이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타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싣거나 이름난 작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시인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즐거웁게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이야기를 짓는 삶이 된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가꾸고 기쁘게 일구는 삶을 노래할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덤프트럭은 시절 없이 오가고 방범대원은 골목골목 호루라기를 불어댄다네 /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고 그 사랑 가로등 아래 우울한 그늘 만드네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밝은 유리문이 있다 (加恩이라는)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바로 이 시를 쓴 이경림 님 삶이 깃들었을 테지요.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삶이 깃들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삶이 깃듭니다. 아픈 삶이 깃들고, 설레거나 벅차는 삶이 깃듭니다.


  그늘을 바라본 삶을 시로 노래하고, 햇살을 마주한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하루를 시로 읊고, 시골로 마실을 가거나 이웃나라를 다녀온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시집을 덮고 고요히 생각에 잠깁니다. 책상맡에 촛불을 켜고 지긋이 바라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에 느즈막하게 잠든 아이들을 가까스로 재우고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 깊은 밤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나는 오늘 하루 잠들고 나서 이튿날에는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시 한 줄에 흐르는 삶을 읽다가, 내 삶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시 두 줄에 감도는 사랑을 헤아리다가, 내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밤오줌을 누려고 큰아이가 잠에서 살짝 깹니다. 쉬를 누고 다시 자리에 누운 아이를 다독입니다. 이불을 여미어 주고, 작은아이도 살핍니다.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반듯하게 누인 뒤 이불을 새로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두 팔을 옆으로 뻗어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기쁜 꿈을 꾸자고 속삭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삶이 즐거우면서 아름답겠지요.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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