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놈 -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27
김개미 지음, 오정택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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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3



재미난 문학을 읽어도 삶이 따분하다면

― 어이없는 놈

 김개미 글

 오정택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3.8.12. 9500원



  수저질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한참 동안 밥알을 흘리고 국을 쏟습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을 먹도록 아이는 도무지 수저질을 익숙하게 못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말 그대로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른 해나 쉰 해 동안 수저질을 한 어른도 곧잘 흘립니다. 마흔 해나 예순 해 동안 설거지를 한 어른도 가끔 그릇이나 접시를 깹니다. 아이들이 수저질이 익숙하지 못하거나 그릇을 깨는 일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제 막 삶을 배우고, 바야흐로 삶을 누리며, 차근차근 삶을 즐기는 아이들은 밥알을 흘리면서 신나게 밥을 먹습니다.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 줬더니 /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어이없는 놈)



  김개미 님이 빚은 동시를 그러모은 《어이없는 놈》(문학동네,2013)을 읽습니다. 김개미 님은 아이들이 학교와 집 사이에서 겪는 일을 재미나게 바라보면서 재미나게 풀어냅니다. 아이도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드러내기도 하고, 아이 사이에서도 언니랑 동생이 모두 사랑스러운 숨결이라는 대목을 넌지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나이가 많거나 몸이 크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하나입니다. 세 살 아이와 여섯 살 아이도 목숨은 하나예요. 할머니도 어머니도 목숨은 하나예요. 목숨이 둘인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 있는 목숨을 아름답고 즐겁게 누릴 때에 살가이 웃습니다.



앨범을 뒤적거리다 / 배꼽이 빠질 뻔했다 / 기저귀 하나 달랑 찬 /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아기가 / 양손에 과자를 든 채 /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옛날 사진)




  아이가 잘못을 하는 까닭은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잘못이 없습니다. 아니, 아이가 한 일은 ‘잘못’이나 ‘잘’로 따질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기에 서툴기 마련이고, 아이는 아직 잘 모르니 ‘모르는 대로 스스럼없이’ 할 뿐입니다. 아이는 그저 온갖 일을 겪어 보고 싶습니다. 


  국 그릇에 담긴 국을 숟가락으로 톡톡 쳐 보고 싶습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길목에 큰 돌을 놓아 보고 싶습니다. 나비 애벌레를 살며시 건드려 보고 싶습니다. 잠자리가 손가락에 내려앉으면 잡아 보고 싶습니다. 하늘로 훌쩍 뛰어올라 바람을 타 보고 싶습니다. 도서관이나 전철 같은 데에서도 신나게 달리거나 춤을 추어 보고 싶습니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가 / 화단 앞에서 뭔가를 주워 / 편지 봉투에 넣어 줬어요 / 내년 봄에 심으면 / 분꽃이 필 거라나 (이게 뭐야)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즐겁고 재미납니다. 스스로 놀고 싶은 대로 놀지 못하는 아이한테는 하루가 따분하거나 괴롭습니다.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아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억지스레 쥐어짭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동시를 들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들일 만한 동시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삶을 물려줄 만할까요? 아이들이 기쁘게 맞아들일 만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를 베풀 만할까요? 아이들이 사랑스러 껴안을 만한 마을과 보금자리와 배움터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당벌레를 한참 바라보다가 / 눈을 꼭 감으면 / 무당벌레가 눈 속으로 쳐들어온다 (무당벌레)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씨앗이랑 단추랑 돌이랑 돈을 제대로 못 가린다고도 합니다. 참말 그러할까 싶지만, 참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풀씨가 어떤 풀씨인지 낱낱이 알려주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참말 그러하겠구나 싶습니다. 시골에 살더라도 밭일이나 논일을 거들지 않으면 모르고, 논일이나 밭일을 거들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거들지 않으면 몰라요. 도시에서 집하고 학교하고 학원 사이만 오가는 아이라면 그야말로 풀씨를 제대로 알기 어려워요. 아마 도시에서는 어른들도 풀씨를 모르겠지요. 민들레라면 꽃대에 달린 씨앗을 보고 알는지 몰라도, 꽃대에서 뗀 뒤 솜털을 떼어내면 어떤 씨앗인지 모르리라 느껴요. 가을을 앞두고 길가에 잔뜩 피는 코스모스도 늦가을에 맺는 씨앗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무당벌레는 우리 눈으로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가슴으로 ‘살살 기어올’ 수 있습니다. 무당벌레는 우리 마음으로 ‘조용히 날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몸짓인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하루를 보내는가에 따라서 무당벌레를 다르게 맞이합니다.


  즐겁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누린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즐겁거나 기쁩니다. 즐겁게 놀지도 못하고 기쁘게 노래하지도 못하는 하루를 보내면서 학원과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 아이라면, 어떤 동시를 읽더라도 독후감 숙제로 여길 뿐입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아이들한테 이 동시집은 어떻게 스며들 만할까 궁금합니다. 재미나게 놀면서 ‘재미난 동시’를 읽을 수 있을까요? 잔뜩 짓눌린 채 시험공부만 하다가 독후감 숙제를 하느라 ‘재미난 동시’를 글로만 읽어야 할까요?




토란잎이 / 빗방울을 가지고 노네 / 투명한 구슬을 / 요리조리 굴리네 / 똥그란 구슬을 / 더 똥그랗게 만드네 (비 오는 날)



  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다른 집 아이들한테도 높임말을 써요. 그러나 높임말만 쓰지 않습니다. 높임말을 쓰다가 여느 말을 섞습니다. 여느 말을 쓰다가도 높임말을 섞어요. 어떤 말투로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에서 흐르는 생각을 나누어 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말하고 허물없이 듣습니다. 즐겁게 말하고 기쁘게 듣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무렵 어떤 넋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넋으로 자랄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마다 어떤 바람결이 묻어나는가를 살핍니다.


  내가 웃으면 아이들이 웃습니다. 내가 찡그려도 아이들이 웃습니다.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웃습니다. 아이들이 찡그려도 나는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웃고 싶은 사람이 웃고, 찡그리고 싶은 사람이 찡그려요. 아이들은 놀고 싶은 마음이니 언제나 즐겁게 놀고, 어른들은 씩씩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이니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길을 생각하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꾸립니다.


  동시집 《어이없는 놈》을 읽어 보면, 여러모로 재미난 말놀이가 흐릅니다. 다만, 재미난 말놀이가 흐르다가 그칠 뿐, 다른 이야기로 뻗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를 시인 한 사람이 바꿀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삶을 배우는 길이 아니라, 대학교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학교교육을 시인 한 사람이 고칠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어린이문학은 사회도 학교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얼마든지 바꾸거나 고칠 수 있습니다. 글 한 줄에 담는 이야기로 아름다운 나라와 마을과 보금자리를 얼마든지 신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말놀이만 할 수 있는 동시가 아니라, 삶놀이를 할 수 있는 동시요, ‘말놀이 하는 재미’뿐 아니라 ‘삶놀이 나누는 기쁨’을 펼칠 수 있는 동시입니다. 꿈을 그리고 노래하면서 아이들한테 꿈과 노래를 알려줄 수 있는 동시예요.


  말놀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말놀이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을 담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말놀이를 재미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이요 동시라고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4348.8.9.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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