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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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말투’는 없고 ‘번역 말투’만 있다
 [책읽기 삶읽기 79] 이희재,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



 나라밖 책을 한국사람이 읽도록 옮기는 일을 하던 이희재 님이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이라는 책을 이태 앞서 내놓았습니다. 이태 앞서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늦게 이러한 책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다 한들, 또 2013년이나 2015년에 다른 책이나 비슷한 책이나 더 나은 책이 나온다 한들, 이 나라 번역 문화는 그닥 달라지지 않는구나 싶어요. 누구보다 번역을 하는 분이 읽을 《번역의 탄생》이지만,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번역말이 더 한국말다울 수 있도록 힘쓰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거든요.

 이희재 님은 “직역은 한국어를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어의 참신한 비유는 앞으로도 과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3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이어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가와 독자는 ‘-게 하다’라는 사역 표현에 무척 익숙합니다. 번역서에서 워낙 그런 문장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지요(10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세 마디를 가만히 놓고 생각합니다. ‘직역’이라는 번역 말투는 오늘날 이 나라에 아주 널리 퍼졌습니다. 이희재 님은 이 직역이 한국말을 크게 살찌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희재 님 입으로 ‘한국사람은 서양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무턱대고 우러르며 쓰기만 하는 종살이’를 한다고 나무랍니다.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내 삶을 다스리는 임자 구실을 못하는 한국사람이라면서, 종살이와 같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서, 이러한 ‘직역’으로 한국말을 어떻게 얼마나 살찌울 수 있을는지요. 아니, 살찌우려고 하기나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살찌웠다 할 만한가요. 소 뒷다리로 개구리를 잡는다 하듯, 직역 말투로 한국말을 살찌운 대목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제 나라말을 곱다시 여기지 못하는 매무새로 서양말·중국말·일본말을 섬기는 한겨레는 한국말을 하나도 살찌우지 못했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 일본어는 한국의 사전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해방 후에 영한사전을 만들 때도 영일사전을 전범으로 삼았습니다 …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한자로 어렵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한국어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영일사전을 베끼다 보니까 영일사전에 나와 있는 한자로 된 딱딱한 풀이어들이 발음만 한국어로 표기되어서 영한사전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 한국어는 주어는 안 쓰더라도 문장은 될수록 능동문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힘찹니다. 일본어는 될수록 수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  (28∼29, 93쪽)


 《번역의 탄생》은 “번역이 태어났다”고 밝히는 책이 아닙니다. “번역이라는 새 말투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사람 누구나 익숙하게 젖어든 ‘번역 말투’가 어떠한가를 찬찬히 살피면서, ‘조금 더 한국말답게 말을 하거나 번역을 헤아리는 길’을 돌아보자고 이끄는 책입니다.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한국에서 나오는 책은 하나같이 번역 말투입니다. 여느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아요. 어린이책이라 해서 번역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좀 다를까요?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읽어야 할 교과서는 좀 낫다 할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싫든 좋든 초등학교부터 번역 말투로 교과서를 배웁니다. 더욱이,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에서도 번역 말투로 이야기를 듣거나 주고받습니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들기 앞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라면 누구나 ‘아주 마땅하다’ 할 만큼 번역 말투로 생각을 나눠요.


.. 난해한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번역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제가 한국어 번역에서 대명사를 명사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몇 분의 일이라도 한국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균형 감각 때문일 것입니다 … 한국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주어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동문을 쓰지 않습니다.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언어일수록 수동태가 발달합니다. 영어가 그렇습니다 …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 주어야 자연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전치사 자체가 강한 행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31, 56∼57, 80, 236쪽)


 여느 인문책이나 문학책이나 학술책이 ‘번역 말투로 가득하다’고 걱정하거나 슬퍼하기 앞서, 이 나라 모든 교과서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일찌감치 번역 말투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전문가나 학자나 여느 어버이나 교사 또한 ‘으레 번역 말투를 여느 삶말로 여겨’ 주고받아요. 연속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옮기는 나라밖 그림책도 이와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사람이 빚은 한국 그림책 또한 이와 같아요.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돌보면서 한국말을 나누려는 어른이 없습니다.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보듬으면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고 땀흘리거나 애쓰는 어른이 없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는 ‘생각 안 하고 살아가는 어른들 번역 말투’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에도 저희들이 어린 나날부터 익숙해지거나 길든 번역 말투로 저희 아이들을 낳고 기릅니다.


.. 한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고유명사를 적는 데도 불리합니다. 뜻글자는 의미 환기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것을 차단하려면 될수록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모아야 하고, 심지어 새 글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소리로 나는 수많은 한자어 중에서 어떤 한자어를 고유명사의 발음에 대응시킬지 막연합니다 … 그런데 왜 멀쩡한 ‘공약’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매니페스토’라는 말을 요즘 뜬금없이 쓰는 것일까요? 기존 영한사전에 manifesto의 풀이어로 ‘공약’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manifesto는 그냥 공약이 아니라 책임 있는 공약이기나 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공약’과는 구별해서 써야 하는 말인 것처럼, 한국어 ‘공약’은 영어 manifesto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  (322, 344쪽)


 한국땅에서 번역 말투가 이처럼 널리 퍼진 지는 얼마 안 된 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참 짧은 햇수만에 번역 말투가 온누리 구석구석 퍼졌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처럼 널리 쉬 퍼진 번역 말투가 ‘한국말을 살찌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널리 쉬 퍼지는 ‘번역 말투 또한 한국말로 삼아야 한다’고 바보스레 생각하고야 맙니다.

 번역 말투가 아닌 한국말다운 한국 말투를 쓰는 일을 낯설게 여기는 요즈음이니까요. 이제는 번역 말투를 ‘번역 말투’ 아닌 ‘한국 말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겨도 틀리지 않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니, 이제 한국사람들 한국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지난 2000년대와 오늘 2010년대와 앞으로 맞이할 2020년대 한국땅 한겨레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하겠지요.


.. 한국의 번역 문화는 한국어의 논리보다는 외국어의 논리를 너무 숭상하는 풍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 외국어의 논리라는 것도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체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화도 그렇습니다. 외국 문화의 방정식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답만 열심히 받아적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외국 전문가와 외국 이론을 그대로 들여와서 한국 현실에 들이미는 풍토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두 세대가 넘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402쪽)
 

 《번역의 탄생》을 쓴 이희재 님은 우리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이 나아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길을 따로 밝힐 수 없습니다. 거듭나려고 애쓴다 한들, 둘레 다른 사람들 얄궂거나 슬픈 모습에 휩쓸리거나 휘둘리거나 다칩니다. 맑게 다시 태어나거나 밝게 새로 태어나려고 힘쓴다 한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말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일구지 않습니다.

 말을 바르게 다스릴 길을 살피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말을 아름다이 북돋울 길을 찾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아니, 이 나라가 말썽이기 앞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내 매무새부터 내 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말을 아끼거나 보살피거나 믿지 않아요.

 한국말은 없고, 한국글은 없습니다. 번역말과 번역글만 있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말이랑 이름값이나 학벌이나 권력에 젖어든 글만 있습니다. (4344.9.18.해.ㅎㄲㅅㄱ)


― 번역의 탄생 (이희재 씀,교양인 펴냄,2009.2.10./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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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2011-10-2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본지는 오래 되었지만 번역의 예만 주의깊게 보고 배우느라 책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문제의식은 그냥 넘기고 말았다는 생각을 이 글을 보고 해 보게 되네요...

숲노래 2011-10-30 02:36   좋아요 0 | URL
번역 보기 바로잡기는...
글쓴이부터 글쓴이 삶에서
제대로 녹아들면서 조금만 보여줄 수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문제의식'은 나부터 내 삶에서
내 넋과 말을 아름다이 돌볼 줄 아는 길에서
실마리를 얻어요..
 
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전집 2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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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아끼면서 활짝 웃는 살붙이
 [책읽기 삶읽기 78] 알베르 카뮈, 《시사평론》(책세상,2009)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하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목숨은 이웃인 사람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목숨이니까요. 아주 마땅하면서 보드라운 흐름인 ‘좋아하기’와 ‘사랑하기’라고 느껴요.

 좋아하기 때문에 함께 팔짱을 낀 채 걷고 싶습니다. 좋아하니까 살을 부비고 싶기도 하고, 마냥 바라보고 싶기도 하겠지요.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고 싶기도 합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이제껏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이야기를 끝없이 털어놓아도 고마우면서 즐겁게 귀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 삶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닥 좋아하지 않으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내거나 학교를 다닙니다.

 나는 이 나라를 딱히 사랑하지 않습니다만, 딱히 밉게 여기거나 나쁘게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사랑하고, 내 목숨처럼 내 이웃 목숨을 사랑할 뿐이라고 느낍니다. 나라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아요. 정부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정부가 무너지거나 서는 일은 나라가 무너지거나 서는 일이 아니에요. 여느 살림집 어머니나 아버지 한 사람이 죽는 일이 곧 나라가 죽는 일이요, 여느 살림집에 아기가 태어나는 일이 바로 나라가 사는 일이에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제대로 힘을 냅니다. 내 옆지기는 내 옆지기대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신나게 기운을 냅니다. 다른 사람 누구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참말 힘이 나고 기운이 샘솟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지켜야’ 하거나 ‘힘을 누려야’ 하기 때문에 한다면, 얼마나 고단할까요. 얼마나 슬플까요. 얼마나 안타까이 삶을 버리는 셈이 될까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벌어야 할 돈은 그닥 많지 않아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벌어야 할 돈은 따로 없어요. 우리는 돈을 벌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면서 살아갈 사람이거든요. 서로 아끼고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내 살림을 일굴 만한 돈을 벌면 돼요.


.. 우리의 욕심은-많은 경우 소리 없는 것이었기에 그만큼 더 내심 깊은- 그 신문들을 돈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중을 그들이 내면에 지닌 최상의 것의 높이로 끌어올릴 만한 어떤 어조와 진실성을 그 신문들에 부여하자는 데 있었다 ..  (38쪽)


 알베르 카뮈 님이 쓴 《시사평론》(책세상,2009)을 읽었습니다. 이태 앞서 나온 책을 이태 앞서 읽었습니다. 이태 앞서 읽고 이태에 걸쳐 묵혔습니다. 이태 동안 묵히느라 내 책꽂이는 아주 어수선합니다. 왜냐하면, 《시사평론》 하나만 내 책꽂이에서 이태를 묵지 않으니까요. 《시사평론》을 비롯해 500권쯤 되는 책이 이래저래 꽂히거나 눕거나 쌓이면서 묵습니다. ‘한 번 다 읽었다’ 하더라도 ‘한 번 다 읽은 그때’에 이 책들에 서린 넋과 삶과 말이 내 넋과 삶과 말로 고스란히 스며들거나 녹아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야 해요. 바라보아야 해요. 생각해야 해요. 이러면서, 살아내야 해요.

 밥을 먹은 곧바로 힘이 나지는 않습니다. 기다립니다. 어떤 밥을 먹었는가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밥을 먹으면서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앞길뿐 아니라, 옆지기와 아이들과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와, 숱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돌아보며 살아내야 합니다.

 착한 길을 걸어야 하고, 참다운 길을 돌봐야 하며, 아름다운 길을 나누어야 합니다.


.. 우리의 은밀한 소원은 악이 승리하여 날뛰고 신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던 바로 그때 그 말을 해 주는 것이었다 ..  (73쪽)


 ‘알베르 카뮈 전집 20번’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으로 《시사평론》을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 굳이 느낌글을 안 쓰고 소개글이나 추천글을 써도 되겠지요. 애써 내 삶과 넋과 말을 톺아보면서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내 지식과 지성과 철학을 북돋우거나 자랑하려는 허울로 삼아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 《시사평론》은 한국사람이 붙인 책이름이 ‘시사평론’이라지만, 정작 알베르 카뮈 님이 쓴 글에는 ‘사랑’이 감도는걸요. ‘사랑이야기’이지 ‘시사평론’이 아닌 《시사평론》입니다.


.. 아무리 봐도 스스로에게 편리한 것만을, 그것도 가장 유리한 때에만 공개하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정부는 책임이 크다. 그러나 그 책임이 아무리 크다 해도 기자들의 책임은 그보다 더 크다 ..  (145쪽)


 삶을 사랑하려는 카뮈 님 넋을 담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카뮈 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무척 아쉽지만,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말’이 제대로 살아숨쉬는가는 모릅니다. 알베르 카뮈 님이 프랑스말로 썼을 글은 프랑스사람들한테 ‘어떤 말’이었는지 모르거든요. 한국말로 옮겨진 《시사평론》에 담긴 ‘말’은 이 나라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말’하고 얼마나 가깝거나 이어지거나 맞닿는가를 알 수 없거든요.


.. 진정한 예술가들은 훌륭한 정치적 승리자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편의 죽음을, 아,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죽음의 편이 아니라 삶의 편이다. 그들은 법 쪽의 증인이 아니라 육체 쪽의 증인이다 ..  (276쪽)


 알베르 카뮈 님 책을 이제 와서 다시 읽는다면, 또 프랑스 아닌 한국에서 애써 알베르 카뮈 님 책을 새로 읽는다면, 지식이나 지성이나 진보나 개혁이나 사상이나 철학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기나긴 나날과 머나먼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랑을 담았으니, 이 사랑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움을 빛내려고 다시 읽거나 새로 읽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법이 아닌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요. 예술을 모르는 여느 살림꾼 어머님들은 역사가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

 나를 낳은 내 어머니는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습니다. 내 어머니는 이름값이나 돈이 아닌 ‘당신 아이 하나라는 어린 목숨’을 사랑했습니다. 알베르 카뮈 님을 낳은 어머님은 역사에 이름이 남을까요. 알베르 카뮈 님을 낳은 어머님을 낳은 어머님은, 또 이 어머님을 낳은 어머님은 역사이건 어디이건 이름을 남길 만할까요.

 사랑을 물려받아 사랑을 누렸기에 사랑을 글로 담습니다. 《시사평론》은 서로 아끼면서 활짝 웃는 살붙이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4344.9.17.흙.ㅎㄲㅅㄱ)


― 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씀,김화영 옮김,책세상 펴냄,2009.12.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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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존스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엘리엇 고온 지음, 이건일 옮김 / 도서출판 녹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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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이소선’은 사랑으로 맺은 눈물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2] 엘리엇 고온,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마더 존스》


- 책이름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마더 존스
- 글 : 엘리엇 고온
- 옮긴이 : 이건일
- 펴낸곳 : 녹두 (2002.12.27.)
- 책값 : 13000원


 (1) 어머니


 이 나라 천만 노동자 모두한테 어머니와 같다던 이소선 님이 2011년 9월 3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둔 이소선 님한테는 지난 1970년 11월 13일부터 언제나 ‘어머니’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돌이키면, 1970년 11월 13일 뒤로도 어머니였으나, 이에 앞서도 어머니였습니다. 천만 노동자한테 어머니였든 아들아이 하나한테 어머니였든, 여러 아이한테 어머니였든, 이소선 님은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어머니로 살아가기 앞서는 예쁜 딸이었겠지요. 당신을 낳은 어머니한테 더없이 예쁜 딸이었을 이소선 님이었겠지요. 이소선 님이 아들 전태일한테 어머니가 되기 앞서, 또 이 나라 노동자한테 어머니가 되기 앞서, 당신을 알뜰히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으며, 당신을 알뜰히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당신은 당신 아들아이를 비롯해 숱한 사람들한테 어머니 품을 따사로이 내밀 수 있었으리라 느낍니다.

 
.. 그녀는 유럽과 미국에서 자본이라는 물결에 내던져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했다.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불행과 죽음을 목격했고, 토론토에서 노동과 노동계급의 현실을 보고 배웠다. 그녀는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희망을 펼칠 수 있는 나라, 미국으로 들어갔다 … 그녀는 멤피스에서 탐욕이 어떻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또 전쟁으로 노예들이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을 목격했다. 여기서 그녀는 폭발 일보 직전에 있는 인종간 증오와 계급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 마더 존스는 노동자들의 빈곤과 동경,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가 부인들과 중산층 직장 여성들을 엘리트주의자들로 규정했다 … 마더 존스는 존경과 안정에 대한 그들의 탐욕을 철저히 불신했으며, 그런 욕심에 배신의 씨앗이 자리잡게 된다고 믿었다 ..  (62, 78, 356, 372쪽)



 흙으로 돌아간 이소선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땀흘려 일하는 여느 사람들 누구한테나 사랑스러운 어머님입니다. 아이들을 착하게 돌보면서 다 함께 착하게 살아가고픈 꿈을 나누는 사랑스러운 어머님입니다.

 어느 어머니라 하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플 손가락이 없습니다. 열 손가락이 모두 아픕니다. 어머니한테는 혼잣힘으로 살림을 잘 꾸리는 아이도 사랑스럽지만, 도무지 제 살림살이를 일구지 못하는 가녀린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아니, 도무지 제 살림살이를 일구지 못하는 가녀린 아이한테 더 마음을 쏟고 더 땀을 들여 더 기운을 내도록 북돋웁니다. 따돌림받으며 괴로운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입니다. 온갖 궂은 일에 시달리면서 아파하는 아이를 따사로이 보듬는 어머니입니다.

 당신 아이를 함부로 해코지하거나 들볶는 누군가 있다면, 스스럼없이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아이를 지키는 어머니입니다. 몽둥이나 회초리나 전쟁무기 따위로 아이를 지키지는 않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오직 당신 자그마한 몸뚱이 자그마한 사랑으로 아이를 지킵니다.

 아이를 돈으로 지키지 않습니다. 아이를 이름값으로 지키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키, 조그마한 손, 조그마한 몸뚱이라 하지만, 어머니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꿋꿋하게 당신 아이를 건사합니다.


.. 경찰은 자본가들이 요구한 대로 위협과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당이 1876년에 발족되었다 … 네 개 철도회사들은 경기 침체기에도 주주들의 배당금은 꼬박꼬박 나눠 주면서도, 직원들의 임금을 10퍼센트 삭감(그것도 1년에 두 번)했다 … 자본가들·학자들·언론인들은 자립을 촉구하였고,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다윈의 적자생존론은 그런 위기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야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호물품을 마구 퍼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 ..  (86, 105쪽)


 곰곰이 생각합니다. 모든 노동자한테 어머니와 같은 이소선 님이 있다면, 이소선 님처럼 모든 노동자한테 아버지와 같은 누군가는 있을까 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 꿈과 믿음을 지키며 보살피려는 따사로운 어머니 이소선 님처럼, 일하는 모든 사람들 꿈과 믿음을 지키며 보살피려는 따사로운 아버지는 있을까 하고.

 이리 생각하고 저리 톺아봅니다. 그렇지만 좀처럼 ‘따사로운 어머니’ 같은 ‘따사로운 아버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돈도 힘도 이름도 없다지만, 작은 맨몸뚱이를 내맡기며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이 작은 맨몸뚱이 하나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누가 있을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참말 여느 아버지는 없을까요. 참말 여느 아버지는 당신 여느 아이들을 여느 사랑으로 보듬지 못하는가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자랍니다.

 아이들은 손꼽히는 학원을 여럿 다닌다고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손꼽히는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손꼽히는 대학교를 다닌 다음 손꼽히는 이웃나라에 배움길을 떠나야 슬기롭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손꼽히는 회사에 들어가 손꼽힐 만큼 높은 연봉을 받아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사랑을 나눌 때에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저희가 크기까지 받은 사랑씨를 저희 새로운 아이한테 곱게 물려주는 사랑길을 걸을 때에 슬기롭습니다.


.. 노동조합은 넓은 의미의 가족이었다. 노동조합은 조금 더 많은 돈을 버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 미국의 자본가들은 시민동맹과 같은 어용단체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시민동맹은 매우 공격적으로 노사관계에 개입했으며 8시간 근로제와 같은 노동입법의 반대에 앞장서고 있었다 … 광산주들 역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들은 경비원들을 유지하는 데 수만 달러가 넘는 비용을 썼다. 조업이 멈춰진 광산은 추가로 수십만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손실은 미국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이 자본가에서 깡패나 불량배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 것이었다 … 부를 축적하는 일과 자유를 짓밟는 일, 이 두 가지 일은 같은 일이었다 ..  (150, 176, 342쪽)


 이소선 님은 ‘노동자 어머니’요 ‘전태일 어머니’입니다. 이소선 님은 참말 고스란히 ‘어머니’입니다. 나이 여든한 살이 되어도 ‘어머니’입니다.

 우리와 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미국땅에서는 백 살 나이를 살아낸 메어리 해리스 존스 님이 ‘어머니’입니다. 이른바 ‘마더 존스’ 님은 여든을 넘고 아흔을 넘긴 때에도 언제나 ‘어머니’였습니다.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요, 따사로운 사랑과 따사로운 손길로 가난하고 힘겨우며 외롭거나 지친 모든 착한 사람들을 넉넉히 감싸안으면서 껴안는 좋은 어머니였어요.


 (2) 사랑


 엘리엇 고온 님이 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마더 존스》(녹두,2002)라는 책이 있습니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오기 앞서까지 1978년에 한글로 옮겨진 《마더 죤스》(평민사,1978) 하나만이 ‘노동자한테 어머니인 사람이 일군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서전을 쓴 메어리 해리스 존스 님은 《마더 죤스》라는 책에서 당신을 ‘영웅’이나 ‘성녀’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부르는 이름 ‘어머니’ 그대로, 어머니로서 아파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따사롭게 돌보고픈 마음을 찬찬히 그려냅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은 당신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도시락을 예쁘게 꾸려 보자기에 싸서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고는 ‘밥 좀 먹으면서 일하’라고 북돋웁니다.

 고추장을 담가서 아이들한테 찾아갑니다. 간장을 담고 된장을 담아 아이들한테 찾아갑니다. 손수 흙을 일구어 거둔 곡식을 손수 갈무리해서 고추장이며 간장이며 된장을 담습니다. 김치를 담고 나물을 무치며 닭을 잡아 곱니다.

 때때로 이러한 일을 맡는 아버지가 있습니다만, 아버지들은 당신 아이들이 밥을 굶을까 걱정하는 일이 퍽 드뭅니다. 당신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려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아버지란 참으로 드뭅니다.


.. 4반세기 이상을 그녀는 아동노동, 노동대중의 빈곤, 미국의 자유파괴 등,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 하는 진실을 폭로하는 사람이었다 … 그녀는 남녀 노동자들에게 세상은 그들의 손으로 이룬 것, 그래서 세상은 바로 그들의 것이라는 믿음을 분명히 심어 주었다 … 가혹한 착취의 시기에, 그녀가 벌인 싸움은 인간다운 노동시간 확보와 적정한 임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조직화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돋보였다. 그녀는 연설을 하고, 미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노조에 가입시키고, 잠은 노동자들의 오두막·하숙집, 아니면 친구들의 집에서 해결하는, 미국 행동주의자들의 자니 애플시드라 할 수 있었다 ..  (25, 26∼27쪽)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마더 존스》라는 책이름이지만, ‘어머니 존스’, 곧 ‘존스 어머니’는 조금도 “위험한 여성”이 아닙니다. 존스 어머니는 참말 존스 어머님입니다. 이소선 어머님은 참말 어머님이듯, 존스라는 분도 어머님이에요.

 힘든 아이들을 코앞에서 버젓이 보는데, 이 힘든 아이들을 따사롭게 얼싸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픈 아이들이 눈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외로운데, 이 아픈 아이들을 포근하게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싸우는 사람 존스 어머니가 아닙니다. 싸우는 사람 이소선 어머니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 존스 어머니요, 사랑하는 사람 이소선 어머니입니다.

 《미혼의 당신에게》(백산서당,1983)라는 책을 읽을 때에도 이 책을 일구어 내놓은 다나까 미찌꼬라는 일본 ‘어머님’은 참말 어머니로서 가녀린 사람들을 사랑하는 눈물과 웃음을 나누려 했구나 하고 느낍니다. 지식을 뽐낸다든지 학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지식을 우러르거나 학식을 섬길 까닭이 없습니다.

 오직 아이들을 사랑할 뿐입니다. 오로지 아이들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아끼며 보살필 뿐입니다. 서로 미워한다든지, 나 홀로 1등을 차지하면서 우쭐거릴 까닭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할 뿐이요,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밥술을 나누는 기쁨을 맛볼 뿐입니다.


.. 마더 존스로서 그녀의 생애는 정말 놀라운 용기의 이야기, 정말 훌륭한 싸움의 이야기다. 그녀 세대의 다른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제들을 회피하는 동안, 마더 존스는 그것들로 불타올랐다 … 마더 존스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들에 의지해야 하는 것을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 마더 존스는 무소유의 이상을 잊지 않았고, 그것의 찬미자가 되었다. 그녀의 자기부정의 삶은 경박함과 물질주의를 꾸짖는 것이었다 … 그날(100번째 생일) 마더 존스는 뉴스·영화 기자들에게 예전에 서운했음을 털어놓으면서, “미국은 돈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피로 세워졌어요. 미국의 자유를 지킬 권능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는데, 노동자들은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한 거요. 또 여성들의 손에도 아주 놀라운 능력이 주어졌건만, 그들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른다오. 자본가들은 그 여인네들을 사교클럽에 끌어들이며, 자기들 입맛에 맞는 숙녀로 만들려고 하지. 우리 나라엔 그런 숙녀는 필요없고, 여성이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  (99, 146, 204, 444쪽)


 어머니 존스는 아픈 사람들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 존스는 외로운 사람들하고 같이 지냈습니다. 어머니 존스는 슬픈 사람들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니 존스는 배고픈 사람들한테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사랑은 혁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제도개혁이나 선거민주주의에서 싹트지 않습니다. 사랑은 높은 연봉이나 걱정없는 공무원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자가용이나 아파트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펄떡펄떡 뛰는 가슴에서 나타납니다. 사랑은 솔솔 김이 나는 따뜻한 밥그릇에서 싹틉니다. 사랑은 시원한 물 모금과 기름진 논밭에서 태어납니다. 사랑은 굳은살 박힌 손으로 빨래하고 바느질하며 이부자리를 까는 삶에서 비롯합니다.


.. 그녀는 인종·종교·국적을 초월해서 노동계급 연대의 대오를 갖추자는 호소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자본가들은 남부와 북부를, 미국 본토인과 외국인들로 갈라서 여러분의 대오를 이간시켜 정복하려 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공동의 명분을 위해 사용자와 싸우는 광산 노동자들입니다. 자본가들의 칼끝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가난·고통, 그리고 여러분 자녀들의 미래가 여러분에게 더 강력하게 연대하라고 합니다 … 나는 정의를 위한 계급투쟁에 나설 때면, 동부와 서부·남부와 북부를 가리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미국에 있는 모든 노동자 자녀들의 발에서 쇠고랑이 벗겨진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런데 아프리카 흑인 아이 한 명의 발에서 쇠고랑이 아직 벗겨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곳으로 가서 또 싸울 것입니다.” ..  (183쪽)


 ‘어머니 이소선’은 사랑으로 맺은 눈물입니다. ‘어머니 존스’는 사랑으로 이룬 웃음입니다.

 어머니 이소선이나 어머니 존스를 괴롭힐 뿐 아니라, 어머니 이소선과 어머니 존스가 도우면서 지키려 하던 착한 사람들을 들볶은 이들은,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을 잊거나 사랑을 등지면서 그예 돈바라기로 삶을 깎아먹은 안쓰러운 넋입니다.


 (3) 아름다운 삶을 찾기


 우는 아이를 잘 달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버지들은 여느 어머니들보다 우는 아이를 잘 달래지 못합니다. 우는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울음을 그치면서 마음을 쉬곤 합니다.

 밥을 잘 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버지가 차리는 밥을 떠올리면서 그리는 여느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예부터 집일을 여자가 도맡도록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아버지들 스스로 아이한테 ‘아버지 손맛’을 물려주려고 힘쓰는 일이란 아주 드뭅니다. 여느 아버지는 여느 아이한테 따순 사랑을 좀처럼 물려주지 못하나, 여느 어머니는 여느 아이한테 당신 여느 손길로 따순 사랑을 언제나 물려줍니다.

 보드라운 목소리로 싱그러운 노래를 불러 주면서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함께 노는 아버지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버지는 아이하고 노래하며 놀 겨를을 그닥 내지 못합니다. 여느 아버지는 여느 일터로 가서 여느 돈벌이를 하느라 바쁘거나 얽매이기 일쑤입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와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나누려고, 과장 자리이든 부장 자리이든 사장 자리이든 스스럼없이 내려놓으면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겠다고 나서는 여느 아버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느 어머니는 당신 여느 아이하고 곱게 노래를 부르면서 오순도순 여느 놀이를 즐깁니다. 여느 아이를 여느 손길로 사랑하고자 여느 어머니는 이런저런 일자리 이런저런 이름값을 얼마든지 곱게 내려놓습니다.


.. 그녀가 뉴스에 처음 등장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아동들의 5분의 1이 빈곤 속에 있다. 그들은 마더 존스의 자식들이다. 어엿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계급 또한 그녀의 자손들이다.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며, 현 시대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마더 존스의 자식인 것이다 ..  (30쪽)


 지난 2008년부터 아이들 기저귀를 빨래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삐 살아갑니다. 갓난쟁이들은 쉬가 마려우면 그냥 쉬를 하니까 빨랫감이 하루에 마흔 장이나 쉰 장이 나오기도 하고, 두 살쯤은 지나야 낮오줌을 가릴 만하며, 세 살쯤 되어야 비로소 밤오줌을 가립니다. 둘째가 두 살을 지나고 세 살을 지날 두어 해 뒤까지 이 기저귀 빨래는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바지런히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며 빨래를 걷다가는 빨래를 갭니다. 옆지기가 조금씩 몸을 추스르면 빨래를 나누어 맡고 빨래 걷기와 개기도 하나둘 나누어 맡습니다. 네 살배기 아이는 아직 서툴지만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갤 때에 어설픈 손짓으로 빨래를 만지작거립니다. 곧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을 지나면서 빨래 널기와 걷기와 개기를 시나브로 야무지게 해낼 수 있겠지요.


.. 부는 가난의 충격적인 장면 가까이에서 뻔뻔스럽게 스스로를 뽐내고 있었다 ..  (81쪽)


 빨래기계를 쓴다면 빨래하는 집일에서 조금은 홀가분할는지 모릅니다. 자가용을 굴린다면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 아이를 태우고 읍내로 장마당 마실을 다니느라 헉헉거리며 땀으로 흠뻑 젖지 않아도 좋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옆지기와 아이들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는 이 삶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하는 빨래가 좋기도 하지만, 돈이 없으니 빨래기계를 들이지 못합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나 자전거를 몰 때에 시원하며 즐겁기도 하지만, 돈이 없으니 자가용을 굴리지 못합니다.

 네 식구는 가만히 꿈을 꿉니다. 우리한테 돈이 없으나 우리한테 돈이 생긴다면, 우리한테 돈이 모자라지만 우리한테 돈이 넉넉하다면, 우리한테 새로 생기거나 넉넉한 돈으로 빨래기계나 자가용이 아닌 고운 흙으로 살가운 논밭이나 멧자락을 장만할 꿈을 꿉니다. 몸을 살찌울 너른 들판과 멧자락을 꿈꿉니다. 마음을 살찌울 아름다운 책을 ‘언제 생길는지 알 길이 없는 돈’이 들어올 날 신나게 장만하자고 꿈을 꿉니다.

 한 번 살다가 죽은 다음 또 사람으로 다시 살 수 있을는지, 아니면 목숨은 이제 끝일는지, 아니면 넋만 살아남아 어딘가를 떠돌는지는 모릅니다. 어찌 되든, 이렇게 사는 동안에는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중에 흙으로 돌아갈 때에는 또 이때대로 아름다운 내 넋이 되도록 보살필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지요. (4344.9.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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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우어줄라 쇼이 지음, 전옥례 옮김 / 현실문화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에는 자유도 민주도 없다
 [책읽기 삶읽기 71] 우어줄라 쇼이 엮음,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현실문화연구,2003)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이 나라에는 헌법이 있지만, 헌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때때로 특별법이 생기면서 헌법을 뛰어넘습니다.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보다 권위와 권력이 앞섭니다. 자연과 삶보다 개발과 경제가 앞섭니다. 평등과 평화보다 안보와 군대가 앞섭니다.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뒷전이 됩니다. 사랑과 믿음을 지키는 나라정책이나 나라살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나라정책만 자유와 민주하고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라살림만 사랑과 믿음하고 등지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삶부터 자유와 민주랑 사귀지 못합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삶터부터 사랑과 믿음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나라정책에 앞서 여느 사람들부터 자유와 민주를 먼저 살피지 않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돈벌이를 먼저 살핍니다. 나라살림에 앞서 여느 삶터부터 사랑과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언제나 이름값을 먼저 헤아립니다. 입시지옥은 나라정책이 만들고 제도권학교가 함께 만들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느 어버이 또한 함께 만듭니다. 비정규직이나 푸대접이나 따돌림은 나라정책이 만들고 회사가 함께 만들지만, 어른이 된 여느 사람들 또한 함께 만듭니다.

 내가 살아가는 자리부터 자유와 민주가 가장 앞설 수 있도록 해야, 내 삶터가 달라지고 내 마을이 달라집니다. 내가 꿈꾸는 마음밭부터 사랑과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내 나날이 바뀌고 내 이웃이랑 동무가 바뀝니다.


- 남녀의 동등한 권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종이 위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12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 나와 결혼할 남자는 내 예술과도 결혼해야 한다. 내 예술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라! (33쪽/조지 엘리엇)
- 진실을 위해 싸우는 사람도 남자고, 진실에 반대하는 자들 역시 남자다. (53쪽/메리 아스텔)
- 남자들은 여자를 껴안는 대신에 덮친다. 남자들은 여자를 얻는 대신에 산다. 남자들은 뭔가 이문을 남겨야 하는 사업을 하듯 여자를 다룬다. (80쪽/루트 베를라우)



 우어줄라 쇼이 님이 엮은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현실문화연구,2003)라는 작고 도톰한 책을 읽습니다. 여자로 살아가며 여성으로 말하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보여줍니다. 숱한 서양사람이 어떠한 말을 길어올려 참삶과 참자유와 참민주를 바랐는가를 보여줍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 어여쁜 사람인 줄 느끼며 살아갈 참평화와 참평등과 참사랑이 어떠해야 좋을까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종이에 적힌 권리는 권리가 아닙니다. 삶으로 함께 누릴 때에 비로소 권리입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우는 일은 평화하고 동떨어집니다. 무기와 군대가 더 많고 더 세다 해서 지키는 평화가 아니라, 무기와 군대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전쟁이요 푸대접이며 따돌림입니다.

 여자 군인이 드물게 있으나, 군대는 남자가 만들어 남자로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여자 정치꾼과 경제꾼이 더러 있으나, 정치이든 경제이든 남자가 만들어 남자가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우리 사회와 교육과 문화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남자가 만들어 남자가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집을 떠납니다. 남자들은 저를 낳아 키운 어버이 곁을 금세 떠나 홀로 살아갑니다. 어른이 되어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았어도, 저(남자)를 키운 어버이처럼 제 아이를 키울 생각을 않고, 아이를 키울 몫은 오직 여자한테 떠넘기고는 집 바깥에서 무언가 ‘큰 일’을 벌입니다. 돌이키면, 저(남자)를 키운 어버이도 으레 어머니(여자)였지, 아버지(남자)는 아니라 할 만합니다.


- 남자가 권력과 어리석음 대신 영혼과 인간성을 채워 넣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86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 남자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모든 남자가 독재자가 될 것이다. (96쪽/애비게일 애덤스)
- 어른들은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들이 놀 때 각기 다른 운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들이 배우는 종목이 각각 다르다. (163쪽/게르트루드 피스터)
- 아름다운 여자는 이중으로 보복 조치를 당한다. 몸은 묶이고, 남자의 소유물인 자신의 모습은 길들여지고 다듬어진다. (182쪽/수잔 팰루디)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버려야 나라살림이 살아납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에 들일 돈을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에 들여야 합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단단히 움켜쥐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없애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없애면 남북이 하나되는 마당에 든다 하는 돈이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가 무섭게 버티는데 대학등록금이 이토록 비쌀밖에 없습니다.

 장난감 칼이나 총을 아이한테 선물하는 일부터 잘못인 줄 느끼지 못하기에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는 더 커지기만 합니다. 전투기나 군함이나 탱크나 잠수함이나 미사일을 만들 돈으로 햇볕힘을 알뜰히 쓰도록 애쓸 노릇이요, 지구별 자원을 걱정할 일입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칼이 아닌 호미나 낫이나 쟁기를 손에 쥐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총이 아닌 빨래비누와 걸레와 수세미를 손에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일구며 땀을 흘리는 나날을 어릴 적부터 맞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집일을 거들며 찬찬히 배우는 삶을 어린 날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입으로 넣는 밥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한글은 나중에 깨치더라도 흙살림을 먼저 옳게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며 즐거이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어떻게 돌보며 아끼는가를 익혀야 합니다. 영어나 한자는 모르더라도 집살림을 제대로 알뜰살뜰 느껴야 합니다.


-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 그게 예절에 맞는지 어떤지 묻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의 판단에 따라 흔들리고 싶지 않다! … 나는 진리에 도움이 되고 싶다. (218쪽/루이제 뮐바흐)
- 여자답다는 말은 남자들에게 욕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형용사다. (233쪽/헤드비히 돔)
- 사회 모든 분야의 원칙은 남자가 정한다. (274쪽/앙엘리카 메르켈)
- 여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가 곁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토록 난폭하게 구는 것이다. (279쪽/조앤 콜린스)



 이 나라에서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아니, 이 나라에는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아예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조차 쉬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이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며 건사하는 삶입니다.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사람다이 살아가면서 둘로 나뉜 성별에 걸맞게 착하면서 참답고 아름다운 나날을 일구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건사할 생각부터 하지 않는데다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건사할 줄 모릅니다. 내 삶은커녕 동무 삶과 이웃 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이 보듬을 줄 모릅니다.


- 여자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사내 아이를 재봉학원과 부엌으로 보내라. 그렇게 3세대가 흐르면 여러분도 남자가 바느질과 요리를 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인지, 억압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날이 오리라. (340쪽/이다 한-한)
- 여자는 과거에 대체로 정치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전해 내려온 나쁜 정치 습관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정치를 생각해 낼 수가 있다. (385쪽/에밀리 그린볼치)
- 집안일은 사람의 일이지 여자의 일이 아니다. (418쪽/알리스 슈바르처)
- 전쟁은 경악스러운 강간을 동반한다. (464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라는 책은 아픈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엉터리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라는 책은 우리가 예쁘게 살아갈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떻게 해야 즐거우며 반가운 나날을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모든 아이들은 오직 대학에 보내는 틀에 짜맞추어집니다. 아이들은 오직 대학에 가는 틀에만 짜맞추어지면서, 스무 살이 되건 스물다섯 살이 되건 스스로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건사하거나 하는 일을 겪지 않고 배우지 않으며 대물림하지 않습니다. 그예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어들이는 일자리 얻는 틀에 갇힙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학문하는 데가 아니라, 돈을 잘 버는 일자리에 들어갈 자격증인 졸업장을 따는 곳일 뿐입니다. 대학등록금이 비싼 까닭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들일 일자리를 얻도록 내밀 자격증인 졸업장을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보아야 하고, 사람을 느껴야 하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며, 아름다이 사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자유도 민주도 없습니다. (4344.8.13.흙.ㅎㄲㅅㄱ)


―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우어줄라 쇼이 엮음,전옥례 옮김,현실문화연구 펴냄,2003.12.2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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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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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는’ 책과 ‘시험문제’ 교재
 [책읽기 삶읽기 70] 장정일,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2006)



 소설쓰는 장정일 님이 쓴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2006)를 읽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어 집일을 옆지기한테 맡긴 채, 자리에 드러누워 책을 읽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면 책이든 뭐든 읽지 말고 가만히 쉬어야 할 텐데, 끙끙 앓며 누워 지내기만 하자니 무언가 허전하다고 느껴, 책 하나를 손에 쥡니다.

 장만하기는 일찌감치 장만했으나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여러 해를 보낸 《장정일의 공부》를 펼칩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읽었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세 해 앞서 읽었다면, 또 지난해에 읽었다면 나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앞으로 세 해나 다섯 해나 열 해쯤 뒤에 이 책을 읽는다면 나는 무엇을 생각할 만할까요.

 《장정일의 공부》에 나오는 사회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에는 눈길이 쏠리지 않습니다. 사회 이야기를 깊이 파헤치고 싶어 하는 대목에만 눈길이 쏠립니다. 정치를 다루는 이야기 말고 정치에 깃든 장정일 님 삶을 밝히는 대목에만 눈길이 갑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머릿기사를 모릅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고, 아홉 시 새소식을 볼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새소식도 찾아서 듣거나 보지 않습니다.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신문 머릿기사나 방송 새소식은 ‘하루 지나면 부질없는 옛이야기’로 쌓이거나 묻히거든요.


.. 한 번도 살상 거부를 위한 종교적 정언 명령을 고민한 적이 없었던 이들이 ‘대체 복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혜’라는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이다. 일부 거대 개신교 목사들이 주장하는 특혜와 형평성 시비는 그들이 한 번도 대체 복무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신념으로 여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스개일 수밖에 없다 ..  (19쪽)


 신문과 방송은 등지면서 책을 읽는 까닭은 한 가지인지 모릅니다. 책은 언제라도 되넘길 수 있습니다. 참책인가 거짓책인가는, 장만해서 책꽂이에 꽂은 책을 한참 뒤에 펼치건 곧바로 펼치건 금세 드러납니다. 아니, 책꽂이에 꽂은 책을 얼마나 나중에 꺼내어 펼치느냐에 따라 참값과 거짓값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1회용품이 아닌 책이라 할 때에는 대물림을 해서 여럿이 돌려 읽어야 뜻이 있다고 느낍니다. 애써 종이에 책을 찍을 때에는 한 번 읽고 지나치거나 잊어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삶을 이야기하고, 삶을 파헤치며, 삶을 나누는 책이어야 비로소 책답다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이덕일은 “앞의 대동법 논쟁에서 보았듯이 당시 백성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양반 사대부들의 가렴주구였지 국왕의 군사력 강화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 박정희의 일성 앞에 ‘입이라도 벙끗’ 하는 국민은 곧바로 ‘빨갱이’가 될 각오를 해야 했고, 빨갱이로 찍히는 것은 곧바로 죽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대사는 박정희를 말하기에 앞서, 이승만 체제의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 ..  (38, 370쪽)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합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시험문제 외우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한국사람은 공부를 안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한국사람은 노상 ‘시험문제 외우기’만 합니다. 공무원시험이건 자격증시험이건 영어시험이건, 으레 시험을 치를 때에 더 점수를 잘 받게끔 문제를 외우는 데에만 마음을 바칩니다.

 참으로 많다 싶은 한국사람이 도서관에 갑니다. 그러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지 않습니다. 시험문제를 달달 외우려고 도서관에 갑니다. 도서관에 책이 많이 있다지만, 정작 ‘배우는(공부하는) 책’이라기보다 ‘시험을 잘 푸는 데에 도움이 될 교재’가 꽤나 많은 셈 아닌가 싶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붙잡고는 ‘공부 시킨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배움’도 ‘공부’도 없습니다. 오직 ‘시험’만 있습니다. 대학교라고 그닥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나는 반값등록금을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대학등록금은 반토막으로 깎아야 하지 않습니다. 대학등록금은 사라져야 합니다. 대학등록금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대학교에는 오직 참배움만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대학교에 못 들어가게끔 제대로 ‘공부하는 길을 가르쳐’서, ‘참다이 공부하지 않는 젊은 넋은 곧장 대학교 바깥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대학교는 ‘공부하지 않는 젊은 넋’을 쫓아내지 않아요. 대학교는 ‘공부 안 하는 대학생한테서 등록금을 받아 장사하는 곳’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대학교를 구태여 다니면서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일은 걸맞지 않아요. 대학교가 ‘공부하기’하고 동떨어졌는데, 이런 대학교를 얼른 그만두든지 아니면 뜯어고치든지 해야지, 그저 반값등록금 노래만 붙잡아서는 샛길에서 이리저리 헤맬 뿐입니다.


.. 민족주의라는 잣대만으로 저항운동을 투시해 온 한국사는 근대사회 이행 과정 중에 불거져 나온 여러 가지 부문 운동을 모조리 억압하거나 민족주의 투쟁 속에 귀속시켜 버렸다 … 황국신민화 교육을 담당하면서 황국신민을 양성하고 민족성 말살에 참여했던 초등학교 교사들과, 일본군 내의 한국인 장교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 다카키 마사오는 물론이고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를 호소했던 수많은 문인들과 언론들을 더 이상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전범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  (207, 210∼211쪽)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도서관에 갑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공부를 하려고 도서관에 갑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돈을 치러 살 만한 책은 돈을 치러 사고, 그저 읽을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고 도서관에 갑니다. 이제껏 책을 꽤 많이 읽었을 텐데, 언제나 더 새롭게 생각하고 더 새롭게 바라보며 더 새롭게 배우려고 책을 읽으며 도서관에 갑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도서관에서 시험문제 외우기 같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집에서도 시험문제 외우기는 안 하겠지요. 아름다운 당신 한삶을 배움이 아닌 시험에 허덕이도록 내동댕이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이 되고 싶기에 책을 읽으며 배웁니다. 사랑을 이루고 싶기에 사람을 사귀며 배웁니다. 삶을 일구고 싶기에 보금자리를 아끼며 배웁니다.

 《장정일의 공부》라는 책 앞자락에는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덧이름이 붙습니다만, 글쎄요, 소설쓰는 장정일 님이 ‘인문학 되살리기’를 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참말 옳게 배우고 옳게 살고 싶기에 책을 읽으며 글을 쓴 한 사람 마음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느낍니다. (4344.8.10.물.ㅎㄲㅅㄱ)


―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 씀,랜덤하우스 펴냄,2006.11.13./12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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