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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평점 :
‘한국 말투’는 없고 ‘번역 말투’만 있다
[책읽기 삶읽기 79] 이희재,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
나라밖 책을 한국사람이 읽도록 옮기는 일을 하던 이희재 님이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이라는 책을 이태 앞서 내놓았습니다. 이태 앞서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늦게 이러한 책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다 한들, 또 2013년이나 2015년에 다른 책이나 비슷한 책이나 더 나은 책이 나온다 한들, 이 나라 번역 문화는 그닥 달라지지 않는구나 싶어요. 누구보다 번역을 하는 분이 읽을 《번역의 탄생》이지만,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번역말이 더 한국말다울 수 있도록 힘쓰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거든요.
이희재 님은 “직역은 한국어를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어의 참신한 비유는 앞으로도 과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3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이어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가와 독자는 ‘-게 하다’라는 사역 표현에 무척 익숙합니다. 번역서에서 워낙 그런 문장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지요(10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세 마디를 가만히 놓고 생각합니다. ‘직역’이라는 번역 말투는 오늘날 이 나라에 아주 널리 퍼졌습니다. 이희재 님은 이 직역이 한국말을 크게 살찌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희재 님 입으로 ‘한국사람은 서양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무턱대고 우러르며 쓰기만 하는 종살이’를 한다고 나무랍니다.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내 삶을 다스리는 임자 구실을 못하는 한국사람이라면서, 종살이와 같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서, 이러한 ‘직역’으로 한국말을 어떻게 얼마나 살찌울 수 있을는지요. 아니, 살찌우려고 하기나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살찌웠다 할 만한가요. 소 뒷다리로 개구리를 잡는다 하듯, 직역 말투로 한국말을 살찌운 대목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제 나라말을 곱다시 여기지 못하는 매무새로 서양말·중국말·일본말을 섬기는 한겨레는 한국말을 하나도 살찌우지 못했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 일본어는 한국의 사전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해방 후에 영한사전을 만들 때도 영일사전을 전범으로 삼았습니다 …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한자로 어렵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한국어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영일사전을 베끼다 보니까 영일사전에 나와 있는 한자로 된 딱딱한 풀이어들이 발음만 한국어로 표기되어서 영한사전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 한국어는 주어는 안 쓰더라도 문장은 될수록 능동문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힘찹니다. 일본어는 될수록 수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 (28∼29, 93쪽)
《번역의 탄생》은 “번역이 태어났다”고 밝히는 책이 아닙니다. “번역이라는 새 말투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사람 누구나 익숙하게 젖어든 ‘번역 말투’가 어떠한가를 찬찬히 살피면서, ‘조금 더 한국말답게 말을 하거나 번역을 헤아리는 길’을 돌아보자고 이끄는 책입니다.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한국에서 나오는 책은 하나같이 번역 말투입니다. 여느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아요. 어린이책이라 해서 번역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좀 다를까요?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읽어야 할 교과서는 좀 낫다 할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싫든 좋든 초등학교부터 번역 말투로 교과서를 배웁니다. 더욱이,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에서도 번역 말투로 이야기를 듣거나 주고받습니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들기 앞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라면 누구나 ‘아주 마땅하다’ 할 만큼 번역 말투로 생각을 나눠요.
.. 난해한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번역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제가 한국어 번역에서 대명사를 명사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몇 분의 일이라도 한국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균형 감각 때문일 것입니다 … 한국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주어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동문을 쓰지 않습니다.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언어일수록 수동태가 발달합니다. 영어가 그렇습니다 …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 주어야 자연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전치사 자체가 강한 행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31, 56∼57, 80, 236쪽)
여느 인문책이나 문학책이나 학술책이 ‘번역 말투로 가득하다’고 걱정하거나 슬퍼하기 앞서, 이 나라 모든 교과서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일찌감치 번역 말투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전문가나 학자나 여느 어버이나 교사 또한 ‘으레 번역 말투를 여느 삶말로 여겨’ 주고받아요. 연속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옮기는 나라밖 그림책도 이와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사람이 빚은 한국 그림책 또한 이와 같아요.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돌보면서 한국말을 나누려는 어른이 없습니다.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보듬으면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고 땀흘리거나 애쓰는 어른이 없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는 ‘생각 안 하고 살아가는 어른들 번역 말투’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에도 저희들이 어린 나날부터 익숙해지거나 길든 번역 말투로 저희 아이들을 낳고 기릅니다.
.. 한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고유명사를 적는 데도 불리합니다. 뜻글자는 의미 환기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것을 차단하려면 될수록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모아야 하고, 심지어 새 글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소리로 나는 수많은 한자어 중에서 어떤 한자어를 고유명사의 발음에 대응시킬지 막연합니다 … 그런데 왜 멀쩡한 ‘공약’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매니페스토’라는 말을 요즘 뜬금없이 쓰는 것일까요? 기존 영한사전에 manifesto의 풀이어로 ‘공약’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manifesto는 그냥 공약이 아니라 책임 있는 공약이기나 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공약’과는 구별해서 써야 하는 말인 것처럼, 한국어 ‘공약’은 영어 manifesto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 (322, 344쪽)
한국땅에서 번역 말투가 이처럼 널리 퍼진 지는 얼마 안 된 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참 짧은 햇수만에 번역 말투가 온누리 구석구석 퍼졌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처럼 널리 쉬 퍼진 번역 말투가 ‘한국말을 살찌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널리 쉬 퍼지는 ‘번역 말투 또한 한국말로 삼아야 한다’고 바보스레 생각하고야 맙니다.
번역 말투가 아닌 한국말다운 한국 말투를 쓰는 일을 낯설게 여기는 요즈음이니까요. 이제는 번역 말투를 ‘번역 말투’ 아닌 ‘한국 말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겨도 틀리지 않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니, 이제 한국사람들 한국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지난 2000년대와 오늘 2010년대와 앞으로 맞이할 2020년대 한국땅 한겨레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하겠지요.
.. 한국의 번역 문화는 한국어의 논리보다는 외국어의 논리를 너무 숭상하는 풍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 외국어의 논리라는 것도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체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화도 그렇습니다. 외국 문화의 방정식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답만 열심히 받아적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외국 전문가와 외국 이론을 그대로 들여와서 한국 현실에 들이미는 풍토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두 세대가 넘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402쪽)
《번역의 탄생》을 쓴 이희재 님은 우리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이 나아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길을 따로 밝힐 수 없습니다. 거듭나려고 애쓴다 한들, 둘레 다른 사람들 얄궂거나 슬픈 모습에 휩쓸리거나 휘둘리거나 다칩니다. 맑게 다시 태어나거나 밝게 새로 태어나려고 힘쓴다 한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말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일구지 않습니다.
말을 바르게 다스릴 길을 살피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말을 아름다이 북돋울 길을 찾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아니, 이 나라가 말썽이기 앞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내 매무새부터 내 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말을 아끼거나 보살피거나 믿지 않아요.
한국말은 없고, 한국글은 없습니다. 번역말과 번역글만 있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말이랑 이름값이나 학벌이나 권력에 젖어든 글만 있습니다. (4344.9.18.해.ㅎㄲㅅㄱ)
― 번역의 탄생 (이희재 씀,교양인 펴냄,2009.2.10./17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