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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문장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철호 지음 / 유토피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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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지만
 [책읽기 삶읽기 59] 김철호,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유토피아,2010)



 사람들은 나날이 학교를 더 오래 다닙니다. 가방끈 길어지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나날이 새로운 책이 쏟아집니다. 이 나라 도서관은 퍽 어설프거나 모자라다 하지만, 이곳저곳에 새 도서관이 들어서며, 사람들이 손에 쥐어들 책이 꾸준히 늡니다. 신문은 무척 많이 나오고, 방송은 온갖 이야기가 하루 내내 끊이지 않으며, 셈틀을 켜고 인터넷을 열면 갖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말이며 글이며 어마어마하다 싶도록 넘칩니다. 잘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름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도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문장작법’에서 ‘작문’을 거쳐 ‘글짓기’를 지나 ‘글쓰기’로 오면서,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여느 사람하고 나누는 이야기를 글로 담아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과 지식과 학력과 정보를 뽐내려고 잔뜩 힘을 주거나 멋을 부리는 말씨로 엮는 책이 새삼스레 쏟아집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 같은 책은 지난날에는 꿈을 꿀 수 없던 책입니다. 지난날 같으면 이와 같은 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이오덕 씀)가 처음으로 ‘여느 우리 말로 사랑하는 여느 우리 삶’ 이야기문을 연 뒤로 수많은 여느 우리 말 이야기책이 나왔고,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이러한 흐름 한켠에 야무지게 자리합니다.


.. 마지막으로, 글맛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야 한다. 문장이 뜻도 분명하고 표현에도 군더더기가 없는 데다 ‘맛있는 글’이니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마디로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일부이다. 내가 쓰는 글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말, 나의 글은 나의 정신이자 나의 인격이다 ..  (14쪽)


 ‘낱말편’에 이어 ‘문장편’이 나온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책이름 그대로 ‘우리 말을 잘 쓰면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줄거리를 담습니다. 참말 그렇겠지요.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온통 영어사랑에 푹 빠지는데, 영어를 제아무리 잘 하는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사람하고 한국말로 내 생각을 나눌 수 없다’면 그토록 대단하다는 영어 솜씨라 하더라도 부질없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몇몇 사람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영어를 하면서 살아갈 수 없어요. 영어를 잘 해야 나라힘을 북돋울 수 있대서 시골 흙일꾼한테 영어를 쓰며 벼를 거두거나 배추를 기르라 할 수 없어요.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이들이 왜 영어를 써야겠습니까.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사람이 영어를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영어로 경기를 해야 할까요. 영어신문이나 영어방송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연속극을 영어로 듣는다든지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영어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건 수업을 하건 한국말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를 또렷하게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살찌워야 아름답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막대접할 뿐 아니라 짓밟기까지 하는 어설프며 슬픈 모습을 뉘우치거나 돌아보자는 목소리를 들려주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옳게 배우자고 외치며, 한국사람인 만큼 한국말을 알맞게 쓰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좀 궁금합니다. 왜 글쓴이 김철호 님은 ‘나의’와 같은 일본 말투를 쓰지요? 이제 이러한 일본 말투는 한국 말투로 스며들었다 할 만큼 두루 쓰니까 그냥 써도 될는지요? 글쓴이 스스로 토씨 ‘-의’를 다루는 대목에서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또 다른 자리에서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이라든지 “한국어 쓰임을 넓힌”다고까지 덧붙입니다.


.. ‘한국의 문학’에서는 뒤의 ‘문학’보다 앞의 ‘한국’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의 효과이다. 즉, ‘의’는 자신이 붙게 되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 이렇게 ‘의’의 쓰임이 넓어졌다는 것은 한국어에서 동사의 비중이 작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명사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 위 예들(분홍색이 티셔츠, 34평의 아파트, 세 가지의 의문, 양쪽의 콧구멍)에서 ‘의’는 의미 전달에 공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읽는이들이 의미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런 표현들이 빈발하는 까닭은,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  (62∼63, 65, 68쪽)


 말은 하는 사람 나름입니다. 글 또한 쓰는 사람 나름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 나름대로 사랑스레 잘 하면 되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나름대로 올바로 잘 쓰면 되는 글입니다.

 말을 잘 한대서, 곧 말솜씨가 뛰어나다 한다면 아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요. 글을 잘 쓴대서, 그러니까 글재주가 훌륭하다 한다면 아마 책을 꽤나 팔 수 있겠지요.

 다만, 말을 좀 못 하거나 글을 퍽 못 쓰더라도 말에 담는 넋과 글에 싣는 얼이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솜씨로 부리는 말이 아니라, 착하게 나누는 말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재주를 피우는 글이 아니라 참다이 주고받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 그런데 우리가 글을 쓸 때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고유어와 한자어는 친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229쪽)


 글쓴이는 “토박이말은 토박이말끼리 잘 어울리고 한자말은 한자말끼리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은 낱말뿐 아니라 글월도 토박이 낱말과 토박이 말투로 가다듬습니다. 한자말을 쓰려고 힘쓰는 사람은 낱말을 비롯해 글월까지 한자 낱말과 한자 말투로 추스릅니다.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낱말에다가 글월까지 영어로 펼치겠지요.

 쉬우면서 바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쉬우면서 바르다 싶은 말글을 나눕니다.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를 읽으면, ‘쉽다고 할 만한 한국말’은 거의 안 보입니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에는 ‘일본 한자말이건 중국 한자말’이건, 또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이 나라 지식인한테 스며들었다 하는 ‘일본 말투’에다가 ‘서양 번역 말투’까지 골고루 드러납니다. 글쓴이는 이러한 글매무새를 다독이거나 손질하지 않으면서 “우리 말 솜씨가 밥 먹여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합니다. 참말,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 할 만하며, 오늘날 수많은 글쓰기책이 나오고 말지식책이 나오는 만큼, 영어 지식 못지않게 한국말 지식을 쌓는 일도 ‘내 경력’과 ‘내 소개서’에 적바림할 좋은 보배덩이가 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식으로 얽어매려는 한국말 이야기보다는, 옳고 바르면서 착하고 참다이 꾸려 아름다운 삶으로 북돋우려는 한겨레 한글과 말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말솜씨는 없어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글재주는 없어도 믿음직하게 땀흘려 일하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반갑겠습니다. (4344.5.29.해.ㅎㄲㅅㄱ)


―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 (김철호 글,유토피아 펴냄,2010.10.15.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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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하워드 진.에드워드 W. 사이드 외 17인 지음, 강주헌 옮김, 데이빗 버사미 / 시대의창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착한 삶 사랑할 때에 바른 말 하는 사람
 [책읽기 삶읽기 58] 데이비드 바사미언,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시대의창,2006)



 한자말 ‘양심(良心)’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양심 있는 사람이 된다 할 때에는 옳고 그른 줄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할 테지만, 이에 앞서 ‘착한’ 사람을 일컫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良心’에서 ‘良’이란 ‘착할 량’이거든요.

 말이며 몸가짐이며 곱거나 바르거나 상냥할 때에 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이며 몸가짐이며 곱거나 바르거나 상냥하자면, 옳은 말과 몸가짐을 알아야 합니다. 옳은 말과 몸가짐을 모르고서야 곱거나 바르거나 상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으레 ‘선량’이나 ‘양심’이나 ‘선행’이나 ‘선심’ 같은 갖가지 한자말을 들먹입니다만, 어떠한 말마디라 하더라도 한 가지로 모둘 수 있습니다. ‘착함’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 마음을 착하게 가다듬을 때에 내 삶을 옳은 쪽으로 접어들도록 애쓰는 셈이고, 내 하루를 착하게 돌볼 때에 내 삶을 바른 길로 접어들도록 힘쓰는 노릇이며, 내 말을 착하게 다스릴 때에 내 삶을 상냥한 결로 돌보도록 온몸을 쓴다 할 만합니다.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라는 책이라 한다면, 이 지구별에서 ‘착하게’ 살아가면서 ‘바르게’ 말하려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 인도 정부는 비폭력이란 개념을 지향해 왔습니다. 따라서 비폭력 저항과 비폭력 지배가 인도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중국이나 터키, 인도네시아와 달리 인도는 국민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정부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국민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꾹 참고 기다릴 뿐입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고, 그 결과는 무시해 버립니다 … 인도 공공분야의 기반시설은 국민의 돈으로 지난 50년 동안 꾸준히 건설된 것입니다. 정부는 이런 기반시설을 엔론에게 팔 권리가 없습니다 … 야라 나라가 핵무기를 비축해서, 인도와 파키스탄과 미국처럼 자기 국민을 속이고 다른 나라를 위협하는 세계는 위험한 세계입니다 …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라 말하면서, 핵폭탄을 만드는 데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 도시의 좁은 틈바구니에는 예외없이 가난한 사람이 몸을 쪼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한 곳은 빛이 너무 환한데, 어둠은 그 주변에서 점점 짙어 갑니다. 엘리트들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 내가 쓴 글대로 행동하고, 내가 글로 쓴 것을 끝까지 해내려고 애씁니다 ..  (아룬다티 로이/145∼151쪽)


 나부터 착해야 합니다. 내 마을이 착해야 합니다. 내 겨레와 내 나라가 착해야 합니다. 여느 일자리를 찾아 여느 살림을 꾸리는 나부터 착해야 합니다. 공무원이나 교사로 일하는 사람도 착해야 하고, 정치를 하건 회사를 꾸리건 착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은 제 밥그릇을 챙기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나와 네가 서로 웃으면서 마주할 밥상을 차립니다. 착한 사람이 제 밥그릇 떵떵거릴 까닭이 없고, 착한 사람이 어깨를 우쭐거릴 일이 없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며 정치를 한다 할 때에는 제 힘을 키우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즐거울 터전을 일굴 정치를 할 착한 사람입니다. 회사를 꾸리건 공장을 꾸리건 다르지 않습니다. 일하는 사람 누구나 땀값을 받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은 돈을 더 벌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내 살림을 사랑하고 내 이웃 살림을 사랑합니다. 다 함께 오붓하게 누리거나 즐길 보금자리를 사랑합니다.


.. 우리에겐 더 이상 관광객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관광객을 원하지 않습니다. 관광객을 위한 휴양지가 세워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 하와이에는 사방이 골프장입니다. 온갖 종류의 살충제가 뿌려집니다. 원주민이 쫓겨난 땅에 골프장이 세워집니다 … 환경오염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환경적 인종차별이기도 합니다 … 관광객들도 와이키키가 자동차와 사람으로 만원이라고 투덜댑니다. 교통난이 끔찍합니다. 관광객들은 다른 섬으로도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른 섬들까지 단기간에 황폐화시킵니다 … 하와이를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우리 역사를 모릅니다. 우리가 미국의 일부가 되기를 기꺼이 원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매우 낭만적 이야기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173∼177쪽)


 나는 어버이로서 생각합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착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우리 집 아이가 학교를 다니건 안 다니건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일구는 착한 삶을 가까이에서 늘 지켜보면서 스스로 착한 길을 걸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착한 삶을 스스로 헤아리면서 아이한테 가장 걸맞으며 아름다울 착한 나날을 일구면 됩니다.

 굳이 초등학교이니 중학교이니 고등학교이니 대학교이니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학문은 제도권학교가 아닐 뿐더러, 배움은 대안학교 또한 아닙니다. 졸업장이 있대서 학문을 잘 갈고닦은 사람이 아닙니다. 대안학교를 다녔기에 열린 넋이나 얼로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학교는 제도권이라 하든 대안이라 하든, 정작 가야 할 길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곳이라 하는 학교는, 교과 과정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가르치며 배울 수 없다면 배움터가 아닙니다. 삶이 아닌 지식을 가르치거나 배운다면 입시학원입니다. 시험문제를 풀거나 교과서를 외우도록 이끈다면 입시학원입니다. 학교는 학원이 아닌 학교라는 이름을 쓴다지만, 껍데기가 학교라 하기에 학교이지 않습니다. 알맹이가 학교라야 학교이지, 학교 노릇은 안 하거나 못 하면서 이름만 학교라 일컫는대서 학교일 수 없습니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부터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착한 꿈과 착한 말로 착한 삶을 사랑하는 교사가 있어야 비로소 학교입니다.

 착한 교사가 착한 아이들을 맞아들여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착한 배움길을 걸어가려 할 때에 바야흐로 배움터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착하지 않고서야 무슨 가르침이고 어떤 배움이겠습니다.

 착함이란 옳고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요, 착함이란 아름답고 해맑게 살아내는 나날이며, 착함이란 따스하며 넉넉하게 얼싸안는 사랑입니다.


.. 어머니는 여성만의 힘으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남자는 탐욕과 자아로 가득해서 긴장과 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 어머니는 “나일론 옷을 사 주는 건 문제가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는지 생각해 보거라. 그럼 먹을 것이 직공의 손에 들어가는 게 낫겠니? 이익이 산업자본주의자의 손에 들어가는 게 낫겠니?”라고 말했습니다 … 내가 아직도 수공예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수공예품을 단순히 제품으로만 보지 말고 인간의 창조력과 노동으로 빚어진 산물로 생각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 미국 영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엘리트들에게 미국식의 에너지 소비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간단히 정의한다면 ‘시장이 될 만한 곳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마시는 물에 돈을 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은행은 물이 공짜이기 때문에 남용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물이 남용되는 진짜 이유는 물을 대규모로 사용하는 산업체가 물을 알뜰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물을 오염까지 시키고요 … 사회적 책임, 노동자의 권리, 자원의 이용이나 독극물의 방출에 대한 제한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본과 무역만 자유화하는 세계 헌법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현재의 자유무역협정은 이 땅에서 생명을 고갈시키려는 협정입니다 … 대기업들과 싸우면서 그들이 겉으로는 막강한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한없이 공허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짜릿한 전율감마저 느낍니다 ..  (반다니 시바/340∼349쪽)


 이야기책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바사미언이라는 사람이 만난 스무 사람은 한결같이 ‘착한 꿈’을 ‘착한 말’로 펼치며 ‘착한 삶’을 들려주려 합니다. 꿈과 말과 삶이 한동아리로 착하게 흐르도록 힘을 쏟습니다. 넋과 글과 일놀이가 착하게 뿌리내리도록 땀을 흘립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그저 착한 길입니다. 착한 마음일 때에 착한 얼굴이고, 착한 손길로 착한 글을 쓰거나 착한 그림을 그리거나 착한 사진을 찍습니다. 사랑바라기를 하면서 조그맣게 살림을 꾸립니다. 믿음바라기를 하면서 예쁘게 두레를 하거나 울력을 합니다.

 굳이 남 앞에서 멋들어져 보이는 옷을 차려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고운 결을 아끼면서 내 고운 보금자리를 어여삐 돌보는 삶을 일구면서 내 숨결을 살찌우는 자연을 헤아리는 옷을 자연에서 얻어 자연스레 웃으면 됩니다. 치레하는 삶이 아닌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보이거나 뽐내는 삶이 아닌 보살피거나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4344.5.15.해.ㅎㄲㅅㄱ)


―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데이비드 바사미언 엮음,강주헌 옮김,시대의창 펴냄,2006.9.18./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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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
이와사 메구미 지음, 다카바타케 준 그림, 황부겸 옮김 / 푸른길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파란빛 하늘과 바다를 껴안아 주셔요
 [책읽기 삶읽기 55] 이와사 메구미·다카바타케 준,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푸른길,2004)


 온누리에는 책이 참 많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이 태어나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책이 늘어나며 온누리 책은 날마다 북적북적 넘칩니다.

 수없이 늘어나는 책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모조리 읽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새로 태어나서 나중에 스스로 책을 읽을 무렵이 될 때에는 ‘일찌감치 판이 끊어져 새책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갖춘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커다란 도서관 빼고는 안 갖추는 책이 많습니다.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제주에 있는 도서관에서도 모든 책을 샅샅이 갖추려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이 나라 모든 도서관은 한국땅 모든 책을 1권씩이라도 알뜰히 건사할 만큼 돈이나 시설이나 일꾼이 없다고들 합니다.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은 어떠한 빛과 소금을 담는지 헤아려 봅니다. 부질없이 나오는 책이란 없겠지요. 쓰잘데없이 종이쓰레기를 빚는 책 또한 없겠지요. 그러면, 종이에 글을 찍는 책이라면 하나같이 사랑할 만하거나 아낄 만하거나 돌아볼 만하다 할 수 있을까요.


.. 파란색을 정말 좋아하는 고래 선생님은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보며, ‘아, 행복해. 이런 곳에서 태어나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  (6쪽)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푸른길,2004)라고 하는 책을 집어들어 읽습니다. 옆지기가 고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래곶’과 ‘고래’라는 이름에 끌려 집어듭니다. 아마, 고래를 좋아하는 다른 분들도 책이름에 두 차례 나오는 ‘고래’라는 이름에 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앞머리에 나오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보며” 참으로 즐겁다고 느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곧이어, ‘품격이라는 뭔가는 참으로 뭔가 있기나 한가’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는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너른 바다를 누비는 고래라 한다면, 파란 바다와 파란 바다가 좋겠지요. 품격이니 격식이니 하는 틀이나 껍데기에 얽매이지 않을 테지요. 사람들처럼 성적표라든지 졸업장이라든지 매달리지 않겠지요.

 아파트가 없어도 되는 고래이고, 자가용이 없어도 되는 고래입니다. 훈장이라든지 기관총이라든지 파티복이라든지 전투기라든지 없어도 되는 고래예요.

 고래는 바다에서 살아가며 바닷것을 먹고 바다에 똥오줌을 눕니다. 고래처럼 큰 덩치가 바다에 똥오줌을 누며 살지만, 고래 똥오줌 때문에 바다가 더럽혀진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합니다. 고래 못지않게 덩치가 큰 상어가 누는 똥오줌 때문에 바다가 더럽혀진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어요. 오직, 사람이 누는 똥오줌 때문에 온 들판과 물과 하늘과 흙과 바다가 더러워집니다. 사람이 누리는 물질문명 때문에 온 하늘과 바다가 더러워집니다.


.. “저, 아무래도 고래 선생님은 엄청나게 큰 몸집으로 보나 품격으로 보나, ‘고래 씨’라든가 ‘구지에몬 씨’라고 부르는 것은 어쩐지…….” 고래 선생님이 품격이 대체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펠리컨이 다시 말했습니다 ..  (14쪽)


 이야기책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는 고래들이 벌이는 ‘올림픽’을 보여줍니다. 물뿜기를 겨루고, 다른 바닷짐승이 펼치는 놀이를 보여줍니다. 치고 받으며 다투기보다는 어깨동무하면서 사이좋게 어울리는 삶을 보여줍니다. 보드라운 이야기요, 따사로운 이야기입니다.

 다만, 책을 덮기까지 두 군데 말고 더 밑줄을 긋지 못합니다. 새삼스레 들여다보거나 가만히 되짚을 만한 대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쁘거나 얄궂은 이야기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만 한 이야기책까지 굳이 한국땅에서 책으로 내놓아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국땅에서 한국 삶터를 돌아보면서 한국 아이들한테 살가이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마음그릇이 있는 한국 글쟁이는 없을까 궁금합니다.

 파랗디파란 하늘을 가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겠습니다. 파랗고파란 바다를 끝없이 아끼는 넋으로 조촐히 이야기마당을 열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더 작게 생각하고, 더 작게 바라보며, 더 작게 살아갈 때에 한결 애틋하면서 살가운 이야기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4.5.1.해.ㅎㄲㅅㄱ)


―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 (이와사 메구미 글,다카바타케 준 그림,황부겸 옮김,푸른길 펴냄,2004.7.1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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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 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
김재영 지음 / 한얼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아픈 사람이 아픈 이웃을 사랑한다
 [책읽기 삶읽기 52] 김재영,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한얼미디어,2005)



 배를 곯은 적이 없는 사람은 배곯이를 모릅니다. 추위에 떤 적이 없는 사람은 추위를 모릅니다. 몸앓이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은 몸이 여리거나 아픈 사람을 모릅니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가난한 살림살이를 모릅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거의 못 읽은 사람을 모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삶을 모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얼마나 고되게 일하며 저희를 보살피는지 모릅니다. 아이인데 벌써부터 어른들 삶을 알거나 어른들이 얼마나 땀흘리거나 애써서 저희를 보살피는가를 안다면, 이런 아이를 두고 ‘애어른’이나 ‘애늙은이’라 합니다.

 아이는 아이로 자라야 합니다. 아이한테 아이다움이 없다면 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라 해서 마냥 철없거나 철딱서니없이 살아도 되지 않습니다. 아이라 하기에 건방지거나 시건방지게 살아도 되지 않아요. 아이는 아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사람다움을 차근차근 느끼며 깨달아 아름다운 제 삶길을 찾아야 합니다.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거나 동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읽으면, 두 작품 주인공인 네로(넬로)가 우유수레를 끄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이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가 힘에 부쳐 더는 수레를 끌 수 없어 자리에 누운 날부터 어린 네로는 우유수레를 끕니다.  추운 겨울날, 양말도 장갑도 없는 가난한 네로는 맨손과 맨발로 무거운 우유수레를 끌면서 그동안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달팠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라서 더 힘들다기보다 어른이라도 몹시 힘든 우유수레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이토록 추운 날에도 하루를 거를 수 없이 날마다 우유수레를 끌어야 한다니, 이렇게 날마다 우유수레를 끌면서도 끼니를 잇지 못해 굶는 날이 있어야 한다니, 어린 네로로서도 몹시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네로는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이 할아버지하고만 살아가니까 양말이나 장갑마저 없이 추운 겨울을 홑옷으로 납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네로처럼 추위를 사무치게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네로처럼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네로처럼 고된 일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추위와 가난과 배고픔과 고된 일에 시달린대서 우리 삶과 이웃 삶을 더 잘 헤아리거나 살피지는 않습니다. 괴롭거나 힘든 나날이 되풀이되는 나머지 마음이 비뚤어지거나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누구라도 추위와 가난과 배고픔과 고된 일을 견디거나 이기기 몹시 어렵습니다.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빌리네 아버지 또한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배신자’ 소리를 듣더라도 어쩔 수 없이 집식구 먹여살리는 슬픈 길을 걷습니다. 동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배신자 길을 가고야 맙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누구를 가리켜 배신자라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빵 한 조각을 얻으려고 도둑질을 했던 쟝 발장을 ‘뭐라 하든 넌 도둑일 뿐이야!’ 하고 모질게 몽둥이질을 할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쟝 발장은 부귀와 권세를 누리려고 빵 한 조각을 훔쳤을까요. 쟝 발장한테 빵 한 조각을 예쁘게 나눈 부자는 한 사람이나마 있었는가요. 아니, 똑같이 가난한 이웃 가운데 쟝 발장을 가엾이 여긴 사람이 있었는가요.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부역을 하거나 친일문학을 하던 사람들은 틀림없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에는 말 그대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려던 사람이 있는 한편, 쟝 발장처럼 가난과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배신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은 바로 ‘배신자’가 되었고, 당신이 숨을 거두는 날까지 스스로 배신자 노릇을 했음을 떳떳이 밝히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봐요. 어떤 배신자가 스스로 배신자 발자국을 쉬 드러내겠습니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한테나 ‘네 잘못을 떳떳이 드러내어 뉘우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쟝 발장》을 한국말로 옮기기도 했던 이원수 님임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마음앓이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톺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밥 한 그릇 얻으려고 배신자 길을 걸었으면서도 살림살이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어요.


.. 왜 이들이 1948년 이전에 나라를 떠났겠는가. 가난과 수탈을 피해 굶주리을 면하고자 농사를 지으러 간 이들이었고,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피흘려 싸웠던 독립투사들과 그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동포가 아니라는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조차 동포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 재외동포로 인정한다면 마땅히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세계 어느 민족이 자기 민족을 감싸 주지 못할망정 불법체류자라는 족쇄를 채운단 말인가 … 러시아 국적이 없는 고려인은 의료와 연금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당연히 취업이 허락되지 못해 이 질긴 가난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 한국의 백과사전은 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 그리고 그에게 훈장이 추서되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은 한 가지를 빼먹고 있었다. 그의 11명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으며, 그 중 생존한 두 명의 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  (8∼9, 48쪽)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고려인 생채기’를 헤아리거나 껴안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고려인이라는 사람을 헤아리는 사람이나마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려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를 살피는 사람이나마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이 나라 남녘땅이랑 북녘땅은 군사분계선을 마주하면서 백만 젊은이 남짓이 총과 대포를 들고 불꽃 튀기도록 맞섭니다. 북녘은 굶어죽는 사람이 그토록 많다지만 남녘보다 더 많은 군인을 먹여살려야 한답니다. 남녘은 굶어죽을 사람이 적다지만 어김없이 가난한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부자도 많고 가난뱅이도 많습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 많고 굶어죽다 못 이겨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총을 내려놓고 대포 아닌 살림살이를 마련해야 할 노릇이지만, 남녘도 북녘도 온통 전쟁무기 키우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붓습니다. 한갓진 남녘사람들은 북녘 정치꾼들이 ‘제 나라 사람이 굶어죽는 데에도 전쟁무기에 저렇게 돈을 써서야 되겠느냐?’ 하고 나무라지만, 군사분계선을 마주하는 남녘나라가 전쟁무기를 더 많이 늘리면서 국방비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니까, 북녘도 똑같이 슬픈 길을 걷고야 마는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 어디서 누구를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청년 지마와 스물세 살 꽃다운 처녀의 한을 말이다 … 연해주 재이주 고려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이것이다. 법으로부터도 정치로부터도 경제로부터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그들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옷을 벗으라면 벗어야 하며, 떠나라면 떠나야 하는 이 그치지 않는 유랑자의 신세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여정 중 가장 곤란했던 것은 화장실이 없는 것과 먹을 것이 공급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서운 추위였다. 명령대로 2∼3일 분량의 식량밖에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굶기를 밥먹듯 했다. 아이들은 굶어죽어 갔고, 아비는 배곯아 죽은 자식을 어두운 밤 잠깐 멈추었던 어느 이름모를 땅에 맨손으로 묻었다 ..  (29∼30, 189쪽)


 지난날,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권력을 움켜쥔 이들이 슬기롭거나 올바르지 못한 나머지 일본 제국주의자한테 나라를 넘겼을 뿐 아니라, 밑바닥 사람들이 더 밑바닥에서 헤매며 짓눌리도록 내몰았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 굶거나 추위에 떨던 권력자나 임금·신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부자는 조선 때에도 부자였고 일제강점기에도 부자였습니다. 가난뱅이는 조선 때이든 일제강점기이든 가난뱅이였어요. 이리하여 고향땅에서 발을 붙일 수 없던 이들이 눈물을 삼키며 나라를 등졌습니다. 나라를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만주나 연해주로 넘어갔대서 입에 풀을 바르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서로서로 도우며 끼니를 겨우 이을 수 있었는데, 조금 살림이 펼 만할 즈음 ‘강제이주’라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강제이주를 겪고 길디긴 나날이 흐르며 겨우 생채기가 아물 무렵 다시금 ‘재이주’라는 새로운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라는 책은 강제이주에다가 재이주를 겪으며 ‘살아간다는 즐거움이나 꿈이나 기쁨’을 도무지 누리기 힘든 고려인을 만나며 조금이나마 이웃으로서 도우려고 애쓰던 두 사람이 고려인들을 마주한 나날을 고스란히 적바림합니다. 속속들이 받아들이거나 껴안지는 못하지만, 고려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부대끼거나 마주하거나 겪는 숱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습니다.


.. 40대 중년의 얼굴을 가지고 그도 동갑이라며 반가워한다. 나는 내 손과 기름진 얼굴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 누구든 러시아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길가의 그들을 보라. 그들의 얼굴과 말소리와 표정을 주목해 달라. 내 어머니 같고 내 아버지 같은 그들이 파는 한 덩이의 감자는 곧 ‘밥’이며 ‘약’이며 ‘물’이며 ‘옷’이며 그들의 ‘아이’들이다 … 뒷날 내가 원주로 반강 선생을 찾아뵈었을 때 그는 강원대와 원주대에 출강하고 계셨는데, 마침 학생들이 모아 준 25만 원과 헌옷·신발 등을 챙겨 주셨다. 그날 선생은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나라가 망해도 독립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연해주에 가 보니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짐승처럼 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냔 말이다.” ..  (75, 137, 228쪽)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김재영 님은 당신 옆지기와 함께 러시아땅에서 고려인하고 부대끼며 살아가기에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같은 책을 내놓습니다. 고려인들 눈물을 느끼고 웃음을 느낍니다. 고려인들 손바닥을 쓰다듬고 당신 손바닥을 비빕니다. 만화영화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앤 셜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잃고 여러 집에서 애보개로 떠돌며 세 쌍둥이까지 보살펴 본’ 일을 치렀기 때문에, 살가운 동무 다이애나 동생 미니메이가 후두염에 걸렸을 때에 차분하면서 살뜰히 보살펴 목숨을 건지도록 돕습니다.

 겪는다 해서 다 알지는 않습니다. 겪으나 못 깨닫거나 못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안 겪었다 해서 다 모르지는 않습니다. 안 겪거나 못 겪었다지만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요. 만화책 《달려라 하니》를 보면 ‘유지애’라고 하는 아주머니 또한 어린 날 ‘새엄마’한테 시달리던 아픔이 있기 때문에 하니가 그토록 저를 미워하는 모습을 가슴으로 아파하면서 하니가 느낄 아픔과 생채기를 달래려고 애씁니다. 어쩌면 유지애라는 아주머니는 스스로 겪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니가 껴안는 아픔과 생채기를 달래려 했겠지요. 그런데 당신 스스로 어린 나이에 하니와 마찬가지로 뼛속 깊숙하게 겪었기 때문에 더 사무치게 떠올리고 더 애틋하게 보듬고 싶어 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김재영 님이 살짝 ‘봉사’하러 러시아로 갔다가 금세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같은 책을 내놓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러시아에서 힘껏 땀흘리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잇는다 한다면,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를 이은 둘째 이야기나 셋째 이야기를 살포시 들려줄 수 있겠지요.


.. 어느새 바뀌어 버린 계절, 겨울이었다. 오두막은커녕 낡은 거적때기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들, 그곳에 고려인들이 서 있었다 … 이제 러시아어를 사용해서도 안 되며 소련 시절의 어떤 훈장도 소용이 없게 됐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고려인들에겐 또 한 번의 고난을 예견하는 단어 ‘난민’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  (193, 205쪽)


 우리 집 아이는 허구헌날 넘어져 무릎이 깨집니다. 날마다 몇 번씩 무릎이 다시 깨집니다. 이러다 예쁜 무릎에 생채기 자국이 깊이 남겠구나 싶어 걱정스러운데, 늘 넘어지며 무릎이 깨져 울먹이는 아이는 제 또래이든 동생이든 언니이든 넘어져서 다치거나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살며시 다가가서 호호 하고 입김을 붑니다. 살살 쓰다듬거나 토닥이면서 “이제 안 아파.” 하고 얘기합니다.

 겪는다고 다 알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겪어야 제대로 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은 하루하루 새로운 이야기를 겪는 나날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스스로 겪으며 스스로 발돋움합니다. 스스로 부딪히고 스스로 마주하면서 스스로 거듭납니다. 새봄에 새롭게 피어나는 어여쁜 꽃을 두 눈으로 본 사람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 추운 겨울을 맞닥뜨렸을 때에 이 겨울을 견디어 내면서 새로운 봄이 다시금 찾아올 때에 새로운 봄꽃을 새삼스레 보고픈 꿈을 키우면서 어깨를 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지나치게 배부르고 지나치게 한갓지며 지나치게 넉넉하다 보니, 내 곁에 이웃이 있으며, 내 곁 이웃이 어떠한 마음이거나 삶이거나 넋인가를 도무지 들여다보지 못할 뿐더러 들여다본다 한들 가슴으로 못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사랑을 느껴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사랑을 못 받아 외로운 동무를 꼬옥 껴안으며 아낄 수 있습니다. (4344.4.18.달.ㅎㄲㅅㄱ)


―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김재영 글·사진,한얼미디어 펴냄,2005.2.19./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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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말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50]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책과함께,2005)


 (1) 한국사람·한국말·한국말사전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사전을 들추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내가 쓰는 말글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살펴야 하니까요.

 퍽 예전에는 한글학회 일꾼이 힘을 모아 한국어사전을 내놓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학자나 대학교나 출판사나 국립국어원까지 한국어사전을 내놓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읽힐 국어사전을 애써 찾아서 쥐어 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여러 가지 국어사전을 어릴 적부터 곁에 한 권쯤 두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국어사전보다 영어사전을 자주 들춥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 가운데 국어사전을 틈틈이 들추면서 말을 살피거나 익히려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찾아본다면 영어사전을 찾아보지, 국어사전을 뒤적이지 않아요. 늘 쓰는 한국말이지만, 늘 쓰면서 어떠한 말뜻이요 말쓰임이며 말느낌인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 개화 세력은 양반 귀족의 소통 도구였던 한문보다는 일반 대중의 소통 도구였던 한글을 공식문자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각과 정책을 일반 대중과 폭넓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 일본어 상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서 조선어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도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럼 이 세상에 조선어는 무용하다는 세 명의 아동은 십 년 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어를 해야만 살 수 있는 현실을 보며, 아마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  (27, 283쪽)


 이야기책 《우리말의 탄생》은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라는 이름이 딸립니다. 한국어사전이 없이 한국말이 없다 할 만하기 때문에, 책이름이 《우리말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의 誕生’이라는 말투는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할까 아리송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지만,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해서 한국사람 말투라 해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 말투대로 적자면 “우리 말이 태어나다”라 해야 할 텐데요. 또는 “새로 태어난 우리 말”이라든지 “갓 태어난 우리 말”이라 하든지요.

 곰곰이 살피면, “最初의 국어사전” 또한 한국사람 말투일 수 없습니다. “첫 국어사전”이라 해야 한국사람 말투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 50年의 역사”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의 50년의 역사”처럼 적지 않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역사”쯤으로는 적어야 비로소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합니다. 한 걸음 더 헤아린다면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발자취”라든지 “국어사전 만들기 쉰 돌 발자취”라 할 수 있어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았고, 일제강점기 앞서는 한문이 으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난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영어가 으뜸으로 자리잡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느 한때고 한국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은 적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려 하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지자채와 교육부에서도 엄청나게 큰 돈을 들이붓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아이들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이 나누도록 북돋우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돈도 품도 땀도 마음도 사랑도 베풀지 않습니다.


.. 조선어사전을 집필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민족의식과 관련된 단어의 경우 뜻풀이를 축소하거나 아예 수록 대상에서 빼버리는 일이 있었던 반면,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공용어가 될 민족어 사전과 식민 지배를 받는 일개 민족어의 사전이 같은 체제와 내용으로 출판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41쪽)


 한국사람은 한국말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기껏 안다고 한다면 세종큰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지식이 있다뿐, 막상 훈민정음이 어떤 글이고 이 글을 지난날 지식인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거의 모르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최경봉 님 같은 분들이 《우리말의 탄생》 같은 책을 써 주기에, 이 책 하나를 읽으면서 한국말사전이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지만, 한국말사전이 태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에 깃드는 말마디부터 썩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말마디를 한국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왜 이런 말마디로 한국말사전 이야기를 펼쳐야 할까요.


.. 사전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전에는 어려운 단어가 우선적으로 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찬자들이 많았다 ..  (182쪽)


 어렵다 싶은 낱말이란 따로 없습니다. 쉽다 할 만한 낱말 또한 따로 없습니다. ‘있다’나 ‘없다’라는 낱말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와 ‘쓰다’는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영어사전에서 ‘be’나 ‘go’나 ‘get’ 같은 낱말을 찾아본다면 알 테지만, 영어사전에서는 이런 ‘쉽다 할 만한 낱말’을 아주 꼼꼼하면서 길게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있다-없다-보다-쓰다-주다-갖다-넣다-가다’ 같은 낱말을 어떻게 풀이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이러한 낱말부터 옳게 다루지 못하는 한국말사전이라면 한국말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이냥저냥 쓰는 말마디를 되도록 더 많이 주워담은 잡동사니 책이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2) ‘언어민족주의’가 있을까


 한국말사전 쉰 해 발자취를 담는다는 책 《우리말의 탄생》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답답합니다. 이 책은 ‘한국말사전이 처음 태어난 쉰 해 발자취’를 다룬다고 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조선어학회 언어민족주의 비판’이 곳곳에 자꾸자꾸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차분하게 한국말사전 발자취를 다루는 학문책이었으면 좋으련만, 왜 자꾸 글쓴이 ‘한쪽 생각만 옳다’는 투로 이야기를 펼치는지 안타깝습니다.

 글쓴이 생각은 옳을는지 모르나 그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생각을 밝히려 한다면 아예 주의주장을 다루는 책으로 내야지, 책이름을 “우리 말글이 태어나다”나 “첫 국어사전 발자취”라 적으면서 껍데기를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말에 담긴 민족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면서, ‘언어는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보다는 ‘언어는 민족의 얼’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진리로 자리잡았다. 언어의 타락을 민족혼의 타락으로 보는 경향이나 조선어가 가장 위대한 언어이고 훈민정음이 가장 위대한 문자라고 보는 국수주의적 경향도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  (34쪽)


 ‘말은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만 하지 않습니다. 영어는 영어를 쓰는 겨레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얼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중국말은 중국사람 넋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일본말은 일본사람 얼을 밝힙니다. 티벳말은 티벳사람 넋을 보여주고, 덴마크말은 덴마크사람 얼을 밝혀요.

 어느 겨레가 쓰는 말이든 이 말을 쓰는 겨레얼이 깃듭니다. 영국사람이 쓰는 영어하고 미국사람이 쓰는 영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넋과 얼이 사뭇 달라요.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을 틀림없이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겨레와 나라마다 제 터전과 삶자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말마디에 싣습니다. 섣불리 ‘국수주의’이니 무어니 하고 꼬리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훈민정음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으나 ‘가장 요즈음에 만들고 가장 과학 원리에 따라 만든 글’이니,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테지요.


..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주시경 이후 조선어 연구의 한 경향이 된 언어민족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결과였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는 곧 우리 민족의 얼이자 우리 민족 그 자체’라는 언어민족주의에 기대어 연구 방향을 설정하였다 ..  (67쪽)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피는 일이 ‘언어민족주의’일 수 없습니다. 제 겨레나 제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살피는 일은 언어주의도 민족주의도 언어민족주의도 아닙니다. 그저 학문입니다. 한 마디를 붙일 수 있다면 나라와 겨레와 말과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요.

 영국사람이 영어사전을 만들고, 독일사람이 독일어사전을 만드는 까닭은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영어학이나 독일어학이나 중국어학이 나오는 까닭 또한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한국어학을 하는 분들은 자꾸 ‘무슨무슨 민족주의’ 또는 ‘무슨무슨 국수주의’라는 이름표를 섣불리 붙이곤 합니다. 이런 주의주장을 해야 논문이 되거나 학문이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말을 살피거나 다루는 사람들한테 자꾸 애먼 ‘주의자’라고 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살피는 사람은 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기계’도 아닙니다. ‘의사소통 도구’로만 한국말을 살피는 기계인 학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무를 보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꼴이 된 조선어학회는 자신들의 아집에 사로잡혀 모국어의 정리와 통일의 결정체가 될 모국어사전의 출판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홍기문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부정했던 것은 조선어학회의 아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조선어 연구가 쇼비니즘적 경향을 띠는 것이었다. 국수주의에 경도된 언어 연구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당시 조선어학회의 위상을 볼 때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지키는 절대적 문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  (232쪽)


 글쓴이 최경봉 님은 ‘국수주의’와 ‘언어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이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비판합니다. 책은 《우리말의 탄생》이지만, 우리 말글이 어떻게 국어사전으로 갈무리되면서 틀을 잡는가 하는 이야기에서 이래저래 벗어나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를 살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고 《우리말의 탄생》에서 거듭거듭 나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자들이 조선말이 어떠한가를 말하거나 밝힐 때에 어떻게 말하거나 밝히려나요. 《이응호-미군정기의 한글운동사》(성청사,1974) 같은 책에서 그러모은 예전 자료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즐겨쓰던 사람들은 식민지살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권력을 누립니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이건 조선말을 살피는 학자이건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말을 살피는 사람은 ‘권력 아닌 탄압’을 누립(?)니다.

 글쓴이는 어쩌면 나무도 숲도 보지 않으면서 ‘국어사전 발자취’를 살피려 하면서, 일부러 조선어학회 비판에만 불꽃을 피우지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이라 해서 더 거룩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사람한테는 거룩하거나 훌륭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쓰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미국사람은 미국땅에서 미국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일본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겠지요.

 하나도 민족주의가 아니며 국수주의라든지 쇼비니즘 따위가 아닙니다. 말결이고 말흐름이며 말삶입니다. ‘절대적 문화 권력’이란, 지난날 한문을 쓰던 지식인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아끼던 지식인이며 오늘날 영어를 사랑하는 지식인입니다. 이들 지식인은 예나 이제나 우리 말글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쓰지 못합니다.


.. 그들(민족주의 언어학자)은 일관되게 우리말이 우리 민족과 함께 수천 년을 이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계통론적 시각에서 우리말의 기원을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수 있었다 ..  (331∼333쪽)


 말투를 하나하나 따진다면,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같은 말투는 우리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말투대로 말을 하자면, “다른 말과 얽혀 살펴보는 일이 이들 학자한테는”이라고 가다듬어야 합니다. “관련 속에서” 같은 말투는 영어를 일본사람들이 옮겨적던 말투를 한국 지식인이 생각없이 받아들여 퍼뜨리는 말투입니다. 앞에 ‘-와 + 의’처럼 붙인 토씨 또한 일본 말투입니다. ‘自體’ 같은 한자말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것’을 아무 데나 넣는다든지 ‘그들’ 같은 대이름씨를 섣불리 쓰는 말투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니에요.

 말은 계통론으로도 살피지만,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낸 사람들 말버릇으로도 살핍니다. 고장말로도 살피는 말이요, 이웃한 고장이나 이웃한 나라나 겨레하고 견주면서도 살피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로만 살필 수 없는 말입니다. 말은 죽기도 하지만 태어나기도 하고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틀을 지을 수 없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 틀을 섣불리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적기법이라든지 띄어쓰기라든지 맞춤법이라든지 받침이라든지, 무엇 하나를 놓고도 참 오래도록 힘겨운 입씨름을 하거나 생각을 그러모은 끝에 국어사전 하나를 빚습니다.


.. 이희승 《국어대사전》은 ‘국어사전이면서 백과사전이나 각종 전문사전의 구실을 겸할 수 있도록 엮은’ 사전으로 우리 국어사전의 특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전이다 … 그 어휘의 증가분 중 상당 부분이 외래어나 한자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어휘 수록 양상은 새말의 수용이나 전문어의 확대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  (364쪽)


 글쓴이가 《국어대사전》을 비롯한 ‘고침판 이희승 국어사전’을 얼마나 살펴보고 이렇게 적는지 궁금합니다. ‘ㄹ 항목’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이희승 국어사전에 일본말이든 서양말이든 외국 물건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으며, 뜬구름 잡기라도 되는 듯한 외국사람 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고, ‘스쿨걸’과 ‘스쿨보이’ 같은 영어까지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이희승 국어사전인 줄을 스스로 살폈더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롱’이나 ‘라이프’나 ‘리빙’ 같은 낱말은 영어이지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롱스커트’나 ‘로스트 비프’나 ‘록(= 바위)’이나 ‘리레코(= 리레코딩)’나 ‘리딩(= 읽기)’이나 ‘리밋(= 한계)’ 같은 영어를 슬그머니 실어 놓은 매무새로 올림말 숫자를 늘린 이희승 국어사전인데, 올림말 숫자가 많대서 새롭거나 남다른 한국어사전이 될 턱이 없습니다. 이런 영어까지 실었으니, 우리가 안 쓰는 한자말이나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만 쓰는 한자말은 오죽 많이 실었겠습니까.

 이희승 님이 엮은 한국어사전은 이 한국어사전대로 보람과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낱말이 아닌 일본말과 일본 한자말을 지나치게 실은 대목에서 비판을 받을밖에 없습니다. 우리 낱말을 다루는 책이어야 할 국어사전에 왜 우리 낱말을 제대로 못 실을까요. 게다가 최경봉 님은 왜 이러한 대목을 옳게 짚지 못할까요.

 한자말을 쓰는 일이나 영어를 쓰는 일을 꼭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쓸 만하다면 써야지요. 쓸 만하지 않다면 안 써야지요. 엉터리로 쓰거나 얄궂게 쓰거나 겉치레로 쓴다면 한국어사전에는 함부로 싣지 말아야지요.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또한 이런 대목에서 비판받아야 할 뿐 아니라,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이 어긋나는 대목이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한국어사전은 잘못된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을 꾸준히 바로잡지만, 정작 종이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은 잘못된 곳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는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을 다루면서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에서 잘 돌아보며 담은 대목이나 잘못 건드리며 얄궂게 된 대목을 찬찬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남영신 님이나 박용수 님이 일군 ‘우리말 분류사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김광해 교수가 이룬 ‘유의어·반의어 사전’이라든지, 정재도 님이 이룬 ‘국어사전 바로잡기’라든지, 임홍빈 교수가 펼친 ‘말느낌(뉘앙스)에 따라 다른 말풀이’와 같은 새로우면서 깊이있게 파고드는 한국어사전 톺아보기 이야기 또한 다루지 못해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최경봉 님은 “우리 말글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로 헤아리자니, “우리 말글은 아직 안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우리 말글이 태어나올 땅이 꽁꽁 막혔”습니다. 학자와 정부와 관료와 지식인과 여느 학부모까지 “우리 말글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알껍데기에 무쇠붙이를 철썩 뒤집어씌웠다”고 할 만합니다. 태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태어날 수 없게끔 가로막힌 한국말 이야기를 펼치자니, 《우리말의 탄생》이 구석구석 갑갑하거나 턱턱 막힐 수밖에 없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밑에는, 이희승 국어사전 올림말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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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몽 2012-02-2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쓰신 글이신지요...?
너무 가슴아프게(?) 잘 읽었습니다.
'가슴아프게'라고 한 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좋은 점을 얘기해 놓고는 끄트머리에 '그래서 한글을 뛰어나'-이것도 꼭 '우수'라는 한자말을 쓰지요...-라고 끝을 맺지요.
그리고 한글이 뛰어나다고 하던 나랏말학자들도, 하지만 우리말 만으로는 말글사는 데에 모자라고 한자말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더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한글이 우수하다고 하는 그 분들도 잘 들어보면,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맨날 똑같은 그 얘기 말고는 근거를 들지 못합니다.(마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정광태 씨 노랫말에서 밖에서 못 찾는 것처럼...)
그리고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과 엄청난 돈을 들이고도 완전 엉터리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까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여튼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2dreamy.wordpress.com/

숲노래 2012-02-21 06:08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이 아니면 서재에 올릴 수 없겠지요.

..

한글은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을 한겨레가
가장 슬기로이 담는 그릇이지만,
이 그릇을 제대로 다룰 때에 좋은 그릇이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슬픈 그릇이 됩니다...

깨몽 2012-02-21 12:01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가요...^^;;
여튼 꿰뚫어 보시는 힘이 대단합니다.
이른바 나랏말학자라는 이들과 우리말글운동한다는 이들도 잘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얘기를 해도 바로 보기 싫어하는 것을 꿰뚫어 보시니...
그러고 보면, 되장 님도 그렇지만, 제가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이나 이 책을 쓰신 최경봉 님,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말글을 바로 보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그런 분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습니다.(엉터리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앉아... ㅡ.ㅡ)
아마 그래서 이 글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을 만한 글이 많아 마음이 좀 급하긴 하지만,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보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혹 SNS(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하시면 알려주시면 말씀 나누면서 배웠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02-21 13:31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트위터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주류이거나 아니거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옳게 바라보며 제대로 살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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