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빛 책읽기

 


  봄빛과 여름볕을 물씬 머금은 가을열매인 나락을 벤다. 논에 모를 낸 차례에 따라 천천히 벼베기를 한다.벤 벼는 시골길 한켠에 죽 펼쳐서 해바라기를 한다. 올가을에는 빗방울 없고 구름만 살짝 흐르며 햇살이 곱게 내리쬐니 알알이 잘 여문다.


  아이들과 시골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다가 새 나락, 곧 햅쌀을 들여다본다. 길바닥에 구르는 나락알을 주워 보기도 한다. 큰아이는 “껍질을 까서 먹는 거야?” 하고 물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락알을 까먹는다. “아니야. 껍질째 먹어야지.” 하고 들려준다.


  해바라기를 하는 나락 곁을 지나가면 나락내음이 확 풍긴다. 봄빛을 먹고 여름볕을 마신 나락들은 가을 내음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은 밥을 지어 먹을 때에 봄을 먹고 여름을 마시고 가을을 누리는 셈이리라. (4345.10.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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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나무 가을 새잎 책읽기

 


  가을이 무르익는데 벚나무 가지에 새잎이 돋는다. 하나둘 떨어지며 앙상한 나무가 되던 벚나무에 싯푸른 새잎이 돋을 뿐 아니라, 하얀 꽃송이까지 맺힌다. 감나무에도 새잎이 돋는다. 감꽃까지 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넓적하며 싯푸른 감나무 새잎이 발그스름 익는 감알 곁에서 가을노래를 부른다.


  철이른 동백꽃이 한겨울에 봉오리를 터뜨리다가 그만 눈을 옴팡 맞기도 한다. 남쪽 나라이니까 이런 일이 있겠거니 싶으면서, 따사로운 햇살이 풀과 나무와 꽃한테 얼마나 고운 숨결이요 빛인가를 새삼스레 느낀다.


  어떤 목숨이든 햇볕을 쬐면서 살아간다. 어떤 목숨이든 물을 마시고 바람을 들이킨다. 어떤 목숨이든 흙에 뿌리를 내린다. 어떤 목숨이든 서로 사랑을 나누고 꿈을 피운다. 사람이란 무엇을 하는 목숨일까. 사람은 햇볕을 어떻게 쬐는가. 사람은 물과 바람과 흙을 어떻게 맞아들이는가. 사람은 사랑과 꿈을 어떻게 나누면서 삶을 짓는가. (4345.10.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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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04 13:53   좋아요 0 | URL
운치 있는 감나무를 보니 가을이 느껴집니다.
성묘하고 오는 길에 보게 되는 풍경 속에 감나무가 있곤 하지요.^^

숲노래 2012-10-05 07:54   좋아요 0 | URL
시골 감나무는
더 따스하게
서로를 헤아리도록 돕는구나 싶어요
 


 가을 들판 책읽기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다녀온다. 두 아이 모두 재채기를 하기에 천천히 달린다. 천천히 달리다가도 곧잘 선다. 곧잘 서서 누런 벼가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논둑길에서 자전거를 멈춘 다음 두 아이를 내린다. 두 아이더러 걷거나 달려서 가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가을 들판 논둑길을 마음 놓고 달린다. 작은아이 콧물이 많이 흘러 얼마 못 달리고 다시 태우고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살짝이나마 가을 들판을 함께 거닐며 달리는 동안 온몸에 가을내음이 스민다.


  벼내음을 맡고 풀노래를 듣는다. 볕내음을 쬐고 하늘노래를 듣는다. 봄이나 여름처럼 들새와 멧새가 숱하게 날아다니지는 않으나, 가을은 가을대로 환하고 따스한 빛살이 곳곳에 찬찬히 스민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없어도 덥지 않은 날이다. 하늘에 살몃살몃 퍼지는 구름조각은 들판 빛깔을 머금으며 조금 노랗다.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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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꾼 ‘싸이’ 독서량 0

 


  노래하는 사람 ‘싸이’는 “독서량 0”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독서량 0”인 사람이 노래꾼 싸이뿐일까 궁금하다. 참 많은 사람들이 “독서량 0”이라고 느낀다. 대통령 뽑는 날이 다가온다 하는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 아니, 책을 읽을 틈을 내기는 할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데에 바쁜 나머지, 스스로 삶과 넋과 꿈을 북돋우는 책을 어느 만큼 읽을는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독서량 0”이 아닌 “독서량 1”이면 어떠할까. “독서량 2”나 “독서량 3”은 어떠한가. 0과 1는 얼마나 다르고, 1와 2은 얼마나 다른가. 차근차근 이어 5과 6은, 9과 10은 얼마나 다를까. 더 이어 생각한다. 열한 권 읽는 사람과 열두 권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르려나. 열두 권과 열세 권, 열세 권과 열네 권, …… 아흔아홉 권과 백 권, …… 구백아흔아홉 권과 천 권, 이렇게 저렇게 읽는 책 숫자는 서로 얼마나 다르다 할까.


  다른 금이 있을까. 다르다 할 대목이 있을까.


  “읽은 책 없음”과 “읽은 책 한 권”이 그리 다르지 않다면, “읽은 책 없음”과 “읽은 책 만 권” 또한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곧, 책은 ‘숫자’로 읽지 않는다. 책은 책으로 읽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읽는다. 사귀거나 만나거나 아는 사람 ‘숫자’가 많대서 동무가 많거나 이웃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귀거나 만나거나 아는 사람이 서로서로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운가를 살펴야 비로소 ‘사람읽기’가 어떠한가를 헤아릴 수 있다.


  어떤 책을 한 권 읽거나 백 권 읽는가를 돌아보아야지 싶다. 저마다 읽은 책을 어떻게 곰삭혔는가를 살펴야지 싶다. 책 한 권 읽은 뒤로 삶과 넋과 꿈이 어떻게 거듭나거나 새롭게 꽃피었는가를 톺아보아야지 싶다. 종이로 된 책을 안 읽었거나 적게 읽었대서 대수롭지 않다. 종이로 된 책을 많이 읽었거나 꾸준히 읽는대서 대단하지 않다.


  삶을 생각할 노릇이라면, 달삯을 얼마 버는가 하는 숫자나 종이책 몇 권 읽었나 하는 숫자에서 홀가분해져야지 싶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대학교 졸업장으로 ‘어느 한 사람 삶이나 넋이나 꿈’을 읽을 수 있거나 살필 수 있거나 가를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대학교 졸업장은 그예 졸업장일 뿐, 이 졸업장이 한 사람을 보여주지 못한다. ‘한 사람이 읽은 책’ 또한 그저 읽은 책일 뿐, 이렁저렁 읽은 책이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밝히지 못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은 모두 덧없다. 여러 가지 좋다거나 훌륭하다거나 멋지다거나 하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좋아지거나 훌륭해지거나 멋져지지 않는다. 스스로 좋게 살아갈 때에 좋을 뿐이요, 스스로 훌륭하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 훌륭하고, 스스로 멋지게 생각하고 꿈꾸며 삶을 일굴 때에 멋지다.


  나는 노래꾼 싸이 님이 어떤 삶길을 걸었는지 모르고, 둘레에 어떤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는지 모른다. 무엇을 얼마나 배웠고, 이녁 동생이나 아이한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 또한 모른다. 그러나, 누가 누구한테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치는 일도 부질없다. 게다가,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친대서 삶을 배우지 못한다. 오직 온몸으로 삶을 보여주면서 느끼도록 할 뿐이다.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아이를 낳아 돌보지 않는다. ‘읽은 책 권수와 가짓수’가 많아야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에 아이들한테 사랑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물려준다. 꿈이 있을 때에 아이들한테 꿈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물려준다. 이렇게 살아가면 넉넉하지 않을까? ‘종이책 독서량 0’이 무슨 대수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메마른 사람들이 딱하지, ‘종이책 읽은 권수가 없’는 사람이 딱하지 않다. (4345.10.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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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토리 줍는 책읽기

 


  9월 2일에 음성 할아버지 생일에 맞추어 나들이를 했고, 9월 28일에 한가위를 앞두고 다시 나들이를 한다. 9월 2일 멧자락을 살피니 도토리가 한창 여물려고 하지만, 푸른 빛이 감돌아 덜 익었다. 한가위 즈음 찾아오면 다 익겠거니 여겼는데, 한가위 즈음 도토리는 거의 모두 떨어졌다. 잘 익었을 뿐 아니라 거의 남김없이 바닥에 떨어져서 흙이랑 하나가 되었다.


  흙하고 한몸으로 섞인 도토리는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어린 참나무로 자랄 테지. 나는 아직 도토리나 잎사귀나 줄기나 나뭇가지를 살피면서, 네가 굴참나무인지 갈참나무인지 졸참나무인지 떡갈나무인지 상수리나무인지 가름하지 못한다. 그저 도토리요 그예 참나무라고만 여긴다. 이름을 옳게 살피지 못한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도토리를 갈무리해서 도토리를 빻고, 도토리를 갈아 도토리묵을 쑤지 않으니까. 내가 몸소 도토리묵을 쑤면서 먹을거리를 마련한다면, 도토리마다 다 다른 맛과 내음을 느낄 테지. 도토리마다 다른 맛과 내음, 여기에 빛깔과 무늬와 모양을 느낀다면, 나는 눈을 감고도 참나무 이름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나무도감이나 열매도감 같은 책을 백 번 천 번 읽거나 외운대서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잎 그림을 백 번 천 번 그려도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도토리를 주워서 먹어야 안다.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그늘을 누리고, 숲에서 나물을 캐야 비로소 안다. 숲사람일 때에 숲을 이루는 나무를 알지, 숲사람이 아니고서 어떻게 도토리를 알거나 참나무를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직 숲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사람 되어 시골자락을 누리면, 나무와 풀과 꽃마다 어떤 이름인가를 알지 못하더라도 가슴을 활짝 열어 온갖 빛깔과 맛과 내음을 듬뿍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모두 반가우며 푸른 빛깔이요 맛이요 내음이로구나 하고 느끼ㅕ 활짝 웃을 수 있다.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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