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소나무 책읽기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나무젓가락처럼 박아 놓은 소나무를 본다. 숲에도 기차역에도 도시 한켠에도, 소나무를 갖다 심는 사람들은 ‘나무심기’ 아닌 ‘나무젓가락 박기’를 한다. 소나무 아래쪽 가지를 모조리 잘라 없앤 다음 맨 위에만 조금 남긴 나무젓가락이 되게 한다.


  소나무는 이렇게 나뭇가지 몽땅 잘리고 솔잎 몇 남지 않아도 살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나뭇가지와 솔잎을 몽땅 잘라 없애야 소나무는 이리 비틀고 저리 뒤틀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용을 쓸까. 사람들이 소나무한테 하는 짓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거나 느낄까. 돈과 겉멋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소나무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한다고만 느끼지 않는다. 여느 사람들조차 이런 소나무가 멋스럽거나 ‘비싸다’고 생각하니, 이런 짓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나무는 언제나 스스로 씨앗을 맺어 스스로 새끼나무를 퍼뜨리는데, 사람들이 애써 억지로 심어서 기르고 돌봐야(관리) 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엉터리라서 엉터리짓을 할밖에 없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슬기로운 길하고 동떨어지기에 슬기롭게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은 헤아리지 않을까. 도시를 만들며 숲을 밀어 없애는 도시사람 마음이기에, 이 마음에 따라 나무를 나무로 여기지 않고 나무젓가락으로 삼는 노릇일까. (4345.9.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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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물려타는 책읽기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가꾸지 않으며 살아가기에 ‘새로운 한국말’이 예쁘면서 슬기롭게 태어나지 못하곤 한다. 새로운 문화나 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피운다면, 이러한 문화와 예술에 걸맞게 ‘새로운 한국말’이 흐드러지게 꽃피울 만큼 새로 태어나야 알맞다. 그렇지만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예쁘거나 슬기롭게 안 하느라, 언제나 서양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새로운 문화나 예술’뿐 아니라 ‘새로운 문명이나 기계’에다가 ‘새로운 학문과 넋과 이야기’를 나타내려고만 한다.


  이를테면, ‘물려주다’에서 테두리를 넓혀 ‘물려읽기’라든지 ‘물려쓰다’라든지 ‘물려타기’라든지 ‘물려하다’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줄 모른다.


  나는 자전거를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내 어버이가 즐겁게 타면서 고이 건사하는 자전거를 내가 물려타고, 내가 물려타면서 즐기고 돌본 자전거를 내 아이가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 자전거나 물려줄 수 없다. 뼈대가 튼튼한 자전거일 때에 물려줄 수 있다. 부품은 열 해 스무 해 지나고 보면 닳거나 바스라져서 갈아야 하곤 한다. 그렇지만 뼈대는 서른 해 쉰 해를 흘러도 그대로 이어간다. 자전거를 손질한다 할 때에는 뼈대를 뺀 부품을 갈거나 손질하지, 뼈대를 손질하는 법이 없다. 튼튼하고 훌륭한 뼈대 하나만 있으면 자전거는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어느 삶에서라도 같은 흐름이 된다고 느낀다. 내가 두 아이를 태우는 자전거수레는 뼈대가 아주 튼튼한 자전거이다. 이 자전거는 그야말로 뼈대만 빼고 모든 부품을 다 갈았다. 다만, 아직 ‘바퀴’는 그대로라 할 텐데, 바퀴살이 부러져서 바퀴살을 갈아 넣은 적이 있다. 바퀴도 퍽 튼튼하기에, 뼈대와 바퀴 두 가지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어가리라 보는데, 바퀴도 어느 때에는 새로 갈아야 할는지 모르는데, 뼈대만큼은 훨씬 오래 건사할 수 있다.


  밑앎과 밑삶이 튼튼하며 훌륭한 줄거리일 때에 책이 되리라 느낀다. 밑앎과 밑삶이 허전하거나 얕을 때에는 ‘가벼운 읽을거리’는 될는지 모르나,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 책은 못 된다고 느낀다.


  나는 날이 갈수록 신문을 안 좋아한다. 신문이란 그야말로 ‘읽을거리 없는 종이뭉치’라고 느낀다. 날마다 뚝딱뚝딱 뒤집는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도 부질없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를 왜 실어야 할까. 누리신문(인터넷신문)이라고 다르지 않다. 누리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하루도 아닌 한나절도 아닌 반나절도 아닌 한 시간조차 값을 하는지 안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고작 하루치 목숨밖에 안 되는 글과 사진과 자료를 실어야 한다면, 신문이 할 몫은 무엇일까. 오려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글을 얼마나 싣는 신문일까. 곧, 책 가운데에는 예쁘게 보살피는 넋으로 책시렁에 꽂고는, 두고두고 물려읽힐 만한 책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나 스스로 열 차례 스무 차례 되읽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물려읽히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새 아이를 낳으면, 새 아이한테까지 기쁘게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그저 바로 오늘 읽어야 한다고 여기는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4345.9.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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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와 집과 삶과 책과

 


  10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1000년이 끄떡없다. 5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500년이 끄떡없다. 1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100년이 끄떡없다. 3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30년이 끄떡없다.


  오늘날 한국에서 집을 짓는 이들은 어떤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을까. 오늘날 한국에는 10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아니, 한국에는 500년은커녕 100년이나 5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만할까. 아니, 한국에는 앞으로 100년이나 500년이나 1000년 뒤를 살아갈 뒷사람이 집을 짓도록 나무를 예쁘게 건사하는 삶을 누리는가.


  1000년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1000년을 읽히는 책이 된다. 100년을 헤아리며 쓰는 글은 100년을 읽히는 책이 된다. 저마다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저마다 다르게 읽히는 책이 된다. (4345.9.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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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꽃 책읽기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발포 바닷가로 가는 길에 꽃을 본다. 길에서 피고 지는 가을꽃이다. 바야흐로 가을에 접어드니, 여느 사람들은 가을날 지는 노랗거나 붉은 가랑잎을 떠올릴까. 그렇지만 이 가을에 길섶이나 풀섶에 예쁘장하게 피고 지는 조그마한 꽃이 많다. 예나 이제나 적잖은 이들은 살살이꽃(코스모스)을 두고 가을을 말하곤 하는데, 관청에서 씨앗을 잔뜩 뿌려 길가에 나풀거리는 살살이꽃이 길에서 길꽃처럼 피기도 하지만, 누가 씨앗을 뿌리지 않았어도 바람에 날리고 들짐승 털에 붙어 옮기며 천천히 자리를 넓히는 들풀이 조그마한 꽃을 피우기도 한다. 관광지라면 관청 공무원이 ‘자활 근로 일꾼’을 일삯 몇 만 원에 부려 코스모스를 뺀 다른 길꽃은 모조리 뽑거나 베지 않았을까. 관광지 아닌 여느 시골이라 온갖 들꽃이 길가에서 흐드러지며 서로 어여쁜 길꽃잔치를 벌인다. 어느 마을 어귀를 보니, 길가를 따라 관청에서 길게 심었음직한 동백나무 둘레로 마을 할머니가 심었음직한 호박이 노랗고 커다란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관청에서 뭘 하지 않아도, 마을은 할머니들이 지켜 주신다니까요. (4345.9.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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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을 입는 책읽기

 


  이른아침에 어머니가 동생하고 마을걷기를 하러 나가니, 큰아이가 저도 데리고 가라며 달려 나가는데, 굳이 한복을 입고 나가려 한다. 걷고 들어와서 입어도 될 테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느끼기에 더 고운 옷을 입고 싶다.


  할머니가 한 벌 사 주고, 마을 이웃 할머니한테서 손주 한복 작아진 것을 한 벌 얻었다. 아이는 이 옷을 명절에만 입는 옷으로 묵히고 싶지 않다. 명절날 신나게 입어 땀으로 옴팡 젖은 옷을 빨아서 널면, 다 마르기 무섭게 큰아이 스스로 걷어서 입는다. 이렇게 달포 가까이 한복입기를 하는데, ‘이제 그 옷은 그만 입고 다른 옷도 좀 입지?’ 하는 마음으로 빨래가 다 마르고 아이가 눈치를 못 챌 적에 슬그머니 종이가방에 담아 옷장 한쪽에 모신다. 아버지는 모르는 척 아뭇소리를 않는다.


  이렇게 해서 아이가 한복을 잊고 한동안 지나가는데, 얼마쯤 지나면 새삼스레 “내 한벅(한복) 어디 있어? 내 예쁜 치마 어디 있어? 할머니가 사 준 내 예쁜 치마 어디 있어? 나 예쁜 치마 입고 싶어.” 하면서 조잘조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듣고도 모르는 척할 수 없기에 옷장에서 종이가방을 꺼내어 아이한테 내민다. “네가 입고 싶다 했으니까, 이제는 스스로 입어 봐.”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를 보다가 새삼스레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든 중국에서든, 또 북녘에서든, 가시내는 으레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사내는 ‘서양 차린옷’을 으레 입지만, 가시내한테는 ‘고운 겨레옷’이라 일컬으며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한다. 오직 남녘에서만 가시내도 사내도 겨레옷이든 한국옷이든 한복이든 입으려 하지 않는다. 워낙 내 나라 옷을 나 스스로 안 입으려 하는 남녘이기에, ‘생활한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운 옷이 나온다.


  그런데, ‘생활한복’이란 무엇일까? 언제부터 한복이 ‘살아가며(생활)’ 입는 옷이 아니라 명절에만 예쁘게 보이라 입는 옷이 되었고, 이 때문에 굳이 ‘살아가며’ 입는다는 한복이 따로 나왔을까?


  그리 멀잖은 옛날, 이 땅 사람들 누구나 아주 마땅하면서 어여쁘게 한복을 입었다. 한겨레 누구나 한복을 입던 지난날, 한겨레가 입던 옷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복’이 아니었으리라 느낀다. 한겨레 바깥에서 살아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바라보기에 ‘한복’이지, 이 땅 사람들로는 그저 ‘옷’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2000년대 오늘날 이 땅 사람들이 입는 ‘여느 옷’이 바로 ‘한복’이다. 한겨레가 오늘 입는 옷이 바로 한복이지, 다른 옷이 한복이 아니다. 이리하여, ‘한옥’도 없다. 한겨레가 살아가는 집은 그저 ‘집’일 뿐 한옥이 될 수 없다. 한겨레가 먹는 밥 또한 ‘한식’이 아니라 ‘밥’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앞으로 천 해가 지나 3000년대가 되면, 3000년대를 살아갈 이 땅 뒷사람은 2000년대 ‘한겨레 옷 문화’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입는 여느 옷이 곧바로 ‘한복’인 셈이다.


  생활한복이란 없다. 한복도 없다. 그저 옷이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는 ‘한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치마저고리’라고 말한다. 옳다. 치마저고리를 입으니 ‘치마저고리’라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도 ‘한복’을 입는다 말할 수 없다. 우리 큰아이도 ‘치마저고리’를 입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 작은아이가 제 옷을 입는다 할 때에는 ‘색동옷’이 될까, 아니면 ‘바지저고리’가 될까. (4345.9.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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