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책읽기

 


  시골집으로 돌아와서 달을 본다. 닷새나 시골집을 떠나 부산 한복판에서 지내며 달 한 조각, 별 한 모금 바라볼 수 없었다. 부산 보수동 꼭대기 집에서든, 부산 연산동 여관에서든, 다시 부산 보수동 여관에서든, 달이나 별을 바라볼 틈바구니가 없을 뿐더러, 길거리와 가게와 자동차 불빛은 달빛과 별빛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꽁꽁 가로막기만 했다. 밤에 밤을 느끼지 못하고, 저녁에 저녁을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는 몸과 마음이 힘들기만 하다.


  비로소 밤을 느끼고 저녁을 헤아린다. 비로소 달을 바라보고 별을 마주한다. 10월 10일에서 10월 11일로 넘어가는 깊은 밤, 마당에 설 때 내 왼편 하늘 멧자락 위로 봉긋 올라온 초승달이 웃는다. 큰아이가 종이에 그리는 웃는 얼굴 입 모양처럼 빙그레 웃는 초승달이로구나 싶다. 고개를 위로 꺾어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쏟아진다.


  기지개를 켠다. 별을 내 가슴에 담는다. 한갓진 시골마을 누렇게 익는 들판 풋풋한 벼내음이 퍼진다.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에서 풀려난 몸이 가뿐하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곯아떨어졌다. 오늘부터 아이들한테 ‘풀만 먹이’고 나도 ‘풀만 먹자’고 생각한다. 도시로 마실을 가면 다른 무엇보다 풀을 먹을 수 없고, 누런쌀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없어 괴롭다. 잇몸이 아프다. 흰쌀밥을 먹으면 밥을 씹는 맛을 못 느끼고, 맵고 짜고 달고 시고 기름진 반찬을 먹으면 입안이 찝찝하다.


  달아, 너는 무얼 먹고 사니. 달아, 너는 누구와 함께 사니. 도시에서는 그나마 별 한 모금 볼 수 없어도 달 한 조각 가끔가끔 구경할 수 있기는 한데, 오늘날 사람들 거의 모두 달빛을 잊으며 지내는 마당에 달은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가려나. (4345.10.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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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꽃 책읽기

 


  부산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온다. 멧꼭대기에 깃든 오래된 아파트에 잠자리를 얻어 여러 날 지낸다. 아이들과 가파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린다. 길바닥은 모두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이다. 흙으로 된 땅을 아직 못 본다. 아이들은 부산으로 마실을 오고 나서 여러 날 흙을 구경하지 못한다. 흙을 못 만지고 흙을 못 보며 흙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하고 동무하지 못한다. 흙이 없으니 흙에서 보금자리를 틀며 먹이를 찾는 들새나 멧새 또한 구경하지 못할 뿐더러, 들새와 멧새 노랫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어디에서나 온통 자동차 소리뿐이다. 가게마다 울려퍼지는 대중노래 소리뿐이다. 텔레비전 소리에다가 수많은 사람들 수다 떠는 소리에다가, 손전화 터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큰아이가 문득 “저기 꽃 있어!” 하고 외친다. 나도 보았다. 아버지인 나는 작은아이를 가슴으로 안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골목꽃을 보았다. 아이도 저 꽃을 보았구나. 몹시 반갑다. 그런데 아이는 참 뜻밖인 말을 한다. “이 꽃은 안 꺾을래요.”


  시골에서는 어디에서나 꽃을 본다. 어디에서나 꽃이 가득가득 무리지어 핀다. 아이는 언제나 꽃을 꺾는다. 꽃을 꺾으면 꽃들도 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 꽃들이 꺾이더라도 흙으로 돌아가 다시 고운 꽃으로 피어나는 줄 마음으로 알까.


  그저 시멘트뿐인 골목동네 계단 가파른 한켠 아주 좁다란 틈바구니에 꽃그릇 몇 놓인다. 이 꽃그릇에서 발그스름한 꽃이 눈부시게 빛난다. 꽃 앞으로 다가선 큰아이는 얼굴을 들이밀고 꽃송이에 코를 박는다. “아버지, 냄새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꽃이에요.”


  나도 네가 좋아. 나도 골목꽃이 좋아. 나도 꽃이 좋아. 나도 흙이랑 하늘이랑 바람이랑 햇살이랑 너희랑 모두 좋아. (4345.10.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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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책읽기

 


  두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마실을 나온다. 길디긴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든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곧 곯아떨어지는데, 막 잠들기 앞서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묻는다. “(바깥에) 무슨 소리야?” 창문 바깥에서 아스라이 온갖 소리가 크고 작게 울린다. 큰아이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큰아이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적 살던 인천 골목집에서는 언제나 자동차 소리와 전철 소리를 들었다. 데시벨이라 하는 소음측정으로 100이 넘어가도록 시끄럽게 들어야 하던 소리인데, 큰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겨 살아가며 이 시끄러운 소리들하고 헤어졌다. 큰아이로서는 두 해 반만에 듣는 소리라고 할까.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야. 우리 사는 시골에서는 풀벌레하고 새들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여기는 부산이라고 하는 되게 큰 도시야. 낮에도 많이 봤잖아. 도시에는 자동차가 아주 많아. 그래서 이렇게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 도시에서는 풀벌레하고 새들 노래하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


  큰아이한테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를 이야기하며 나 스스로 슬프다. 어쩌다 한두 차례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침부터 밤까지, 또 새벽 내내, 잠자는 동안, 온통 자동차 소리를 들어야 하는 도시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동차 소리를 듣고 자동차 모습을 본다. 아이들과 부산으로 마실을 오면서 자동차 때문에 자꾸 아이들한테 빽빽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 볼 일이 아주 적어, 찻길에서든 마당에서든 마을에서든 저희 마음껏 마구 뛰고 구르고 기고 달리고 논다. 찻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와 다르다. 아이들은 거님길에서 달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찻길로 확확 내려서며 논다. 찻길에서는 커다란 버스며 생생 달리는 택시며 무시무시하다. 내가 무시무시하다고 안 느끼면 하나도 안 걱정스러울 수 있지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갑자기 찻길로 뛰어내려와 노는 아이들’을 찬찬히 헤아리지 않는다. 자동차를 모는 어른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 하고, 자동차로 꽉 막힌 도시에서 요모조모 빈틈을 찾아 끼어들기를 하기 일쑤라, 아이들은 이 자동차한테 쉽게 치이고 쉽게 목숨을 잃는다.


  도시로 마실을 오니, 아이들한테 자꾸자꾸 소리만 질러대야 해서 어버이로서 아주 미칠 노릇이다. 내가 미치고 아이들이 미치겠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는 아버지 눈치를 봐야 하고, 아버지가 자꾸 소리를 지르니 자동차들 눈치를 봐야 하고,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마음껏 개구지게 뛰놀지 못하고 만다.


  가게에서도, 골목에서도, 버스나 택시 같은 데에서도,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노래도 부르면서 뛰놀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저 꾹 참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들어야 하고, 때로는 엉덩짝이든 볼기짝이든 찰싹 얻어맞기도 한다. 나는 차마 이 아이들 궁둥짝을 때리지는 못하지만, 이맛살을 찡그리고 소리를 질러대니, 내 마음부터 메말라지고야 만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마음 느긋해지는 길이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책읽기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살피고 좋아하는 길이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책읽기란 무엇일까. 기쁜 웃음으로 함께 마주할 도시살이란 무엇일까. (4345.10.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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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두는 자리 (도서관일기 2012.10.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책을 두는 자리를 스스로 나무를 얻고 시렁을 달아 마련한다면 가장 좋구나 하고 느낀다. 책은 가장 사랑스럽게 얻은 나무로 빚은 종이로 엮고, 가장 고맙게 얻은 나무로 시렁을 꾸며, 가장 빛나는 손길로 읽은 뒤에 사뿐히 얹으면 되겠지.


  올 한글날 맞추어 새로 내놓는 책을 책시렁에 둔다. 사람들한테 곱게 사랑받으면서 고운 이야기 두루 퍼뜨릴 수 있기를 빈다. 아이들은 골마루를 이리저리 마음껏 내달리며 논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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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손짓 책읽기

 


  반찬 삼을 돗나물을 뜯는데, 작은아이가 곁에 붙는다. 옆에서 아버지가 풀을 뜯듯 저도 뜯는다. 그런데 작은아이는 풀을 뿌리까지 뜯는다. 줄기만 살짝 꺾으면 풀이 새로 자라며 언제까지고 더 먹을 수 있지만, 뿌리까지 뜯으면 더는 못 먹는다. 아이야, 그렇게 확 뜯지는 말고 살금살금 잘 뜯으렴. 오늘도 먹고 모레도 먹으려면 예쁘게 잘 뜯으며 고맙다고 말해 주렴.


  뜯은 돗나물을 헹군다. 곤약을 썰어 함께 무친다. 밥상에 올린다. 한창 여러 가지를 먹던 작은아이가 손가락으로 돗나물을 가리킨다. “응.” 아직 ‘엄마’랑 ‘응’이라는 낱말로 모든 생각을 나타내는 작은아이는, 저 돗나물을 먹고 싶다며 “응.” 하고 말한다. 어인 일이니. 네가 손수 뜯은 돗나물이라 먹어 보고 싶니. 좋아. 잘 씹어서 풀맛을 네 혀로 느껴 봐. 하루하루 씩씩하게 자라면서 네 손으로 풀을 보살피고 거두고 밥을 지어서 먹어 봐. 네 손길이 닿은 풀은 한껏 맑게 빛날 테고, 네 손짓으로 지은 밥은 한결 구수하게 맛날 테니까. (4345.10.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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