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숨결을 깨우는 소리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6] 오진태, 《바닷소리》(세명출판사,1981)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바닷소리를 듣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들소리를 듣습니다. 멧골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노상 멧소리를 듣습니다.


  시골사람이라면 시골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니, 시골소리를 듣고 자란 셈입니다. 도시사람이라면 도시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라, 도시소리를 듣고 자란 셈일 테지요.


  바다에는 어떤 소리가 흐를까요. 들판에는 어떤 소리가 감돌까요. 멧골에는 어떤 소리가 떠돌까요. 시골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나요. 도시에서는 어떤 소리에 휩싸여 살아가나요.


  소리가 한 사람을 키웁니다. 내음이 한 사람을 돌봅니다. 빛깔이 한 사람을 북돋웁니다. 무늬가 한 사람을 살찌웁니다. 보고 듣고 겪고 마시고 느끼고 마주한 모든 것이 한 사람 숨결로 깃듭니다.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르거나 맞는 것은 없습니다. 차근차근 흐르고 하나하나 흘러 한 사람 넋으로 이루어집니다.


  1936년에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나 부산 동래구 장전2동에서 살아간다고 하던 오진태 님이 1981년에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세명출판사)를 읽습니다. 부산 한켠에서 조용히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는 그야말로 부산 한자락에서 조용히 읽혔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닷소리를 생각하는 사진을 찍고, 바닷소리를 헤아리는 사진을 읽습니다. “갯가에서 나서 갯가에 살고 있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처럼, 갯가에서 나서 자라며 늘 마주하던 삶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더 구지레하거나 낡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찍지 않습니다. 늘 보던 대로 사진으로 담습니다. 늘 느끼던 대로 사진으로 찍습니다. 늘 마주하고 바라보며 겪던 대로 사진으로 옮깁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듯, 사진쟁이 오진태 님은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 바닷가 바닷소리를 꾸밈없이 사진으로 다시 빚습니다.


  1930년대나 1940년대 바닷가 바닷소리를 1960년대나 1970년대에도 사진기 하나 손에 쥐고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2000년대나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사진책 《바닷소리》는 오래도록 흐르는 바닷내음이나 바닷빛깔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문득 사진책을 덮습니다. 바닷사람이 바닷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는다면, 들사람은 들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하고, 멧사람이 멧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해요. 그러면, 들사람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이나 멧사람 삶자락을 실은 사진책은 우리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수수하거나 투박하면서 즐겁게 누리는 하루를 고이 담는 사진책은 우리 곁에 얼마나 있는가요.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으레 ‘만듦사진(메이킹포토)’으로 흐릅니다. 사진을 만들지 않고서는 ‘사진찍기’를 할 수 없는 듯 여깁니다. 더없이 마땅한 흐름이라 할 텐데,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사진길을 걷기 앞서 어린이집·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만들어진 틀’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했어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우도록 내몰려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에 집어넣고는 다섯 살 어린이나 열 살 어린이일 적에도 서울에 있는 이름난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 바깥에서 홀가분하게 뛰놀도록 풀어놓지 않습니다.


  즐겁게 뛰놀지 못한 아이들이 사진기를 손에 쥔다 해서 ‘삶을 사진으로 빚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그동안 길들여진 대로 ‘만들어진 틀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다시 만드는 얼거리’를 짤 뿐이에요. 사진을 찍는 삶과 사진을 읽는 삶을 누리지 못해요. 자꾸 새로운 예술을 하거나 놀라운 문화를 해야 하는 듯 생각하고 말아요.

 

 

 


  오진태 님은 “이제 여기 몇 점 바다 내음의 조각들을 모아 보았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을 붙이며 사진쟁이 말을 마감합니다. 책끝에 실은 오진태 님 모습은 최민식 님이 찍어 주었습니다. 같은 부산에서 서로 사진으로 만나고 사귀었겠구나 싶습니다. 최민식 님은 오진태 님을 반가운 동생으로 여기고, 오진태 님은 최민식 님을 고마운 형으로 여겼을까요. 서로 다른 사진을 찍지만, 서로 같은 사진길을 걸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를 했을까요. 오진태 님은 1969년에 중앙일보 사진콘테스트 금상을 받고, 1975년에 신동아 초대작품 14점 ‘바다의 삶’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1981년에 《바닷소리》를 내놓은 다음 어떤 사진빛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닷사람이 바닷내음 맡으며 바닷소리를 ‘바다삶’으로 들려주는 사진책 《바닷소리》를 읽으며 바다를 그릴 수 있어 즐겁습니다. 바다를 그리면서 내가 살아가는 터전을 그려 봅니다. 바닷내음을 맡으며 내가 살아가는 시골자락 시골내음은 어떤 기운이나 넋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바닷빛깔을 느끼며 우리 집 두 아이가 누리는 시골빛은 어떤 꿈결이 되어 맛난 밥이 될까 하고 가눕니다.


  숨결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봄에는 제비가 처마 밑으로 찾아와 봄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을에는 처마 밑 둥지를 떠난 제비에 이어 누런 들판을 누비는 뭇새들 노랫소리가 가을소리 되어 찾아듭니다. 시골자락 바람소리에는 별빛이 묻어나고 햇볕이 스밉니다. 시골마을 들소리에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천천히 어립니다. 어린 아이들은 마음껏 마당을 뛰놀고, 집안을 뒹굽니다. 까르르 웃고, 넘어져 울고, 밥먹으며 게걸스럽고, 잠들며 색색 고요합니다. (4345.10.14.해.ㅎㄲㅅㄱ)

 


― 바닷소리 (오진태 사진,세명출판사 펴냄,1981.8.23.)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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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꽃 책읽기

 


  아이들 얼굴 크기만 한 꽃을 본다. 요즈막 어느 시골에나 흔하게 피는 코스모스 언저리에 코스모스하고 똑 닮았으나 잎사귀가 무척 큰 옅은분홍빛 꽃을 본다. 먼 데에 있어도 꽃내음이 물씬 풍긴다. 큰꽃이 맑은 내음 풍기는 들판에서 자라는 벼는 이 꽃내음도 담뿍 담으며 무르익겠지. 꽃내음 맡는 아이는 꽃내음도 함께 먹으며 자란다. 꽃잎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꽃바람도 함께 누리며 자란다. 큰아이가 큰꽃 한 송이를 꺾어 논둑길을 달린다. 머리에 핀을 꽂고 핀 사이에 꽃대를 물리며 꽃순이가 된다. (4345.10.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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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질듯 수수알 책읽기

 


  예전 사람들은 수수를 얼마나 심어서 먹었을까. 논자락이나 밭뙈기 끄트머리에 한 줄로 심은 수수가 나락과 함께 알이 터질듯 익는 모습을 보다가 생각해 본다. 다섯 살 큰아이는 수숫대를 바라보며 “옥수수야?” 하고 묻는다. 옥수숫대가 제 키보다 웃자라는 모습을 으레 보았고, 얼핏 본다면 옥수숫대를 닮았다 싶으니까 이렇게 묻는다. 거꾸로,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수숫대를 보고 수수빗자루를 만지며 살았으면 “야, 저기 수수네?” 하고 물었으리라 느낀다.


  수수가 들어간 밥그릇을 받아먹으며 자랐을 뿐, 내가 손으로 수수알을 심은 일은 없다. 수숫대 한들거리는 모습을 시골에서 살아가며 바라보지만, 이 수숫대를 낫으로 베어 수수알을 훑고 수숫대로 빗자루를 엮는 일은 해 보지 않았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수수빗자루를 엮어 읍내 장마당에 한 자루씩 들고 나와서 팔곤 한다. 흙을 만지는 손으로 수수알을 심고, 수수알 베는 손으로 수수빗자루 엮으며, 수수빗자루 엮는 손으로 가을 열매를 갈무리해서 이듬해 봄에 다시 흙에 한 알 두 알 심는다.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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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에서 도시락 먹는 책읽기

 


  혼자서 먼길 나들이를 다니거나 식구들 다 함께 먼길 마실을 갈 적 첫날에는 집에서 장만한 도시락을 먹는다. 그러나 첫날 낮을 지나고 저녁이 될 때부터는 온통 바깥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배가 고프니 밥을 찾아서 먹는다 할 텐데, 집에서 밥을 차려서 먹을 때처럼 풀을 먹기란 몹시 힘들다. 바깥에서 사다 먹는 밥에는 풀다운 풀이 적기도 하지만, 온통 기름과 양념으로 범벅이 된다. 풀맛이 아닌 기름맛과 양념맛인데다가 매우 맵고 달고 짜기까지 하다. 날풀을 먹고 싶은 마음을 채울 길이 없다.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때에는 아이들과 복닥이느라 이래저래 바쁘고 빠듯하게 먹이고 먹지만, 집밥을 먹으며 속이 거북하거나 더부룩한 적은 없다. 집 바깥으로 나와서 밥을 얻어 먹든 사다 먹든, 속이 느긋하거나 넉넉한 적이 없다.


  나는 ‘풀만 먹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풀이 없는 밥차림은 어쩐지 반갑지 않다. 눈으로 밥차림을 바라볼 때부터 사랑스러운 숨결을 느끼지 못한다. 싱그러운 풀빛으로 빛나는 날풀을 젓가락으로 집거나 손가락으로 들어서 혓바닥에 올려놓으면, 풀포기가 그동안 깃들던 흙땅 내음과 흙기운을 씻은 냇물 내음을 느낀다. 이 풀포기 하나는 어느 시골에서 어느 햇살과 어느 바람을 받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나한테 찾아들어 한몸이 될까, 하고 생각하며 즐겁다.


  그렇지만, 집밥이든 바깥밥이든 나랑 한몸이 되는데, 바깥밥을 밉게 여기거나 싫다 여길 까닭이란 없다. 차려서 건네는 사람들 사랑을 느끼고, 마련해서 내미는 사람들 손길을 느끼면 되잖아.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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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가는 책읽기

 


  밖에서 나흘 지내고서 집으로 돌아간다. 부전역에서 순천역까지 4시간 25분 길인데, 그저 눈을 감으며 쉬고플 뿐이다. 작은아이 안고 달래며 자장노래 불러 재우고서 한참 뒤, 큰아이는 혼자 스티커책 뜯고 놀다 걸상에 엎어져 잠든다. 홀가분해졌다 할 만하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지는 못한다. 온몸이 찌뿌둥하다. 아이들과 함께 다니는 마실이라 종이책을 못 읽는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이 커서 저희 옷을 저희 가방에 챙길 수 있으면 내 가방은 가벼울 수 있고, 아이 붙잡으랴 달래랴 부산하지 않으면서 종이책 즐길 수 있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대로 이렇게 살아가며 책을 생각하고 아이들을 살피며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라 하겠다. (4345.10.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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