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기독교 - 청소년과 예수의 커뮤니케이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1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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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9

 


하느님과 성경은 어디에 있는가
― 10대와 통하는 기독교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3.12.25.

 


  아침이 되면 해가 뜹니다. 해가 뜨면서 온누리에 고운 빛이 드리웁니다. 까맣던 하늘은 차츰 파란 빛깔로 바뀝니다. 구름은 새롭게 하얀 빛이 짙고, 겨울에도 짙푸른 나무는 고운 풀빛을 뽐냅니다. 추운 겨울밤이 저물면서 따사로운 아침이 됩니다.


  겨울철에 아침을 맞이할 적마다 봄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밤이 저물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듯, 추운 겨울이 저물며 시나브로 봄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달려 면소재지나 다른 마을로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올 때면, 겨울에 참 춥구나 하고 느낍니다. 겨울에 바람만 없어도 한결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 겨울에 찬바람이 없으면 어찌 될까 하고 돌아보며 고개를 젓습니다. 들과 숲과 내를 꽁꽁 얼리는 찬바람이 있어 겨울이 겨울답습니다. 겨울이 겨울답기에 풀이 시들고 벌레가 죽습니다. 겨울이 겨울다우니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 있으며, 논밭을 일구는 사람들도 들일을 쉽니다. 겨우내 흙은 포근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 걸쳐 온갖 풀이 잇달아 자라는 흙이지만, 겨울에 이처럼 포근히 쉴 수 있으니 한결 기름지리라 느껴요. 이 땅에 여름과 함께 겨울이 있으니, 이 누리에 봄과 함께 가을이 있으니, 모두들 즐겁게 밥을 먹고 고맙게 삶을 누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여름만 있다고 할 수 있는 터전이라면? 찬바람이 없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여름이 몹시 짧고 추운 바람과 눈으로 오래오래 덮이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른 들이 아닌 메마른 벌이 펼쳐지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 사막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에선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에 부응하듯 신의 모습이 다채롭게 나타나죠. 거의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서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유일신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동을 중시합니다 …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 기독교는 ‘천주교’ 또는 ‘야소교’로 불렸습니다. ‘야소’는 예수의 한자 이름 표현입니다. 그런 가운데 외국 선교사와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은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경외해 온 ‘초월적 대상’이 있다는 사실, 그 대상을 ‘하느님’으로 불러 왔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  (21, 31쪽)


  여섯 살 큰아이가 저녁에 문득 “아버지, 나 그려 주셔요.” 하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밉니다. 빙그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얼른 그림을 그려 달라고 말합니다. 네 웃음짓는 얼굴은 그림보다 사진으로 담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여섯 살 큰아이는 “사진기는 치우고 그림 그려 주셔요.” 하고 덧붙입니다.


  아이 말마따나 사진기를 들려다가 내려놓습니다. 아이 얼굴을 그립니다. 여느 때 얼굴과 달리 웃음을 가득 품은 얼굴은 통통합니다. 어쩜 이렇게 입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웃음을 가득 물 수 있을까 싶은데, 만화책에 흔히 나오는 함박웃음, 하하하 터뜨리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입꼬리만 위로 올린 웃음은 참말 이렇게 짓는 웃음을 그대로 옮겨 그렸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자, 다 그렸어.” 하고 그림을 내밉니다. 아이가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는 이윽고 “자, 아버지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하면서 내 모습을 그려 주겠다고 합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는데 끝날 낌새가 안 보입니다. 얼마나 꼼꼼히 그리는데 그런가 하고 살며시 다가가서 들여다봅니다. 한 번 그렸다가 슥슥 지우고 새로 그립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립니다. 이제 다 그렸나 싶더니, 아버지가 앉은 걸상까지 그리겠다며 “아직 안 됐어요.” 합니다.


  나는 아이한테 그림을 가르친 적 없습니다. 아이더러 이렇게 그리라느니 저렇게 그리라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저 스스로 그리고픈 대로 그립니다. 흉내를 내는 그림이란 없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고, 아이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픈 빛을 그림에 담습니다.


  아이와 함께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이 그림은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그림이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 마음을 그림에 담고, 나는 내 마음을 그림에 담습니다. 마음을 그림에 담아 활짝 웃고 싶습니다. 마음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운 빛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림이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닙니다. 그림이란 오직 그림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느 그저 사진이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요, 작품이나 창작이 아닙니다. 글을 쓸 적에도 언제나 글이에요. 문학이 아닙니다.


.. 핵심은 예수가 그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지요 … 예수가 직접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듯이, 직접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는 제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는 이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걸 믿으라고 거듭 강조하지요 ..  (43, 75, 99쪽)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면서 풀잎이나 나물을 꼭 올립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 집 둘레에서 손쉽게 풀을 얻습니다. 때로는 읍내로 나가서 우리 집 둘레에는 없는 풀을 사다가 먹기도 합니다. 이제 찬바람이 드세니 우리 집 까마중풀은 그예 시들어 새까만 까마중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섣달 둘째 주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까마중꽃 하얗게 맺혔지만, 이제 새로운 까마중꽃은 더 없어요. 푸르딩딩한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끝이고, 이듬해에 새롭게 자라는 까마중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다시 누릴 수 있습니다.


  까마중풀이 시들어 죽을 요즈음, 집 둘레로 갓풀과 유채풀이 돋습니다. 갓풀은 쓴맛이 퍽 세기에 아직 좀처럼 뜯어먹지 못합니다. 유채풀은 쓴맛이 하나도 없어 신나게 뜯어서 밥상에 올립니다. 따로 배추씨를 심으면 겨울에 겨울배추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배추씨를 심지 않아도 들유채를 얻어요.


  봄이 오면 온갖 나물이 곳곳에서 자랍니다. 아니, 온갖 나물이 아닌 온갖 풀이 자라지요. 온갖 풀은 우리한테 나물이 됩니다. 민들레도 나물이고 씀바귀도 나물입니다. 소리쟁이도 나물이고 미나리도 나물입니다. 질경이도 나물이고 환삼덩굴도 나물이에요.


  원추리도 나물로 먹지만, 새봄 감잎과 느티잎도 나물로 먹습니다. 도깨비바늘풀 잎사귀도 나물로 먹고, 피나물이든 젓가락나물이든 갯기름나물이든 모두 즐겁고 반가운 나물입니다.


  다 다른 풀을 뜯으면서 다 다른 풀내음을 맡습니다. 다 다른 풀을 밥상에 올리면서 다 다른 풀빛을 먹습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풀숨입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넋입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한 해 내내 언제나 다른 풀을 뜯어서 먹으며 생각합니다. 이 지구별에는 얼마나 다른 풀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 다른 풀은 어떻게 해서 다 다른 풀이 되었을까요. 어쩜 이렇게 다 다른 풀이 골고루 돋으며 자랄 수 있을까요.


  온갖 풀이 자라듯이 온갖 벌레가 살아갑니다. 온갖 벌레 곁에는 온갖 짐승이 있습니다. 온갖 버섯이 돋고, 온갖 새가 납니다. 온갖 물고기가 살고, 온갖 갯것과 갯풀이 있어요. 사람 또한 온갖 사람이 있어요.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다르고, 고장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달라요. 또, 나라와 겨레마다 사람들 삶빛이 다릅니다.


.. 마침내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참혹한 유혈극이 벌어집니다. 십자군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 성경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서 해석되고 유포되었지요. 더러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전달했고, 심지어 성경에 없는 말까지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 개신교의 모든 교파 각각이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문제는 교파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과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자신만 ‘성경을 믿는 사람들’로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이후 초기 5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 1500만∼20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  (122, 165, 170, 197쪽)


  풀을 먹는 사람은 풀숨으로 살아갑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고기숨으로 살아갑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먹는 대로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우리 몸에 넣는 대로 우리 몸은 새로운 빛이 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란, 햄버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과 다릅니다.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 넋이란, 자가용을 몰거나 펜대를 굴리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시장이나 군수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들 넋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거나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대학입시만 바라보면서 입시공부에 매달리는 푸름이하고, 시골 어버이 일손을 거들며 흙을 만지는 푸름이는 넋이 서로 다릅니다. 대학바라기로 살아가며 새벽부터 밤까지 교실에 갇혀 시험공부만 하는 푸름이하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기도 하고 집일을 거들기도 하는 푸름이는 넋이 사뭇 다릅니다.


  맞벌이를 한다면서 두 어른이 바깥일에 매달리느라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이 짧은 집안과, 아이하고 하루 내내 얼크러지면서 살아가는 집안은 서로 넋이 달라요. 손수 밥을 차리고 옷을 빨며 집살림 꾸리며 아이하고 지내는 어버이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를 맡긴 채 아이 얼굴은 아침과 저녁에만 겨우 보는 어버이는 서로 넋이 달라요.


  어느 한쪽이 더 아름다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슬프거나 안타까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서 살아가더라도 스스로 즐거운 마음빛이 못 된다면 즐겁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요. 어느 쪽에 서서 삶길을 걷더라도 스스로 기쁜 사랑빛이 못 된다면 사랑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 기독교는 단일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기독교가 있는 거죠. 기독교 가운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은 물론, 예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단일한 또는 통일된 책이 아니라 여러 책을 모아 놓은 ‘여러 책들’ 또는 ‘책들’입니다 … 2세기에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로소 그 책들을 묶는 데 나섭니다. 신의 언약과 관련된 모든 책이 묶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신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글들을 ‘엄선’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그 판단을 했느냐입니다 … 〈도마복음〉을 비롯해 탈락되어 폐기된 문서들은 개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신을 만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  (157, 158, 161쪽)


  손석춘 님이 쓴 이야기책 《10대와 통하는 기독교》(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기독교 이야기라니. 푸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푸름이는 온통 대학바라기에 얽매이는데, 이 책에 깃든 이야기를 얼마나 삭히거나 받아들이면서 제 넋을 살찌울 만한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푸름이가 이 책을 맞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책을 읽는대서 예수나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는 않아요. 마음이 있는 푸름이가 이 책을 집어들 테지요. 마음이 있는 어버이과 이녁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겠지요. 마음이 있을 적에는 대학입시지옥에 휘둘리면서 숨가쁘거나 힘들더라도 이 책 하나 가슴에 포옥 안으면서 삶빛과 넋빛을 가꾸겠지요. 푸름이로 지내는 나날에는 미처 못 읽는다 하더라도, 대학입시를 마친 뒤 스무 살 풋풋한 젊은이로 꿈을 키우면서 이 책을 두 손에 살포시 쥘 수 있어요.


.. 루터는 뮌처와 정반대쪽에 섰습니다. ‘강도와 도적 같은 폭동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직접 글을 쓰고 발표합니다. 루터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어겼고, 강도와 도적질로 공공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했으며,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하려고 성경의 복음을 끼워 맞춰 “신을 비방하는 죄”를 범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이어 ‘공권력’을 가진 정부는 농민들의 ‘폭동’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며 “미친개를 죽이듯 목을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라”는 살벌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지요 … 자신이 ‘신의 뜻’을 알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선택’ 또는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 기독교인의 공통적 문제는 교만이고 오마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그런 오만은 다른 사람, 다른 국가의 불행을 불러오지요. 끝내는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  (181, 215∼216쪽)


  서양에서 태어나 온 지구별로 퍼진 천주교와 개신교입니다. 서양사람은 이녁 삶터에 맞게 이녁 종교를 세웠는데, 이녁 삶터를 넓혀 권력과 돈과 이름을 떨치려고 전쟁무기를 끝없이 만들었어요. 전쟁무기로 시골 흙지기를 내리누르거나 괴롭힙니다. 한손으로는 종교개혁을 한다고 나서던 이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시골 흙지기를 깎아내리고 짓밟는 일을 저질렀어요. 한손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외친 종교 우두머리들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돈과 권력과 이름에 끄달리면서 참삶하고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너무 마땅한 노릇 아니랴 싶습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면서 삶을 곱게 빛내는 길이 아니라면, 착하지도 참답지도 않아요.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성공회이든 정교회이든 침례회이든 감리회이든 대순진리회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가 바라보는 하느님이란 다 다를밖에 없어요. 삶터에 따라, 고장에 따라, 날씨와 철에 따라, 흙과 풀과 물에 따라, 하늘과 바람과 숲과 들에 따라, 가슴으로 맞아들이는 숨결이 모두 다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마주합니다. 다 다르게 마주하지만 빛은 하나입니다. 이 빛은 저 높은 하늘에서 드리울 수 있고, 내 마음에서 샘솟아 퍼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드리우는 빛이 나한테 찾아와 내가 아늑하면서 너그러운 삶 될 수 있는 한편, 나 스스로 내 마음속에서 빛 한 줄기 길어올려 내 둘레로 곱게 퍼뜨릴 적에 나를 비롯해 내 이웃과 곁님과 동무 모두 포근하면서 따사로운 삶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지 빛이 하나로 만나야겠지요. 두 가지 빛은 언제 한 줄기 빛으로 어우러져야겠지요.


  사랑은 사랑일 뿐, 전쟁이나 전쟁무기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를 든 하느님은 없습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전쟁무기는 전쟁무기일 뿐입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짓은 죽임일 뿐입니다. 한손에 커다란 예배당을 지었으면, 이들은 커다란 예배당일 뿐입니다. 한손에 엄청난 돈을 쥐었으면, 이들은 엄청난 돈일 뿐입니다. 믿음은 믿음일 때에만 믿음이 되어, 나와 이웃 모두를 살찌웁니다. 사랑은 사랑일 때에만 사랑이 되어, 서로 어깨동무하는 맑은 숨결 됩니다.


  풀빛을 마음으로 담고, 풀내음을 몸으로 담으면서, 풀숨으로 온 넋 살찌울 수 있기를 빌어요. 겨울바람을 마시고 봄바람을 들이켜면서, 이 지구별 어디에서나 함박웃음 퍼지기를 빌어요. 성경이란 책이 아니에요. 성경에 담긴 말씀이란 바로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들 빛입니다. 성경으로 옮긴 말씀이란 곧 사랑스럽게 살아온 사람들 꿈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꿀 적에 성경이 태어나고, 삶을 사랑스레 나눌 적에 성경이 빛납니다. 4346.12.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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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함세웅 신부님과의 대화 <껍데기는 가라>를 쓰신 분의 책이로군요.
함께살기님의 좋은 느낌글에 힘입어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12-27 09:27   좋아요 0 | URL
청소년 눈높이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 눈높이에도 잘 맞춘
참 잘 쓴 책이라고 느꼈어요.

이런 책들을 교회 지도자들이
차근차근 읽으며
생각을 깨우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