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쇄 미정 - 말단 편집자의 하루하루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김연한 옮김 / 그리조아(GRIJOA)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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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8



작은 출판사는 책을 어떻게 짓는가?

― 중쇄미정

 가와사키 쇼헤이 글·그림

 김연한 옮김

 그리조아 펴냄, 2016.12.12. 9900원



  자그마한 출판사가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한두 사람이 일하면서 책을 짓는 출판사가 차츰 늘어납니다.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선인세로 치르고 온갖 곳에 광고를 수없이 하면서 책을 수십만 권씩 파는 커다란 출판사도 있지만, ‘책을 판 만큼’만 글쓴이한테 글삯을 치르고 광고 한 번 안 하면서 책손을 찾는 작은 출판사도 있습니다.


  《중쇄를 찍자》라는 만화책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만화책은 일본에서 연속극으로도 나왔다고 해요. 어느 ‘대형 만화책 출판사’에 들어간 새내기 편집자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만화책(중쇄를 찍자)은 ‘책마을 속내’를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출판사 이야기와 편집자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준다고 합니다. 다만 《중쇄를 찍자》는 ‘커다란 출판사가 판을 키워서 돌아가는 흐름’이 고갱이입니다. 커다란 출판사나 잡지사 얼거리를 그 만화책이 아기자기하게 다룬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작은 출판사에서 작게 책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하고는 사뭇 동떨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이에 작은 출판사에서 작게 책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가 조그맣게 만화책 한 권으로 나옵니다. 바로 《중쇄미정》(그리조아,2016)입니다.



“너, 무슨 생각 하면서 이 책을 편집했어?”“오로지 일정에 맞추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럼 OK. 보내.” (20∼21쪽)


“회사에서 잘까? 이 책 다 끝나면 목욕하러 가야지.” 야근을 하든 회사에서 잠을 자든 야근수당은 보통 안 나온다. 마감 직전에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은 편집자에겐 흔한 일상이다. (23쪽)



  만화책 《중쇄미정》을 그린 일본사람 가와사키 쇼헤이 님은 작은 출판사 편집자 일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이는 《중쇄를 찍자》라는 만화책을 좋아하며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는데, 이 만화책에 못 담은 작은 출판사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중쇄미정》을 그렸다고 해요. 그래서 책이름도 ‘중쇄미정’입니다.


  2쇄나 3쇄나 4쇄를 찍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다는 ‘중쇄미정’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책을 꾸준히 엮어서 펴내려 합니다.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글쓴이를 만나서 잘 팔리는 책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만지고 종이를 고르며 책 한 권 묶습니다.



“오자 없는 책은 없어. 오자는 책의 꽃이야. 그러니 마음에 담지 마.” (29쪽)


“유능한 편집자란 게 뭔데?” “중쇄를 팍팍 찍는 책을 편집하는…….” “술 한잔 하러 가자. …… 중쇄를 못 찍는 책은 나쁜 책일까?” “한 잔 더 주세요.” “중쇄를 찍고 돈을 벌면, 그게 뭐지? 만 명을 위한 책을 편집하면 천 명을 버리게 돼. 그럼, 그 천 명은 대체 어떻게 책을 즐겨야 할까? 만 명 안에 들어가야 할까? 만 명과 같은 취향을 가지라고?” (38∼40쪽)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큰 출판사처럼 책을 잔뜩 파는 일을 못 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책을 못 팔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큰 출판사하고 작은 출판사에서는 무엇보다 한 가지가 달라요. 큰 출판사는 ‘일하는 사람’이 많고 ‘매출액’이 큽니다. 큰 출판사에서는 한 해 동안 1쇄를 판다든지, 여러 해에 걸쳐 1쇄를 파는 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큰 출판사에서는 이런 책은 쳐다보지 않아요.


  작은 출판사에서는 한 해에 1쇄를 찍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습니다.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팔림새를 안 살피지는 않으나, ‘아주 많지 않은 독자’라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으로 책을 펴내요. 한 해에 1쇄씩 열 해 동안 팔면 열 해에 걸쳐 10쇄를 찍으면서 ‘독자를 꾸준히 늘려’ 주는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어요.


  큰 출판사에서는 ‘매출이 떨어지는 책’은 이내 절판이나 품절이 됩니다. 다른 책을 얼른 찍어서 불티나게 팔려는 얼거리예요. 큰 출판사는 도서목록만 해도 두툼한 책입니다. 큰 출판사 편집자는 ‘편집자 스스로 엮은 책’이 아닌 ‘같은 출판사 다른 편집자가 엮은 책’을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큰 출판사에서 그동안 펴낸 책’을 읽을 틈조차 없어요. 게다가 너무 많아요. 이러다 보니 큰 출판사에서는 ‘그동안 큰 출판사에서 펴낸 모든 책을 독자한테 알리면서 팔 수 있는 얼거리’가 없습니다.



“이 책에 독자는 있어?” “있습니다. 제가 독자입니다. 팔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에요. 제가 읽고 싶습니다.” “좋아, 하자.” (55∼56쪽)


“간이 부었구나.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해 주마.” “해 보시지. 전부 직거래로 돌리거나 아마존에서 팔 거야.” “그럼, 돗토리 현의 별모래 북스에 너희 책 배본 안 해도 되는 거지?” “거래처 바꾸라고 할 거야.” (68쪽)



  작은 출판사에서 도서목록을 꾸린다면 작은 종이 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쉰 가지나 백 가지 책을 냈어도 종이 몇 장이면 넉넉합니다. 작은 출판사에서는 이곳에서 내는 모든 책을 품습니다. 어느 만큼 팔아 보다가 안 팔린다 싶으면 절판이나 품절로 돌리지 않아요. 머잖아 ‘독자가 이 책에 깃든 값어치와 이야기’를 알아보리라 하는 믿음으로 고이 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은 출판사는 ‘책 한 권을 고이 품으려는 손길’로 책을 지어요. 이른바 ‘밀어내기’ 책을 내지 않는 작은 출판사입니다. 매출 크기를 늘릴 생각으로는 책을 내지 않는 작은 출판사예요. 모든 책을 우리 아이로 여기면서 알뜰살뜰 여미는 작은 출판사이지요.


  그렇다고 큰 출판사가 ‘모든 책을 밀어내기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출판사는 너무 많은 책을 너무 자주 내놓아야 하는 얼거리이다 보니, 큰 출판사에서 낸 책들이 골고루 알려지기 어려워요. 큰 출판사에서는 ‘대표 도서’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낸 책도 새로 낼 책도 너무 많거든요. 이와 달리 작은 출판사는 ‘대표 도서’를 두지 않고 ‘모든 책이 저마다 사랑스럽다’고 하는 이야기를 독자한테 들려주려고 합니다.



“저기 말야, 믿고 기다리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믿는 데는 애정이 필요해. 애정이 없으면 상대방은 네 믿음을 받아주지 않아.” (90쪽)


“뭐, 쓰긴 하겠다만, 자네는 정말 내 원고를 읽고 싶은가?”“네? 읽는 건 독자입니다. 선생님은 독자를 위해 쓰시는 거예요.” (111쪽)


“소제목을 멋지게 단다고 별점 하나 더 주지 않아. 무엇보다 소제목이란 건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일 뿐이야. 비위 맞춰서 키운 독해력은 결국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해. 편집자가 그런 걸로 애써 봤자 독자는 미아가 될 뿐이야.” (127쪽)



  만화책 《중쇄미정》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와 영업자와 관리자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책을 지으려 하는가를 익살을 살짝 보태어 들려주려 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들뜨지 않게, 그렇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또 너무 어둡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앞날을 알 길이 없지만, 3쇄나 4쇄는커녕 2쇄를 찍을 수 있는지조차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는 ‘중쇄미정’이지만, 책을 아끼고 싶은 숨결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큰 출판사는 ‘공장’이에요. 같은 물건(책)을 더 많이 찍어내어 더 많이 팔아서 회사(커다란 몸집)를 버티어야 하는 얼거리입니다. 작은 출판사는 ‘수공예’예요. 같은 물건(책)을 더 많거나 빠르게 찍어낼 수 없는 얼거리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좋아할 책을 다 다른 손길로 빚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살림입니다.


  사회 한쪽에 커다란 공장이 있으면, 마을 한쪽에 작은 지음방(공방)이 있을 만합니다. 꼭 높다란 아파트만 올라서야 하지 않아요. 마당이 있고 텃밭을 두는 자그마한 골목집을 지을 수 있어요. 만화책 《중쇄미정》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마을마다 다 다르’고, ‘마을에 사는 사람도 다 다르’다고 하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비록 팔림새가 대단하지 않고, 언론에서 눈여겨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 이쁜 책이로구나’ 하고 사람들이 느낄 만한 이야기가 흐른다면, 이러한 책을 짓는 작은 출판사가 도시와 시골 곳곳에 상냥하게 깃들 수 있으면 우리 삶자리는 한결 너르고 넉넉하며 아름다울 만하지 싶습니다.


  만화책 《중쇄미정》이 2쇄를 찍고 3쇄를 찍으면서 이 작은 이야기에 서린 사랑이 곱게 씨앗을 퍼뜨릴 수 있기를 빕니다. 2017.1.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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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홍철의 책을 읽다가 작은 출판사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작은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는데, 이 만화 참 인상적이네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 다르게 좋아할 책을 만들어내는 것... ^^

숲노래 2017-01-04 17:54   좋아요 0 | URL
몇몇 유명작가를 키우고 홍보해서 수십만 수백만 베스트셀러를 키우는 책마을 아닌, 다양성과 개성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작가로 태어나서 더 너르고 깊은 이야기를 골고루 펼치는 길이라고 하는 작은 출판이 될 때에 사회도 문화도 달라질 만하리라 생각해요. 재미난 만화책이었어요 ^^
 
백귀야행 3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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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5



귀신한테도 마음이 있으니

― 백귀야행 3

 이마 이치코 글·그림

 강경원 옮김

 시공사 펴냄, 1999.3.15. 5000원



  오늘날 아파트에는 ‘지킴이’를 안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늘날 아파트에는 ‘지킴이’를 둘 자리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이든 집이나 마을에는 ‘사람’뿐 아니라 ‘사람 아닌 다른 넋’이 함께 있다고 여겼어요. 한겨레는 ‘사람 아닌 다른 넋’ 가운데 사람을 보살핀다는 ‘지킴이’를 헤아렸고, 집이나 마을 곳곳에 ‘사람 아닌 다른 넋’을 기리거나 모시거나 섬기거나 아끼는 ‘무언가’를 두었어요. 이러면서 먹을거리를 조금씩 덜어서 함께 나누었고요.


  지난날 한겨레를 비롯해서 지구별 여러 겨레는 다 다른 모습과 몸짓으로 ‘사람 아닌 다른 넋’을 기리거나 모셨어요. 어느 모로는 두려워하기도 했고, 어느 모로는 포근히 여기기도 했어요. 어느 모로는 깍듯이 생각하기도 했고, 어느 모로는 살가운 동무나 이웃으로 삼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면 짚과 풀과 나무와 돌로 지은 한겨레 옛집에는 개구리도 지네도 풀벌레도 거미도 개미도 같이 살아요. 이뿐인가요. 서까래에는 참새 둥지도 있고, 처마 밑에는 제비 둥지도 있지요. 더구나 구렁이까지 한집에서 살고요. 흙에는 지렁이랑 두더지가 함께 살고, 수많은 풀벌레랑 딱정벌레가 집이며 마을에 함께 있어요. 여기에 온갖 새가 함께 살지요.



“깜짝 놀랄 테니 보러 와. 사실은 어제 저녁 우리 집 정원에 갑자기 …… 연못이 생겼다고 친구한테 전화했는데, 어떻게 하룻밤만에 없어진 거야?” (52쪽)


“사실은 우리들, 이 집에서 굉장히 외롭거든요. 좀 제멋대로긴 하지만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당신이나 후유키 같으면 좋을 텐데.” (75쪽)


‘도대체 수호신이란 뭘까? 그 집은 (수호신이던) 그녀들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어.’ (95쪽)



  이마 이치코 님 만화책 《백귀야행》 셋째 권을 읽으며 이 많은 ‘다른 넋’을 하나하나 그려 봅니다. 이 만화책에는 “온갖 귀신(백귀)”이 다 나오는데, 이 “온갖 귀신”은 그야말로 ‘저승’에서 살다가 ‘이승으로 와서 사람하고 함께 사는’ 요괴나 마물이 있다고 해요.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하고, 사람을 돕고 싶은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하며,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해요. 그리고 이승에서 목숨이 다했으나 미처 저승으로 건너가지 못한 채 ‘몸 없는 넋으로만 이승에 남아’서 넋씻이를 받아야 하는 “죽은 사람”도 있대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어느새 이런 곳에 문이.” “할머님, 여기에는 옛날부터 문이 있었어요. 다들 보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전 이 집에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사람들은 진짜로 있었던 거예요.” (100쪽)


‘아버님께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건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그녀들을 보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통하기만 한다면, 자식을 낳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작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내년 봄에는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에요.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아내에게 호적이 없기 때문에…….’ (116쪽)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는 무 자르듯이 섣불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은 깜깜한 곳을 무서워해요. 밤을 무서워한다든지 사람 없는 깊은 숲을 무서워하기도 해요. 아무도 없는 지하실이나 창고를 무서워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왜 무서워해야 할까요? 혼자이니까? 귀신이 있으니까? 아니면 그냥? 귀신이 있다면 귀신은 왜 무서워해야 할까요? 겉모습이 여느 사람하고 달라서 무서워해야 할까요? 무시무시하거나 끔찍해 보여서 무서워해야 할까요?


  영화 〈식스 센스〉를 보면 ‘죽은 사람’이 나오고,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가 나와요.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는 ‘죽은 사람’ 때문에 늘 무서워서 떨어요. 더욱이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를 제대로 헤아리면서 이 아이를 돕는 어른이 없어요. 왜냐하면 거의 모든 어른은 ‘죽은 사람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저 애는 사물을 뚜렷이 가려내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덕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187쪽)


“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지? 분별없는 말을 입에 올리면, 그대로 된다잖아.” (203쪽)



  만화책 《백귀야행》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고등학생 남학생 리쓰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을 보면서 괴롭습니다. 게다가 학교나 마을이나 집에서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는 사람이 없어요. 할아버지는 늘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지만 일찍 돌아가셨어요. 주인공 남학생은 어릴 적부터 학교 공부는 도무지 할 수 없는데다가 집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일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을 느끼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만화책에서 다른 주인공인 여대생 사촌 즈카사도 리쓰처럼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봅니다. 그러나 즈카사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냥 말을 걸거나 그냥 지나칩니다. 그래서 다른 주인공인 리쓰네 사촌 누나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은데, 때때로 소스라치게 놀라지요.



“잘 보라구. 이건 즈키사 누나 때문에 생긴 거야. 다 누나가 불러들인 거란 말야! 이런 것들은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엄마가 돌아가실 리 없잖아! 즈카사 누나의 불안과 공포가 저급의 요마들을 불러모은 거야. 영능력이 어중간하기 때문에 대처하는 게 미숙해서 그래.” (215쪽)



  만화책에 나오는 고등학교 남학생은 학교 공부는 도무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동무를 사귀지도 못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귀신을 볼 줄 아는’ 이 아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놀리거나 괴롭힐 뿐입니다. 귀신은 못 보고 ‘사람만 보는’ 다른 아이들은 막상 ‘사람을 보기’는 하지만, 저희하고 ‘똑같은 사람’인 리쓰라고 하는 아이를 따사로운 마음으로 맞아들이지 않아요.


  학교에 동무는 없으나 사촌 누나가 거의 동무와 같습니다. 두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리쓰라는 아이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으려 합니다. 귀신을 보기만 할 뿐 아니라 ‘귀신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고서 넋씻이를 도와주지요.



“에미의 소행을 그만두게 하고자 잠자리를 바꾸고 숨어 있는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죽여버린 겁니다. 저는 슬픔에 못 이겨 산속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이 한 일조차 잊고 있었나 봅니다. 단지 슬프고 미련이 남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었던 거죠. 왜 이렇게 중요한 걸 잊고 있었을까. 제가 기억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아이는 다시 한 번 저를 찾아온 거예요. 미안, 미안하다, 용서해 주렴. 혼자서 쓸쓸했지. 같이 가자꾸나. 용서해 주렴.” (222∼223쪽)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을 못 읽으면 서로 동무나 이웃이 못 됩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된다면, 우리가 서로 마음을 읽고 나누며 아낀다는 뜻이에요. 귀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또는 귀신을 볼 줄 알거나 볼 줄 모르거나, 이런 여러 가지는 대수롭지 않아요. 서로 마음을 볼 줄 아느냐가 대수롭지 싶어요. 서로 마음을 바라보면서 아낄 줄 아느냐를 살펴야지 싶어요.


  만화책 《백귀야행》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 이야기를 엮으면서 이 자리에 ‘마음’을 가만히 얹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어떤 마음인가를 돌아보도록 넌지시 이끌어 줍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만화책에 나오는 리쓰네 어머니나 할머니는 리쓰가 어릴 적에 ‘산수 시험 5점’을 받아도 걱정하지 않아요. 시험종이에 이름을 썼으니 잘했다고 여겨요. 공부가 시원치 않더라도 마음을 쓰지 않아요. 아이가 튼튼하면서 씩씩하게 잘 자라는 데에만 마음을 써요. 아이가 스스로 꿈을 찾고 제 길을 생각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여요.


  어쩌면 바로 이런 마음이 흐르기 때문에 ‘귀신을 보든 말든’ 또 ‘귀신을 믿든 말든’,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가 아름다운 마음에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차츰차츰 거듭날 수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2016.12.3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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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2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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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64



아직 이승을 못 떠나는 사람들

― 백귀야행 2

 이마 이치코 글·그림

 강경원 옮김

 시공사 펴냄, 1999.3.15. 5000원



  눈에 보이기에 믿고, 눈에 안 보이기에 안 믿곤 합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기에 믿고, 손으로 만질 수 없기에 안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기도 해요. 우리한테 목숨이 있기에 오늘도 몸을 움직이며 살지만, 정작 목숨을 눈으로 본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백귀야행》(시공사,1999)은 여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넋이나 숨결을 언제나 알아보는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 만화책입니다. 이 둘은 할아버지한테서 ‘다른 넋을 보는 눈’을 물려받았다고 할 만한데, 어쩌면 할아버지도 다른 어버이한테서 ‘다른 넋을 보는 눈’을 물려받았을는지 몰라요.



놀면서 술래를 하다가 죽은 아이는, 죽은 후에도 술래가 된 채 헤매이는 걸까. (52쪽)


“이봐, 잠깐만. 이미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난 어쩌면 오래전에 죽은 게 아니었을까. 옛날 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을 약으로 살려 놓았던 것뿐이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집안의 도움이 되게 해 주고자, ‘목주님’께서 힘을 빌려주신 게 아니었을까.” (118∼119쪽)



  때때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고 하지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믿기 어려울 테지만, 우리가 눈으로 모두 볼 수 있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란 없으리라 느껴요. 우리가 어느 일을 놓고 놀랍다고 여긴다면 우리 스스로 그 일을 못 해낸다든지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얼마든지 한다면 놀랄 까닭이 없어요. 우리 스스로 그 모습을 늘 지켜보거나 바라본다면 딱히 놀랍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다.



“식인귀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이야. 성불하지 못하고 계속 여기에 있었겠지. 이 정원은 살아 있어. 틀림없이 솜씨가 좋은 직공이 온힘을 기울여 만들었겠지. 너무 잘 만드는 바람에 생명이 깃들게 되어 버린 거지.” (146∼147쪽)


‘백로가 말을 ……. 참, 전생에는 사람이었지.’ (201쪽)



  새도 얼마든지 말을 합니다. 입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말을 해요. 이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이제 못 듣는 사람이 있어요. 도깨비를 볼 뿐 아니라 도깨비하고 말을 섞거나 함께 노는 사람이 있어요. 이와 달리 도깨비를 못 볼 뿐 아니라, 도깨비하고 못 어울리고 못 노는 사람이 있지요.


  만화책 《백귀야행》은 바로 이 대목을 살며시 건드립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넋’을 웬만한 사람들은 도무지 못 알아채지만, 한 아이는 알아봐요. 한 아이는 알아볼 뿐 아니라 ‘죽었으나 무언가 아쉬워서 떠나지 못하는 넋’한테 말을 걸면서 이 아쉬움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한 아이는 다른 넋을 알아보더라도 무서워하거나 꺼리려고 합니다.



“그런 남자의 아이, 낳고 싶지 않아. 아빠를 닮아 형편없는 아이일 거야.” “누님, 그런 말씀 그만하세요. 그 애는 제 조카이기도 한걸요.” “료야. 울지 마. 나만 괴로운 줄 알았는데.” (215쪽)


“혼인식날 밤에 신랑이 싫다고 연못에 뛰어든 여자를 아내로 맞아 줄까?” “안 받아들여 주면 집으로 들어오시면 되잖아요. 빚은 일해서 갚으면 되구요! 그래도 만일, 받아들여 준다면, 그 사람은 누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예요.” (216쪽)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지 싶어요. ‘다른 넋’을 코앞에 마주할 적에 보이는 두 가지 몸짓처럼, 다른 넋이 아닌 ‘뻔히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코앞에 마주할 적에도 두 가지 몸짓은 아닐까요? 한 가지는 차분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함께 실마리를 풀려는 이웃으로 바라보아요. 다른 한 가지는 못 본 척하거나 등을 돌려요.


  볼 수 없기에 안 믿기도 하지만, 막상 볼 수 있어도 안 믿곤 합니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둘레에 있기에 찬찬히 바라보거나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둘레에 많아도 금을 긋거나 고개를 저으면서 손사래치기만 하기도 해요.


  아직 이승을 못 떠나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풀고 싶습니다. 이승을 떠나는 사람들은 홀가분하게 하늘을 날면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이승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요? 이승을 떠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래,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이것이었는걸!’ 하고 깨달을까요, 아니면 어리거나 젊은 날부터 늘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꿈을 이루는 삶을 이승에서 보낼까요? 2016.12.27.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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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숟가락 11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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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3



평화로운 살림을 바라보는 두 눈길

― 은빛 숟가락 11

 오자와 마리 글

 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 2016.10.28. 5000원



  오자와 마리 님은 이녁 만화에서 늘 ‘평화로운 살림’으로 하루를 짓는 사람들 이야기를 그립니다. 어쩜 이렇게 착학거나 참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만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요. 다툼도 미움도 시샘도 마음에 안 담는 ‘평화로운 주인공’한테는 마치 그늘이나 그림자가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늘이나 그림자처럼 어두운 구석이 없기 때문에 평화로울까요? 평화롭기 때문에 그늘이나 그림자처럼 어두운 구석이 없다고 여길 만할까요? 아니면 다른 모습이나 까닭이 있을까요?



“앗, 아이스크림을 집에서 만들 수 있어?” “응, 디저트로 만들어 볼까?” “응.” (5쪽)


“넌 정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구나.” “응. 엄마도 아이스크림 좋아하니까 분명 엄마를 닮은 거야.” (8쪽)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6) 열한째 권 첫머리는 ‘집에서 빚는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스크림이라면 으레 바깥에서 사다가 먹는 줄로만 아는 ‘아버지가 다른 어린 동생’한테 주인공 리츠는 ‘집에서 한결 재미나며 맛나게 아이스크림을 빚을’ 수 있다고 찬찬히 알려줍니다. 몸소 부엌일을 하고, 이때에 어린 동생이 곁에서 거들도록 이끌어요. ‘입양아’였던 주인공 리츠는 어릴 적부터 ‘낳은 어머니·아버지’ 없이 자랐고, 뒤늦게 ‘낳은 어머니’를 알았어요. 그렇지만 주인공 리츠는 이 대목에서 딱히 흔들리지 않아요. ‘두 어머니’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으며, ‘기른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면서 ‘기른 두 어버이가 그동안 베푼 사랑’을 즐거우면서도 고맙게 헤아려요.


  이러다가 뒤늦게 안 ‘아버지 다른 어린 동생’이 ‘낳은 어머니’하고 지내는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고작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 어린 동생한테 도시락을 싸서 꼬박꼬박 챙겨 주었고, ‘집에서 밥을 지어 여럿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누리는 기쁨’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그렇다 해도 별로 상관없어. 두근거림 없는 연애도 재미있게 그리면 그만이야. 어떤 소재라도 재미있게 그린다면 말이지. 그게 안 되면 경험치를 올리는 수밖에 없어. 만화는 궁극적 엔터테인먼트거든. 그야말로 압도적 불운이나 불행을 경험하면 강해지지. 그런 환경히 제작 의욕으로도 연결되고 말야. 캐릭터도 좀더 깊이가 있었으면 싶네.” ‘살아온 방식도 인격도 전부 부정당한 느낌. 게다가 내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안 했어. 난 재능이 없는 걸까?’ (18∼19쪽)



  겉으로만 본다면 주인공 리츠는 아주 눈부실 만해요. 키가 크고 잘생긴데다가 똑똑하다고 해요. 그러나 리츠는 이런 겉모습을 따지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리츠로서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곁에 두면서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숨결을 한결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돌보고 싶은 꿈을 생각합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기른 어머니’가 몸져누우니 학교가 아닌 집을 고르던 리츠예요. 대학교란 대수롭지 않으며, 정 가야 한다면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 다른 두 동생’을 보살피고 집살림을 꾸리다가 나중에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여겨요. 남들은 리츠한테서 겉모습을 보려 하지만, 리츠는 스스로 속마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리츠는 ‘남들이 수수하게 보는 아가씨’가 리츠한테는 ‘수수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껴요. 리츠는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바라보면서 읽으려는 사람이기에, ‘눈을 감고 마음으로 따스하게 다가오는’ 사람들 숨결을 즐거우면서 반갑게 맞이하지요.



‘가정환경은 평화롭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 남친은 미남에 다정하다. 난 별로 특별한 것 없는 수수한 여자지만, 만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미카리든 누구에게든 지지 않아.’ (29쪽)


“정말이네. 리츠가 입상했어. 너, 영화감독이 목표야?” “아니, 카오루 부장님이 멋대로 응모했어. 그냥 남매싸움을 찍었을 뿐인데, 카나데가 들떴지 뭐야.” (45쪽)



  그런데 말이에요, 주인공 리츠는 이런 마음이나 몸짓이어도, 리츠를 둘러싼 사람들은 아무래도 겉모습에 휘둘립니다. 리츠를 남자친구로 둔 아가씨는 ‘너무 수수하고 너무 평화로우며 너무 따스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이녁이 그리는 만화가 너무 밋밋하면서 재미가 없구나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마치 ‘타고난 불행을 잔뜩 짊어져야’ 재미나면서 톡톡 튀거나 새롭거나 멋진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아요.



‘행복한 얼굴을 보고 나도 행복해진다. ‘뭔가 괴로운 일이 있어도 맛있는 밥 먹으면 우선은 기운이 나잖아.’ 그런 말을 해 준 그 애를 정말 좋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제대로 앞을 보고 걷자.’ (98쪽)



  만화책 《은빛 숟가락》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 곁에서 어렵잖이 마주칠 수 있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대단하거나 남다른 이들이 《은빛 숟가락》에 나오지 않아요. 아주 수수하거나 투박한 사람들이 이 만화책에 나옵니다. 이들은 때때로 즐겁게 제 길을 걷지만, 때때로 스스로 슬픔에 사로잡혀서 엉거주춤하거나 맴돌거나 수렁에 빠지곤 합니다.


  주인공 리츠는 ‘주인공답다’기보다 ‘리츠다운’ 마음으로 아픔을 툭툭 털어냅니다. 먼저, 제 앞에 놓인 모든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받아들입니다. 이러고 나서, 이 길이 가시밭길이든 수렁길이든 진흙길이든 대수로이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녁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고서 나아가자고 생각해요. 아프다고 아픔에 젖지 않고 슬프다고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늘 새롭게 맛난 밥을 차려 주는 마음처럼, 기쁠 적에는 기쁨을 나누도록 밥을 짓고 슬플 적에는 슬픔을 달래도록 밥을 짓는 마음마냥, 스스로 차분하면서 고요하게 마음속을 바라보면서 숟가락을 손에 쥡니다.


  평화로운 살림은 평화에서 태어나요. 평화로운 살림에서는 평화로운 이야기가 흘러요. 평화로운 살림이기에 평화로운 사랑을 그릴 만해요. 리츠를 좋아하는 아가씨가 이 대목을 곧 깨달으면서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모든 만화는 팽팽한 다툼이나 오르락내리락 고빗사위가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거나 악을 쓰거나 눈물을 쥐어짜거나 웃음이 마구 터져야만 하지도 않습니다. 겨울에 동백꽃이 피고 유채꽃이 피듯이, 새봄에 꽃샘바람을 맞으며 맑은 꽃이 피듯이, 가을에 나락이 익듯이, 드센 바람이 불어도 구름은 파란 하늘을 흐르듯이, 한겨울에도 해님이 눈부시듯이, 평화로운 살림에서는 오직 평화로운 살림이기에 그려서 보일 수 있는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있어요. 이 아름다움하고 사랑스러움을 가슴으로 넉넉히 안아 보셔요. 2016.12.2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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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플
우니타 유미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62



빈틈 많은 두 사람이 틈새로 엿본 마음

― 스토커플

 우니타 유미 글·그림

 김완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08.12.26. 8000원



  우니타 유미 님이 빚은 만화책 《스토커플》(애니북스,2008)은 마치 뒤를 몰래 캐거나 살피는 듯한 두 사람이 나와서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처음에는 ‘틈새쟁이’라고 할 만큼 틈새를 들여다보며 놀기를 좋아하는 사내가 나옵니다. 이녁은 남이 무어라 하든 말든 건물과 건물이 맞닿으려고 하면서 맞닿지 않아 생긴 조그마한 틈새에 고개를 들이밀고 쳐다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나 얼결에 드러나는 속내를 틈새 엿보기로 즐긴다고 할까요.



틈새를 지나가는 약 1초 정도의 순간, 나는 주시한다 늘씬하고 귀여운 애가 천천히 걷고 있는지, 뚱뚱하고 귀여운 애가 고속이동하고 있는지. 틈새로밖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13∼14쪽)


가만 생각해 보면 이쪽에서 엿볼 수 있다는 건 저쪽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소리다. 틈새란 그런 것. 그걸 깨닫지 못한 내가 멍청했던 거지. (24쪽)



  틈새쟁이 사내는 어느 날 이웃집 아가씨를 봅니다. 여느 날처럼 그냥 창가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는데, 문득 이웃집 커튼 사이로 속옷 차림 아가씨가 움직이는 모습을 봅니다.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었으나, 틈새쟁이 사내는 짧은 동안 스쳐서 지나가는 이웃집 아가씨를 엿보는 재미를 새롭게 붙였고, 날마다 엿볼 수는 없어도 이렇게 엿볼 수 있는 즐거움을 가슴속에 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웃집 아가씨도 건너편 사내를 커튼 틈새로 엿보아요. 게다가 이웃집 아가씨는 그냥 엿보지 않습니다. 사진기로 이웃집 사내 몸짓을 하나하나 담습니다. 우스꽝스러운 몸짓도 바보스러운 몸짓도 아주 재미있어 하면서 사진으로 찍지요.



엿보기만 하던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반응할까? 아니, 엿본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지만, 식당이 텅텅 비었는데 왜 하필 이 자리야? (61쪽)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틈새가 있기 마련입니다. 틈새가 없는 사람이란 없지 싶어요. 우리한테는 틈도 사이도 틈새도 있기 때문에 서로 어우러질 수 있지 싶어요. 이른바 ‘빈틈없는’ 사람이라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을 테니 좀처럼 사귈 수 없다고 할 만해요. 틈새가 있기에, 빈틈이 있기에, 그러니까 허술하거나 모자란 대목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한결 더욱 아끼거나 보살피려는 마음을 북돋우면서 사귈 수 있지 싶습니다.



“줌을 못 쓰겠다면 다가오면 되지.” “아, 그렇구나.” (196쪽)


“아하하, 누구에게나 빈틈을 보이는 게 아니랍니다.” (199쪽)



  멀어서 안 보이기에 사진기 줌렌즈를 쓰고 싶을 수 있어요. 그런데 줌렌즈를 쓴다고 해서 잘 보이지는 않아요. 줌렌즈를 쓰더라도 목소리를 못 듣고, 숨결을 못 느껴요. 줌렌즈를 내려놓고 가만히 다가서면, 목소리를 듣고 숨결을 느낄 뿐 아니라, 무거운 사진장비 하나도 없이 서로 마주보면서 따사로운 마음이 흐를 만합니다.


  나는 너한테 틈을 주면서 다가섭니다. 너는 나한테 틈을 주면서 다가옵니다. 우리는 서로 틈을 마련해서 이 틈에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넣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틈을 내어 만나고, 틈을 빚어 어울리며, 틈을 지어 살림을 노래해요. 틈이 있기에 함께 있고, 틈이 있으니 어깨동무를 하지요.


  아주 작은 틈이라 하더라도 다 좋아요.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틈을 내면 돼요.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서로서로 다가서는 길목으로 맞닿아요. 사랑이라는 마음이기에 허술하거나 모자란 틈을 따사로이 보듬으면서 더욱 아름답고 즐거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어요. 2016.12.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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