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샤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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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0



오백 해를 가로지르는 따순 마음

― 이누야샤 1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02.3.25. 4500원



  만화책 《이누야샤》는 500년이라는 나날을 우물을 사이에 두고 가로지르면서 만나는 두 사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본에서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열두 해에 걸쳐 나온 작품이며, 만화영화로도 나왔어요. 한국에서는 한때 ‘견야차’라는 이름으로 해적판이 나왔으나, 2002년부터 정식계약을 맺은 번역판이 나왔습니다.



(1400년대 일본 전국시대) “이것을 내 몸과 함께 태워 다오. 두 번 다시 사악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혼의 구슬은 내가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가겠다.” (9∼10쪽)



  첫 회가 나온 지 어느덧 스무 해 남짓입니다. 1996년 첫 연재에 나오는 배경은 1999년이라고 합니다. 1999년에 살던 열다섯 살 푸름이가 어느 날 ‘집으로 들어온 지네 요괴’한테 붙잡혔다가 풀려나면서 ‘집에 있는 오래된 우물’에 빠져요. 이러다가 1400년대 옛날로 넘어간대요. 이때에 열다섯 살 푸름이는 무엇을 느낄 만할까요? 두려움일까요? 무서움일까요? 새로움일까요? 또는 모험이나 용기나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일 만한 마음일까요?


  ‘(만화 배경으로 본다면) 아니 2000년대를 눈앞에 둔 때’에 웬 지네 요괴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테지요. 더구나 ‘뜬금없다 싶은 지네 요괴’에 뒤이어 자그마치 오백 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짚으로 지붕을 잇고 자동차는커녕 자전거조차 없을 뿐 아니라, 온통 숲이요 들뿐인 시골마을에 떨어진다면? 이리하여 자칫 ‘내가 살던 1999년’으로 못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1999년 일본 도쿄) “사혼의 구슬?” “음, 이것만 있으면 가정은 화목하고 사업은 번창하지.” “이걸 팔겠다교, 할아버지? 그냥 유리구슬인데?” (11쪽)



  만화책 《이누야샤》를 이루는 큰 줄거리는 ‘사혼 구슬’을 둘러싸고 흐릅니다. ‘사혼 구슬’을 거머쥐면 엄청난 힘을 끌어내어 쓸 수 있다고 여긴다고 해요. 요괴도 사람도 이 구슬을 손에 쥐려고 용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1400년대 이야기예요. 1999년 언저리에 보기에 사혼 구슬은 그저 흔한 유리구슬 같다고 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혼 구슬을 손녀딸 생일선물로 주려고 하는 할아버지는 “가정 화목 사업 번창”을 이야기하고요.



‘방금 그건 뭐였지? 꿈? ……이 아니야.’ (21쪽)


“지네 요괴 같은 조무래기를 상대로 뭘 쩔쩔매는 거야?” (38쪽)


“어쩔 거야, 여자! 여기서 나하고 같이 죽을래?” ‘이, 이런 알 수 없는 곳에서, 죽는 건 싫어! 되살아나라, 이누야샤!’ (53쪽)



  꿈이라 여길 수 없는 일을 삶에서 맞닥뜨리는 열다섯 살 푸름이는 생각을 곧장 추스릅니다. 뜬금없거나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면서 멍하니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곳에 똑 떨어진 셈이지만, 이 새로운 곳에서 뾰족한 수를 찾아보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을 하’고 ‘마음을 써’요. 주저앉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달리고 자꾸자꾸 길을 걷습니다.



“저 말야. 나는 카고메야. 키쿄우가 아니라.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래? 응?” “헹. 너, 바보냐? 네가 누구든 간에, 사혼의 구슬을 뺏기 위해선 인정사정 안 봐줘.” “그치만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앉아’ 하고 말만 하면.” (77∼78쪽)


“먹이와 함께 찢어버릴 테다!”“뭐? 바보야! 어린애는 살려야지!” (106쪽)



  만화이기에 마치 꿈 같은 이야기를 지어서 그릴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만화가 아닌 우리 삶이나 사회를 보아도 마치 꿈 같은 이야기가 흐르기도 해요. 터무니없다 싶은 말썽거리로 온 나라가 들끓을 수 있어요. 엉터리라 할 만한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둘레에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더없이 아름답거나 착한 사람들을 마치 꿈처럼, 이른바 천사나 요정이라고 느낄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해요.


  진작에 연재가 끝난 묵은 만화책을 새삼스레 들추면서 ‘꿈’하고 ‘삶’ 사이에 잇닿는 끈을 헤아려 봅니다. 무엇을 꿈이라 할 만하고, 무엇을 삶이라 할 만한지 곱씹어 봅니다. 오랜 만화책을 되읽는 까닭이라면, 오래도록 꾸준히 사랑받는 만화책에 흐르는 숨결을 되짚고 싶기 때문이에요. 오늘을 비추어 어제를 되새기고 모레를 새로 지어 보려는 마음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이로 살지만 모레에는 어른으로 살림을 지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슬기를 가다듬고 싶기도 합니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서로 이름을 밝히면서 마음을 여는 몸짓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고빗사위나 벼랑에 몰려도 ‘해야 할 일’이나 ‘지킬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만화책 《이누야샤》에는 ‘반요(반만 요괴. 주인공 이누야샤)’하고 ‘사람(그저 오롯이 사람. 주인공 카고메)’이 나오고, 이 둘을 둘러싼 숱한 요괴랑 사람이 나옵니다. 마음이 시커먼 요괴나 반요나 사람이 있고, 마음이 맑은 요괴나 반요나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도무지 사람답지 않은 짓을 일삼는 누가 있어요. 겉모습은 요괴여도 참으로 사람다운 넋을 보이는 누가 있어요.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요괴·사람’을 가릴 수 있을까요? 겉모습만으로도 틀을 가르거나 나눠도 될까요?



‘어쩐지 지금까지의 일이 꿈 같아. 그래도, 저쪽 세계, 괜찮을까?’ (161쪽)


‘이상하다. 유라의 목적이 사혼의 구슬이라면, 목적은 벌써 달성했을 텐데. 나와 이누야샤를 노리고 있나?’ “이누야샤, 돌아가자!” “웬일로 말귀를 알아먹게 됐어?” “사실은 가기 싫지만.” ‘이대로 현대에 있으면,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게 돼.’ (178∼179쪽)



  모두 56권으로 마무리를 지은 《이누야샤》입니다. 56권에 이르는 긴 만화책을 찬찬히 읽어 보면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마음은 겉모습을 넘어서며 이어지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이웃들한테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설 적에 누구나 마음을 새롭게 열 뿐 아니라, 삶과 사랑도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열 수 있다는 대목을 밝혀 주어요.


  한국말로는 ‘씻김’이고 한자말로는 ‘정화’인데, 사람인 카고메는 바로 이 ‘씻김(정화)’을 합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힘들거나 다치거나 눈물조차 메마른 뭇목숨을 씻길 수 있는 기운이 바로 ‘사람인 카고메’한테 있다고 해요. 이 기운, 바로 모두를 따사로이 어루만지거나 달래거나 품거나 돌볼 줄 아는 기운인 사랑이란, 참말로 만화책 주인공한테만 흐르는 기운이 아닌 ‘사람인 우리 모두’한테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흐르는 기운이리라 생각합니다. 2017.2.2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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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25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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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80



두려움이나 살림을 짓는 사람은 바로 나

― 백귀야행 25

 이마 이치코 글·그림

 한나리 옮김

 시공사 펴냄, 2017.1.25. 5000원



  일본에서는 1995년부터 나왔고, 한국말로는 1999년부터 나온 만화책 《백귀야행》입니다. 25권은 일본에서 2016년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2017년에 나옵니다. 스무 해 넘게 이야기가 흐르지만 아직 이 만화책은 끝날 줄 모릅니다. 아마 끝날 수 없을 테지요. 우리를 둘러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는 잔뜩 있을 테니까요.



“밭의 신이라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 실제로 무엇을 불러들였는지는 몰라.” (10쪽)


“신이나 요마란 건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거야.” (11쪽)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귀신’이란 무엇일까요? 수많은 귀신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놀리거나 들볶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을 받거나 들볶이려고 하는 마음일까요?


  이 대목에서 놀라거나 손사래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내 끔찍한 하루를 바로 내가 스스로 끌어들였다고?’ 하고 말예요. ‘아니, 내 기쁨을 참말 내가 스스로 이루었다고’ 하고도 물을 만하고요.


  법정 구속이 된 재벌 우두머리는 이녁 스스로 돈이랑 힘을 거머쥐고 싶은 마음에 불타올랐으니 그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그이 스스로 깨끗한 짓이 아닌 케케묵은 짓을 한다는 마음이 있으니 갖가지 말썽거리가 바깥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법정 구속에 이릅니다. 그이가 스스로 다른 마음이 되었다면, 이를테면 굳이 돈이랑 힘을 거머쥐려는 길이 아닌 ‘어마어마한 돈이나 힘을 이웃하고 널리 나누면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가꾸자는 마음’이었다면 사뭇 다른 삶이 될 만하리라 느껴요.



“꼭 결혼해야 해요?” “당연하지! 엄마는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이러는 거야.” ‘내 행복이란 게…….’ (171쪽)


‘이 20년 동안의 불행에 모두 이유가 있었다고? 아버지가 쓰러진 것도 할머니가 살해당한 것도,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 (187쪽)



  우리는 누구나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스스로 즐겁고 싶으니 즐겁습니다. 스스로 골을 부리고 싶으니 골을 부립니다. 스스로 웃고 싶으니 웃으며, 스스로 노래하고 싶기에 노래해요. 목소리가 곱기에 노래하지 않아요. 잘난 사람만 노래하지 않아요. 돈이 있기에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요. 돈이 없대서 살림이 안 넉넉하지 않아요. 만화책 《백귀야행》을 꾸준히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한결 짙게 듭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언제나 내가 스스로 끌어들이고, 웃음도 노래도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삶을 짓는 사람은 바로 나요, 살림을 이루는 사람도 늘 나입니다. 2017.2.25.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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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여행자
다니구치 지로 지음, 홍구희 옮김 / 샘터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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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679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떠난 만화가

― 동토의 여행자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홍구희 옮김

 샘터 펴냄, 2008.12.31. 8500원



  1947년 여름에 태어난 만화가 한 사람이 2017년 2월 11일 겨울 끝자락에 숨을 거둡니다. 이이는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을 넘어 프랑스에서까지 사랑받은 이이는 한국에서도 꽤 사랑받는 만화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이 발자국을 헤아리면 1998년에 ‘제2회 데즈카 오사무 만화대상’을 받기도 했어요. 《고독한 미식가》나 《개를 기르다》나 《신들의 봉우리》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고, 《아버지》나 《열네 살》이나 《도련님의 시대》나 《산책》을 그리기도 했어요. 한국말로 나온 작품으로 2016년에 《하늘의 매》나 《지구빙해사기》가 있기도 합니다.



‘춥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우린 여기서 죽고 마는 것일까.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난 죽으려고 이런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땅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14쪽)


“백인들 금광 찾으러 곧잘 여길 온다. 너희들 같은 패인가?” (18쪽)



  여든아홉 해 삶을 마감하고 흙이 된, 또는 바다로 간, 또는 멧봉우리로 간, 또는 섬으로 간, 또는 골목길로 간, 또는 맛집으로 간, 또는 몽골이나 북미 인디언 품으로 간, 또는 지구문명이 저물고 찾아온다고 하는 빙하시대로 간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님이 선보인 만화 가운데 짤막한 이야기를 그러모은 《동토의 여행자》(샘터 펴냄)를 읽어 봅니다.


  ‘동토’는 ‘언 땅’으로 고쳐써야 한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이런 이름쯤은 출판사에서 잘 손질해서 알맞게 붙여 주면 좋으련만, 가만히 살피면 한국말로 나온 다니구치 지로 님 만화책 가운데 《우연한 산보》도 있어요. ‘산책·산보’ 모두 한자말입니다만, ‘산보’는 일본 한자말이에요. 적어도 ‘산책’으로 손질하거나 ‘마실·나들이’로 바로잡을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만화책 《동토의 여행자》, 그러니까 “언 땅을 여행한 사람” 또는 “겨울 땅을 거닌 사람”을 보면, 잭 런던이 남긴 글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하얀 말코손바닥사슴’ 이야기부터 잔잔히 흐릅니다. 금을 좇다가 이 금좇기가 부질없는 줄 깨닫고서 삶과 땅을 처음으로 마주했다는 잭 런던처럼 다니구치 지로 님도 삶과 땅을 새롭게 바라보며 배우는 기쁨을 만화로 풀어놓습니다.



“그 녀석(곰)은 내가 쏘아야만 해.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 (118쪽)


“어, 어째서. (개) 시로마저 나한테서 앗아가시는지? 모르겠어. 어째서 언제나 나만 살아남는 건지. 아아, 산신령 님, 어째서 나 같은 늙은이를 살려 두시는 게요? …… 오오! 아, 아니, 강아지 한 마리. 아아, 장하다, 시로! 기뻐해라! 좋은 강아지를 얻게 되었구나!” (138∼139쪽)



  다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 한길을 걸어가며 내놓은 작품을 찬찬히 살피면 ‘여행·사냥’이 가만히 맞물립니다. 낯익은 곳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찾아가며 사냥을 하는 숨결이 고즈넉히 흐르곤 합니다. 《고독한 미식가》나 《우연한 산보》는 여행이나 사냥하고는 동떨어진 듯 보일 수 있지만, 큰 테두리에서 살피면 낯선 길을 찾는 마음이 드러나면서 무엇인가 마음에 붙잡으려고 하는 숨결이 흘러요. 이러한 숨결은 북중미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인 흰둥이 이야기를 다룬 《하늘의 매》에서도 여러모로 엿볼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냐, 시게루? 약한 애를 괴롭히다니. 모두들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아!” (150쪽)


“아직은 멀었어요. 만화가가 될지도 아직은 모르는데요.” “아니지. 의지만 있다면 뭐든 될 수 있거든. 참 좋다아, 젊은이는 꿈이 있어서. 나도 말야, 젊은 시절에는 연극을 좋아해서 떠돌이 딴따라 일을 했다네. 돈벌이도 좋지만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게 제일이거든, 안 그런가?” (178쪽)



  여린 이나 겨레나 나라를 괴롭히는 몸짓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만화마다 찬찬히 흐르는 다니구치 지로 님 작품이라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일본하고 조선 사이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서양이라는 힘센 문명이 일본으로 쳐들어오던 무렵 일본은 이웃에 있는 여린 나라로 쳐들어가서 꽤 오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류큐와 아이누를 짓밟은 일본입니다.


  “모두들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아!” 같은 말을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한테 만화가 스스로 낼 수 있을까요?


  모든 만화가가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만화가가 이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지도 않을 테고요. 다만 다니구치 지로 님은 《도련님의 시대》 같은 만화를 그리면서 이 대목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살그머니 비껴 갔다고 할까요.



“네, 저도 믿어요. 틀림없이 (고래) 딕은 당신에게만 가르쳐 주었어요. 가만히 놓아둔다, 알겠지요.” 고래들의 신비로운 문화. 잠들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꿈꾸면서 재생을 기다린다. 북극의 해저 깊이 그 ‘성스러운 심연’은 존재한다. (241쪽)



  다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로 새롭게 담은 ‘어니스트 톰슨 시튼’ 이야기를 보면, 시튼이라는 분이 남긴 이야기에는 ‘숲·숲짐승하고 하나가 되는 숨결’이 너르게 흐르는데, 다니구치 지로 님 만화책에는 이보다 ‘사냥’이나 ‘총을 드는’ 이야기가 자주 흐릅니다. 이제 흙으로 돌아간 다니구치 지로 님인 터라 새로운 작품을 더 선보일 수 없으니, 이녁이 남긴 작품에 흐르는 ‘사냥·총’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단편집 《동토의 여행자》를 이루는 마지막 이야기인 ‘고래가 죽음을 앞두고 찾아간다는 북극 깊은 바다’를 곰곰이 되읽어 봅니다. 총도 작살도 내려놓은 맨몸으로 오랫동안 고래 곁으로 다가가서 동무가 되고서야 비로소 고래하고 말을 섞으며 고래무덤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는 만화 주인공 이야기를 고즈넉히 돌아봅니다.


  고래는 고래 앞에서 총이나 작살을 든 이한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이리나 여우나 늑대나 곰도 저희 앞에서 총이나 화살을 든 이한테 말을 걸지 않아요. 하얀 말코손바닥사슴도 제 앞에서 총이나 화살을 든 이한테 말을 안 걸어요. 모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서려고 할 적에, 따스한 마음이 되어 오래도록 찾아와서 손을 맞잡으려고 할 적에 비로소 말을 걸어요.



“난 덫을 보러 간다. 거기까지 바래다주겠다. 여길 봐. 토끼가 지나갔다. 그리고 여기, 토끼가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토끼가 되돌아섰다. 발자국 간격이 넓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여기, 더 큰 발자국. 이건 스라소니 발자국. 토끼가 바짝 쫓겼다. 이 깊은 발톱 자국, 여기서, 스라소니가 크게 뛰었다. 여기서 일격. 이 앞으로는 토끼의 발자국이 없다. 알겠는가? 너희들, 총은 쏠 수 있어도 짐승의 발자국 쫓는 일, 할 수 없다. 여기서 살아가는 일, 아주 어렵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곧장 이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 “우리한테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요.” “아니, 해 줄 수 없다. 곧바로 여기서 떠나야 한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지.” (28∼30쪽)



  숲에서, 또는 바다애서, 또는 멧봉우리에서, 또는 섬에서, 또는 골목길에서, 또는 맛집에서, 또는 몽골이나 북미 인디언 곁에서, 또는 지구문명이 저물고 찾아온다고 하는 빙하시대에서, 우리가 이야기 한 자락을 어떻게 끌어내어 생각을 새롭게 지필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때로는 살짝 아쉬운 대목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멀고 먼 길을 구비구비 돌고 돌면서 ‘작은 삶에 깃든 작은 살림에서 작은 사랑이 피어나는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를 만화로 담은 다니구치 지로 님 발자국이 담긴 만화책을 읽은 젊은이가 앞으로 한결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피어날 이웃사랑과 숲사랑과 마을사랑을 새 만화로 그릴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다니구치 지로 님은 하늘나라에서 하늘숨을 마시며 온누리를 훨훨 날아다닐 하늘마음 같은 바람이 되었을 테지요.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하늘길로 가셨을 테고요. 숱한 이야기를 품은 만화책을 그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이 쉬셔요. 2017.2.2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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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잭 창작비화 3 - 테즈카 오사무의 작업실에서
요시모토 코지 지음, 미야자키 마사루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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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70



새내기 직원한테 “빨리 그만둬 주세요” 하고 외친 사람

― 블랙잭 창작 비화 3

 미야자키 마사루 글

 요시모토 코지 그림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5.25. 1만 원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님이 있습니다. 1989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이제는 없는 사람입니다. 1989년에 숨을 거둔 만큼 새로운 만화를 그릴 수 없어요. 그런데 이 땅에 없는 테즈카 오사무 님을 놓고 만화책이 새로 나오기도 해요. 이 가운데 하나가 《블랙잭 창작 비화》(학산문화사,2014)입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한창 만화를 그리던 무렵 곁에서 지켜보거나 일을 돕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엮어요. 그때 그분이 그렇게 일을 했고, 그때 그분이 이렇게 일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어시스턴트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빨리 그만둬 주세요!!” “에엑?” “그리고 만화가가 되어 주세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입사하자마자 빨리 그만두라는 회사는 거기 말고는 없을 거예요. (17∼18쪽)


나는 22살에 상경해서, 테즈카 프로덕션의 수라장에 뛰어들었고, 어른들의 진검승부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테즈카 선생님을 동경하면서 동료들과 그림을 그렸어. 단지 그랬을 뿐인데, 그 모든 게 내게 양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40∼41쪽)



  《블랙잭 창작 비화》는 모두 네 권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셋째 권에 오래도록 눈길이 갑니다. 테즈카 오사무라고 하는 만화가한테도 눈길이 가고, 이 만화책 네 권을 놓고도 눈길이 갑니다만, 《블랙잭 창작 비화》 셋째 권은 테즈카 오사무 님이 ‘일하려고 새로 들어온 도움이(어시스턴트)’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 ‘새 직원 교육’을 할 적에 들려주었다고 하는 말에 눈길이 가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새내기 도움이한테 한결같이 “빨리 그만둬 주세요!” 하고 바랐대요. 새내기 도움이가 된 이들은 처음에 부푼 꿈으로 설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테즈카 오사무 님 곁에서 만화를 배우며 도울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은 “빨리 그만둬 주세요!”라는 말에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요! 그야말로 터무니없다 할 만하고, 참말로 뜬금없다고 할 만해요.


  그런데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이녁이 외친 말에 벙 쪄서 입을 못 다무는 젊은이들한테 한 마디를 덧붙였다지요. “그리고 만화가가 되어 주세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장편을 그리기보다는 수없이 많은 단편을 완성해 주세요. 그게 실력이 향상하는 지름길입니다! 16페이지 안에 기승전결을 넣을 수 있으면, 장편도 그릴 수 있게 돼요! …… 자신이 그리려는 만화의 대상 독자 연령보다도 두세 살 어리게 잡고 그리면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잘 전달됩니다!” (42∼43쪽)


언제부턴가, 선생님의 눈에 비치는 것을, 선생님이 보고 있는 것을, 나도 보고 싶다고 바라게 됐어! 테즈카 선생님을 쫓고 있으니, 선생님이 보고 있던 빛 자체는 선생님 등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 하지만 그 등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48∼50쪽)



  테즈카 오사무 님이 한창 만화 연재를 많이 할 적에는 2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한 사람 머리에서 태어나는 끝없는 새 줄거리 새 이야기 새 만화 새 그림을 거드는 사람이 200이 넘었다는 뜻이에요. 이들은 모두 ‘빨리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어 달라’는 말을 들었대요.


  어느 모로 본다면 터무니없지만, 어느 모로 보면 제대로 짚고 가르쳐 준 한 마디로구나 싶어요. 배경이나 먹이나 톤이나 여러 가지를 돕는 일을 하는 젊은이한테 이들이 스스로 더욱 새롭고 재미나며 알뜰한 이야기를 엮는 만화가로 ‘홀로서기’를 하기를 바라는 말을 들려준 셈이거든요.


  한국에 이런 회사가 있을까요? 한국에 이런 공공기관이 있을까요? 얼른 일을 제대로 찬찬히 알뜰히 훌륭히 빈틈없이 익혀서 스스로 설 줄 아는 일꾼으로 홀로 나아가라고 북돋우는 회사나 공공기관이 있을까요?



“확실히 디즈니는 굉장해요. 하지만 만화영화는 디즈니뿐만이 아니에요. 전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의 전, 디즈니를 보고 꿈을 갖게 됐고, 이 작품 〈철선공주〉에서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용기를 얻었어요.” “용기요?” “‘아시아인어도 이렇게 굉장한 만화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요!” (116∼118쪽)


테즈카 오사무는 스스로 에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무렵의 에니메이션 제작비, 스태프들의 급료는, 전부 테즈카 오사무의 원고료로 충당했었다. (132쪽)



  이른바 ‘만화의 신’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즈카 오사무 님이에요. 만화를 어마어마하게 그렸기에 ‘만화 그린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받았구나 싶기도 하지만, 젊거나 어린 제자한테 만화를 온마음으로 사랑해서 온몸으로 가꾸어 주기를 바라는 숨결을 물려주었기에 ‘만화로 사랑을 이야기한 하느님’이라고 할 만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생각해 봐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만화를 그려서 번 일삯으로 만화영화를 만들었대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몇 날 며칠 잠을 안 자면서 만화를 그려 얻은 일삯을 모조리 ‘새로운 만화를 짓는 바탕’이 서도록 쏟아부었대요.


  이른바 ‘사회로 돌려주기’를 늘 한 셈입니다. 내 것으로 삼지 않고 늘 나누어 준 셈입니다. 내 권위나 권력을 세우려 하지 않고 어린 뒷사람한테 길을 틔우려고 온힘을 들인 삶이에요.



중국판 ‘우주소년 아톰’은 가로로 긴 특수한 판형. 때문에 세로로 긴 만화원고를 위아래로 나누어 편집했지만, 아무리 해도 판형에 맞출 수 없는 세로로 긴 컷은, 중국 측에서 멋대로 다시 그렸다. “서, 선생님. 그림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엄중하게 항의하죠.” “고치겠습니다.” “네?” “제가 원고를 고치겠어요!” “네에? 서, 선생님이 원고를 손질?” “네! 제가 다시 그릴 겁니다. 그걸 책으로 내주세요!” “하, 하지만 선생님. 저작권이 없으니 무보수로 일하는 꼴이 될 텐데요.” “무슨 소립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그림으로는 재밌지 않아요! 중국사람들도 제대로 된 그림으로 즐겨야죠!” (163∼166쪽)



  중국에서 ‘무단 해적판 아톰’이라든지 ‘무단 해적판 레오’가 나왔을 적에 테즈카 오사무 님은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저작권을 침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엉터리로 만화책을 펴냈기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대요. 그래서 테즈카 오사무 님은 일삯을 하나도 받을 수 없지만, 중국에서 이녁 만화책을 몰래 함부로 펴낸 출판사에 ‘제대로 똑똑히 그린 만화 원고’를 그냥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돈이 아니라 ‘중국 어린이 독자’가 만화다운 만화를 제대로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일을 했대요.



“중학생 때, (중국) 완 선생님의 〈철선공주〉를 보고, 전 에니메이션을 만들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손오공’을 만들어 왔어요. 제가 완 선생님께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손오공’이 되었다고요.”(187∼190쪽)



  《블랙잭 창작 비화》는 테즈카 오사무 님한테서 만화를 배우며 만화가가 된 사람들이 ‘나는 어떻게 만화를 사랑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 설 수 있었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두 네 권에 걸쳐 수많은 만화가가 수많은 이야기를 다 다르면서 맛깔스럽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보면 괴짜 같고, 저렇게 보면 바보스럽고, 그렇게 보면 참말 욕심이 없는데, 도무지 언제 눈을 붙이고 쉬는지 알 길이 없도록 언제나 펜을 쥐고 종이에 새로운 이야기를 빚는 테즈카 오사무라는 사람이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어린이한테 만화로 어떤 꿈을 북돋아 주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어요.


  우리가 함부로 다가설 수 없거나 섣불리 넘볼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이룬 테즈카 오사무 님일 수 있습니다. 만화가 ‘문화’이며 ‘예술’일 뿐 아니라 ‘이야기’이고 ‘책’이라는 대목을 똑똑히 밝혀 준 테즈카 오사무 님일 수 있어요.


  여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뒷사람한테 길을 열어 준 테즈카 오사무 님이에요. 누구나 만화가가 될 수 있다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어요. 누구나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며 손을 내밀어 주었어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몸져누워 숨을 거두는 날까지 손에서 펜과 종이를 놓지 않으면서 다음 작품을 마음속으로 지었대요. 싱글벙글 웃음 띤 낯으로 ‘만화를 그리는 기쁜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대요. 이리하여 이 모든 삶과 살림과 숨결을 젊은 뒷사람이 물려받아서 다 다른 수많은 만화가가 저마다 다르면서 재미나고 아름다운 만화를 그려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선 자리에서 아름답게 일하고 기쁘게 꿈을 짓는 하루를 살자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솟는 해님을 바라보며 더욱 씩씩하게 아이들 손을 잡자고 다짐합니다. 2017.2.1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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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보세, 전통가옥! 2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78



나무한테 말 걸며 집짓는 마음

― 지어 보세, 전통가옥! 2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서수진 옮김

 미우 펴냄, 2015.6.15. 8000원



  《천재 유교수의 생활》로 널리 알려진 만화가 야마시타 카즈미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버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만화를 그렸어요. ‘천재 유교수’는 참말로 있던 사람, 그러니까 ‘만화가네 아버지’라 하지요.


  매우 오랫동안 유교수 이야기가 만화책으로 나오는데, 야마시타 카즈미 님은 아주 새로운 만화를 하나 선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어 보세, 전통가옥!》(미우,2015)입니다. 이 만화책 첫째 권에서는 만화가 한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다가 손수 ‘일본 옛집’을 도쿄 한복판에 땅까지 장만해서 새로 지으려 하는가 하는 마음을 밝힙니다. 둘째 권에서는 ‘집을 짓는 살림’이란 스스로 얼마나 기쁜 마음이 되는 하루인가를 들려주어요.


  《지어 보세, 전통가옥!》을 읽으면서 바로 이 대목에서 가슴이 찌르르 울립니다. 그래요, 우리가 우리 보금자리가 될 터전을 손수 찾고 살피고 마련해서 기둥을 하나하나 올리고 구들을 놓고 서까래를 늘이는 까닭은 따로 있어요. 그냥 누워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집이 아니에요. 살림을 짓고 삶을 짓듯이 집을 지어요. 밥을 짓고 옷을 짓듯이 집을 짓지요. 바로 사랑을 짓고 꿈을 지으려고 집을 짓는다고 할 만합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만화. 제일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것 …… 혼자일 땐 필요한 부분만 점등. 가급적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밝을 동안 일을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 물도 조금씩, 사용할 만큼만. (18∼19쪽)



  만화가 한 사람은 스스로 밝히기를 아직 철이 없다고 합니다. 꽤 오랫동안 만화만 좋아해서 만화만 그리느라 다른 것은 거의 모른다고 해요. 만화 그리기 빼고는 달리 즐기는 놀이도 없이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지낸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마흔 넘은 나이에 ‘내 집’이라는, 아니 ‘내 보금자리’라는 데에 눈을 뜬다지요. 시멘트와 쇠붙이로 척척 맞추는 집이 아닌, ‘이 집에 깃들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살림을 꾸리면서 어떤 하루를 누리려 하는가’를 낱낱이 따져서 나무토막 하나도 알뜰히 건사해서 짓는 집에 마음을 활짝 열었다고 합니다.



지금 임시로 살고 있는 곳의 목욕탕은 너무 넓고 조명도 많아서 촛불만 켜 보았다. 그게 은근 근사해서 이런 것도 ‘스키샤’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그 김에 서툴지만 작은 베란다 텃밭도 가꿔 봤다. 풀들이 자라는 모습을 낙으로 삼는 나날.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있던 마사지샵에는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계속 다니는 중인지라, 절약과 운동을 위해 1시간 걸려 걸어서 가 봤다. 그러다 발견한 녹음. 그것은 개인 주택의 뒷마당이거나 실개울을 재현해 놓은 곳이거나,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20∼21쪽)



  《지어 보세, 전통가옥!》를 읽는 동안 몇 번이고 멈추면서 숨을 골랐습니다. 우리는 돈으로만 집을 짓지 못해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즐거운 우리 집”을 짓지는 못합니다. 돈이 얼마 없기에 “남이 지은 집을 빌려서 살더”라도 얼마든지 오순도순 알콩달콩 아기자기하며 “즐거운 우리 집”을 누리곤 합니다.


  내 부동산 소유인 집이 아니어도 “즐거운 우리 집”이 되어요. 그리고 부동산이 아닌 보금자리를 바라면서 푼푼이 그러모은 돈으로 집터를 고르고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있어요. 후다닥 올려세우는 집이 아니에요. 한 땀 두 땀 손길이 깃드는 집이에요.



오타루에서 카마쿠라로 이사를 가면서 짐을 싸게 된 초등학교 6학년 봄. 저녁햇살이 비추는 두 칸짜리 방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장지문의 낙서, 피아노와 옷장 자국, 뜯겨진 다다미의 결. 왜일까. 그 광경은 저녁노을과 겹쳐서 그 뒤 수없이 내 꿈에 나타났다. (33∼34쪽)


스키야를 지을 결심을 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건, 일본의 나무를 사용하기 때문. 그것이 일본의 숲을 지키는 길이란 걸 알았고 또한 일본의 땅에 녹아드는 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 기술을 계승할 자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 (51∼52쪽)



  오늘날 한국에 아주 많은 아파트는 백 해는커녕 쉰 해를 버티기 어렵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분도 다 알리라 생각해요. 아무리 번듯하게 높은 건물이어도 쉰 해를 튼튼히 버틸 만할까요? 백 해쯤 되면 허물고 다시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때에 옛 아파트나 건물에 쓴 시멘트는 어떻게 될까요? 시멘트와 석고보드와 쇠붙이와 유리로 빠르게 올려세운 아파트는 쉰 해쯤 뒤에는 어떤 쓰레기를 내놓으면서 무너질까요?


  먼먼 옛날부터 나무랑 흙이랑 돌이랑 풀로 지은 집은 허물고 다시 짓더라도 쓰레기가 한 줌조차 안 나와요. 흙이랑 풀은 땅으로 가고, 돌은 되씁니다. 나무는 되쓸 수 있고, 되쓸 수 없다면 땔감으로 삼아요. 게다가 옛날에는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사이 ‘새로운 집을 지을 적에 기둥으로 삼을 나무’가 우람하게 자랍니다.


  간추려 보자면, 옛집은 늘 되살림이 깨끗하면서 아름다이 이루어진 보금자리예요. 이러면서 오랜 나날 수많은 살붙이가 얼크러지고 어우러지면서 숱한 이야기꽃이 피어난 삶자리이고요.



하지만 어떤 형식이든, 받은 땅에 감사하는 행위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땅에는 고래로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으니까. (97쪽)


30∼40년에 걸쳐 곧게 곧게 자라다가 심긴 지 50년 정도 기다려서 드디어 우리 집에 오는 것이니, 소중히 사용해야지. 집이 다 되면 (나무한테) 또 말을 걸어 볼까. (122쪽)



  철없던 만화가에서 철든 만화가로 거듭나려는 꿈을 키우는 만화가 한 사람은 일본 옛집을 짓겠노라는 마음이 되면서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 많습니다. 차를 마시는 모임에 나가 보고, 골목을 한참 걸어 봅니다. 햇볕을 한참 마주하기도 하고, 한갓진 숲정이에서 짙푸른 그늘이 얼마나 싱그러운가를 느껴 봅니다. 그리고 나무한테 말을 걸어 보아요. ‘내가 지을 집’에 쓸 나무를 만나서 이 나무가 살아온 나날을 헤아려 보았다고 해요.



나무의 생명에 감사하고 혼을 불어넣는다. 나무의 생명을 받아서 집을 짓는다. 나무와 함께 생활하는 인간의 나무를 향한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우린 몇 천 년이나 나무와 함께 살아왔다. (168∼169쪽)



  ‘짓다’라는 오랜 한국말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요새는 이 ‘짓다’를 제대로 쓰는 사람이 매우 줄어요. 밥이나 옷이나 집뿐 아니라 글이나 살림이나 땅이나 삶이나 꿈이나 생각 모두 짓는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나타나도록 온힘을 기울이는 몸짓이나 마음씨를 예부터 ‘짓다’로 나타냈어요.


  요즈막 흐름을 보면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낸다는 결이 담긴 ‘만들다’를 아무 자리에나 쓰고 말아요.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시멘트덩이인 아파트를 척척 만들어서 세우지요. 이러다 보니 집을 집다이 아끼거나 건사하는 마음이 옅어지지 싶어요. 오래도록 사랑할 집이면서, 아이들이 고이 물려받을 터전이라는 마음이 못 될 적에는 보금자리가 못 되고 말아요.


  가만히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우리 어른들이 ‘아이가 기쁘게 물려받을 만한 보금자리’인 집을 짓는다면 참말 크게 달라지리라 봅니다. 아이가 기쁘게 물려받을 만한 보금자리라면 적어도 백 해나 이백 해는 거뜬해야 할 테고, 마당도 텃밭도 딸려야 할 테지요. 나무를 심을 만한 집이어야 할 테고, 이 집에서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 이쁜 살림을 더욱 살가이 지을 만해야지 싶어요.


  우리가 이백 해쯤 든든한 집을 지으려 한다면 ‘건축자재’도 아무것이나 쓸 수 없어요. 한 터에서 이백 해쯤 살 생각이라면 ‘마을을 살리는 길’을 처음부터 다시 살필 만해요. 《지어 보세, 전통가옥!》을 빚는 만화가도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얻기를 바라고, 우리들 누구나 우리한테 저마다 아름다울 보금자리를 손수 지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손수 집을 지어서 산다면 우리 마을과 나라는 저절로 푸르게 눈부실 만하겠지요. 2017.2.1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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