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여행자
다니구치 지로 지음, 홍구희 옮김 / 샘터사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679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떠난 만화가

― 동토의 여행자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홍구희 옮김

 샘터 펴냄, 2008.12.31. 8500원



  1947년 여름에 태어난 만화가 한 사람이 2017년 2월 11일 겨울 끝자락에 숨을 거둡니다. 이이는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을 넘어 프랑스에서까지 사랑받은 이이는 한국에서도 꽤 사랑받는 만화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이 발자국을 헤아리면 1998년에 ‘제2회 데즈카 오사무 만화대상’을 받기도 했어요. 《고독한 미식가》나 《개를 기르다》나 《신들의 봉우리》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고, 《아버지》나 《열네 살》이나 《도련님의 시대》나 《산책》을 그리기도 했어요. 한국말로 나온 작품으로 2016년에 《하늘의 매》나 《지구빙해사기》가 있기도 합니다.



‘춥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우린 여기서 죽고 마는 것일까.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난 죽으려고 이런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땅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14쪽)


“백인들 금광 찾으러 곧잘 여길 온다. 너희들 같은 패인가?” (18쪽)



  여든아홉 해 삶을 마감하고 흙이 된, 또는 바다로 간, 또는 멧봉우리로 간, 또는 섬으로 간, 또는 골목길로 간, 또는 맛집으로 간, 또는 몽골이나 북미 인디언 품으로 간, 또는 지구문명이 저물고 찾아온다고 하는 빙하시대로 간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님이 선보인 만화 가운데 짤막한 이야기를 그러모은 《동토의 여행자》(샘터 펴냄)를 읽어 봅니다.


  ‘동토’는 ‘언 땅’으로 고쳐써야 한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이런 이름쯤은 출판사에서 잘 손질해서 알맞게 붙여 주면 좋으련만, 가만히 살피면 한국말로 나온 다니구치 지로 님 만화책 가운데 《우연한 산보》도 있어요. ‘산책·산보’ 모두 한자말입니다만, ‘산보’는 일본 한자말이에요. 적어도 ‘산책’으로 손질하거나 ‘마실·나들이’로 바로잡을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만화책 《동토의 여행자》, 그러니까 “언 땅을 여행한 사람” 또는 “겨울 땅을 거닌 사람”을 보면, 잭 런던이 남긴 글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하얀 말코손바닥사슴’ 이야기부터 잔잔히 흐릅니다. 금을 좇다가 이 금좇기가 부질없는 줄 깨닫고서 삶과 땅을 처음으로 마주했다는 잭 런던처럼 다니구치 지로 님도 삶과 땅을 새롭게 바라보며 배우는 기쁨을 만화로 풀어놓습니다.



“그 녀석(곰)은 내가 쏘아야만 해.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 (118쪽)


“어, 어째서. (개) 시로마저 나한테서 앗아가시는지? 모르겠어. 어째서 언제나 나만 살아남는 건지. 아아, 산신령 님, 어째서 나 같은 늙은이를 살려 두시는 게요? …… 오오! 아, 아니, 강아지 한 마리. 아아, 장하다, 시로! 기뻐해라! 좋은 강아지를 얻게 되었구나!” (138∼139쪽)



  다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 한길을 걸어가며 내놓은 작품을 찬찬히 살피면 ‘여행·사냥’이 가만히 맞물립니다. 낯익은 곳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찾아가며 사냥을 하는 숨결이 고즈넉히 흐르곤 합니다. 《고독한 미식가》나 《우연한 산보》는 여행이나 사냥하고는 동떨어진 듯 보일 수 있지만, 큰 테두리에서 살피면 낯선 길을 찾는 마음이 드러나면서 무엇인가 마음에 붙잡으려고 하는 숨결이 흘러요. 이러한 숨결은 북중미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인 흰둥이 이야기를 다룬 《하늘의 매》에서도 여러모로 엿볼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냐, 시게루? 약한 애를 괴롭히다니. 모두들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아!” (150쪽)


“아직은 멀었어요. 만화가가 될지도 아직은 모르는데요.” “아니지. 의지만 있다면 뭐든 될 수 있거든. 참 좋다아, 젊은이는 꿈이 있어서. 나도 말야, 젊은 시절에는 연극을 좋아해서 떠돌이 딴따라 일을 했다네. 돈벌이도 좋지만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게 제일이거든, 안 그런가?” (178쪽)



  여린 이나 겨레나 나라를 괴롭히는 몸짓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만화마다 찬찬히 흐르는 다니구치 지로 님 작품이라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일본하고 조선 사이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서양이라는 힘센 문명이 일본으로 쳐들어오던 무렵 일본은 이웃에 있는 여린 나라로 쳐들어가서 꽤 오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류큐와 아이누를 짓밟은 일본입니다.


  “모두들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아!” 같은 말을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한테 만화가 스스로 낼 수 있을까요?


  모든 만화가가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만화가가 이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지도 않을 테고요. 다만 다니구치 지로 님은 《도련님의 시대》 같은 만화를 그리면서 이 대목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살그머니 비껴 갔다고 할까요.



“네, 저도 믿어요. 틀림없이 (고래) 딕은 당신에게만 가르쳐 주었어요. 가만히 놓아둔다, 알겠지요.” 고래들의 신비로운 문화. 잠들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꿈꾸면서 재생을 기다린다. 북극의 해저 깊이 그 ‘성스러운 심연’은 존재한다. (241쪽)



  다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로 새롭게 담은 ‘어니스트 톰슨 시튼’ 이야기를 보면, 시튼이라는 분이 남긴 이야기에는 ‘숲·숲짐승하고 하나가 되는 숨결’이 너르게 흐르는데, 다니구치 지로 님 만화책에는 이보다 ‘사냥’이나 ‘총을 드는’ 이야기가 자주 흐릅니다. 이제 흙으로 돌아간 다니구치 지로 님인 터라 새로운 작품을 더 선보일 수 없으니, 이녁이 남긴 작품에 흐르는 ‘사냥·총’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단편집 《동토의 여행자》를 이루는 마지막 이야기인 ‘고래가 죽음을 앞두고 찾아간다는 북극 깊은 바다’를 곰곰이 되읽어 봅니다. 총도 작살도 내려놓은 맨몸으로 오랫동안 고래 곁으로 다가가서 동무가 되고서야 비로소 고래하고 말을 섞으며 고래무덤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는 만화 주인공 이야기를 고즈넉히 돌아봅니다.


  고래는 고래 앞에서 총이나 작살을 든 이한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이리나 여우나 늑대나 곰도 저희 앞에서 총이나 화살을 든 이한테 말을 걸지 않아요. 하얀 말코손바닥사슴도 제 앞에서 총이나 화살을 든 이한테 말을 안 걸어요. 모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서려고 할 적에, 따스한 마음이 되어 오래도록 찾아와서 손을 맞잡으려고 할 적에 비로소 말을 걸어요.



“난 덫을 보러 간다. 거기까지 바래다주겠다. 여길 봐. 토끼가 지나갔다. 그리고 여기, 토끼가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토끼가 되돌아섰다. 발자국 간격이 넓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여기, 더 큰 발자국. 이건 스라소니 발자국. 토끼가 바짝 쫓겼다. 이 깊은 발톱 자국, 여기서, 스라소니가 크게 뛰었다. 여기서 일격. 이 앞으로는 토끼의 발자국이 없다. 알겠는가? 너희들, 총은 쏠 수 있어도 짐승의 발자국 쫓는 일, 할 수 없다. 여기서 살아가는 일, 아주 어렵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곧장 이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 “우리한테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요.” “아니, 해 줄 수 없다. 곧바로 여기서 떠나야 한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지.” (28∼30쪽)



  숲에서, 또는 바다애서, 또는 멧봉우리에서, 또는 섬에서, 또는 골목길에서, 또는 맛집에서, 또는 몽골이나 북미 인디언 곁에서, 또는 지구문명이 저물고 찾아온다고 하는 빙하시대에서, 우리가 이야기 한 자락을 어떻게 끌어내어 생각을 새롭게 지필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때로는 살짝 아쉬운 대목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멀고 먼 길을 구비구비 돌고 돌면서 ‘작은 삶에 깃든 작은 살림에서 작은 사랑이 피어나는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를 만화로 담은 다니구치 지로 님 발자국이 담긴 만화책을 읽은 젊은이가 앞으로 한결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피어날 이웃사랑과 숲사랑과 마을사랑을 새 만화로 그릴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다니구치 지로 님은 하늘나라에서 하늘숨을 마시며 온누리를 훨훨 날아다닐 하늘마음 같은 바람이 되었을 테지요.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하늘길로 가셨을 테고요. 숱한 이야기를 품은 만화책을 그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이 쉬셔요. 2017.2.2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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