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밥 먹자 75. 2014.5.12.



  양배추하고 마당에서 뜯은 풀을 된장으로 무친다. 무를 썰고, 오이와 당근과 고구마를 썬다. 썰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썰면 더 예쁘게 보일까. 어떻게 썰 적에 아이들이 재미나게 바라보면서 맛나게 손에 쥘까. 돼지고기튀김을 굽는다. 풀무침에 얹는다. 보라야, 고기만 집지 말고, 고기 밑에 있는 풀무침도 다 먹어야지? 밥에 심은 당근을 먹어 보렴. 밥과 함께 끓인 당근은 입에서 그대로 녹는단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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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책길 걷기

5. 누가 책을 쓰는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노래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노래를 불러요. 가락이 어긋나더라도 빙긋빙긋 웃으면서 노래를 부르지요.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춤을 춥니다. 춤판이 아니어도 스스로 춤을 추어요. 걸음걸이가 춤사위입니다. 움직임이 언제나 춤짓입니다. 당근을 썰거나 양파를 썰 적에도 덩실덩실 어깨춤이에요. 누가 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꽃을 만납니다. 꽃밭에 가야만 꽃을 볼 수 있지 않아요. 들에서는 들꽃을 봅니다. 숲에서는 숲꽃을 봐요. 길에서는 길꽃을 보지요. 꽃은 들에서도 숲에서도 길에서도 피어납니다. 흙이 있으면 씨앗이 드리워 곱게 피어나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책을 손에 쥡니다.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노래하는 아름답고 호젓한 시골에 깃들어야 느긋하게 책을 읽지 않아요. 시끄러운 북새통인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에서도 책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좋아하니까요. 졸음을 쫓으며 책을 읽어요. 더위를 잊으며 책을 읽어요. 스스로 좋아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기에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좋아해 보셔요. 입에서 ‘좋아!’ 하고 톡 튀어나와요. 싫어해 보셔요. 입에서 ‘싫어!’ 하고 탁 튀어나옵니다. 좋으니 즐겁게 하고, 싫으니 억지로 해요. 좋기에 웃으면서 하고, 싫기에 울면서 겨우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떤 마음일까 헤아려 봅니다. 아이를 좋아해서 사랑스레 낳은 어버이일까요, 아이를 낳기 싫으나 억지로 낳은 어버이일까요. 따사로운 손길로 보살피면서 보드라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라면, 스스로 좋아해서 아이를 사랑스레 낳았으리라 생각해요. 아이를 학원으로만 내몰거나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도록 들볶는다면, 아무래도 스스로 좋아해서 아이를 사랑스레 낳았다고는 여기기 어렵습니다. 아이를 좋아해서 사랑으로 낳은 어버이라면, 언제나 아름답게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리도록 돌보는 한편, 마을과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힘쓰리라 생각해요.


  《말괄량이 삐삐》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있습니다. 1907년에 태어나 2002년에 숨을 거두셨어요. 이분이 어릴 적 삶을 돌아보면서 쓴 산문책이 《사라진 나라》(풀빛,2003)라는 이름으로 나온 적 있어요. 이 책에서 린드그렌 님은 “누군가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에 대해 물으면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자연은 내 모든 나날을 에워싸고 있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 삶을 채우고 있었습니다(93쪽).” 하고 이야기해요. 어릴 적에 숲과 들에서 뛰놀며 자랐다고 해요. 이분이 쓴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으레 숲과 들에서 뛰노는데, 머릿속으로 지은 모습이 아니라, 바로 린드그렌 님이 보낸 어린 나날 모습이요, 린드그렌 님네 식구들 모습이면서, 린드그렌 님이 어릴 적 함께 놀던 동무들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숲에서 즐겁게 뛰놀았으니, 이분이 글을 쓸 적에는 ‘숲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삐삐이건 마디타이건 로타이건, 모두 숲에서 살며 숲에서 뛰놀아요. 숲바람을 마시고, 숲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숲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맞이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숲을 누리며 숲에서 뛰노는 어린이가 거의 없습니다. 도시에서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어린이만 많습니다. 시골에 살아도 도시와 엇비슷하게 입시지옥에 얽매이는 삶입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글을 쓴다면, 스스로 겪거나 누리거나 본 모습을 담겠지요. 숲을 누리지 못했으니 숲빛을 글로 쓰기 어렵고, 숲내음을 마시지 못했으니 숲놀이를 그리기 어려우며, 숲살이를 즐기지 못했으니 숲사람이 꿈꾸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어려워요.


  린드그렌 님은 “상상력이란 바로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어난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한 인간의 상상 속에서 형태를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겨났겠습니까(149쪽)?” 하고 이야기해요. 생각이란 날개이고, 날개는 홀가분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날갯짓을 하는 삶이고, 날갯짓을 하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홀가분한 넋입니다.


  작가가 책을 쓰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예창작학과를 다녀야 글을 쓰거나 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받거나 작품집을 내놓았다고 해서 ‘작가’가 아닙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삶을 즐겁게 누린 사람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어릴 적에 즐겁게 놀면서 생각날개를 훨훨 펼친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누린 놀이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글을 쓰고 책을 묶습니다. 사랑스럽게 즐긴 삶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놓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일 때에 찬찬히 우러나옵니다. 좋아하는 넋일 때에 가만히 샘솟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나 억지로 글을 써야 한다면, 겉보기로는 짜임새가 탄탄하거나 줄거리가 재미있게 보인다 하더라도,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책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글은 보고서가 아니고, 책은 논문이 아니거든요. 글은 웃음이면서 노래입니다. 책은 사랑이면서 빛입니다.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놀던 하루가 글로 태어나요. 어깨동무하면서 숲을 뒹굴던 나날이 책으로 거듭납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잘 놀아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면서 뛰놀고 나서야 비로소 글이 나와요. 책을 쓰고 싶다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에 깃들어 고운 바람을 쐬어 보셔요. 가슴을 활짝 펴면서 지구별 기운을 누리면 시나브로 책이 나와요.


  어머니가 아이를 돌본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출퇴근 하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논밭을 일구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고 숲을 돌보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이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즐겁게 누리고 나서야 이야기가 하나둘 나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웃고 노래하며 뛰놀던 삶이 밑바탕이 되어 글을 쓰거나 책을 씁니다. 그나저나, 왜 숲에 깃들어야 글을 쓸 수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셔요. 사람은 누구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들이켜며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야 살아요. 아스팔트 찻길과 시멘트 건물만 있는 도시에는 이 모두가 없어요. 이 모두는 숲에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기에 삶을 살리고, 삶을 살리기에 사랑을 살리지요. 책을 쓰는 사람이란, 삶을 쓰는 사람입니다. 삶을 가꾸듯이 글을 쓰기에 책 한 권이 태어납니다. 4347.5.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책 푸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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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39) -의 : 세 명의 숙녀의 생


한 가지 확실한 건, 세 명의 열두 살 숙녀들의 생에 새로운 추억 하나가 새겨졌던 사실입니다

《고은명-후박나무 우리 집》(창비,2002) 75쪽


 세 명의 열두 살 숙녀들의 생에

→ 열두 살 숙녀 세 사람 삶에

→ 열두 살 아가씨 세 사람 삶에

→ 열두 살 꼬마 아씨 세 사람 삶에

→ 열두 살 우리 세 사람 삶에

→ 열두 살 우리들 삶에

 …



  한자말 ‘숙녀’를 그대로 둔다면 “숙녀 세 사람”이라 하면 됩니다. 한자말 ‘숙녀’를 손본다면 “우리 세 사람”이라 하면 돼요.


  보기글을 쓴 분은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자만 밥하거나 빨래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글흐름을 본다면 “숙녀 세 사람”보다는 “우리 세 사람”이라 할 때에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열두 살 어린이가 스스로 ‘숙녀’라 말하는 대목도 그리 알맞지 않습니다. 정 무언가 꾸미면서 쓰자면 “꼬마 아가씨”나 “꼬마 아씨”쯤으로 쓰면 됩니다.


  우리는 ‘신사(紳士)’나 ‘숙녀(淑女)’가 아니에요. 가시내이고 머스마이며, 여자이고 남자이며, 그저 사람입니다. 한겨레는 따로 이런 한자말로 사람을 가리키지 않았어요. ‘상냥하다’나 ‘착하다’나 ‘얌전하다’나 ‘점잖다’ 같은 낱말을 붙이면서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4347.5.18.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한 가지는 틀림없어, 열두 살 우리 세 사람 삶에 새로운 이야기 하나가 새겨졌습니다


한자말 ‘숙녀(淑女)’는 “(1)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현숙한 여자 (2) 보통 여자를 대접하여 이르는 말 (3) 성년이 된 여자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한국말 ‘아가씨’는 “(1)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2) 손아래 시누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3) 예전에,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말 ‘색시’는 “(1) = 새색시 (2)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젊은 여자 (3) 술집 따위의 접대부를 이르는 말 (4) 예전에, 젊은 아내를 부르거나 이르던 말”이라고 하며, ‘새색시’는 “갓 결혼한 여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씨’는 “아랫사람들이 젊은 부녀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가만히 살피면, ‘숙녀 (1)’ 풀이 때문에 초등학교 가시내한테도 “열두 살 숙녀”처럼 쓰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한국말 가운데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여자’를 가리키는 낱말은 없을까 궁금합니다. 한국말 ‘아가씨’와 ‘색시’와 ‘아씨’는 이러한 뜻을 나타낼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왜 한국말에는 새로우면서 밝은 뜻을 담으려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확실(確實)한 건”은 “한 가지 틀림없는 것은”이나 “한 가지는 틀림없어”로 손질하고, “세 명(名)의 숙녀”는 “숙녀 세 사람”이나 “꼬마 아씨 세 사람”이나 “우리 세 사람”으로 손질합니다. ‘생(生)’은 ‘삶’으로 손보고, ‘추억(追憶)’은 ‘이야기’로 손보며, “새겨졌던 사실(事實)입니다”는 “새겨졌습니다”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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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명함



  책방 명함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책방이 사라지니까. 아니, 자그마한 책방이 사라지니까. 커다란 책방에 명함이 있을까? 이를테면 교보문고 명함이나 영풍문고 명함이 있을까? 누리책방인 알라딘이나 예스24에 명함이 있을까?


  책방 명함은 자그마한 책방에서 쓰던 쪽종이이다. 작은 책방은 책갈피(책살피)에 책방 이름을 조그맣게 박아서 나누어 주곤 했다. 커다란 책방도 커다란 책방 이름을 큼직하게 박아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커다란 책방은 커다란 종이봉투까지 있다. 작은 책방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종이봉투 또는 종이가방이다.


  아주 작지는 않고 아주 크지도 않은 책방에서는 ‘책방 비닐봉투’를 쓰기도 한다. 웬만한 책방은 책방 이름을 새긴 비닐봉투를 ‘책방 명함’으로 삼기도 한다.


  동네마다 있던 작은 새책방에서는 명함을 거의 안 썼다. 왜냐하면, 동네 새책방이라 하더라도, 전화를 걸어 책을 주문하고, 책방에 앉아서 새책을 받으니까.


  책방 명함은 으레 헌책방에서 썼다. 헌책방은 새책방과 달리 ‘책을 사려면 집집마다 돌아야’ 하거나 ‘책을 찾으려고 고물상이나 폐지수집상을 돌기’도 한다. 그러니, 헌책방으로서는 명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동네를 돌면서 책방 명함을 뿌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을 건넨다. 집안에서 책을 치워야 한다면, 부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날에는 동네마다 새책방이 많았고 헌책방도 많았다. 지난날에는 동네에서 읽은 책은 으레 동네에서 돌고 돌았다. 동네 새책방이 새로 나오는 책을 먼저 팔고, 동네 헌책방이 이 책들을 받아들였으며,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 책들을 사고 팔며 읽고 되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웠다.


  돈이 제법 넉넉하면 새책방을 찾는다. 돈이 좀 모자라면 헌책방을 찾는다. 비매품이라든지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을 헌책방이 건사하기에, 돈이 제법 넉넉해도 ‘새책방에 없는 책’을 찾으려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한다. 미군부대나 외국인학교에서 버리는 외국책을 만난다든지, 나라밖으로 떠나는 사람이 내놓는 값진 책을 만나고 싶어 헌책방으로 마실을 한다.


  이래저래 책방 명함은 쓸모가 많다. 아직 헌책방이 있다면, 아직 헌책방이 씩씩하게 동네마다 책삶을 밝히고 책빛을 가꾼다면. 4347.5.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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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으니까



  책이 좋으니까 손에 쥔다. 책이 좋으니까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한 쪽 두 쪽 읽는다. 책이 좋으니까 가슴에 포옥 안는다. 책이 좋으니까 나한테 사랑스러운 이웃한테 책을 한 권 선물한다.


  책이 좋으니까 한 권 두 권 그러모아 집안에 책을 모신다. 책이 좋으니까 다 읽은 책을 책꽂이에 곱게 건사한다. 책이 좋으니까 다 읽은 책을 동무한테 건넨다. 책이 좋으니까 ‘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 아름다운 책’을 나도 스스로 써 보자고 생각하면서 연필을 쥔다. 4347.5.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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