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손석춘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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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섬기는 삶이 사람을 섬기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5] 손석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거님길 바닥돌을 새로 갈아치우는 데 들일 돈으로 교육과 문화와 복지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참 예전부터 불거져 나왔으나 아직까지 공무원 귓결에 스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공무원 귓결뿐 아니라 정치꾼 귓결에도 안 스치고 있으리라 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금세 자라는가를 헤아린다면, 굳이 돈을 들여 거리거리에 벚나무를 잔뜩 심지 않아도 넉넉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나무심는날에 맞추어 반마다 몇 사람씩 거리거리 다니면서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거나 나무 씨앗 하나를 심어서 고이 기르도록 한다면,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심은 나무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들한테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랍니다. 이 나무는 이 어린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에는 어른들한테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겠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심어 스스로 기르고 돌본 나무일 때에는 이 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낍니다. 나중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할 때에는 골골샅샅 숱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사람들 터전을 아름다이 가꾸는 길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을 들여 꾸밀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움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땀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며 손길을 바치면 언제나 아름다움하고 가까울 뿐 아니라, 이러한 땀과 마음과 손길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살리기’라는 토목공사가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살리기’라는 이름을 붙여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데, 이 나라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가 바로 토목공사에서 비롯합니다. 주택보급율이 일찌감치 100퍼센트가 넘었어도 아파트 짓기를 멈추지 않을 뿐더러, 제 고향마을인 인천 같은 곳은 240만 인구를 360만이 되도록 아파트를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꿈까지 꾸고 있는 까닭이란, 바로 이와 같은 토목공사 일자리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서민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산층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더욱이,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서민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중산층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재벌이 드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많은 돈’에 휩쓸리고 있으며, 이러한 소용돌이는 광고지와 다를 바 없다는 몇몇 신문뿐 아니라 스스로 왼쪽이라느니 진보라느니 하고 내세우는 신문까지 어슷비슷합니다. 어떠한 신문이든 자유로운 목소리가 아닌 광고주를 찾아 돈을 벌어 일삯을 치르고 글삯을 내어 밥벌이를 하는 얼거리에 매여 있습니다.


.. 다만, 언제까지 기성세대의 잘못만 추궁할 일은 아닙니다. 기성세대 탓만 하다가는 소중한 10대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인생도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문제는 흑백의 울타리에 갇힌 민주주의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가두는 데 있습니다 ..  (27, 240쪽)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혁명처럼 내놓았던 손석춘 님이 젊은이들한테 ‘온누리를 옳게 읽는 자기계발서’ 틀거리로 엮어 내놓은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손석춘 님은 아주 너그럽게도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책을 따로 써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애써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지식청년 자기계발서’가 없이는 이 나라 젊은 지식인들이 ‘신문읽기’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레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신문읽기이니 영화읽기이니 책읽기이니 사진읽기이니 그림읽기이니 교육읽기이니 정치읽기이니를 ‘어떤어떤 자기계발서’를 들추어야 비로소 알아채는 지식인이 더없이 많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젊은이이든 중고등학생 푸른 넋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곧은 삶을 일구지 못하는 가운데 스스로 곧은 책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곧은 말을 붙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이 아무리 허접하고 엉터리보다 못한 이야기를 줄줄 읊고 있더라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맑고 밝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군가한테 돈을 먹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퍼뜨리는 목소리가 판을 치든 떡을 치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으면 올바로 읽을 올바른 삶입니다. 책을 읽으면 올바로 되새기는 올바른 넋입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 올바로 배우고 가르치는 올바른 매무새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까닭에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같은 ‘또다른 자기계발서’를 찾아 들고야 맙니다. 우리가 찾아 들어야 할 책이라면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이어야 할 터인데,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을 쥐어도 속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찾고 새겨야 할 책이라면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이어야 할 텐데,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을 거듭 살피더라도 온몸으로 삭이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막강한 자본의 힘을 배경으로 대화를 봉쇄하거나 대화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여론몰이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자본을 소유한 극소수 사람들은 여론이 공론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다수인 민중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다 보면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같은 이유에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절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인 양 호도합니다 ..  (107쪽)


 손석춘 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빗대어 우리 삶터가 얼마나 ‘안 민주주의’이거나 ‘민주주의를 억누르’거나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말 우리 삶터는 아주 글러먹은 독재요 봉건이요 식민지요 쇠사슬입니다. 이는 정치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머리길이를 다그치고 치마와 바지 매무새를 나무라며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며 아이들 스스로 제 고운 삶을 붙안지 못하게끔 가로막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넋 올바른 삶이라 한다면 올바른 말로 올바른 길을 이야기하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습니다. 헌법을 내리누르고 있는 터무니없는 교칙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칙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누구나 알리라 봅니다만, 아마 오늘 우리 터전에서는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은데, 학교에서는 교장이 임금님입니다. 우두머리요 왕초입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학교에서 교장이 임금님이요 우두머리요 왕초인 얼거리는 그대로입니다. 외려 나날이 더 깊어진다 할 만하고, 되레 갈수록 단단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예전처럼 손찌검을 한다든지 몽둥이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주먹다짐이 살짝 줄었지 돈과 권력으로 휘두르는 몹쓸 짓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같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교칙이며 교장 권력이고 교육감 지휘봉입니다.


.. 국민은 언제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만 강조하는 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없애는 과정에 국민이 하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을 때, 법치는 비로소 민주주의입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법을 만들거나 고치고 없애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  (126쪽)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총칼이나 주먹다짐이 아닌 말로 일을 풀어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입니다. 속알맹이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떤 일이고 말로 풀리는 법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주가 말을 나누며 일을 푸는 모습을 보기란 참 힘듭니다. 꼭 집회를 해야 하고 어김없이 몸싸움을 해야 합니다. 헌법에는 집회를 하는 자유가 적혀 있으나, 어떠한 일터에서도 집회를 하는 자유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집회를 꺾어 누르는 경찰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패고 감옥에 집어넣기까지 하거나 벌금을 왕창 물립니다.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말로 일을 푼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어림 반푼어치조차 안 됩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말이나 평화로운 몸짓으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민주주의가 없는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허울만 좋은 거짓 민주주의는 쓸어내고 싶다면, 말로는 아무런 일을 풀거나 맺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야말로 온몸으로 두들겨맞는 삶을 건사하고 싱긋싱긋 방긋방긋 웃으면서 평화로운 말과 몸짓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사람들하고 똑같이 삿대질을 한다고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못난 엉터리들하고 마찬가지로 주먹다짐을 한다고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고 민주주의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 손석춘 님은 ‘젊은 지식인한테 도움이 될 자기계발서’로서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를 쓰셨는데, 이 나라에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이러한 자기계발서는 안 써야 맞습니다. 우리가 쓸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기성세대라 하는 우리 어른 가운데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서 ‘나는 내 터전에서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롭게 살아가는가’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 그런데 왜 자신의 미래 모습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 물구나무 선 인식을 하고 있을까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주권 의식을 가지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노동 운동을 폄훼해 왔기 때문입니다 ..  (188∼189쪽)


 손석춘 님이 쓸 글은 아름다운 문학이어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젊은이 앞에 선물해 줄 책은 슬기로운 삶자락 이야기여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머리를 쥐어짜며 풀어낼 말마디란 ‘국어사전에 숨어 있는 예쁘장한 낱말’이 아니라 ‘저잣거리 여느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당신들끼리 주고받는 가장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을 써낸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알아채 주지 않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아름다운 문학보다는 ‘꼴통 보수들이 휘두르는 총칼 같은 무기’에 맞설 만한 ‘총칼 같은 지식조각’들이니까요. 슬기로운 삶자락을 들려준다 한들 젊은 지식인들은 삶이 아닌 입으로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하거나 모임을 꾸리기 때문에 더없이 고단합니다.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마디로 책을 쓰면 아주 반갑지만, 이러한 책에 깃든 멋과 맛을 듬뿍 받아들이며 받아먹는 고운 젊은 넋은 얼마 안 됩니다.

 아마 ‘자기계발서’가 아닌 ‘삶책’을 쓴다면 손석춘 님은 굶어죽기 딱 알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굶어죽기 딱 알맞을 책을 손석춘 님 같은 분들이 써야 합니다. 굶어죽을 다짐으로 삶책을 써야지, 웬만큼 팔리고 읽힐 만한 자기계발서를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손석춘 님이 이 땅에 참되고 착하고 고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워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거나 꿈꾸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요?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고개 숙여 뉘우칩니다. (4343.5.16.해.ㅎㄲㅅㄱ)


 ┌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2010)
 ├ 글 : 손석춘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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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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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 사진책은 시중 책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지율 스님 다른 책에 이 글을 걸쳐 놓는다. 이 사진책은 녹색평론사에 전화해서 주문해야 한다. 이 사진책을 보고 싶은 분은 한 권에 3000원이니 10권을 3만 원에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주신다면 더없이 고맙겠다.)
 

 






 낙동강 삶터와 거짓말하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8] 지율 스님, 《낙동강 before and after》



- 책이름 : 낙동강 before and after
- 글ㆍ사진 : 지율 스님, ‘낙동강 숨결 느끼기’ 순례 동행들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10.3.31.)
- 책값 : 3000원
(http://www.chorok.org)


 (1)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을 참말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진은 참말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참을 밝히는 글이 있으나 거짓으로 가득한 글이 있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한편, 거짓으로 넘실거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참을 숨긴 목소리가 있고 참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사진을 다르게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쪽에 서 있느냐 저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요. 우리 동네 한복판에 51층으로 올라설 아파트는 누군가한테는 아주 멋진 집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51층짜리 아파트 둘레에서 햇볕을 쬐지 못하고 찬바람만 씽씽 불어대는 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한테는 끔찍한 집자리입니다. 돈 몇 푼으로 햇볕권을 갚아 줄 수 없는 노릇이요, 살림을 꾸리는 넋을 보듬을 수 없습니다.

 헌책방을 속깊이 헤아리면서 책시렁을 가만가만 살피는 이들한테는 헌책방에서 숨죽이는 책들이 어떻게 아름답고 좋은가를 온몸으로 깨달으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묻기만 하거나 어쩌다 한 번 지나치는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람한테는 헌책방처럼 구지레하거나 어수선한 데는 따로 없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보배로운 책을 찾고 얻는 헌책방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아무런 책이 없는 헌책방입니다.

 골목길을 오로지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으로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은 내 터전인 골목길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습니다. 곱고 맑고 살갑게 일구고 돌봅니다. 골목동네 사람한테 골목길이란 추억 아닌 삶(현실)이며, 퇴락한 곳이 아닌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과 부산을 네 시간으로도 모자라 두 시간 반이나 두 시간 만에 오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수천 억이 아닌 수십 조를 쓰더라도 빠른기차를 놓아야 합니다. 수천 억이나 수십 조를 교육과 복지에 바쳐서, 대학 교육까지 개인이 돈을 내지 않고 나라에서 돈을 내도록 하면서 튼튼하고 곧은 배움마당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빠른기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논밭과 산들과 냇물이 파헤쳐지거나 무너지거나 앓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주 빨리 휙휙 지나치는 ‘풍경’이지, 숱한 목숨과 사람이 기나긴 나날을 보내온 삶터에 기찻길을 놓았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빠른기차를 달리며 바깥을 바라보는 사진하고 기찻길한테 자리를 내준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서 빠른기차를 바라보는 사진은 다릅니다. 빠른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기차가 내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 있는 사람은 삶자리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등에 업으며 귀를 막아야 합니다.

 자가용을 타고 골목을 쌩 하니 달리며 내다보는 모습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휙휙 달리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이랑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릴 때 골목을 쳐다보는 모습이랑 아이 손을 잡고 거닐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빨리빨리 달리기만 해서는 골목을 느낄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머리속에 자질구레한 생각조각이 많으면 골목을 한갓지게 거닐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습니다.

 사진 하나를 찍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사진감인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이나 물건하고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구경하는 삶으로는 구경하는 사진일 뿐입니다. 여행하는 사진은 거의 모두 구경꾼 사진입니다. 이러다 보니 여행 사진은 으레 그럴싸하거나 멋들어진 모습으로 꾸미려 할 뿐, 그 좋다고 하는 곳을 두루 다니면서 맛보고 받아들인 좋은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 가운데 스스로 조촐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합니다. 내 삶터를 찍고 내 사랑이를 찍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찍어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아파트를 아끼며 빠른기차와 자가용을 아끼는 사람한테는 ‘쇠삽날 재개발 정책’에서 장미빛 꿈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면서 큰물을 막는다느니 물을 잘 살려쓸 수 있다느니 일자리를 늘린다느니 아름다운 나라로 탈바꿈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잔뜩 파헤쳐진 강바닥을 보면서 ‘이제 더 멋지게 다시 태어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강바닥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바라보면서 ‘꿈처럼 아름다운 관광길’이 태어나겠거니 생각합니다. 서울 청계천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돈을 좋아하지 않고 자연 삶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4대강 살리기’란 무서운 말장난이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느라 정작 우리 삶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뿐 아니라, 일찌감치 우리 둘레 우리들 조그마한 터전부터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와 막개발이 판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좋은 삶 좋은 삶터 좋은 자연이란 사람이 돈을 써서 억지로 꾸밀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살리거나 사랑한다면 자연을 그대로 놓아 두기만 하면 되는 줄 헤아립니다. 씨앗 하나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넉넉한 줄을 읽습니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으며 자연스러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터전이요, 이 아름다운 터전에서 우리들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멋과 웃음이 있음을 느낍니다.

 온누리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든 사람 눈높이와 삶자리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사진이 됩니다. 구경꾼 사진은 동네 주민한테 거짓말 사진입니다. 동네 주민 사진은 구경꾼한테는 거짓말 사진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뜯어고치고자 집회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거짓말입니다.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경찰하고 한 자리에 선 사람들한테는 짓밟히고 억눌려서 집회를 하겠다는 사람들 이야기와 삶이 거짓말입니다. 흔히들 ‘왜곡 사진’이니 ‘비틀린 기사’이니 하지만, 왜곡이나 비틀림이란 없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매무새가 당신들 삶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꾸미거나 겉발림하는 모양새가 당신들 삶입니다. 큰 돈과 큰 집과 빠른 차를 바라는 이들하고 가난과 작은 삯집과 두 다리로 살아가는 이들하고는 참거짓을 가르는 잣대와 금과 틀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삶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지만,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꾸리지 않을 뿐더러,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돈바라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돈바라기 사진이라는 허울을 감추고 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 지율 스님 사진 《낙동강》


 ㅈ일보는 지율 스님이 찍은 사진을 놓고 “이들의 허위 선동은 국민 가슴에 근거 없는 증오를 심고,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든다(2010.5.11.)”고 이야기합니다. 또다른 ㅈ일보는 “현지 민심부터 읽어야 한다. 더 이상 식상한 이벤트로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려면 논리적인 설득만이 유일한 길이다(2010.5.13.)”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율 스님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녹색평론사)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사진책을 내놓으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ㅈ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거나 기자로 뛰는 분들이 지율 스님 사진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며, 지율 스님 사진잔치에서 사진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지율 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 강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세워진 시멘트 기둥을 자연과 신의 선물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4대강 사업은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의 강은 원형을 잃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녹색의 그믈망에 덮여 있는 저 베어진 나무들은 얼마전 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바로 이 강가에 서있던 생명들이었다. 한 나무들의 봄은 우리의 봄이었고 그 나무들의 여름은 우리들의 여름이었다. 그 나무들의 죽음은 바로 계절의 죽음이며 강의 죽음이며 우리들의 죽음이다 ..  (초록의 공명/2010.2.11.)


 지난 2007년에 사진쟁이 홍순태 님이 《낙동강》(눈빛)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홍순태 님은 1970년대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책 하나로 묶었습니다.

 올 2010년에 스님 지율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라는 작은 사진책을 내놓으며 2009년과 2010년에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 빛을 본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2000년대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1970년대 낙동강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진책 《낙동강》은 1970년대에 홍순태 님이 찍은 사진일 뿐, 1960년대나 1950년대나 1940년대나 이 사진에 깃든 모습하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바꾼다면 1870년대라든지 1770년대라든지 1670년대하고도 다를 바 없겠지요. 아마 1070년대라든지 570년대하고도 어슷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빛을 보는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2000년대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쇠삽날 개발 정책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2009년과 2010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모습이 어떻게 사라지고 마는가를 찬찬히 알려줍니다.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낙동강은 단순히 자연경관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만이 아니라 물의 원천이요, 물은 인간의 희망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을 살찌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수자원의 원천이며 우리 고유문화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고 덧붙입니다.

 스님 지율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라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천성산을 통해 나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신고 다니는 신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국토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천성산을 밟아 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없는 자들의 기술적인 잣대에 의하여 천성산은 무너지고 파헤쳐졌다. 천성산은 내게 우리의 국토가 처해 있는 아픔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기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 눈이 아픈 현장들을 담은 사진전을 여는 이유는 -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없이 무참하게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4대강 개발의 실상을 알리고,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하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한 시대를 살다간 한사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우리 뒤에 올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  (초록의 공명/2010.3.30.)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밥굶기 싸움에 이어 사진찍기로 접어들었을까요.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그토록 기나긴 밥굶기 싸움을 하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그토록 가녀린 몸뚱이로 작은 사진기를 어깨에 달랑달랑 걸치고는 기나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고 또 걷고 다시 걷고 있을까요.

 《낙동강》을 펴낸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강물이 얼어붙을 때이든 큰물이 져 풀집이 물에 잠기든 낙동강으로 달려갔습니다.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펴낸 스님 지율은 낙동강 물줄기에 쇠삽날이 한 번 찍히고 두 번 찍힐 때마다 거듭거듭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있습니다.


.. 제가 초록의 공명이라는 이름의 창을 쉽게 닫지 못했던 것은 문명과 자본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과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혹은 소유하는 행위가 계속 된다면 이 오리섬에 깃들었던 많은 생명들의 몰락처럼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도 지구라는 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질 동원은 무수히 많아 보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 더 사실적이기는 합니다 ..  (초록의 공명/2010.2.3.)


 무엇을 참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거짓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연에는 태어남만 있지 않고 죽음이 함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사람 삶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담아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다고 읽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은 거짓부렁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거짓부렁이라고 온나라 수백만 사람들한테 외치고 있는 사람이 거짓부렁 목소리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목소리는 고작 수십 또는 수백 사람 귀에만 들어가는데, 수백만 사람 앞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이 낮고 작은 목소리가 무엇이 그리도 무섭거나 두려워서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아냥거리기 앞서 지율이라고 하는 스님 하나가 선 낙동강 물줄기에 나란히 서 있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기 앞서 산을 보고 물을 보며 흙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물과 바람과 밥이 아닌 돈과 이름과 힘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 “여러분도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걸으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먼젓번 순례에 참가한 외국인 한 분은 전 세계 어디서도 낙동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36쪽)


 서울과 부산을 잇는 빠른기차를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빠른전철을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빠른기차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 거의 안 멈추고 달립니다. 빠른전철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서 드문드문 설 뿐 신나게 달립니다.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이웃동네를 오갈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전철이 있어야 합니다. 옆동네를 드나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넘어, 자전거와 두 다리와 아기수레로 오갈 조용하고 걱정없으며 오붓한 길이 있어야 합니다.


.. 지난 주말, 설악산의 단풍객이 5만이 넘었고, 해운대 광안리 불꽃놀이 인파가 70만을 넘었으며, 올 시즌 야구 관람객은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오색 단풍의 풍광, 바닷가의 현란한 불꽃놀이, 운동장의 함성과 열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다. 하지만 억만 년 이어져 내려온 자연의 물길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 재앙에 대한 경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되고 있어도, 태어나 자라게 해 준 국토가 겪는 아픔의 현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너무나 드물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10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기는 사진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은 거의 모두 빠른기차와 빠른전철하고 맞닿은 사진입니다.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닮은 사진이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는 사진은 더욱 드뭅니다. 아기수레를 끄는 사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두 다리로 거니는 사진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습니다.

 저는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우리 옆지기도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엄마랑 아빠가 손빨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딸아이 또한 손빨래를 사랑하여 머잖아 제 손으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는 날을 맞이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식구 옷가지를 손빨래로 깨끗하게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듯이 제가 마주하는 삶을 손빨래하는 마음으로 사진 한 장에 담고 두 장에 싣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손빨래를 하고, 두 다리로 걸으며, 동네에서 생협하고 어깨동무하는 내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일하며 알맞게 노는 삶을 좋아합니다.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하고 지율 스님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포개어 놓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고작 50쪽짜리인데다가 앞등조차 없어 책꽂이에 꽂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여느 책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여쭈어야 따로 받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낮은 자리에서 만들며 낮은 자리에서 나누는 사진입니다. 이런 낮은뱅이 사진이 뭇사람을 쑤석거린다든지 엉터리 이야기를 퍼뜨린다든지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낙동강에 선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니까요. 낙동강에 박힌 쇠말뚝을 본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파하는가를 받아들이니까요.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우리가 기나긴 나날 아름다이 건사해 오며 울고 웃고 보듬던 물줄기 삶터를 보여줍니다.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며 등돌리는 바람에 앞으로는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할 슬픈 물줄기 생채기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말없이 말하기도 하지만, 사진은 슬픔을 눈물과 함께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진은 사랑이지만, 사진은 미움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눈물을 담은 땀방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겉치레 돈벌레 몸짓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따스한 손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우악스런 주먹다짐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너그러운 어버이 품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차가우며 매몰찬 총칼이기도 합니다. (4343.5.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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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강승숙 선생님의 그림책 수업 일기 살아있는 교육 21
강승숙 지음, 노익상 그림 / 보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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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한테 좋은 책 하나 읽히기 앞서
 [그림책이 좋다 80] 강승숙,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책이름 :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글 : 강승숙
- 사진 : 노익상
- 펴낸곳 : 보리 (2010.4.12.)
- 책값 : 15000원



 (1) 제도권 학교 교사들


 요즈음 초등학교는 한 반에 스물∼스물다섯 즈음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이런 숫자가 될 만큼 발돋움했으니까요. 그러나 담임교사 한 사람이 맡는 아이들 숫자는 줄었을지라도 교사 한 사람이 맡을 행정 일감은 그리 줄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맡아야 할 아이들 숫자가 줄었으면 그만큼 아이 하나하나한테 더 마음을 기울여 참되고 착하고 고운 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할 텐데, 예나 이제나 대학바라기 배움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끔찍한 대학바라기로 바뀌는 한편, 집과 마을이 학교와 함께 맡아야 할 몫을 놓거나 잃거나 잊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1982년부터 고등학교를 마친 1993년까지, 학교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어 준 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를 가르친 분 한 사람이 있었을 뿐, 열두 해에 걸쳐 시집이나 소설책이나 그림책이나 동화책 한 번 읽어 준 분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반에 예순 안팎이던 학교였고, 교과서 진도 나가기 바쁜 가운데, 날마다 쏟아내는 숙제를 살피어 몽둥이찜질로 열고 닫는 학교였던 만큼, 교과서 아닌 책을 들고 다니는 교사를 찾아보는 일부터 잘못일는지 모릅니다. 제도권 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교과서 아닌 책’은 ‘불온도서나 불온소지품’으로 여기던 학교였고, 국민학교 때이든 중고등학교 때이든 교과서와 참고서와 공책과 준비물 따위로 가방이 몹시 무거웠기에 ‘교과서 아닌 책’을 따로 챙겨 들고 다니는 동무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적에 한둘 고작 있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님과 서머셋 모옴 님 소설을 영어책으로 읽던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고, 신경림 님이나 신동엽 님이나 김현승 님이나 릴케 님 시집은 고등학교 때에 ‘불온도서 압수품’이 되곤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우리들을 닦달하고 숙제벼락 퍼부어 몽둥이찜질을 하며 ‘학교 밖 탈선을 막는다’는 큰일을 하시느라 몹시 바쁘고 힘에 겨워 가벼운 소설책 하나조차 손에 쥘 기운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에 걸쳐 우리들을 밤 열한 시까지 학교에 꽁꽁 가두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자니,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잠이나 텔레비전 보기나 고스톱이지, 조용히 책읽기를 하며 당신들 마음닦이를 하실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따로 불러 돈봉투를 내라 하지 않은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만,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또는 아침저녁 모임을 하면서, 때로는 골마루에서 큰소리로 외치듯 대놓고 돈봉투를 내라 하던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 스승날을 앞두고 반장과 부반장은 돈봉투에 넣을 돈을 얼마씩 모아야 한다며 닦달하듯 돈을 거두는 한편, 선물을 따로 챙겨서 교탁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선물을 챙기기 어려운 몹시 가난한 동무가 있을 때에는 마음 좋은 동무가 한 가지씩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따돌림을 받는 동무라든지 자존심이 있는 동무는 선물을 내지 않고 ‘스승날을 기리며 스승한테 선물을 내지 않은 값’으로 종아리나 엉덩이를 두들겨맞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떠올리는 국민학교 여섯 해 나날 가운데 수업시간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몇 대목이 떠오르지만, 국민학교 적 이야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운동장이나 골마루나 교실 뒤쪽에서 뛰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교실 안쪽 이야기 가운데에는 얻어맞거나 폐품 모으기하고 성금 내기하고 환경미화 하기에다가 날마다 한두 시간에 걸쳐 끔찍하게 해야 했던 청소가 떠오릅니다. 가뜩이나 날마다 ‘짧아야 한 시간’을 골마루며 창문이며 뒷간이며 책걸상이며 학교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빛을 내느라 ‘밖에서 동무하고 놀 겨를’이 모자라 입이 뿌루퉁하게 나오며 쑹얼쑹얼거렸는데,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면 한 주나 보름 동안 ‘한 시간 + 한 시간’ 청소를 했고, 교육감이 들이닥치는 때에는 아예 수업을 안 하고 청소만 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교육감이 찾아온다며 청소하던 일이 고마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숙제가 너무 많아 다 못했기 때문에 그냥 수업을 했다면 숙제 안 한 만큼 흠씬 두들겨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기뻤던 대목은 국민학생 때하고 견주어 학교에서 청소하는 시간이 1/3이나 1/2로 줄었던 한 가지입니다.

 담임교사가 우리들 집을 찾아다니는 때에는 동네가 들썩들썩합니다. 다들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인 터라 ‘가정방문 교사한테 돈봉투를 주고 밥과 술 대접’ 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 집 저 집 다니며 돈을 꾸느니 먹을거리를 얻느니 반찬을 나누느니 하느라 부산했습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담임교사가 집에 들렀다 가면 담임교사는 여러 집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좀 늦게 오면 다른 집에서 배불리 먹을 테니 우리 집에서는 잔칫상 같은 밥상을 얼마 손을 못 대고 남겨서 이 남은 좋은 먹을거리를 우리가 신나게 먹는 날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어머니가 옆집에서 돈을 꾸어 비싼 딸기를 한 소쿠리 내놓았으나 담임교사는 다른 집에서 벌써 잔뜩 먹었다며 거의 손을 안 대고 돌아갔습니다. 형하고 저는 이날 딸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 학교 어디에도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을 만한 구석진 자리는 없다. 아름드리나무도, 아담한 뒤뜰도 없다. 그러니 자연 여자아이들은 화장실을 아지트로 삼는다 … 아이들과 같이 이 그림책을 보면서 산도 들도 빼앗기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다시 생각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피시방에 간다고, 텔레비전에 매달려 산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 전에 둘레에 아이들이 바라는 공간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31, 37∼38쪽)


 국민학교 적 모든 교사가 나쁜 마음 몹쓸 마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이었을 때에 담임을 하셨던 분은 여느 교사들과 달리 (몽둥이 아닌) 회초리조차 거의 든 일이 없었고, 무슨 일 때문에 일찍 다른 학교로 떠났는지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하면서 예순이 넘는 우리들한테 선물을 하나씩 ‘저마다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한테 받은 ‘삼미슈퍼스타즈 야구수첩’하고 편지를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교과서 아닌 《세계사 수첩》(민맥)이라는 책을 교과서처럼 삼으며 수업을 했던 분하고는 편지나 소식을 가끔가끔 주고받습니다.


 (2) 그림책 읽어 주는 교사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강승숙 님이 낸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강승숙 님은 지난 2003년에 《행복한 교실》이라는 책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사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지만, 이 숱한 교사들 가운데 교사일기를 꾸준히 쓴다든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적바림하는 분은 아주 드뭅니다. 교사일기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쓴다 할지라도 가슴이 뭉클할 만한 삶자락을 보여주는 분은 다시금 손가락으로 꼽아야 합니다.

 좋은 교사가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좋은 교사로 일할 만한 터전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교사일기를 써야지, 갖가지 자질구레한 행정서류를 쓸 노릇이 아닙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학교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누어야지, 부동산이니 자가용이니 여행이니 뭐니 하며 다른 이야기에 마음이 푹 빠질 노릇이 아닙니다. 학교 바깥에서 여느 사람으로 지낼 때에는 무얼 하든 마음껏 하면 됩니다. 다만 학교 안쪽에서 일할 때에는 학교를 생각하고 학생을 헤아리며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이음고리를 살필 노릇입니다.

 “책 한 권으로 아이들 마음이나 행동이 크게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를 깊이 생각할 기회는 생길 것 같다(171쪽).”고 이야기하는 강승숙 님입니다. 틀림없이 책 한 권으로 아이들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과서를 제아무리 잘 가르친다 할지라도 아이들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동네에서 동네 어른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내보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집식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가까이에 마음을 달래 줄 자연조차 없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는 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 2008년에 4학년 아이들하고는 이 그림책을 재미있게 보았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는 내내 자기네가 사는 집과 식구들을 생각하는 듯했고, 불만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보통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은 멋진 아파트를 꿈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개들이 마중 나오고, 할머니가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할아버지가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는 ‘만희네 집’을 몹시 부러워했다 …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넉넉하지 못한 주영이네와 그림책 속에 나오는 부유한 집안 풍경이 대조가 되어 읽어 주기가 민망했다. 집에 대한 주영이의 아쉬움은 《돼지책》을 읽을 때도 강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나오는 피곳 씨 부인은 아들 둘과 남편의 도구 같은 존재였다. 밥해 주는 여자, 집안 정리해 주는 여자, 그 피곤함을 전반부에 잘 그리고 있다. 힘든 여자의 처지를 잘 이해했을 텐데도 주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좋겠다. 집이 좋잖아요.” ..  (63, 275, 296쪽)


 슬기롭고 아름다이 거듭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어리석고 짓궂게 굴러떨어질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착하고 참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되고 구지레하고 나뒹굴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삶이란 둘레 어른들 삶에 따라 다릅니다. 둘레 어른들 스스로 당신들 삶을 먼저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되이 가다듬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책 한 권 읽어 줄 겨를을 낸다면 더없이 고맙습니다만, 책 한 권 안 읽어 주거나 못 읽어 주어도 괜찮으니까, 부디 옳고 바르고 곱게 당신들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 옳은 삶이 아이들 옳은 삶으로 이어지니까요. 어른들 바른 넋이 아이들 바른 넋으로 옮아가니까요. 어른들 고운 말이 아니들 고운 말로 대물림하니까요.


.. 《새앙 쥐와 태엽 쥐》, 나는 이렇게 마음이 따스해지는 그림책이 좋다 …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권정생 선생님이 쓴 글은 꾸밈없는 시골 아저씨 이야기처럼 담담하다. 기교를 부리지도, 형식을 실험해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작품에 공감한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의 힘, 또는 삶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야기를 만들려고 애쓰는 데서 동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선생님을 둘러싼 삶의 아주 작은 구석부터 거대한 사회 흐름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  (80, 153쪽)


 교사 강승숙 님은 살아숨쉬는 배움터를 생각하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일인 ‘그림책 읽기’를 함께합니다. 먼저,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을 찾는다기보다 당신 스스로 좋아하거나 당신한테 반갑고 좋을 그림책을 찾습니다. 꼭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한다기보다, 학급문고로 그림책을 갖추어 놓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먼저 찾아 읽도록 하는 한편,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도록 그림책을 읽는 일을 거듭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그림책 읽기를 억지로 내세우거나 앞세운다면 이는 제도권 교과서 달달 털어내는 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제아무리 맛나고 좋은 밥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밥술을 들어 떠먹어야 하거든요. 수저질을 잘 못해서 밥알을 떨어뜨리더라도 아이들이 차근차근 손아귀힘과 손가락힘을 길러 스스로 밥을 떠먹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든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좋다는 책 하나를 읽든,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가장 기쁘고 신날 책 하나를 알아보고 찾아내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집에 가서 다시금 찬찬히 그림책을 보았다. 그리고 책 뒤표지에 붙어 있는 색종이를 접어서 고양이를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내가 감동하여 읽은 이 책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 열 번도 넘게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 오는 《까마귀 소년》. 좋아하는 그림책을 보여줄 때면 아무래도 읽어 줄 준비를 더 잘하게 되나 보다. 늦은 밤 이불에 엎드려 그림책을 다시 보았다. 동무들과 선생님을 무서워하던 주인공 땅꼬마 아이를 보니 어릴 적 동무들과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생각났다. 지저분하고 공부 못한다고 놀림받던 명자는 늘 혼자였다. 명자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동무들이 노는 모습을 한쪽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해마다 명자처럼 동무 없이 지내는 쓸쓸한 아이들이 한둘씩 꼭 있었다 ..  (106∼107, 123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강승숙 님네 아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강승숙 님이 읽어 주는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괜찮은 책이든 안 괜찮은 책이든 떠나, 아이들한테는 ‘숙제나 짐처럼 떠안기는 추천도서나 명작동화’가 아니라, 살과 숨과 목소리와 땀을 함께 느끼며 빠져드는 고운 이야기를 나누는 배움이거든요. 아이들은 저희하고 놀아 주는 교사가 좋지, 아이들한테 매섭거나 무서우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교사가 좋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딱딱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사로운 어깨동무가 좋은 아이들입니다. 무슨 지식조각이나 어떤 지식부스러기를 나누어 주지 못할지라도 함께 고무줄을 하고 같이 금긋기놀이를 하는 어른이 좋은 놀이동무요 일동무요 배움동무입니다.

 예부터 스승이란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배우는 사람이지만 배우기만 할 뿐 아니라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사이요, 어버이와 아이 또한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살붙이입니다.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은 교사 된 사람들이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이렁저렁 읽어 주어야 좋다는 생각을 펼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그림책을 꼭 읽히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아이들 앞에서 읽어 줄 때에 교육 효과가 크다고 떠벌이지 않습니다.

 한 학급 숫자가 예순이나 여든일 때에도 얼마든지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었으나, 한 학급 숫자가 고작 스물이나 서른인 오늘날에는 누구나 그림책 읽기를 어렵잖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렵잖이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이들 삶에 더 깊숙하게 스며들면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겯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으로 우리 매무새를 다독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승숙 님은 이처럼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 되기’를 그림책 읽기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저마다 다른 길과 흐름에 맞추어 아이들 앞에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이 될 삶을 찾아 주면 넉넉합니다.


.. 문장을 보니 2학년 아이들한테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지’를 얼른 ‘땅’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래도 이 문장을 들은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생명의 불꽃’이라니, 무슨 말인지 얼른 다가오지 않는 모양이다. 설명하려다 화면을 넘겼다 … 그림책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과감한 기법과 새로운 감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림책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엄마의 의자》같이 삶이 묻어난 그림책, 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처럼 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도 필요하다 ..  (130, 287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는 제대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줄거리나 모습을 섣불리 따라하면 안 되고, 이 책에 나오는 그림책들이 ‘모두 괜찮은 책’이라고는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책은 고작 백 가지가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 아주 많을 뿐 아니라, 이 책은 ‘좋은 책 추천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읽어 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먼저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림책 하나에 어떤 땀과 뜻이 서려 있는가를 헤아리자고 하는 목소리를 무엇보다 제대로 살펴야 할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입니다.

 아무래도 책 짜임이 이 대목을 더 헤아리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데, 딱딱한 책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강승숙 님 모습과 당신 반 아이들 모습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만, 외려 이 사진들은 책읽기에서 자꾸 걸립니다. 책에 담긴 줄거리하고는 어울리지 않고 ‘그림만 좋은’ 사진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일곱 갈래로 나눈 책이니 일곱 갈래를 새로 여는 데에만 사진을 넣고, 사이사이에는 강승숙 님과 아이들이 아주 아끼고 사랑한 ‘그림책 어느 한 대목’을 제대로 보여주었어야 이 책을 읽으며 눈과 숨이 부드러웠겠다고 느낍니다. 사이사이 그림책 한두 대목이 들어가 있기는 한데, 정작 ‘이 그림책을 이야기하며 바로 이 그림이 좋았다’고 하는 흐름에서 ‘이 그림’이 없기 일쑤였습니다. ‘그림책 교육 지도서’ 느낌이 안 나도록 하려고 이처럼 책을 엮었다 할 수 있는데,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은 ‘그림책 한 대목’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강승숙 님이 왜 아이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같은 눈높이에서 그림책을 즐기고 있는가를 좀더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109쪽에 ‘도둑고양이’라고 적바림한 낱말은 ‘골목고양이’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도둑개나 닭둘기가 아닌 골목개요 골목비둘기입니다. 어설픈 사람 눈길로 뭇짐승을 깎아내리는 말마디가 어설피 튀어나오지 않도록 끝마무리를 단단히 여미어 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4343.5.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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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과 반동
이갑철 사진, 강운구.김용택 글 / 포토넷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내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7] 이갑철, 《충돌과 반동》



- 책이름 : 충돌과 반동
- 사진 : 이갑철
- 펴낸곳 : 포토넷 (2010.4.1.)
- 책값 : 7만 원



 (1) ‘대가’와 ‘엉터리’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 사진밭에서 ‘대가(大家)’라는 이름이 붙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라밖에서 그리 알아주지 않으나, 나라안에서는 서로서로 추켜세우거나 부추기면서 ‘대가’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꼭 나라밖에서 알아주어야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나라안에서 몇몇이 알아준다 하여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입니다.

 크게 뜻을 이루었다는 분들이란 어떤 분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오랜 나날에 걸쳐 작품 하나 빚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작품 하나 빚기까지 오랜 나날을 보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다른 어느 문화밭이나 예술밭보다 사진밭에서 ‘대가’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팔리고 나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대가라는 이름이 붙거나 이 이름을 붙이는 분들 사진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분들 사진책이 덜 팔린다고 이분들이 대가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많이 팔리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대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무렵부터 사진을 꾸준히 찍고 사진책을 차근차근 즐기는 오늘날까지 “대가 = 엉터리”이고 “엉터리 = 대가”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대가라고 일컫거나 둘레에서 대가라고 일컫는 이름에 흐뭇해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사래치지 않는다면 그예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엉터리라 하든 스스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든 엉터리 소리를 흔히 듣거나 자주 듣거나 으레 듣는다면 이이야말로 대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작품 하나로 그치는 대가란 없습니다. 작품 하나로 마무른 대가라 한다면 새로운 작품 하나로 나아갈 노릇이요, 지난날 당신이 이룬 대가다운 작품은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작품 하나를 일군 대가라 한다면 하루하루 새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당신이 지난날 이룬 대가다운 작품을 깎고 보태고 다듬고 손질하면서 마지막 숨결을 잇는 그때까지 땀흘리기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자말로는 ‘대가’라지만, 우리 말로는 ‘큰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하든 글쓰기를 하든 그림그리기를 하든, 우리가 굳이 큰그릇만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그릇이면 어떠하고 작은그릇조차 못 되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은 그릇이 되고자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끼는 만큼, 내가 알아 가는 만큼, 내가 고개숙이는 만큼, 내가 부대끼는 만큼, 내가 껴안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내가 깨닫는 만큼, 내가 믿고 보듬는 만큼 일을 하고 놀이를 한다고 봅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딸아이 하나를 옆지기와 낳아 함께 복닥이고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아빠나 엄마보다 크고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이란 처음부터 큰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작은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인데, 아마 작은그릇이 되라고 작품을 빚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다들 당신들 삶을 고루 담아내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열매 하나를 생각하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억지로 짜맞추거나 끼워맞추거나 들어맞추도록 하려는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당신들 삶을 찬찬히 실어내며 따사로운 보람 하나를 헤아리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크고 높게 내세우거나 내놓으려고 하는 작품으로만 헤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대가’라는 옷에 휘감긴 채 ‘작품’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사진이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즐기며 함께하는 사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복닥이는 삶이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쉰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얽매일 사슬이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앞으로 백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악다구니를 쓰듯 붙잡으려는 힘-돈-이름이란 가없이 덧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사진으로 일거리를 찾고 이름값을 높이며 돈벌이를 하는 한편 큰배움터나 문화마당 같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분들 누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곱씹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왜 하고, 사진을 왜 찍고, 사진을 왜 가르치며, 사진을 왜 보여주고, 사진을 왜 돈 받고 파는지를 찬찬히 되새기면 반갑겠습니다. 사진을 책 하나로 엮는 까닭을 생각하고, 당신이 찍어서 엮은 사진책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까닭을 생각하면 기쁘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는데, 마땅히 글은 글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괜히 멋부리듯 읊지 말고, 그저 그대로 온몸과 온마음 고스란히 내맡겨 스스로 사진삶을 일구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도록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삶이 그대로 글이고 그림이듯,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뿐 아니라 사진쟁이 또한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자꾸자꾸 대가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당신 삶을 풀어 놓지 못한다면, 어설픈 이름 하나 얻을는지 몰라도 이러한 이름이 사진일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이름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권력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돈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이니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은 아직 엉터리’라고 여기며 늘 새롭게 거듭나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니까요.
 











 (2) 다시 나온 사진책 《충돌과 반동》


 2002년에 처음 나왔던 사진책 《충돌과 반동》이 새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예전 판은 보지 못했는데, 새옷을 입고 나온 책은 예전 판에 실린 사진하고 똑같다고 합니다. 예전 책에는 육명심 님 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 글을 덜고 강운구 님 글을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쟁이 이갑철 님으로서는 2002년이나 2010년이나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내놓은 셈입니다(2009년에 《RED》라는 작품을 내놓으셨데 ‘충돌과 반동’이라는 사진감으로는 여덟 해 동안 다른 발돋움이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충돌이 있고 반동이 있대서 책이름이 《충돌과 반동》이요, 이갑철 님이 일구어 온 사진밭은 다름아닌 충돌과 반동이라는 낱말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flict’와 ‘reaction’으로 적는데, 우리 말로는 ‘부딪힘’과 ‘거스름’ 또는 ‘부대낌’과 ‘튕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부딪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거스르거나 튕깁니다. 부대끼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밀어내거나 등을 돌립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이라 할지라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충돌과 반동이란 그치지 않는 흐름이요, 만남과 헤어짐이며, 잠과 깸입니다. 해와 함께 달이 있듯,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밥하고 똥은 다르지 않으며,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고운 목숨입니다.

 이갑철 님이 2002년에 보여주었던 《충돌과 반동》은 여덟 해가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고작 여덟 해로서는 달라지지 않는 탓입니다. 아니, 앞으로 열여덟 해나 여든 해가 흐르더라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는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여든 해조차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더 움켜쥐려고 할 뿐, 더 나누거나 더 베풀거나 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바빠지는 삶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슷비슷합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흐름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어떠할 때에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길이 어디로 이어질 때에 우리 스스로 신나고 맑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우리 스스로 반갑고 넉넉한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한국땅입니다. 같은 잘못이 이어지고 같은 슬픔이 잇달으며 같은 생채기가 자꾸 파이는 한국땅입니다. 이름과 때와 곳이 다를 뿐, 지난날과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이란 거의 한결같습니다.

 이러한 한국땅에서 《충돌과 반동》에 깃든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제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갑철 님으로서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일구어 새로 나오는 책에 보탤 까닭이 없습니다. 《충돌과 반동》은 2002년에든 2010년에든 2022년에든 2102년에든 똑같은 사진책이 되고, 똑같은 느낌이 되며, 똑같은 삶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나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나 어떠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스스로 ‘달라질 삶’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는 사람 또한 ‘달라질 삶’을 붙잡지 않습니다.

 좋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이어가는 삶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넉넉하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내놓는 사진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이 삶터는 새로운 흐름이란 없고 달라질 삶이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에는 한껏 넓고 깊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이 스며들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이런 틈바구니가 가부장제도이든 남녀 신분과 계급이든 마을과 고을이든 보수와 진보이든 시골과 도시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일까요. 이어온 대로 좋다면 무엇이 예부터 이어온 줄기일까요.

 2010년에 새옷을 입고 거듭 태어난 《충돌과 반동》이란 미식가한테 맛난 밥이 되듯 소장가치가 있어 집안에 모셔 둘 만한 사진책인지, 또는 2002년에는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한 깊은 얘기가 있어 2010년이 된 오늘날부터는 새롭게 받아들일 얘기를 건네려고 내놓은 사진책인지, 또는 사진쟁이 이갑철 님을 대가로 섬기고자 마련한 사진책인지, 또는 웅숭깊은 사진말이 없는 한국땅 사진밭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자 선보이는 사진책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에 담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는 고맙고 드물며 반가울 사진말로 다가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으로 담는 젊은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젊은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이루었다는 사진쟁이들한테 이 사진책 하나가 얼마나 말걸기로 파고들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열 만한 마음밭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걱정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는 어슬렁거리며 작은 방의 프린트들을 뜯어보며 고생많았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트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두운 상황에서 뭔가를 본 순간에 쏠려고,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심도를 깊게 하면서도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필름의 감도를 두 배나 네 배로 올려서 찍는다”고 이갑철은 나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다. 그래도 이갑철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과 초점이 나간 흐릿함에 귀신들이 깃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철 사진의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자동 카메라를 잘못 쓴 것 같은 엇나간 초점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윌리엄 클라인의 경우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다가 점차 귀신 잡는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기법은 머리의 얄미운 계산이 아니라 뛰는 가슴의 어쩔 수 없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130쪽/강운구 풀이말)


 2002년에 첫선을 보인 사진책 《충돌과 반동》에는 199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이갑철 님 눈길로 담겨 있습니다. 이갑철 님은 이갑철 님 눈썰미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았기에 《충돌과 반동》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데, 이갑철 님한테 당신한테만 남다른 눈길이 있기 앞서, 먼저 이갑철 님한테 보여지며 마주한 사람들이 오랜 나날을 당신들 터전에서 고이 살아내 왔기 때문에 이갑철 님 남다른 눈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 숱한 사진쟁이들이 흔히 놓치는 대목이란 바로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자락이 거쳐 온 발자국 하나하나입니다. 옛날 사람이란 없고 오늘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옛날 모습이란 따로 없고 오늘날 모습 또한 따로 없습니다. 옛날 결하고 오늘날 결은 있으나, 이 또한 사람들이 서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이루어 내는 삶을 돌아본다면 언제 적 모습이니 어쩌니 하는 갈래 나눔이란 덧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농사짓고, 낫질하는 사람은 똑같이 낫질하고, 절집 다니는 사람은 그예 절집을 다니고, 성모상에 절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성모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기나길며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사진쟁이 남다른 눈으로 잘라내거나 옮겨내거나 이어받아 한 가지 모습으로 선보이는 손짓입니다.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사람들 삶입니다. 섣불리 따지거나 잴 수 없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모습으로 찍혔다 한들 사람들 삶입니다. 조금 어둡게 찍히든 더욱 밝게 찍히든 사람들 삶입니다. 사람들 삶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느껴야 할 사진찍기이고, 사람들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맺고 사귀고 다가서며 스며들며 어우러지는가를 느껴야 할 사진읽기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어떤 필름을 쓰든, 어떤 디지털 장비를 쓰든, 어느 사진감을 붙잡든,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걷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눈길보다 바라보는 눈길에 서린 삶을 느낄 노릇입니다. 사진에 담길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만큼 내 사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자연 터전이나 물건들이 바로 나와 내 사진기를 어떻게 느끼며 마주하고 있느냐를 나란히 곰삭일 노릇입니다.

 그나저나, 2010년판 《충돌과 반동》은 곱게 여민 옷자락에 정갈하고 말끔하여 멋스럽지만, 책값 7만 원이란 지나치게 짐스럽습니다. 책꽂이에 박아 놓을 사진책이 아니라 한다면 좀더 단출하고 자그마한 그릇으로 여미어 한결 수수하며 너른 이야기자리가 되도록 매만질 때에 바야흐로 푸진 사진결이 빛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7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7만 원으로 이 사진책을 두어 권 장만할 수 있도록 여밀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4343.5.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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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 - 이언진 시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2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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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으로 번역한 시는 시가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4] 박희병 번역, 《이언진 시집 : 골목길 나의 집》



 18세기 천재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언진이라는 분 시를 우리 말로 옮긴 책이 나와 있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읽었습니다. 더없이 뜻깊은 책이요 그지없이 알찬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번역이라고 해야 할는지 뭐라고 해야 할는지 어지러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영 찜찜합니다. 도무지 이언진이라는 분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거실》이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박희병 님은 ‘호동()’이란 ‘골목길’과 같고, 이 골목길에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비천(卑賤)’이란 “지위가 낮고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나 이제나 잘나고 이름있고 돈있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법이란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예술쟁이가 골목동네로 나들이를 와서 얼핏설핏 담 너머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골목길’이라는 글월이 영 못마땅합니다. 아니, 가없이 슬픕니다. 골목길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러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애써 높이지 않고, 스스로를 괜히 낮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농사꾼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서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못 벌고 더 큰 이름을 못 누리며 더 센 힘을 뽐내지 못할 뿐, 골목길 사람은 여느 자리 사람이든 궁궐 안쪽 사람이든 다 매한가지로 애틋하고 알뜰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호동거실》을 우리 말로 옮겼다고 하는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은 골목동네 사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매무새가 엿보이지 않아 슬프고 씁쓸합니다.


.. ‘골목길’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사는 공간을 표상한다. 골목길의 집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시인의 집은 바로 이 골목길 속에 있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 《호동거실》에는 백화(중국의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  (6, 188쪽)


 더욱이, 이 책 《골목길 나의 집》은 번역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책을 읽은 저로서는 도무지 번역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6언시(글자수를 여섯으로 맞추어 넉 줄로 쓴 시)’를 옮긴 번역책 《골목길 나의 집》인데,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견주어 자유롭게 말하고 입말(그래 봤자 중국 한문입니다)을 살려서 쓰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골목길 나의 집》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에 옮겨진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에핌 에트킨드라는 분이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109쪽)”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언진 님 시를 우리 말로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은 틀림없이 뜻이 있고 아름다운 문학입니다. 그러나 번역이라 할 수 없는 번역을 선보이는 한편, 18세기 이언진 님이 살아가던 골목동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높’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눈썰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말로 옮길 때에 ‘6언시’처럼 여섯 글자로 맞추거나 어슷비슷한 짧은 글월로 맞추기란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 문학’이라는 꼴은 갖추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모두 170 꼭지 시를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에서 열세 꼭지를 가려내어, 저 또한 어설프고 어줍잖습니다만, 이언진 님이 골목동네에서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지내던 느낌을 헤아리면서 골목사람들 말투로 다시금 옮겨 봅니다. 책에는 우리 말로 옮긴 산문 밑에 이언진 님이 한문으로 적은 싯말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기에 저 같은 쥐대기도 어설프나마 번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문 원문까지 옮겨 적기란 너무 버겁고 부질없다고 느껴, 박희병 님 번역에 제 번역을 붙이기만 합니다. 박희병 님 번역은 넉 줄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두 줄로 붙입니다. 왜냐하면 이언진 님 6언시는 넉 줄이 아닌 두 줄로 나누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문학을 옮겨서 나누려 한다면 시 문학 짜임새와 얼거리와 글맛과 글흐름을 모두 살피어 오늘날 우리 말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4343.5.10.달.ㅎㄲㅅㄱ)
 





(1)
새벽종 울리자, 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
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 만인의 마음 나는 앉아서 안다.
(새벽종 울리자 / 골목사람 바쁘다 /
 밥 빌고 벼슬 얻으려는 / 이 마음 난 앉아서 안다)


(5)
치가(治家)하려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애 기를 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야지.
‘빈이락(貧而樂)’ 이 세 글자 비결을 알면 얼굴에 근심이 깃들 리 있나.
(살림 하며 눈귀 멀고 / 아이 보며 기저귀 간다 /
 가난이 즐거우면 / 얼굴에 근심 없지)


(9)
집 나가 노닐면 고생 또 고생 집에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
몸이 늙거나 약해지지 않고 식솔이 기한(飢寒)에 떨지도 않지.
(집 나가면 괴롭고 / 집에서는 즐겁다 /
 늙어도 튼튼하고 / 굶거나 추운 식구 없다)


(15)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는 건 범 안고 자고 뱀 품고 달리듯 위태하기 때문.
용퇴하면 화(禍) 적고 복 많을 텐데 뭣 땜에 사주 보고 점을 치는지.
(나라님 부름 싫다 / 범 안은 독뱀 방석 /
 물러서니 걱정 없다 / 내 팔자 그예 좋다)


(19)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골목 사람 거룩하다 / 가난하고 배고파도 /
 착하고 고운 마음 / 맹자님도 말했다)


(28)
아이 우는 소리 천뢰(天뢰)와 같아 피리와 거문고 소리보다 훨씬 낫지.
처마의 한적한 물소리 참 좋으니 똑, 똑, 똑 베개맡에서 듣고 있노라.
(아이 울음 하늘 소리 / 뭇 악기보다 좋다 /
 처맛물 조용한 소리 / 누워서 듣는 똑똑똑)


(43)
인정세태는 천만(千萬) 가지고 바다 속엔 온갖 고기가 있지.
선생의 마음은 터럭처럼 세밀해 저자사람 얼굴의 마마 자국까지 알지.
(사람 마음 갖가지 / 바다엔 숱한 고기 /
 내 마음 촘촘한 터럭 / 장사꾼 낯 다 알지)


(58)
저잣거리의 구운 떡 어린애는 그 값을 아네.
좋은 물건이면 그뿐 난 진짜 가짜 따위 가리지 않아.
(저잣거리 구운 떡 / 아이는 아는 제값 /
 좋으니 두루 좋아 / 참거짓 떠나 좋지)


(78)
밥은 하루 지나면 쉬었는가 싶고 옷은 해 지나면 낡았는가 싶지.
문장가의 난숙한 문투 한당(漢唐) 이래 어찌 안 썩을 리 있나?
(밥은 하루면 쉬고 / 옷은 한 해면 낡고 /
 어리숙한 글쟁이 / 예부터 썩을밖에)


(81)
가난한 집 식탁 썰렁하여서 반찬이란 꼴랑 된장뿐이네.
오늘 아침은 처자가 호강하누나 / 제사 지낸 서쪽 이웃 쇠고기 보내 줘.
(가난해 밥상 썰렁 / 된장 하나만 겨우 /
 오늘 아침 뜻밖에 / 젯상 고기 들어와)


(91)
진짜 보타산과 진짜 관음이 10보 옆에 있다 해도 나는 안 갈래.
내 엄마가 곧 부처 엄마니 / 집에 있으면서 엄마를 잘 공양할래.
(보살 관음 살아서 / 내 곁에 있다 해도 /
 울 엄마가 참 부처 / 울 집에서 섬기리)


(105)
손가락끝, 붓끝, 종이 사이에 하나의 부처 분명 생겨나지만
손가락끝 보고 붓끝 보고 종이를 봐도 부처는 없네.
(손붓이 빚은 부처 / 환히 그려진 모습 /
 손붓 종이 어디도 / 참 부처는 없는데)


(132)
천하엔 본래 일이 없는데 유식한 이가 만들어 내지.
책을 태워 버린 건 정말 큰 안목 그 죄도 으뜸이요, 그 공도 으뜸.
(처음부터 없던 일 / 글쟁이가 지어내 /
 책 불사름 훌륭해 / 엉터리요 멋진 일)



 ┌ 《골목길 나의 집》(돌베개,2009)
 ├ 글 : 이언진
 ├ 옮긴이 : 박희병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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