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과 반동
이갑철 사진, 강운구.김용택 글 / 포토넷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내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7] 이갑철, 《충돌과 반동》



- 책이름 : 충돌과 반동
- 사진 : 이갑철
- 펴낸곳 : 포토넷 (2010.4.1.)
- 책값 : 7만 원



 (1) ‘대가’와 ‘엉터리’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 사진밭에서 ‘대가(大家)’라는 이름이 붙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라밖에서 그리 알아주지 않으나, 나라안에서는 서로서로 추켜세우거나 부추기면서 ‘대가’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꼭 나라밖에서 알아주어야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나라안에서 몇몇이 알아준다 하여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입니다.

 크게 뜻을 이루었다는 분들이란 어떤 분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오랜 나날에 걸쳐 작품 하나 빚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작품 하나 빚기까지 오랜 나날을 보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다른 어느 문화밭이나 예술밭보다 사진밭에서 ‘대가’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팔리고 나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대가라는 이름이 붙거나 이 이름을 붙이는 분들 사진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분들 사진책이 덜 팔린다고 이분들이 대가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많이 팔리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대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무렵부터 사진을 꾸준히 찍고 사진책을 차근차근 즐기는 오늘날까지 “대가 = 엉터리”이고 “엉터리 = 대가”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대가라고 일컫거나 둘레에서 대가라고 일컫는 이름에 흐뭇해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사래치지 않는다면 그예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엉터리라 하든 스스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든 엉터리 소리를 흔히 듣거나 자주 듣거나 으레 듣는다면 이이야말로 대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작품 하나로 그치는 대가란 없습니다. 작품 하나로 마무른 대가라 한다면 새로운 작품 하나로 나아갈 노릇이요, 지난날 당신이 이룬 대가다운 작품은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작품 하나를 일군 대가라 한다면 하루하루 새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당신이 지난날 이룬 대가다운 작품을 깎고 보태고 다듬고 손질하면서 마지막 숨결을 잇는 그때까지 땀흘리기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자말로는 ‘대가’라지만, 우리 말로는 ‘큰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하든 글쓰기를 하든 그림그리기를 하든, 우리가 굳이 큰그릇만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그릇이면 어떠하고 작은그릇조차 못 되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은 그릇이 되고자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끼는 만큼, 내가 알아 가는 만큼, 내가 고개숙이는 만큼, 내가 부대끼는 만큼, 내가 껴안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내가 깨닫는 만큼, 내가 믿고 보듬는 만큼 일을 하고 놀이를 한다고 봅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딸아이 하나를 옆지기와 낳아 함께 복닥이고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아빠나 엄마보다 크고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이란 처음부터 큰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작은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인데, 아마 작은그릇이 되라고 작품을 빚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다들 당신들 삶을 고루 담아내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열매 하나를 생각하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억지로 짜맞추거나 끼워맞추거나 들어맞추도록 하려는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당신들 삶을 찬찬히 실어내며 따사로운 보람 하나를 헤아리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크고 높게 내세우거나 내놓으려고 하는 작품으로만 헤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대가’라는 옷에 휘감긴 채 ‘작품’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사진이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즐기며 함께하는 사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복닥이는 삶이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쉰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얽매일 사슬이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앞으로 백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악다구니를 쓰듯 붙잡으려는 힘-돈-이름이란 가없이 덧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사진으로 일거리를 찾고 이름값을 높이며 돈벌이를 하는 한편 큰배움터나 문화마당 같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분들 누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곱씹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왜 하고, 사진을 왜 찍고, 사진을 왜 가르치며, 사진을 왜 보여주고, 사진을 왜 돈 받고 파는지를 찬찬히 되새기면 반갑겠습니다. 사진을 책 하나로 엮는 까닭을 생각하고, 당신이 찍어서 엮은 사진책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까닭을 생각하면 기쁘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는데, 마땅히 글은 글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괜히 멋부리듯 읊지 말고, 그저 그대로 온몸과 온마음 고스란히 내맡겨 스스로 사진삶을 일구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도록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삶이 그대로 글이고 그림이듯,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뿐 아니라 사진쟁이 또한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자꾸자꾸 대가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당신 삶을 풀어 놓지 못한다면, 어설픈 이름 하나 얻을는지 몰라도 이러한 이름이 사진일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이름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권력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돈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이니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은 아직 엉터리’라고 여기며 늘 새롭게 거듭나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니까요.
 











 (2) 다시 나온 사진책 《충돌과 반동》


 2002년에 처음 나왔던 사진책 《충돌과 반동》이 새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예전 판은 보지 못했는데, 새옷을 입고 나온 책은 예전 판에 실린 사진하고 똑같다고 합니다. 예전 책에는 육명심 님 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 글을 덜고 강운구 님 글을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쟁이 이갑철 님으로서는 2002년이나 2010년이나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내놓은 셈입니다(2009년에 《RED》라는 작품을 내놓으셨데 ‘충돌과 반동’이라는 사진감으로는 여덟 해 동안 다른 발돋움이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충돌이 있고 반동이 있대서 책이름이 《충돌과 반동》이요, 이갑철 님이 일구어 온 사진밭은 다름아닌 충돌과 반동이라는 낱말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flict’와 ‘reaction’으로 적는데, 우리 말로는 ‘부딪힘’과 ‘거스름’ 또는 ‘부대낌’과 ‘튕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부딪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거스르거나 튕깁니다. 부대끼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밀어내거나 등을 돌립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이라 할지라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충돌과 반동이란 그치지 않는 흐름이요, 만남과 헤어짐이며, 잠과 깸입니다. 해와 함께 달이 있듯,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밥하고 똥은 다르지 않으며,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고운 목숨입니다.

 이갑철 님이 2002년에 보여주었던 《충돌과 반동》은 여덟 해가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고작 여덟 해로서는 달라지지 않는 탓입니다. 아니, 앞으로 열여덟 해나 여든 해가 흐르더라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는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여든 해조차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더 움켜쥐려고 할 뿐, 더 나누거나 더 베풀거나 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바빠지는 삶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슷비슷합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흐름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어떠할 때에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길이 어디로 이어질 때에 우리 스스로 신나고 맑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우리 스스로 반갑고 넉넉한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한국땅입니다. 같은 잘못이 이어지고 같은 슬픔이 잇달으며 같은 생채기가 자꾸 파이는 한국땅입니다. 이름과 때와 곳이 다를 뿐, 지난날과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이란 거의 한결같습니다.

 이러한 한국땅에서 《충돌과 반동》에 깃든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제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갑철 님으로서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일구어 새로 나오는 책에 보탤 까닭이 없습니다. 《충돌과 반동》은 2002년에든 2010년에든 2022년에든 2102년에든 똑같은 사진책이 되고, 똑같은 느낌이 되며, 똑같은 삶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나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나 어떠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스스로 ‘달라질 삶’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는 사람 또한 ‘달라질 삶’을 붙잡지 않습니다.

 좋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이어가는 삶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넉넉하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내놓는 사진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이 삶터는 새로운 흐름이란 없고 달라질 삶이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에는 한껏 넓고 깊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이 스며들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이런 틈바구니가 가부장제도이든 남녀 신분과 계급이든 마을과 고을이든 보수와 진보이든 시골과 도시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일까요. 이어온 대로 좋다면 무엇이 예부터 이어온 줄기일까요.

 2010년에 새옷을 입고 거듭 태어난 《충돌과 반동》이란 미식가한테 맛난 밥이 되듯 소장가치가 있어 집안에 모셔 둘 만한 사진책인지, 또는 2002년에는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한 깊은 얘기가 있어 2010년이 된 오늘날부터는 새롭게 받아들일 얘기를 건네려고 내놓은 사진책인지, 또는 사진쟁이 이갑철 님을 대가로 섬기고자 마련한 사진책인지, 또는 웅숭깊은 사진말이 없는 한국땅 사진밭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자 선보이는 사진책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에 담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는 고맙고 드물며 반가울 사진말로 다가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으로 담는 젊은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젊은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이루었다는 사진쟁이들한테 이 사진책 하나가 얼마나 말걸기로 파고들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열 만한 마음밭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걱정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는 어슬렁거리며 작은 방의 프린트들을 뜯어보며 고생많았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트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두운 상황에서 뭔가를 본 순간에 쏠려고,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심도를 깊게 하면서도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필름의 감도를 두 배나 네 배로 올려서 찍는다”고 이갑철은 나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다. 그래도 이갑철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과 초점이 나간 흐릿함에 귀신들이 깃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철 사진의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자동 카메라를 잘못 쓴 것 같은 엇나간 초점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윌리엄 클라인의 경우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다가 점차 귀신 잡는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기법은 머리의 얄미운 계산이 아니라 뛰는 가슴의 어쩔 수 없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130쪽/강운구 풀이말)


 2002년에 첫선을 보인 사진책 《충돌과 반동》에는 199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이갑철 님 눈길로 담겨 있습니다. 이갑철 님은 이갑철 님 눈썰미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았기에 《충돌과 반동》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데, 이갑철 님한테 당신한테만 남다른 눈길이 있기 앞서, 먼저 이갑철 님한테 보여지며 마주한 사람들이 오랜 나날을 당신들 터전에서 고이 살아내 왔기 때문에 이갑철 님 남다른 눈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 숱한 사진쟁이들이 흔히 놓치는 대목이란 바로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자락이 거쳐 온 발자국 하나하나입니다. 옛날 사람이란 없고 오늘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옛날 모습이란 따로 없고 오늘날 모습 또한 따로 없습니다. 옛날 결하고 오늘날 결은 있으나, 이 또한 사람들이 서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이루어 내는 삶을 돌아본다면 언제 적 모습이니 어쩌니 하는 갈래 나눔이란 덧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농사짓고, 낫질하는 사람은 똑같이 낫질하고, 절집 다니는 사람은 그예 절집을 다니고, 성모상에 절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성모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기나길며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사진쟁이 남다른 눈으로 잘라내거나 옮겨내거나 이어받아 한 가지 모습으로 선보이는 손짓입니다.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사람들 삶입니다. 섣불리 따지거나 잴 수 없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모습으로 찍혔다 한들 사람들 삶입니다. 조금 어둡게 찍히든 더욱 밝게 찍히든 사람들 삶입니다. 사람들 삶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느껴야 할 사진찍기이고, 사람들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맺고 사귀고 다가서며 스며들며 어우러지는가를 느껴야 할 사진읽기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어떤 필름을 쓰든, 어떤 디지털 장비를 쓰든, 어느 사진감을 붙잡든,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걷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눈길보다 바라보는 눈길에 서린 삶을 느낄 노릇입니다. 사진에 담길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만큼 내 사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자연 터전이나 물건들이 바로 나와 내 사진기를 어떻게 느끼며 마주하고 있느냐를 나란히 곰삭일 노릇입니다.

 그나저나, 2010년판 《충돌과 반동》은 곱게 여민 옷자락에 정갈하고 말끔하여 멋스럽지만, 책값 7만 원이란 지나치게 짐스럽습니다. 책꽂이에 박아 놓을 사진책이 아니라 한다면 좀더 단출하고 자그마한 그릇으로 여미어 한결 수수하며 너른 이야기자리가 되도록 매만질 때에 바야흐로 푸진 사진결이 빛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7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7만 원으로 이 사진책을 두어 권 장만할 수 있도록 여밀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4343.5.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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