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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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 사진책은 시중 책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지율 스님 다른 책에 이 글을 걸쳐 놓는다. 이 사진책은 녹색평론사에 전화해서 주문해야 한다. 이 사진책을 보고 싶은 분은 한 권에 3000원이니 10권을 3만 원에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주신다면 더없이 고맙겠다.)
 

 






 낙동강 삶터와 거짓말하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8] 지율 스님, 《낙동강 before and after》



- 책이름 : 낙동강 before and after
- 글ㆍ사진 : 지율 스님, ‘낙동강 숨결 느끼기’ 순례 동행들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10.3.31.)
- 책값 : 3000원
(http://www.chorok.org)


 (1)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을 참말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진은 참말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참을 밝히는 글이 있으나 거짓으로 가득한 글이 있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한편, 거짓으로 넘실거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참을 숨긴 목소리가 있고 참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사진을 다르게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쪽에 서 있느냐 저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요. 우리 동네 한복판에 51층으로 올라설 아파트는 누군가한테는 아주 멋진 집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51층짜리 아파트 둘레에서 햇볕을 쬐지 못하고 찬바람만 씽씽 불어대는 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한테는 끔찍한 집자리입니다. 돈 몇 푼으로 햇볕권을 갚아 줄 수 없는 노릇이요, 살림을 꾸리는 넋을 보듬을 수 없습니다.

 헌책방을 속깊이 헤아리면서 책시렁을 가만가만 살피는 이들한테는 헌책방에서 숨죽이는 책들이 어떻게 아름답고 좋은가를 온몸으로 깨달으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묻기만 하거나 어쩌다 한 번 지나치는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람한테는 헌책방처럼 구지레하거나 어수선한 데는 따로 없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보배로운 책을 찾고 얻는 헌책방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아무런 책이 없는 헌책방입니다.

 골목길을 오로지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으로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은 내 터전인 골목길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습니다. 곱고 맑고 살갑게 일구고 돌봅니다. 골목동네 사람한테 골목길이란 추억 아닌 삶(현실)이며, 퇴락한 곳이 아닌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과 부산을 네 시간으로도 모자라 두 시간 반이나 두 시간 만에 오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수천 억이 아닌 수십 조를 쓰더라도 빠른기차를 놓아야 합니다. 수천 억이나 수십 조를 교육과 복지에 바쳐서, 대학 교육까지 개인이 돈을 내지 않고 나라에서 돈을 내도록 하면서 튼튼하고 곧은 배움마당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빠른기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논밭과 산들과 냇물이 파헤쳐지거나 무너지거나 앓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주 빨리 휙휙 지나치는 ‘풍경’이지, 숱한 목숨과 사람이 기나긴 나날을 보내온 삶터에 기찻길을 놓았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빠른기차를 달리며 바깥을 바라보는 사진하고 기찻길한테 자리를 내준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서 빠른기차를 바라보는 사진은 다릅니다. 빠른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기차가 내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 있는 사람은 삶자리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등에 업으며 귀를 막아야 합니다.

 자가용을 타고 골목을 쌩 하니 달리며 내다보는 모습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휙휙 달리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이랑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릴 때 골목을 쳐다보는 모습이랑 아이 손을 잡고 거닐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빨리빨리 달리기만 해서는 골목을 느낄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머리속에 자질구레한 생각조각이 많으면 골목을 한갓지게 거닐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습니다.

 사진 하나를 찍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사진감인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이나 물건하고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구경하는 삶으로는 구경하는 사진일 뿐입니다. 여행하는 사진은 거의 모두 구경꾼 사진입니다. 이러다 보니 여행 사진은 으레 그럴싸하거나 멋들어진 모습으로 꾸미려 할 뿐, 그 좋다고 하는 곳을 두루 다니면서 맛보고 받아들인 좋은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 가운데 스스로 조촐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합니다. 내 삶터를 찍고 내 사랑이를 찍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찍어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아파트를 아끼며 빠른기차와 자가용을 아끼는 사람한테는 ‘쇠삽날 재개발 정책’에서 장미빛 꿈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면서 큰물을 막는다느니 물을 잘 살려쓸 수 있다느니 일자리를 늘린다느니 아름다운 나라로 탈바꿈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잔뜩 파헤쳐진 강바닥을 보면서 ‘이제 더 멋지게 다시 태어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강바닥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바라보면서 ‘꿈처럼 아름다운 관광길’이 태어나겠거니 생각합니다. 서울 청계천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돈을 좋아하지 않고 자연 삶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4대강 살리기’란 무서운 말장난이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느라 정작 우리 삶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뿐 아니라, 일찌감치 우리 둘레 우리들 조그마한 터전부터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와 막개발이 판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좋은 삶 좋은 삶터 좋은 자연이란 사람이 돈을 써서 억지로 꾸밀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살리거나 사랑한다면 자연을 그대로 놓아 두기만 하면 되는 줄 헤아립니다. 씨앗 하나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넉넉한 줄을 읽습니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으며 자연스러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터전이요, 이 아름다운 터전에서 우리들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멋과 웃음이 있음을 느낍니다.

 온누리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든 사람 눈높이와 삶자리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사진이 됩니다. 구경꾼 사진은 동네 주민한테 거짓말 사진입니다. 동네 주민 사진은 구경꾼한테는 거짓말 사진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뜯어고치고자 집회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거짓말입니다.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경찰하고 한 자리에 선 사람들한테는 짓밟히고 억눌려서 집회를 하겠다는 사람들 이야기와 삶이 거짓말입니다. 흔히들 ‘왜곡 사진’이니 ‘비틀린 기사’이니 하지만, 왜곡이나 비틀림이란 없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매무새가 당신들 삶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꾸미거나 겉발림하는 모양새가 당신들 삶입니다. 큰 돈과 큰 집과 빠른 차를 바라는 이들하고 가난과 작은 삯집과 두 다리로 살아가는 이들하고는 참거짓을 가르는 잣대와 금과 틀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삶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지만,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꾸리지 않을 뿐더러,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돈바라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돈바라기 사진이라는 허울을 감추고 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 지율 스님 사진 《낙동강》


 ㅈ일보는 지율 스님이 찍은 사진을 놓고 “이들의 허위 선동은 국민 가슴에 근거 없는 증오를 심고,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든다(2010.5.11.)”고 이야기합니다. 또다른 ㅈ일보는 “현지 민심부터 읽어야 한다. 더 이상 식상한 이벤트로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려면 논리적인 설득만이 유일한 길이다(2010.5.13.)”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율 스님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녹색평론사)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사진책을 내놓으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ㅈ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거나 기자로 뛰는 분들이 지율 스님 사진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며, 지율 스님 사진잔치에서 사진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지율 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 강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세워진 시멘트 기둥을 자연과 신의 선물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4대강 사업은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의 강은 원형을 잃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녹색의 그믈망에 덮여 있는 저 베어진 나무들은 얼마전 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바로 이 강가에 서있던 생명들이었다. 한 나무들의 봄은 우리의 봄이었고 그 나무들의 여름은 우리들의 여름이었다. 그 나무들의 죽음은 바로 계절의 죽음이며 강의 죽음이며 우리들의 죽음이다 ..  (초록의 공명/2010.2.11.)


 지난 2007년에 사진쟁이 홍순태 님이 《낙동강》(눈빛)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홍순태 님은 1970년대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책 하나로 묶었습니다.

 올 2010년에 스님 지율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라는 작은 사진책을 내놓으며 2009년과 2010년에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 빛을 본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2000년대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1970년대 낙동강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진책 《낙동강》은 1970년대에 홍순태 님이 찍은 사진일 뿐, 1960년대나 1950년대나 1940년대나 이 사진에 깃든 모습하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바꾼다면 1870년대라든지 1770년대라든지 1670년대하고도 다를 바 없겠지요. 아마 1070년대라든지 570년대하고도 어슷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빛을 보는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2000년대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쇠삽날 개발 정책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2009년과 2010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모습이 어떻게 사라지고 마는가를 찬찬히 알려줍니다.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낙동강은 단순히 자연경관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만이 아니라 물의 원천이요, 물은 인간의 희망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을 살찌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수자원의 원천이며 우리 고유문화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고 덧붙입니다.

 스님 지율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라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천성산을 통해 나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신고 다니는 신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국토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천성산을 밟아 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없는 자들의 기술적인 잣대에 의하여 천성산은 무너지고 파헤쳐졌다. 천성산은 내게 우리의 국토가 처해 있는 아픔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기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 눈이 아픈 현장들을 담은 사진전을 여는 이유는 -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없이 무참하게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4대강 개발의 실상을 알리고,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하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한 시대를 살다간 한사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우리 뒤에 올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  (초록의 공명/2010.3.30.)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밥굶기 싸움에 이어 사진찍기로 접어들었을까요.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그토록 기나긴 밥굶기 싸움을 하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그토록 가녀린 몸뚱이로 작은 사진기를 어깨에 달랑달랑 걸치고는 기나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고 또 걷고 다시 걷고 있을까요.

 《낙동강》을 펴낸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강물이 얼어붙을 때이든 큰물이 져 풀집이 물에 잠기든 낙동강으로 달려갔습니다.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펴낸 스님 지율은 낙동강 물줄기에 쇠삽날이 한 번 찍히고 두 번 찍힐 때마다 거듭거듭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있습니다.


.. 제가 초록의 공명이라는 이름의 창을 쉽게 닫지 못했던 것은 문명과 자본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과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혹은 소유하는 행위가 계속 된다면 이 오리섬에 깃들었던 많은 생명들의 몰락처럼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도 지구라는 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질 동원은 무수히 많아 보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 더 사실적이기는 합니다 ..  (초록의 공명/2010.2.3.)


 무엇을 참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거짓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연에는 태어남만 있지 않고 죽음이 함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사람 삶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담아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다고 읽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은 거짓부렁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거짓부렁이라고 온나라 수백만 사람들한테 외치고 있는 사람이 거짓부렁 목소리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목소리는 고작 수십 또는 수백 사람 귀에만 들어가는데, 수백만 사람 앞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이 낮고 작은 목소리가 무엇이 그리도 무섭거나 두려워서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아냥거리기 앞서 지율이라고 하는 스님 하나가 선 낙동강 물줄기에 나란히 서 있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기 앞서 산을 보고 물을 보며 흙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물과 바람과 밥이 아닌 돈과 이름과 힘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 “여러분도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걸으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먼젓번 순례에 참가한 외국인 한 분은 전 세계 어디서도 낙동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36쪽)


 서울과 부산을 잇는 빠른기차를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빠른전철을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빠른기차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 거의 안 멈추고 달립니다. 빠른전철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서 드문드문 설 뿐 신나게 달립니다.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이웃동네를 오갈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전철이 있어야 합니다. 옆동네를 드나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넘어, 자전거와 두 다리와 아기수레로 오갈 조용하고 걱정없으며 오붓한 길이 있어야 합니다.


.. 지난 주말, 설악산의 단풍객이 5만이 넘었고, 해운대 광안리 불꽃놀이 인파가 70만을 넘었으며, 올 시즌 야구 관람객은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오색 단풍의 풍광, 바닷가의 현란한 불꽃놀이, 운동장의 함성과 열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다. 하지만 억만 년 이어져 내려온 자연의 물길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 재앙에 대한 경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되고 있어도, 태어나 자라게 해 준 국토가 겪는 아픔의 현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너무나 드물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10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기는 사진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은 거의 모두 빠른기차와 빠른전철하고 맞닿은 사진입니다.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닮은 사진이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는 사진은 더욱 드뭅니다. 아기수레를 끄는 사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두 다리로 거니는 사진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습니다.

 저는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우리 옆지기도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엄마랑 아빠가 손빨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딸아이 또한 손빨래를 사랑하여 머잖아 제 손으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는 날을 맞이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식구 옷가지를 손빨래로 깨끗하게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듯이 제가 마주하는 삶을 손빨래하는 마음으로 사진 한 장에 담고 두 장에 싣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손빨래를 하고, 두 다리로 걸으며, 동네에서 생협하고 어깨동무하는 내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일하며 알맞게 노는 삶을 좋아합니다.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하고 지율 스님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포개어 놓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고작 50쪽짜리인데다가 앞등조차 없어 책꽂이에 꽂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여느 책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여쭈어야 따로 받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낮은 자리에서 만들며 낮은 자리에서 나누는 사진입니다. 이런 낮은뱅이 사진이 뭇사람을 쑤석거린다든지 엉터리 이야기를 퍼뜨린다든지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낙동강에 선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니까요. 낙동강에 박힌 쇠말뚝을 본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파하는가를 받아들이니까요.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우리가 기나긴 나날 아름다이 건사해 오며 울고 웃고 보듬던 물줄기 삶터를 보여줍니다.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며 등돌리는 바람에 앞으로는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할 슬픈 물줄기 생채기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말없이 말하기도 하지만, 사진은 슬픔을 눈물과 함께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진은 사랑이지만, 사진은 미움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눈물을 담은 땀방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겉치레 돈벌레 몸짓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따스한 손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우악스런 주먹다짐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너그러운 어버이 품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차가우며 매몰찬 총칼이기도 합니다. (4343.5.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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