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손석춘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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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섬기는 삶이 사람을 섬기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5] 손석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거님길 바닥돌을 새로 갈아치우는 데 들일 돈으로 교육과 문화와 복지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참 예전부터 불거져 나왔으나 아직까지 공무원 귓결에 스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공무원 귓결뿐 아니라 정치꾼 귓결에도 안 스치고 있으리라 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금세 자라는가를 헤아린다면, 굳이 돈을 들여 거리거리에 벚나무를 잔뜩 심지 않아도 넉넉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나무심는날에 맞추어 반마다 몇 사람씩 거리거리 다니면서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거나 나무 씨앗 하나를 심어서 고이 기르도록 한다면,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심은 나무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들한테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랍니다. 이 나무는 이 어린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에는 어른들한테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겠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심어 스스로 기르고 돌본 나무일 때에는 이 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낍니다. 나중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할 때에는 골골샅샅 숱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사람들 터전을 아름다이 가꾸는 길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을 들여 꾸밀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움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땀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며 손길을 바치면 언제나 아름다움하고 가까울 뿐 아니라, 이러한 땀과 마음과 손길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살리기’라는 토목공사가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살리기’라는 이름을 붙여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데, 이 나라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가 바로 토목공사에서 비롯합니다. 주택보급율이 일찌감치 100퍼센트가 넘었어도 아파트 짓기를 멈추지 않을 뿐더러, 제 고향마을인 인천 같은 곳은 240만 인구를 360만이 되도록 아파트를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꿈까지 꾸고 있는 까닭이란, 바로 이와 같은 토목공사 일자리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서민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산층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더욱이,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서민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중산층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재벌이 드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많은 돈’에 휩쓸리고 있으며, 이러한 소용돌이는 광고지와 다를 바 없다는 몇몇 신문뿐 아니라 스스로 왼쪽이라느니 진보라느니 하고 내세우는 신문까지 어슷비슷합니다. 어떠한 신문이든 자유로운 목소리가 아닌 광고주를 찾아 돈을 벌어 일삯을 치르고 글삯을 내어 밥벌이를 하는 얼거리에 매여 있습니다.


.. 다만, 언제까지 기성세대의 잘못만 추궁할 일은 아닙니다. 기성세대 탓만 하다가는 소중한 10대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인생도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문제는 흑백의 울타리에 갇힌 민주주의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가두는 데 있습니다 ..  (27, 240쪽)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혁명처럼 내놓았던 손석춘 님이 젊은이들한테 ‘온누리를 옳게 읽는 자기계발서’ 틀거리로 엮어 내놓은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손석춘 님은 아주 너그럽게도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책을 따로 써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애써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지식청년 자기계발서’가 없이는 이 나라 젊은 지식인들이 ‘신문읽기’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레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신문읽기이니 영화읽기이니 책읽기이니 사진읽기이니 그림읽기이니 교육읽기이니 정치읽기이니를 ‘어떤어떤 자기계발서’를 들추어야 비로소 알아채는 지식인이 더없이 많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젊은이이든 중고등학생 푸른 넋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곧은 삶을 일구지 못하는 가운데 스스로 곧은 책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곧은 말을 붙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이 아무리 허접하고 엉터리보다 못한 이야기를 줄줄 읊고 있더라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맑고 밝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군가한테 돈을 먹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퍼뜨리는 목소리가 판을 치든 떡을 치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으면 올바로 읽을 올바른 삶입니다. 책을 읽으면 올바로 되새기는 올바른 넋입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 올바로 배우고 가르치는 올바른 매무새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까닭에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같은 ‘또다른 자기계발서’를 찾아 들고야 맙니다. 우리가 찾아 들어야 할 책이라면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이어야 할 터인데,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을 쥐어도 속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찾고 새겨야 할 책이라면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이어야 할 텐데,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을 거듭 살피더라도 온몸으로 삭이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막강한 자본의 힘을 배경으로 대화를 봉쇄하거나 대화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여론몰이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자본을 소유한 극소수 사람들은 여론이 공론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다수인 민중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다 보면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같은 이유에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절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인 양 호도합니다 ..  (107쪽)


 손석춘 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빗대어 우리 삶터가 얼마나 ‘안 민주주의’이거나 ‘민주주의를 억누르’거나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말 우리 삶터는 아주 글러먹은 독재요 봉건이요 식민지요 쇠사슬입니다. 이는 정치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머리길이를 다그치고 치마와 바지 매무새를 나무라며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며 아이들 스스로 제 고운 삶을 붙안지 못하게끔 가로막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넋 올바른 삶이라 한다면 올바른 말로 올바른 길을 이야기하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습니다. 헌법을 내리누르고 있는 터무니없는 교칙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칙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누구나 알리라 봅니다만, 아마 오늘 우리 터전에서는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은데, 학교에서는 교장이 임금님입니다. 우두머리요 왕초입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학교에서 교장이 임금님이요 우두머리요 왕초인 얼거리는 그대로입니다. 외려 나날이 더 깊어진다 할 만하고, 되레 갈수록 단단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예전처럼 손찌검을 한다든지 몽둥이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주먹다짐이 살짝 줄었지 돈과 권력으로 휘두르는 몹쓸 짓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같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교칙이며 교장 권력이고 교육감 지휘봉입니다.


.. 국민은 언제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만 강조하는 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없애는 과정에 국민이 하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을 때, 법치는 비로소 민주주의입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법을 만들거나 고치고 없애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  (126쪽)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총칼이나 주먹다짐이 아닌 말로 일을 풀어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입니다. 속알맹이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떤 일이고 말로 풀리는 법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주가 말을 나누며 일을 푸는 모습을 보기란 참 힘듭니다. 꼭 집회를 해야 하고 어김없이 몸싸움을 해야 합니다. 헌법에는 집회를 하는 자유가 적혀 있으나, 어떠한 일터에서도 집회를 하는 자유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집회를 꺾어 누르는 경찰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패고 감옥에 집어넣기까지 하거나 벌금을 왕창 물립니다.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말로 일을 푼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어림 반푼어치조차 안 됩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말이나 평화로운 몸짓으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민주주의가 없는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허울만 좋은 거짓 민주주의는 쓸어내고 싶다면, 말로는 아무런 일을 풀거나 맺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야말로 온몸으로 두들겨맞는 삶을 건사하고 싱긋싱긋 방긋방긋 웃으면서 평화로운 말과 몸짓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사람들하고 똑같이 삿대질을 한다고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못난 엉터리들하고 마찬가지로 주먹다짐을 한다고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고 민주주의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 손석춘 님은 ‘젊은 지식인한테 도움이 될 자기계발서’로서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를 쓰셨는데, 이 나라에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이러한 자기계발서는 안 써야 맞습니다. 우리가 쓸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기성세대라 하는 우리 어른 가운데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서 ‘나는 내 터전에서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롭게 살아가는가’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 그런데 왜 자신의 미래 모습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 물구나무 선 인식을 하고 있을까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주권 의식을 가지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노동 운동을 폄훼해 왔기 때문입니다 ..  (188∼189쪽)


 손석춘 님이 쓸 글은 아름다운 문학이어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젊은이 앞에 선물해 줄 책은 슬기로운 삶자락 이야기여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머리를 쥐어짜며 풀어낼 말마디란 ‘국어사전에 숨어 있는 예쁘장한 낱말’이 아니라 ‘저잣거리 여느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당신들끼리 주고받는 가장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을 써낸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알아채 주지 않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아름다운 문학보다는 ‘꼴통 보수들이 휘두르는 총칼 같은 무기’에 맞설 만한 ‘총칼 같은 지식조각’들이니까요. 슬기로운 삶자락을 들려준다 한들 젊은 지식인들은 삶이 아닌 입으로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하거나 모임을 꾸리기 때문에 더없이 고단합니다.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마디로 책을 쓰면 아주 반갑지만, 이러한 책에 깃든 멋과 맛을 듬뿍 받아들이며 받아먹는 고운 젊은 넋은 얼마 안 됩니다.

 아마 ‘자기계발서’가 아닌 ‘삶책’을 쓴다면 손석춘 님은 굶어죽기 딱 알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굶어죽기 딱 알맞을 책을 손석춘 님 같은 분들이 써야 합니다. 굶어죽을 다짐으로 삶책을 써야지, 웬만큼 팔리고 읽힐 만한 자기계발서를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손석춘 님이 이 땅에 참되고 착하고 고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워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거나 꿈꾸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요?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고개 숙여 뉘우칩니다. (4343.5.16.해.ㅎㄲㅅㄱ)


 ┌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2010)
 ├ 글 : 손석춘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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