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을 읽으며


 새로운 책은 얼마나 새로운 책일는지 궁금합니다. 새로 나오는 책은 여태껏 나온 책들에 깃든 좋은 열매를 알알이 얻어 누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새옷을 입은 책은 이제까지 쏟아진 책들에 서린 아쉬운 대목을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다듬으면서 거듭났는지 궁금합니다.

 헌책방에 가면 헌책을 만납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헌책은 거의 모두 ‘다시 널리 팔리기 힘들어 보이는’ 책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헌책방마실을 즐깁니다. 오늘날 새로 나온다고 하는 책들이 예전 책들한테서 좋은 열매를 살뜰히 받아먹었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요, 지난날 책들한테서 아쉬운 대목을 곰곰이 살펴 고쳐 세웠다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은 똑같은 책입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책은 새로 태어나서 읽히다가 스러지고, 모든 사람은 새로 태어나서 자라다가 죽습니다. 다만, 모든 책과 사람은 똑같이 목숨이 있으나, 똑같은 결이나 흐름은 아닙니다. 예전 책은 더 예전에 나온 책한테서 새숨을 물려받으며 제 나름대로 꾸리는 삶을 담다가는 오늘날 책한테 제 숨을 물려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가 앞선 푸나무가 맺은 씨앗으로 태어나며, 앞선 푸나무가 숨을 거두어 온몸으로 삭힌 목숨값으로 새로 살아가듯, 책은 앞선 책들이 있어 새로움이란 옷을 입습니다.

 새책방 책꽂이에는 틀림없이 새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새책들 가운데에는 예전 책한테서 목숨을 나누어 받지 않았거나 목숨을 나누어 받으려 하지 않는 책이 꽤 많구나 싶습니다. 더욱이, 이 새책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다 바쳐서 ‘뒷날 새로 나올 다른 책’한테 저희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껍데기는 틀림없는 새책이나 속살은 하나도 새책이 아니요, 바야흐로 책이라 말할 수조차 없는 녀석, 이를테면 돈나부랭이라든지 권력나부랭이라든지 명예나부랭이로 뒹굴고 있는 종이뭉치이기 일쑤라고 느낍니다.

 새책을 만나며 새마음 새사랑 새힘 새빛이 되기란, 오늘날 우리 누리에서 몹시 힘겹습니다. (4343.6.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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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스타 수도원 2층 창가에서


 자동차를 몰고 있는 분은 자동차가 달리며 내는 소리 때문에 찻길 둘레 동네가 얼마나 시끄러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더 좋은 차가 나와서 차를 달리는 사람과 차에 탄 사람이 ‘차 소리를 덜 느낀다’ 할지라도, 자동차에 탄 사람이 느낄 소리는 아주 작습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찻길은 몹시 시끄럽습니다. 100미터 아닌 1킬로미터 바깥까지 자동차 소리는 울려퍼집니다.

 자동차를 몰면 몰수록 우리 삶터는 더욱 시끄럽습니다. 버스와 전철을 타도 시끄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버스가 다니는 길가나 전철이 지나가는 철길 둘레에서 살아 본 분이라면 대중교통이라 해서 시끄러움이 덜하지 않음을 잘 알리라 봅니다. 자동차이든 버스이든 전철이든, 또 기차이든 배이든 비행기이든, 타야 할 때에는 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자동차에 몸을 싣는 일이란 얼마나 뜻이 있거나 값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참말 타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를 타고 있는가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자동차를 장만하거나 차를 몰거나 차에 오르지는 않는가요.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 집식구들이 차분하고 조용히 지내는 가운데 온몸에서 길어내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기계라서 싫다거나 환경을 무너뜨려서 싫지는 않습니다. 참된 소리, 곧 참소리가 아닐 때에는 슬프고 가슴아픕니다. 삶을 밝히고, 삶을 북돋우며, 삶을 즐기는 소리를 나 스스로 내고 싶습니다. 내 둘레 모든 목숨들이 저마다 제 목숨을 빛내고 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4343.6.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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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살림집 마지막 빨래를 앞두고


 인천살림집을 옮기기까지 며칠 안 남았다. 오늘 저녁 거의 마지막으로 짐을 다 꾸려 놓고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날씨를 보아 가며 충주 산골마을로 들어간다. 부엌 살림을 거의 다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고, 이불은 오늘 덮을 담요 한 장만 남기고 모두 이불 가방과 큰 보따리에 담아 묶었다. 새 살림집으로 옮기며 흩어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책 겉그림을 스캐너로 긁고 이래저래 갈무리를 마쳐서 끈으로 묶으면 이제는 더 묶어 놓을 살림거리가 없다. 바야흐로 마지막 빨래 몇 점을 해 놓으면 집 옮길 일손은 마무리가 된다. 밀린 ‘필름 긁기’를 하려고 스캐너에 필름을 앉히고 짐을 꾸리며 생각한다. 짐을 꾸려서 옮기려 하면 이동안 다른 일을 거의 못할 뿐 아니라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렇다고 힘들거나 벅찬 적은 아직 없다. 이제 이 살림집하고는 헤어지는구나 싶은 아쉬움이 새록새록 솟고, 또다시 한 곳에서 오래오래 깃들지 못하고 옮겨야 하는구나 싶은 서러움이 슬며시 꾸물거리기는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만한 살림집 보증금을 내고 달삯을 치르며 버티는 데에도 막바지에 이르렀으니까. 도서관 달삯은 지난달 치와 이달 치를 보증금에서 뺀 다음, 남은 보증금으로 짐차와 사다리차 부를 돈으로 써야 하는데. 살림집 달삯도 매한가지이고. 집식구 앞에서는 웃고, 바깥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웃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빠듯하고 힘겨웠던 살림 꾸리기였다. 이제 다달이 70만 원씩 내던 달삯 짐을 훌훌 털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 말이 70만 원이지, 느긋하게 돈 벌며 이름값 떨칠 수 있는 자리를 모두 마다 하고 골목동네 한켠에서 쭈그리고 앉아 글쓰고 사진찍고 애랑 복닥이며 지내는 가운데 달삯 치르고 책값 치르며 사진값 치르는 가운데 몸아픈 옆지기를 돌볼 여러 가지를 장만하는 데에 들어갈 돈을 다달이 벌어들이기란 참 터무니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억지스럽고 고단한 일을 웃음을 지으면서 해야 할 뿐더러, 내 삶에서 내가 붙잡으며 일구어야 할 일거리를 뒷전으로 젖혀 놓아야 할 때가 얼마나 잦았는가. 이제 차분하게 지난 나날을 돌아보노라면 고되고 힘들던 나날이라 해서 그때에나 이때에나 고되고 힘들기는 했어도 싫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고될 뿐이요 그예 힘들 뿐이다. 고되다고 나쁘지 않으며 힘들다고 슬프지 않다. 고된 일이니 아이구야 고되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힘드니까 어이구 힘들어 죽겠네 하고 허리를 토닥인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이야 참 좋구나 하고 받아들이며, 기쁜 일이 있으면 더없이 기쁘네 하면서 받아들인다. 어여쁜 골목동네 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어여쁘네 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름다운 줄거리 담은 책을 읽으며 가없이 아름답군 하고 느끼며 책장을 넘긴다. 맨 처음 했던 빨래라 해서 더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란 없고, 마지막 하는 빨래라 해서 남달리 새삼스러운 느낌이란 없다. 똑같은 빨래이다. 이제 이곳에서는 더 빨래할 일이 없겠네 하고 느낀다. 자, 좀 숨을 돌리면서 쉬자. 땀 꽤나 뺐으니까 한 번 찬물로 씻고 보리술 한잔 걸친 다음 새로 힘을 내어 마지막 짐을 다 싸 놓고 새벽녘에 잠들자. (4343.6.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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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 눈빛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전쟁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미군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5] 조지 풀러,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예순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사진자료가 빛을 봅니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10일에 나온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 펴냄,2010)은 무척 돋보이는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맨 앞자리에 실린 추천글을 쓴 사람은 백선엽 씨입니다. 백선엽 씨 이름 밑에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이라는 직책이 달려 있습니다. 백선엽 씨가 한국전쟁 때 거두었다는 ‘큰 성과(쥐잡기 작전)’를 헤아린다면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추천글을 쓸 만할 수 있으며, 한국전쟁을 기린다는 사업회 고문 자리를 맡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선엽 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당신과 동생 백인엽 씨 이름을 딴 ‘선인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라는 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여느 학교가 아닙니다. 인천에서 선인재단은 어마어마한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일 뿐 아니라 인천이라는 곳이 꼴통이 되도록 권력을 뒤흔들던 곳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발자취라든지 군사독재정권 무렵 사학비리를 저질렀다든지 하는 발자국이란 ‘한국전쟁 공로’에 견주면 아무것 아닐 수 있으며, 눈감을 만한 티끌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이 갑갑하고 아찔합니다. 전쟁 때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외치며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사람이라면 전쟁을 마친 다음에도 나라를 지킬 수 있게끔 맑고 깨끗하며 정갈한 삶을 꾸려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전쟁 업적과 친일부역과 사학비리란 한 자리에 한 사람한테 나란히 놓일 만한 보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씁쓸한 추천글이 달린 사진책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추천글은 씁쓸하더라도 책에 담긴 사진이 씁쓸하지 않다면 이 사진책은 훌륭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추천글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을 책 하나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또한 그리 달갑지 못합니다. ‘컬러로 보는’이라는 책이름답게 한국전쟁 모습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드문 자료로 엮은 책이기는 하나, 한국땅에서 일어나 한겨레가 서로 치고박으며 숨을 거두고 괴로워 하던 나날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총부리를 마주하며 다투는 가운데에도 여느 사람들은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살림을 여느 매무새로 꾸리고 있던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난 1996년에 나온 작은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든 《끝나지 않은 전쟁》이든 미군 사진기자가 찍은 빛깔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은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사뭇 다릅니다. 아니,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다르다기보다 두 미군 사진기자 삶이 달랐겠지요. 사뭇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눈매가 되었을 테며, 서로 다른 눈매에 따라 서로 다른 눈썰미로 한국땅에서 한국전쟁을 부대끼고 한겨레붙이를 마주하면서 빛깔사진을 담았을 테지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진책은 책이름 그대로 1950년 무렵이든 1996년 무렵이든, 또 2010년 무렵이든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끝날 수 없어 보이는 싸움터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지 않을 싸움터로 보이는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은 아기자기하며 앙증맞습니다. 군인들이 쏘아댄 총알과 폭탄 때문에 산과 들은 무너지고 나무는 꺾이고 풀과 꽃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군인 아닌 여느 사람들, 또 군인으로 끌려간 여느 사람들은 빈 들판에 곡식을 심어 일구고 빈 멧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마음을 쏟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옷가지이든 모포이든 무엇이든 그러모아 바느질을 하여 아이들 옷과 어른들 옷을 마련합니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다시 세우고, 이런 마을 한켠에서 아이들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코를 흘리며 골목놀이를 합니다. 널뛰기를 하고 초콜릿을 얻으려고 미군한테 달려듭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작은 사진책을 덮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사진책 하나로 엮인 전쟁 사진을 찍은 미군 사진기자 조지 풀러 님은 ‘전쟁과 자본주의 미국 문화와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 넋이 맑고 차분하고 깨끔한 사람과 삶’을 찾아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하고.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한국땅 여느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가 인도이니 티벳이니 네팔이니 찾아가서 사진으로 담는 ‘거룩하고 수수하며 깨끗하고 착하다는 사람들’ 느낌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실린 한국땅 한겨레붙이 모습을 볼라치면 한 마디로 ‘전쟁 난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으레 떠올릴 만한 ‘코소보 아이들’이라든지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라든지 ‘콩고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 납니다.

 한국전쟁이란 참으로 쓰디쓴 우리 옛 생채기입니다. 죽인 쪽이나 죽은 쪽이나 아프디아픈 자국입니다. 앞으로 마흔 해가 더 지나 한국전쟁 백 해를 맞이한대서 아물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왜 우리한테 생채기요 아픔이요 슬픔이 될까요.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곰곰이 살필 대목이란 북침이니 남침이니 전쟁 피해이니 하는 숫자셈이어야 할까요. 몇 백만이 죽거나 얼마나 많은 산과 들이 무너졌거나 얼마나 많은 들짐승이 나란히 숨을 거두었거나 하는 한국전쟁이 아닙니다. 이때 뒤로 남과 북이 서로서로 무기를 더 늘리려고 얼마나 큰돈을 쏟아부었으며 서로서로 독재 틀거리를 지키고자 반공과 반미를 왜 그토록 모질게 외쳤는가 하는 대목 또한 한국전쟁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이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가 죽고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며 우리 누나가 죽는 가운데 우리 동생이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내 살붙이가 죽고 내 이웃이 죽었으며 내 동무가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고단하게 죽고 만 용산 철거민 또한 내 이웃이요, 미선이와 효순이 또한 내 동생이며, 한때 정치권력자와 언론들이 폭도로 내몰았던 광주사람 또한 내 살붙이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 삶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괴롭히며 짓밟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느 사람들은 아프고 힘들며 고단해야 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거룩하다거나 뜻깊다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권력자와 지휘자는 죽지 않으며, 전쟁이 끝났든 전쟁이 없는 동안에든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자면 모든 무기와 군인이 사라져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된 힘이란 무기와 군대가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다운 힘이란 여느 사람들 따스한 사랑과 땀흘려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샘솟습니다. (4343.6.25.쇠.ㅎㄲㅅㄱ)


- 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사진,신광수 엮음,눈빛 펴냄,1996.6.3./1만 원)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으나,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엮은 신광수 님 또한 백선엽 씨한테서 도움을 받아 사진에 나온 곳이나 그무렵 이야기를 듣고 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지 풀러 -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사진들 





















 

[존 리치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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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 2


 언제나 내 몸뚱아리가 되며 늘 함께하던 사진기가 망가진 어제 하루는 도무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슬픈 마음으로 잠들다가 깨어난 아침, 어쩔 수 없이 이래저래 빚을 내어 새 사진기를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 장만할 사진기 값이 106만 원이요, 메모리카드를 두 장쯤 더 사야 하니 6만 원이 더 든다고 하는 돈셈을 하면서 괜히 울컥 성이 난다. 디지털사진기는 한 대 있는데 거의 비슷한 기능으로 새로 사야 할 뿐 아니라, 같은 디지털사진기를 사더라도 어차피 들어야 할 돈이면 훨씬 좋은 사진기를 살 돈을 모을 수 없는 때에 사야 하는데다가, 그토록 꿈에 그리고 있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사는 일은 멀리멀리 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히유. 한숨을 몰아쉰다. 배가 꾸물꾸물하다. 뒷간에 가서 똥을 눈다. 똥을 누며 《내 멋대로 사진찍기》(들녘,2004)라는 책을 읽는다. 방으로 돌아온다. 하아. 다시 한숨을 몰아쉰 다음 생각을 추스른다. 망가진 디지털사진기를 고칠 수 있고, 고치는 값이 크게 들지 않는다면, 이 또한 나쁘게만 여기지 말자고 다짐한다. 고쳐 놓은 사진기는 아기랑 애 엄마가 쓰는 사진기로 삼으면 된다. 내 사진기는 그야말로 내 몸뚱이가 되어 낡고 닳도록 땀흘려 주었으니, 망가진 곳을 고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곱게 떠나 보내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 참말, 디지털사진기가 이렇게 낡고 닳아서 스스로 망가지는, 그러니까 숨을 거두도록 쓰는 사람이 우리 누리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아니, 있을까? 디지털사진기뿐 아니라 필름사진기마저 하도 자주 많이 꾸준히 쓰다 보니 제풀에 지쳐서 망가져 버리지 않았던가. 내가 사진기를 어디 떨어뜨리거나 부딪혀서 망가뜨리지 않는다. 워낙 오래 많이 찍다 보니까 스스로 망가진다. 내가 타고다니던 자전거는 두 대가 제풀에 겨워 낡고 닳아 더 탈 수 없다. 내가 무슨 돈이 넘치거나 우악스러운 사람이 아닌데, 쓰는 기계들은 사람처럼 굳은살이 박힌다든지 더 단단해진다든지 할 수 없다. 기계는 쓰는 만큼 낡고 닳아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 주어야 한다.

 나를 탓할 까닭 없고 기계를 탓할 까닭 없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흐름이자 결이다. 그동안 살아내면서 자전거 두 대가 맛이 가 버린 일이라든지, 어느덧 필름사진기 한 대와 디지털사진기 한 대가 스스로 목숨이 끊어진 일이라든지, 짜증을 부리거나 골을 부리거나 할 일이 아니다. 자전거하고 사진기한테 고맙고 미안했다며, 여태껏 참으로 즐거웠고 반가웠다며, 고개숙여 인사를 할 노릇이요 절을 하고 향을 하나 피울 노릇이라고 여겨야지 싶다.

 내 몸이 되어 주던 사진기야, 이제는 푹 쉬렴. 느긋하게 쉬고 홀가분하게 누우렴. (4343.6.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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