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들의 주머니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최정인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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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과 웃음이 없다면 학교일 수 없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1] 하이타니 겐지로, 《악동들의 주머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자니 팔뚝이 근지러워 비비다가 모기 한 마리를 잡습니다. 모기는 제 팔뚝에 앉아 피를 빨아먹으려다가 그만 으스러지고 맙니다.

 며칠 앞서부터 모기가 하나둘 보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때면 모기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끔찍했는데, 올해에는 좀처럼 모기 구경이 어려웠습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으니 모기라는 녀석이 퍽 늦게 깨어나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제 저녁이나 그제 저녁에는 달빛이 무척 밝았습니다. 보름달이 아닌 반달이었으나 집안으로 달빛이 곱다시 비쳐들더군요. 보름달 빛이었다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았겠구나 싶습니다. 반달 빛으로는 책을 읽기에는 모자라지만, 길가에 켜 놓는 등불만큼은 밝다고 느낍니다.

 우리 세 식구 깃든 산골마을에는 둘레 길가에 따로 등불이 없으니까 오로지 달빛에 기댑니다. 따로 손전등을 켜고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어두운 길에서는 얼마쯤 기다리고 있으면 밤눈이 트여 다 보이기에 굳이 손전등이 없어도 됩니다. 손전등을 켜면 오히려 잘 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지낼 때에도 달은 늘 올려다보기는 했으나,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달빛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깊은 밤에도 길마다 등불이 환히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골목이란 어디에도 없기에, 그나마 좀 어둡겠다 싶으면 자동차 불빛이 들이치면서 어두움다운 어두움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밝은 낮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밝은가를 느끼지 못하는 도시요, 어두울 저녁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어두워야 하는가를 느낄 수 없는 도시인 셈입니다.

 요즈음 같은 찜통 더위에는 그야말로 푹푹 찌는 더위를 느껴야 할 텐데, 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후줄근하게 땀을 쏟으며 더위를 느낄 테지만,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낮게 맞춘 에어컨 때문에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도 춥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시골이라 해서 이런 날씨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도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다 보니, 건물 안팎 느낌이 지나치게 다릅니다. 시골에서 차를 몰 때에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면 될 텐데, 시골에서 차를 몰며 창문을 열고 알맞게 달리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우리 스스로 살짝이나마 생각하는 기운이 남아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에어컨을 많이 쓴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름날 ‘더위를 식히려’고 도시사람이 찾아가던 곳은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관공서조차 에어컨을 들여놓고 펑펑 틀어대지 못했어요. 고작 1980년대를 헤아리고 1970년대를 더듬자면, 선풍기 한 대 들여놓는 일마저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1994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동안 대학교를 다녔는데, 이무렵 인천에서 서울로 전철을 타고 오가면서 ‘에어컨 달린 국철’은 타 보지 못했습니다. 이무렵 국철은 ‘선풍기 달린 국철’이었고, 선풍기조차 안 달려 있어 창문을 여는 국철이 수두룩했고, 선풍기가 달려 있어도 망가져 있거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제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이무렵 서울 지하철은 모두 에어컨이 달려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부채로 더위를 식혔고, 등물을 한다든지 모시옷을 입는다든지 제철 열매를 먹는다든지 하면서 땀을 식히려 했습니다. 모두모두 선풍기나 에어컨을 쓰는 삶이 아닌, 거의 모두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 더위를 받아들이는 삶이 우리 삶이었습니다. 지난날에도 오늘날처럼 도시가 있었으나, 도시라 할지라도 전기이며 물질이며 되도록 쓰지 않는 가운데 서로서로 엇비슷하게 가난하면서 오붓한 살림살이였습니다.


.. “이 아이들은 1학년 동생들이 정성껏 기르는 화분을 발로 차서 깨뜨리고 지나갔어요. 대체 이 아이들한테도 따뜻한 마음이 있을까요?” 1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때는 어벙이가 어쩌다 화분에 발이 걸려 화분을 깨뜨려 버렸어. 어벙이 혼자 야단맞으면 너무 불쌍하니까 우리도 같이 화분을 찬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 해 선생한테 변명하는 녀석은 인간쓰레기야.’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저희 반 아이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돈을 빼앗은 적이 있어요. 그 아이는 워낙 성격이 소심해 그 뒤로는 겁이 나서 학교에도 잘 나오지 못할 정도라고요.” 5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 자식은 집에서 몰래 돈을 갖고 나와 아이들한테 한턱 쓰고는 그 아이들을 자기 부하처럼 부려먹는 나쁜 놈이란 말야. 그래서 우리가 대신 벌을 준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해. 선생한테 변명을 하면 그 자식이랑 똑같아져 버리니까.’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  (15∼16쪽)


 여름날 흙길을 걸어가며 느끼는 더위하고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을 걸으며 느끼는 더위는 사뭇 다릅니다. 숲길을 거닐 때 느끼는 더위 또한 크게 다릅니다. 더 많은 돈과 끝없는 경제개발을 바라면서 온 나라가 도시로 바뀌고 갖가지 회사가 생겨납니다. 농사지을 터전은 줄고, 농사짓겠다는 사람 또한 줄며, 회사일 하겠다는 사람이나 셈틀 자판 만지작거리겠다는 사람은 늡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시험 공부만을 시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참다운 환경 공부를 시키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라든지 기후변화 같은 낱말을 가르치고, 이러한 환경 문제를 지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정작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풀어낼 길을 우리 삶에서 우리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찾아 고치거나 다독여야 할는지를 일깨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모조리 부자가 되어 ‘더 많이 벌어들인 돈’으로 ‘생태에너지’를 만들거나 ‘환경 지키기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우리 터전이 나아질 수 없습니다만, 학교에서 이러한 틀거리를 올곧게 가르치거나 받아들이는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농업고등학교’는 몇 군데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아도, 농업고등학교라 해서 농사꾼 되는 길을 가르친 학교는 드물었습니다. 시골학교조차 농사꾼을 키우는 배움마당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온통 도시로 나아가도록 내몰고,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도록 몰아쳤을 뿐입니다.

 사람들 누구나 몸으로 내 삶을 느끼거나 헤아리며 내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찾도록 이끄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라 할지라도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 되는 길로 나아가지, 대안학교 가운데 농사꾼을 말하거나 농사꾼으로 가르치는 곳이 몇 군데 있을까요. 당신 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면서 ‘우리 아이는 흙과 물과 바람과 벌레와 풀을 사랑하는 농사꾼이 되면 좋겠어요’ 하고 꿈꾸는 어버이는 있기나 있는지요. 아니, 어버이부터 스스로 농사꾼이 되고자 꿈꾸기는 하는지요.


.. 수수깡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수수깡의 아버지는 공해병을 앓았지만 공해병 환자로 인정받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공해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지 않은 탓에 보상도 전혀 받지 못했다. 수수깡은 키가 작고 야윈 것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너는 정말 효녀구나.” 수수깡은 엄마한테 이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수수깡은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먹을 것이 생기면 반은 자기가 먹고 반은 반드시 집에 가져가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  (17∼18쪽)


 우리 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살아가면서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찾는 가운데, 사람을 사귀고 문화와 예술을 누리는 한편, 보금자리를 빌라나 아파트로 마련하는 도시라고 하는 터전입니다. 이러한 도시인 탓에 도시 학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에 알맞춤한 지식을 베풀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우리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목숨 하나 곱게 선물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학교에서 익히고 배우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어야지, 돈만 잘 번다거나 이름값만 드높인다거나 권력을 움켜쥔다거나 해서 무슨 즐거움이나 보람이 있을는지요. 다 같이 물을 사다 마시는 도시 삶터가 아닌, 모두 다 물을 ‘흐르는 냇물에서 얻어 마시는’ 시골 삶터로 거듭날 수 없을는지요.

 학교는 언제까지 모든 아이들한테 지식조각만 쑤셔넣는 감옥소 같은 데로 남아 있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학교는 왜 모든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몇 가지 권장도서만 읽히며 아이들 넋과 얼을 짓누르는 감옥소 노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학교는 이름 그대로 ‘배우는 터전’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 공부는 못 하지만 쓸모없지는 않아.” 다보가 말했다. “공부 못 하는 게 반을 욕먹이는 짓이냐? 말도 안 돼.” 오탸양도 맞장구를 쳤다. “선생한테 알랑방구나 뀌고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고 만날 낑낑대기나 하지.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식이 큰소리치기는. 그런 자식이야말로 쓸모없는 인간 아니냐? 바보, 머저리 아니냐고!” 세이조는 화가 점점 더 치미는 모양이었다. “가바시마 선생님은 우리를 나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겠지?” ..  (31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짤막한 어린이책 《악동들의 주머니》라는 작품을 읽으면, 1970년대 일본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복닥이는 삶이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아이들이라면 겪기 힘들 만한 삶이요, 2010년대 한국땅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느끼기 어려운 삶이 아니랴 싶은데, 이웃나라 지난날 삶이든 이웃나라 가난한 마을 아이들 삶이든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이 마주할 법한 사람내음 묻어나는 삶일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놓인 자리와 살아가는 자리는 틀림없이 다르지만, 학교가 학교답지 못한 곳이라면 사회가 사회답지 못할 뿐더러 사람들이 사람들답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던져 놓는다고 아이들이 온갖 지식을 잘 받아들여 시험 잘 치르는 아이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맡겨 놓고 돈벌이를 하는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다이 꾸리는 삶이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어버이 스스로 당신 살림터와 마을에서 언제나 아이들하고 오붓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굳이 학교라는 데에 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며 슬기롭게 자라날 수 있는 배움마당을 늘 베풀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참다이 배우고 올바로 배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지 않다면 학교는 감옥소에 머물 테니까요. 이렇게 할 수 없다면 학교는 감옥소 노릇만 알뜰히 할 테니까요. 생김새도 감옥소이고, 아이들한테 붙이는 이름(번호) 또한 감옥소다우며, 아이들한테 시키는 공부 또한 감옥소 얼거리입니다. 하루 내내 시멘트 교실에 가두어 놓은 채 바깥바람 쐴 겨를조차 주지 않기 일쑤인 학교 아닙니까.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앎과 슬기를 나누는 열린 터전이 아닌, 교사가 학생한테 온갖 지식을 쑤셔박는 외곬 늪이 아닙니까. 아이 하나하나를 골고루 헤아리는 학교를 본 적이란 없습니다. 아이가 서른이든 예순이든, 서른 아이이든 예순 아이이든 저마다 다른 삶이고 목숨이며 넋입니다. 이 다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아름다운 일꾼이 되고 살림꾼이 되며 어른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할머니는 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었다. 그런데 음식을 모두 열 개씩 샀기 때문에 종류마다 하나씩 남았다. “할머니, 그건 할머니 아들 몫이야?” “오냐.” 할머니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 다음에 할머니 아들이 외국에서 돌아오면 꼭 같이 살아야 돼요.” 하고 도메코가 말했다. “오래오래.” 세이조도 말했다. “아아아아, 아아, 아아…….” “오냐오냐.” ..  (136쪽)


 《악동들의 주머니》에 나오는 ‘악동’들은 교사가 붙여 준 이름대로 ‘악동’입니다. 이 악동들은 저희 스스로라든지 마을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착한 ‘아이’입니다.

 이 나라 숱한 제도권학교는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푸름이를 푸름이로 보지 않습니다. 이 나라 대학교 가운데 젊은이를 젊은이 그대로 바라보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이는 이 나라 대안학교 또한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푸름이는 푸름이이지 학생이 아니며, 젊은이는 젊은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학생만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교사 또한 배우는 사람입니다. 서로 배우는 사람이고, 서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교사라고 하는 전문지식인이 학생이라고 하는 덜 여문 풋내기한테 숱한 지식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로서로 어른과 아이, 또는 어른과 푸름이, 또는 늙은이(어르신)와 젊은이라는 사이로 만나면서 서로서로 다른 삶과 넋과 말을 느끼는 가운데 서로서로 아름다울 길을 깨달아 다 함께 발돋움하며 즐거울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 “깡패도 착한 깡패, 나쁜 깡패가 있어?” “당연하지. 아양 형은 착한 깡패야. 이것 봐, 우리한테 초콜릿도 주잖아. 선생들이 우리한테 초콜릿 준 적 있어?” ‘치, 거기서 초콜릿 이야기가 왜 나와? 그치만 아양 오빠는 늘 우리 친구였어. 선생님 중에 우리 친구는 한 명도 없어.’ 하고 도메코는 생각했다. “그치만 세상에 정말로 착한 깡패가 있을까?” ..  (37∼38쪽)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교사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길 수 있어야 교사입니다. 무엇이든 모르고 있는 학생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기는 마음을 키우는 학생입니다.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다니며 내 동무하고 이웃하고 살붙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배운 적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열두 해를 거쳐 들어갔던 대학교에서도 ‘함께’ 살아가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배울 수 없었다고 느낍니다. 중학교라는 문턱을 밟자마자 이런 곳은 곧바로 때려치워야 한다고 느꼈으나 여섯 해를 마지못해 참았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네 해를 더 감옥소살이를 해야 한다고 느끼니 몹시 아찔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은 아주 마땅히 다니지 말아야 할 곳이어서, 다섯 학기까지 참다가 그예 그만두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학교라는 곳은 내 동무와 이웃과 살붙이하고 아름다이 부대낄 삶을 가로막는 슬픈 울 안이라고 느낍니다. 기쁜 열린 마당이 될 수 있고, 신나는 열린 배움터가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돈과 큰 힘과 높은 이름을 꿈꾸면서 학교를 자꾸자꾸 더 굳센 감옥소로 다져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눈물을 잃고 웃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 《악동들의 주머니》(양철북,2006)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그림 : 최정인
 └ 책값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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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씻김


 다음달에 두 돌을 맞이할 딸아이가 제 아빠 발에 물을 묻힌 다음 비누를 바르고 다시 물을 뿌려 씻어 준다. 아빠랑 엄마가 갈마들며 아이를 씻기곤 하지만, 으레 아빠가 아이를 훨씬 자주 씻어 주고 있는데, 아빠 발을 아이가 씻어 주기는 오늘이 처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엄마 발이라든지 할머니 발은 일찌감치 씻어 주었다고. 이런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 앞에서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말을 늘어놓는데다가 어떤 사람을 사귀고 어떤 물건을 쓰는 가운데 어떤 매무새로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가를 제대로 따지거나 살피거나 다스리거나 곧추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들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 나라를 쉬 망가뜨리고 말겠다고 느낀다. 책은 한 권조차 없어도 되고, 책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안 읽어도 된다. 학교는 꼭 하루뿐이어도 안 다녀도 그만이고, 학교란 곳은 아예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이한테는 어버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스승이다. 아이한테는 제 살림집과 마을과 골목이 바로 배움터이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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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7-20 15:00   좋아요 0 | URL
뒤집어 말하면 아이도 우리 어른들의 스승이지요.
저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파란놀 2010-07-20 15:38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랑 함께 살아가면서
그예 서로 좋은 동무로 지내며
즐겁구나 싶답니다...
 


 동화와 글쓰기


 권정생 할배만큼 온삶을 알콩달콩 재미나게 꾸린 분이 얼마나 있을까. 여느 할매와 할배는 당신처럼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았겠지. 그러나 글 좀 쓴다는 사람들치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간 사람이 있었을까. 권력이나 돈힘을 부리던 사람들 가운데 알콩달콩 재미난 삶을 꾸린 이가 있었을까.

 자가용을 버리면 이라크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던 권정생 할배 말은 자가용을 버리는 데에서 내 삶을 맑고 밝으며 즐거이 가꾸는 새날과 새길이 열린다는 슬기로움 묻어난 이야기 한 토막이었다. 우리 스스로 옳은 삶을 재미나게 꾸리면서 옳은 넋과 옳은 말로 서로서로 사랑하며 지낸다면, 어떤 못된 권력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짓을 못할 뿐 아니라, 이 땅 이 나라에서 섣불리 애먼 못난 짓을 못하게끔 타이를 수 있다.

 우리들 누구나 내 삶을 재미나며 신나게 꾸리고 있을 때에는 어떠한 멍청한 돈벌레라 할지라도 아무렇게나 우리 넋을 망가뜨리거나 장사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들 누구나 내 삶을 재미없고 신바람 안 나게 돈바라기 권력바라기 학벌바라기로 치닫고 있으니까, 권력자이든 돈벌레이든 우리들을 마음껏 주무르거나 휘두르거나 짓밟을 수 있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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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협과 아줌마


 우리 나라에서 스스로 진보라 하는 분들하고 보수라 외치는 분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생협에 다니지 않을 뿐더러 생협을 알고자 힘쓰지 않는데다가 생협 같은 모임을 느끼지조차 않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진보인 분들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든지, 보수인 분들 스스로 시골에 터를 마련해 조용히 농사짓기를 즐긴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줌마들만이 왼날개나 오른날개 아닌 여느 수수한 살림꾼으로서 생협에 다니고 있습니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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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테마다 - 곽윤섭 기자가 제안하는 나만의 사진 찍기
곽윤섭 지음 / 동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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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4] 곽윤섭, 《이제는 테마다》



- 책이름 : 이제는 테마다
- 글·사진 : 곽윤섭
- 펴낸곳 : 동녘 (2010.6.5.)
- 책값 : 13800원


 (1) 사진을 하는 마음


 집살림을 쉰 해나 예순 해나 일흔 해를 해 온 할머니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꾸려 온 삶이 대단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으레 꾸려야 하는 집살림이기에, 당신 또한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집살림 한길만을 걸어야 했다고 느낄 뿐입니다.

 집살림을 놓고 ‘가사노동’이라 일컫기는 하지만, 정작 집살림을 하는 살림꾼한테 돈값을 치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집식구가 집살림을 할 때에는 ‘거저로 도맡아 해 줄 일’로 여기고, 밖에서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 비로소 돈값을 치릅니다. 집안에 있으면 벌이를 하나도 안 한다 여기고, 집밖에 있어야 비로소 벌이를 한다고 여깁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던 할머니와 살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수수하고 조촐하게 즐기는 사람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줍잖게 ‘전문 사진작가 흉내’를 내느라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한편, ‘다른 어느 누구 흉내를 내지 않고 스스로 제멋을 살리며’ 더없이 싱그럽고 재미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입니다.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으레 으쓱으쓱거리면서 마치 당신이 언제라도 ‘전문 사진작가’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뻐기곤 합니다. 제멋을 사랑하며 살리는 사람은 으레 ‘아유, 이런 사진이 뭐가 좋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 찍은 사진인데요.’ 하면서 당신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낮추곤 합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내세운다든지 전문 사진작가 시늉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읽거나 들은 ‘전문 지식’이라 일컫는 이론을 들려줍니다.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당신들이 겪거나 부대낀 ‘삶’을 웃음이나 눈물을 담아 들려줍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해서 사진이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전문 사진작가이기에 사진이 대단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라고 해서 사진이 안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이기 때문에 사진이 어설프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가장 크게 돌아볼 대목은 ‘사진하는 마음’이 어떠하느냐입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가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봅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에 어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사진하는 길’이 어느 구비를 거쳤는가를 살핍니다.

 한 사람을 돌아볼 때에 이이가 어떤 일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벌거나 이름값을 얼마나 높였는가는 하나도 돌아볼 만한 대목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이가 당신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어 즐거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했느냐를 돌아볼 뿐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집살림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집살림을 무슨무슨 요리학원이나 문화센터 같은 데에서 익히지 않습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당신 스스로 집안에서 부대끼고 복닥이면서 차근차근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한테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있을 때에 가장 가까우면서 고마운 스승으로 삼으며 드문드문 하나씩 살가이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당신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전문 살림꾼’은 아닙니다. 그저 ‘여느 살림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살림꾼들이 일구는 집살림은 살림집 숫자만큼 많습니다. 사람마다 살림하는 모양이 다르고, 사람마다 살림하는 틀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장맛과 김치맛이 다르다고 하듯, 사람마다 살아가는 얼거리가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듯 모두 다른 삶결대로 모두 다른 살림을 꾸려 온 이들이 바로 우리네 살림꾼인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소리요, 오늘날까지 가장 막대접이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알뜰히 당신 길을 걸어온 어른이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건사하려 한다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집살림하는 할머니가 걷던 길이나 어머니가 걷는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손꼽히는 요리강사나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혀야 살림을 잘하겠습니까. 손꼽히는 요리강사한테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도 어떤 이야기를 듣기는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내 삶은 내 가슴으로 내 나름대로 느끼면서 내 결대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일굴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모습을 흉내낸다든지 남을 엿보면서 시늉을 한다고 내 삶을 일굴 수 없습니다. 내 살림은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깜냥껏 일구어야 합니다. 곧, 내 사진은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 배워서 하는 사진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좋고 나쁨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전문 사진강사한테서 좋은 구도를 배운다든지 괜찮은 빛느낌을 익힌다든지 쓸 만한 사진감(소재나 주제 모두)을 받아들인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내 깜냥껏 반갑고 아쉬움을 헤아리며 담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눈을 믿고 내 손을 믿으며 내 사랑과 믿음을 믿으며 즐기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머나먼 나날까지, 집살림하는 분들이 꾸린 삶자락이란 바깥사람 눈길로 보기에 ‘아무 모양새(주제)’가 없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집살림하는 당신들처럼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집안에서 당신 곁에 머물며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기에 ‘참 고우며 좋은 모양새(주제)’였다 할 만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 때에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엊그제, 마침 충주에서 인천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에, 장례식장에 들렀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마구 뛰고 휘저으며 노는 딸아이를 붙잡느라 정작 돌아가신 분한테 ‘고이 저승길을 걸어가소서’ 하고 비손할 겨를조차 없이 바빴습니다. 고단해 하며 시나브로 잠들 듯한 아이를 안고 잠자리로 가는 길에서야 겨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 어떠했는지를 여쭙지 못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때에도 어디에선가 할머니들은 한 분 두 분 숨을 거두고 있을 텐데, 숨을 거두는 할머니들 궂긴 소식은 신문에든 방송에든 나오지 않습니다. 여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 당신들 삶을 다루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궂긴 소식은 이름난 사람들이나 연예인이나 정치꾼이나 회사 간부나 높은자리 공직자들뿐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름난 사람들한테서 얻거나 느낄 마음이란 무엇일는지요? 하나같이 양복을 쫙 빼입고 있는 그 이름난 분들 궂긴 소식 사진을 바라보면서 무슨 울렁거림이 있을는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는 바로 그때부터 ‘내 사진감(사진 주제)’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식구들 모습을 찍든, 꽃 사진을 찍든, 동네에서 동무나 이웃 사진을 찍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찍든 ‘내 사진감(사진 주제)’을 알뜰살뜰 즐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동안에 언제나 내 사진감이 하나둘 새록새록 쌓이고 있달까요.

 따로 사진감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넓고 깊은 숱한 사진감으로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찍자’고 해야 사진감이 되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 하나만 찍자고 해서 ‘주제가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과 바다만을 찍자고 해서 ‘주제가 서린 사진’을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다만, 한 가지 틀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진에는 저마다 사진감(주제)이 있습니다만, ‘이야기’까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래저래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에도 이야기를 우겨넣을 수 있기는 할 테지요. 이야기란 우겨넣든 꾸겨넣든 쑤셔넣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거나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달가이 반길 사람은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 앞서, 나 스스로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은 이야기가 즐거웁겠습니까.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나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방송 연속극에 나오는 ‘억지로 지어내거나 짜낸 웃음눈물’하고 견줄 수 없이 산뜻하고 너르며 풋풋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곤 합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나 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한테서나 살가우며 재미난 한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인 까닭에, 여느 사람들 삶이야기야말로 눈물나거나 웃음납니다. 그래도 여느 사람들은 당신들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방송 연속극을 들여다보기 좋아하시는데, 그저 당신들 할머니나 어머니 삶을 찬찬히 들으며 당신들 삶을 책으로 쓰거나 연속극으로 담은 일이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붙잡고 부둥켜안으면서 보내 온 삶에는 늘 ‘주제’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나, 당신들부터 이러한 삶에 깃든 주제와 이야기를 내세운 적이 없는 가운데 우리 또한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보듬지 않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하고 싶은 분들은 굳이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사진하는 마음’을 잘 다스리시면 됩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를 알차게 돌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을 보살피면서 ‘사진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면 돼요. 이 모든 줄기와 구비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다른 이 손을 빌 일이란 없습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면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남한테 맡겨서는 이룰 수 없는 우리 집 살림이요 내 사진밭입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다 할지라도 바로 이렇게 ‘벅찬 배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내 사진을 더 튼튼하고 힘차게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혔을 때에 누군가 등받이를 해 주어 밟고 올라설 수 있습니다만, 이 벽을 내 자그마한 두 주먹으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벽을 멀리 에돌아 갈 수 있는 한편, 내 손으로 사다리 하나 만들어서 벽을 살며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벽 앞에 선 나는 내 깜냥껏 이 벽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내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도 똑같고, 그림그리기를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때, 춤을 추거나 어떤 공연을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남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남한테서 배워 글쓰기를 할 수 없고 좋은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그림그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교사나 강사나 스승이나 교수나 전문가라는 분들한테서 몇 가지 자잘한 솜씨는 받아들이거나 물려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 한 줄에 담는 넋은 내 넋을 담을 노릇입니다. 그림 한 장에 싣는 얼은 내 얼을 실을 노릇입니다. 내 스승 넋을 내 사진에 담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 스승 넋은 내 스승이 당신 스스로 찍는 사진에 당신 나름대로 담을 뿐입니다.


 (2) 사진은 억지로 가르칠 수 없는데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일을 하는 곽윤섭 님이 《이제는 테마다》라는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놓습니다.

 사진강좌를 열기도 하고,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길잡이말을 찬찬히 일러 주기도 하는 곽윤섭 님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곽윤섭님한테서 도움을 받은 사진쟁이가 꽤 많지 싶고, 곽윤섭 님이 도와준 사람들 숫자 또한 무척 많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으니까요. 곽윤섭 님 사진은 곽윤섭 님 스스로 깨달으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당신한테 사진을 가르쳐 준 교수님이나 작가님이 있다 할지라도, 곽윤섭 님 당신 사진은 당신 나름대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이루는 사진입니다. 곽윤섭 님한테서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도 매한가지예요.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은 사진강사한테서 훌륭하거나 알뜰하다 싶은 이야기를 엿듣거나 받아들여야 당신 사진을 훌륭하게 끌어올리거나 일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듣든 안 듣든 당신 스스로 당신 사진길을 당신이 몸소 부대끼면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당신 사진길을 걸으면서 당신 사진을 훌륭히 끌어올리거나 일굽니다.


.. 사진에 선이 들어 있으면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바닷가나 사막의 모래밭을 떠올려 봅시다 … 이 모래밭 사진을 찍었을 때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래의 질감과 색일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사막 사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도시에서 사진을 찍으면 삭막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숱하게 등장하는 사각형들 때문입니다. 어디서 카메라를 들여다봐도 사각형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다고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  (13, 25쪽)


 곽윤섭 님은 《이제는 테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책이름부터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주제(테마)가 없는 사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사진에는 늘 주제가 있으나 이야기가 꼭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하는 사람이 ‘이제 막 사진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진길을 걷다가 망설이거나 헤매는 사람’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자면, “이제는 테마다!” 하고 외칠 노릇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어디에나 주제가 있음을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고 있답니다.” 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가운데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기는 한데, 이야기를 싣지 못할 때에는 영 맛이 없거나 멋이 없답니다.” 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토닥이며 딱 한 가지 모자람만 짚으면 됩니다.


.. 모르는 사람을 모델 삼아 찍기가 어렵다면 주변 인물, 즉 가족, 친구, 동료들을 미리 점찍어 둔 공간에 데리고 가서 찍어 봅시다 … 사진은 그림과 달라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을 다르게 찍기가 어렵습니다. 사진은 발견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지런한 발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것을 찍을지 보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긴 두 개의 꽃병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진입니다 ..  (39, 41쪽)


 이야기가 없으니 맛도 멋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으면 흔들린 사진이든 초점이 어긋난 사진이든 좀 어둡거나 밝게 나온 사진이든 재미가 있습니다. 신이 나고 기쁨이 묻어 나기 마련입니다. 놀랍도록 훌륭하다 하는 사진쟁이들이 마련한 사진잔치에 가 보면 으레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 몇 점씩 끼어 있곤 한데, 당신들은 틀림없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을 다시금 찍고 새로 더 찍었을 텐데, 사진잔치 자리에서는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을 어김없이 내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이든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든 “주제는 다 같이 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안 흔들리거나 초점은 잘 맞았어도 “이야기 하나 제대로 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진은 쓰지 못합니다.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하나 살뜰히 실어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씁니다.

 한 달에 오백만 원을 벌어야 좋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한 달에 사백구십오만 원을 벌어도 좋은 돈벌이요, 사백오십만 원을 벌든 삼백오십만 원을 벌든 이백오십만 원을 벌든 오십만 원을 벌든 좋은 돈벌이입니다. 오로지 돈벌이만 하느라 내 삶을 놓치고 있다면 끔찍한 돈벌이입니다. 벌어들이는 돈 숫자가 낮을지라도 내 삶을 가꿀 겨를이 있는 가운데, 보람찬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나한테 좋은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주제다”가 아닌 “이제는 이야기다” 하고 외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막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한테든, 오래도록 사진길을 걸은 즐김이한테든, 꼭 한 가지 말마디, “여러분 당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살포시 사진 한 장에 담아 주셔요. 이뿐이랍니다.” 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소재를 시험 삼아 찍어 보라고 일러 주어 보았자 부질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이런 구도로 찍어 보고 저럴 때에는 저런 느낌을 담아 보라고 해 보았자 덧없습니다. 만듦사진이 부질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야기 하나 없는데 만듦사진이든 스냅사진이든 스트레이트이든 무어이든 해 보았자 “사진이 될” 수 없어요.

 마구 휘갈겨 쓴 글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글쓴이나 그린이 나름대로 이야기 한 자락 담고 있으면 놀랍도록 눈물나거나 웃음나는 글이나 그림으로 남습니다. 세발이를 받치고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찰칵 한 장 찍었다고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도와 빛과 그림자를 맞추어 황금분할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멋있는 사진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를 찍을 때 옆에 있는 다른 놀이기구의 테두리를 이용해 찍는 것. 이것도 프레임 속 프레임입니다 … 회화에서는 화가 특유의 터치로 시각에 따라 대상을 표현하는 선이나 면을 일그러지게, 때로는 더 과장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다른 사람의 해바라기와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셔터를 눌러서 찍는 사진에서는 사진가 임의대로 터치를 바꾸는 것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59, 69쪽)


 우러나오는 사진이 되도록 ‘사진하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넉넉히 사랑하고 아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글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아니면 여느 교사로서 초중고등학교나 대안학교나 대학교나 뭐 이런저런 배움터에 있든 똑같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물려줄 수 없어요. 지식이란 책에 적바림해 놓고 ‘한번 읽으셔요’ 하고 내밀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만 물려줍니다. 삶에 서린 눈물을 물려주고, 삶에 깃든 웃음을 남깁니다.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잇는 가운데, 삶을 돌아보는 눈길과 손길을 나눕니다.


.. 사진을 찍어서 예쁘게 나올 만한 길들을 찾아봅시다. 우선 한강을 따라가 봅시다. 한강 주변에는 멋진 산책로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선유도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무지개다리는 낮이나 밤이 모두 아름다운 곳입니다 ..  (163쪽)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사진 지식’을 펼쳐 보이는 《이제는 테마다》라는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진 지식’이 아닌 ‘사진 삶’을 펼쳐 보였어야 할 곽윤섭 님이 아닌가 싶은데, 이제까지 퍽 오랫동안 전문 사진기자 길을 걸어오셨으나 정작 사람들한테 ‘사진 삶’은 펼쳐 보이지 못하고 책머리부터 책끝까지 온통 ‘사진 지식’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구태여 《이제는 테마다》 같은 책을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은 《이제는 테마다》를 비롯해 그 어떤 책조차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출 사진책이라면 사진하는 삶을 다루는 책이어야 합니다. 사진하는 삶을 ‘사진책을 쓴 사진쟁이’ 스스로 먼저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당신 뒷사람들한테 사진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우며 멋진가를 깨닫도록 한손을 내미는 책을 들추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하는 분들은 당신 집안에서 톡톡히 살림꾼입니다. 사진을 하는 분들은 당신 두 다리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나 톡톡히 ‘사진 살림꾼’일 노릇입니다.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다시 서고,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새로 서며,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튼튼히 설 노릇입니다.


.. 자전거를 테마로 삼으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변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거리, 공원, 광장 등에서 수시로 자전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에 동그란 바퀴가 있다는 것도 사진을 찍는 데 흥미로운 점입니다. 사진 속에 무엇인가를 담을 때는 특이한 소재가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데, 자전거의 바퀴는 모양 덕에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명랑하고 원만하며 희망적인 느낌을 줍니다 ..  (191쪽)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은 종이 한 장과 같습니다. 종이를 앞으로 뒤집으면 사진을 살리고, 종이를 뒤로 뒤집으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눈을 믿고 내 가슴을 사랑하며 내 삶을 좋아하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눈이 아닌 남 눈에 기대거나 내 가슴이 아닌 다른 이 가슴을 눈치 보듯 살피거나 내 삶이 아닌 딴 사람들 삶에 홀리고 있다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사진기가 값싼 녀석이든 비싼 녀석이든, 이 하나를 내 몸통으로 여기며 언제나 고이 아낄 수 있으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사진기 하나를 아끼기보다 더 값있고 괜찮다는 기계에 자꾸 눈이 멀다 보면 사진을 죽입니다. 척 보기에 눈물나거나 웃음나도록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사진에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해야 사진을 살립니다. 남 앞에서 내보이거나 무슨 기록을 만든다거나 어떤 일거리에 따라 찍으려고 하는 사진이라면 저절로 사진을 죽입니다.

 내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두 다리가 단단해지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찌웁니다. 손수 꾸리고 몸소 일구는 삶이라면 사진이 살아납니다. 사진이란 ‘손수’ 하는 일이고, 내가 ‘몸소’ 즐기는 놀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진을 막 배우려는’ 분들이나 ‘사진을 오랫동안 했으나 갈팡질팡하는’ 분들이라면 제발 사진강의는 듣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뿌리는 바로 내 삶에 있으니까요. 사진을 곱게 여미는 잎사귀는 먼나라가 아닌 내 고향마을 어디에나 곱다시 있으니까요. (4343.7.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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