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책 가운데 고전으로 손꼽을 몹시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인 <녹색세계사>가 품절인 채 오래도록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녹색세계사>를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헌책방에 내놓은 사람조차 매우 드물다. 나는 예전 '심지' 판하고 '그물코' 판을 모두 갖고 있으며 읽었으나, 이러한 책을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한 사람한테 <녹색세계사>를 읽어 보라고 말을 할 수 없다. 

 얼마 앞서 <녹색세계사> 고침판이 드디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알라딘에 뜨지 않는다. 책이 나온 지 보름은 넘은 듯한데. 시골에서 살기에 가끔은 인터넷으로 책을 살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녹색세계사>가 알라딘 새책으로 뜨려나. 출판사 누리집에 올라온 겉그림만 핥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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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0-09-30 10:46   좋아요 0 | URL
아, 반가운 소식입니다. 저도 얼른 읽고 싶어요!

파란놀 2010-09-30 21:08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 여쭈어 보니, 요즈음 편집 일이 잔뜩 밀려서 출고를 못하신다더군요.
ㅠ.ㅜ
그래도 책방에 얼른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시골 기름집 아저씨는 시인


 시골집 겨울나기를 할 기름을 넣는다. 기름통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잘 모르기에 한 드럼(200리터)을 받는데 기름통에 반 조금 더 찬다. 200리터로 올겨울을 날 수 있을까? 있겠지?

 기름을 다 넣은 기름집 아저씨는 “나중에 다른 데에서 기름을 받거나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와서 기름을 넣을 때에 이 눈금을 잘 보셔야 해요. 이 기계는 완전 봉인되어 있어서 건드릴 수 없어요. 이 눈금 있는 기계가 없으면 기름을 속여요. 여기 숫자가 기름을 넣은 값이고 여기는 몇 리터를 넣느냐는 눈금이고 여기는 리터에 얼마씩 하느냐는 숫자예요. 이 장치에 기름을 넣을 숫자를 입력하면 이 숫자대로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요. 리터에 얼마인가하고 몇 리터를 넣었는가를 계산기로 두들기면 이 값대로 나오지요. 제가 다른 집에 가서도 할머니들한테 꼭 이런 말씀을 드려요.” 하는 이야기를 세 차례 되풀이한다. 시골에서 살며 보일러에 기름을 넣는 집이 많은데 요즈음 시골집은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살고 있다 보니, 기름집들 가운데 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속여 기름값을 높이 받는다거나 기름을 적게 넣으며 기름값을 오롯이 받는 일이 흔히 있는가 보다. 시골집 기름통에는 ‘기름이 몇 리터째 들어가는가’ 하는 눈금이 없으니까 기름 넣는 차가 콸콸콸 하고 기름을 넣을 때에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제대로 못 살필밖에 없다.

 기름집 아저씨는 기름을 다 넣고 돈을 받으며 “참 좋은 데에서 사시네요. 조용하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을 하시는가요?” 하고 묻는다. 산골자락 집에 도서관을 마련한다며, 아직 책을 덜 갈무리했다고 얘기한다. “아, 좋네요. 그런데 여기까지 멀 텐데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요.” “네, 책을 볼 사람들은 멀어도 잘 찾아와요.”

 빠르지도 느리지도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기름집 아저씨는 시인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아니 시인이라 할 만하지 않겠나 싶다. 내가 기름집 일꾼이면서 시골집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기름을 넣는다고 한다면, 나는 시골 이웃들한테 어떠한 목소리와 매무새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지냈을까. (4343.9.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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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수수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삶
 [책읽기 삶읽기 6] 성수선, 《밑줄 긋는 여자》


 내 둘레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쓴 책이 나온 이야기를 듣고는, 이이 책을 책방마실을 하며 사들일 때 느낌은 사뭇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을 읽을 때하고 조금이나마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조금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는들 이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읽을 때보다 잘 헤아린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꽤 잘 안다 싶은 사람이 쓴 책을 읽는들 이이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을 때보다 잘 받아들인다고 여기지 않는다.

 삼성정밀화학이라는 일터에서 해외영업을 맡으며 살아가는, 그러니까 요즈음으로 치면 ‘여느 회사원’인 성수선 님이 내놓은 《밑줄 긋는 여자》(2009)라는 책을 읽다. 글쓴이를 안다는 까닭 하나 때문에 이 책을 사서 읽는다. 그러나 나로서는 글쓴이를 아주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조금 안다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다. 밥자리와 술자리를 몇 번 함께한 적이 있다고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얼굴을 안다고 하면 될까. 때때로 헌책방마실을 즐기는 분임을 안다고 하면 될까.

 아는 이 책이라 해서 늘 장만하지는 않는다. 아는 이 책이라 해서 더 사랑하며 읽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읽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 삶을 일구는 손발에 기운이 나도록 돕는 책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밑줄 긋는 여자》라는 책은 책이름 그대로 ‘책을 읽을 때에 밑줄을 그으며 읽은 여자’ 한 사람이 살아가며 느낀 이야기를 적바림한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꼭 글쓴이가 살아가는 만큼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보쌈을 사오시곤 했다. 아빠 회사 앞에는 몇 십 년 전통 원조라는 유명한 보쌈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술을 한잔 하실 때마다 우리 얼굴이 어른어른하셨나 보다. 물론 어렸을 때는 아빠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정을 부렸다. ‘치킨도 있고 햄버거도 있는데 아빠는 왜 만날 보쌈만 사오세요?’(1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나 또한 밑줄을 긋는다. 나는 “아빠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정을 부렸다”라는 글월에 밑줄을 긋는다. 왜냐하면 나 또한 우리 어머니 마음이나 아버지 마음이나 옆지기 마음이나 아이 마음을 제대로 읽는다고는 느끼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는 투정을 부렸던가? 글쎄, 투정을 부릴 새가 어디 있을까. 어린 나날, 아버지한테 투정을 부렸다가는 몽둥이가 날아왔을 텐데. 늘 일에 눌려 고단한 어머니한테 어떻게 투정을 부릴 수 있는가. 학교와 집에서 여러모로 힘들던 형한테 투정을 부릴 수 있을까. 나로서는 투정을 부린다는 어린 나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내 둘레에서 ‘엄마 아빠한테 투정 부리는 동무’를 보며, ‘이야, 저렇게도 살아가는 식구가 있네?’ 하고 놀라기는 했다.

 “《삼국지》를 열 번 넘게 읽었다고 떠드는 사람들 중에 처세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 나 하나 살아 보겠다고 남을 속이고 피해를 준다면, 나 하나 잘되겠다고 남을 헐뜯고 이간질한다면 결국 다 함께 망할 뿐이다(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 글쓴이 성수선 님은 그야말로 ‘여느 회사원’이다. 문학책을 즐겨읽는 분이면서 처세책 또한 곧잘 읽는다.

 사람들이 제대로 못 느껴서 그렇지, 처세책도 읽기에 따라 ‘문학을 읽는 마음’이 된다. 문학책도 읽기에 따라 ‘처세를 살피는 마음’이 된다. 어느 책을 골라서 읽든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받아들인다. 어느 책을 마주하든 내 삶이 나아가는 대로 곰삭인다. 《삼국지》라는 책을 읽으려 한다면 이 책에 담긴 줄거리대로 지식을 줄줄 외우는 읽기가 아닌, 내 삶을 한결 아름다우며 훌륭한 쪽으로 이끄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삼국지》이든 《태백산맥》이든 《토지》이든 읽는 분들이 당신 마음을 아름답거나 훌륭한 쪽으로 이끌고자 하는지는 아리송하다. 사람들은 참말 왜 책을 읽는가. 뭐 하러 책을 읽는가. 사람들은 참으로 왜 영화를 보는가. 뭣 때문에 영화를 보는가.

 내 삶을 볼 줄 모르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들 마음이 뭉클할 수 없다. 내 삶을 가꿀 줄 모르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들 마음을 살찌울 수 없다.

 “난 내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은 채 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졸업하고 한 번 찾아오지 않은 제자를 그토록 기다리고 계셨다(1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긋 웃는다. ‘글쟁이로서 대단한 이름값’이 없는 여느 회사원인 성수선 님은 꿈을 잊었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한다. 아마, 적잖은 여느 회사원은 술자리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내 꿈이 뭐였더라?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읊조리다가는 이튿날이 되면 말끔히(?) 양복 차려입고 일터로 달려가 ‘회사에 큰돈 벌어다 주는’ 쳇바퀴 일거리에 매일 테지. 씁쓸하게 읊던 ‘내 꿈은 뭐지?’는 언제나 술자리에서나 읊는 말일 뿐, 정작 당신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당신 삶을 흘리고 말 테지.

 《밑줄 긋는 여자》는 대단한 책이 아니요 대단한 책일 까닭이 없으며 스스로 대단한 책이 되고자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바란다. “……을 읽다가 그만 펑펑 울어 버렸다(166쪽).”고 하듯 글쓴이 삶을 조곤조곤 털어놓으며 말문을 열기를 바란다. 애써 연 말문을 맞은편에서 고즈넉히 맞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여느 회사원으로 살든, 땅을 부치며 살든, 네모난 교실에서 똑같은 지식을 아이들한테 집어넣으며 살든, 날마다 바쁘게 살림하며 바깥사람한테 밥 차려 주고 빨래 해 주며 집 치워 주면서 살든, 저마다 곱고 사랑스러운 넋임을 느끼어 만나자고 말문을 열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우리 삶을 빛내는 빼어난 세계명작 한 가지를 오른손으로 읽는다면, 우리 삶에 깃든 작은 빛줄기를 꾸밈없이 사랑할 수수한 ‘삶 이야기 담은 책’ 한 가지를 왼손으로 읽어야 즐거우며 어여쁘리라 본다. 즐거우며 어여쁘게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훌륭한 얼과 수수한 넋을 나란히 사랑하며 아낄 수 있어야지 싶다. (4343.9.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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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원짜리 새책


 우리 나라 책마을이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김성재-출판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라는 책을 틈틈이 들춘다. 우리교육 출판사에서 소식 한 가지를 띄운다며 ‘모둠 알림 편지’로 보낸 이야기 하나를 며칠 앞서 읽다가 울컥한다. 《출판현장의 이모저모》를 새삼스레 들춘다. 김성재 님이 1997년에 쓴 〈‘재고도서’라는 말과 할인판매〉라는 글을 읽는다.


.. 휴면도서를 덤핑으로 처분하는 것은 출판경영의 합리화와는 동떨어진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출판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출판사는 물론 서적상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며, 독자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도서의 정가제마저 아예 무너뜨리게 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면 먼저 장서를 충실하게 하고 덤핑 서적 따위의 부실한 도서부터 솎아 내는 일을 해야 마땅하다 ..  (127∼128쪽)


 우리교육 출판사는 ‘경영 합리화’라는 이름을 내세워 다달이 내던 잡지 《우리교육》을 그만 내기로 하면서 《우리교육》을 만들던 일꾼을 모두 내쫓았다. 이러면서 잡지 《우리교육》이 아닌 ‘전교조 기관지’로 바꾸어 전교조 회원 교사가 싼값으로 한 해에 네 번 받아보도록 틀을 바꾸었다. 교육노동자 인권과 권리를 지키려 만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요, 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참된 배움을 교사와 아이와 어버이가 서로 나란히 누리는 데에 길잡이가 되도록 하려고 내놓던 잡지 《우리교육》이다. 잡지 《우리교육》은 그동안 ‘전교조 기관지’가 아닌 ‘읽을 만한 좋은 배움 잡지’ 노릇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우리교육 출판사 사장과 전교조 대표는 이런 《우리교육》을 무너뜨렸고, 이제는 ‘우리교육 출판사에서 내놓았던 알찬 어린이책’을 한 권에 2000원씩 싸게 판다고 널리 알린다. 나한테 온 누리편지를 보고 출판사 누리집에 들어가 보면 “여름방학 어린이책 파격! 균일가전!! 쑥쑥문고와 힘찬문고를 권당 2000원으로 구매하실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는 말을 붙인다.

 우리교육 출판사 낱권책은 헌책방에서 한 권에 2000∼2500원씩에는 팔린다. 아주 싸게 파는 데라면 1500원에 팔기도 하지만 이렇게 파는 헌책방은 퍽 드물다. 헌책방 일꾼은 당신 스스로 ‘책 값어치’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장과 간부와 일꾼은 당신 출판사 이름뿐 아니라 책 값어치마저 하루아침에 와르르 허물고 만다.

 우리교육 출판사는 이번 ‘새책 2000원에 팔기’를 하면서 ‘재고도서 처분’에다가 ‘맞돈을 제법’ 손에 쥘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번 맛들인 떨이 넘기기가 이번 한 번으로 그칠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 이번 한 번으로 그치는 떨이 넘기기라 할지라도, 떨이 넘기기를 한 번이라도 하는 출판사 앞날은 내다 보고 싶지 않다. 제아무리 훌륭한 책이라 할지라도 떨이로 내다 팔면 쳐다보기 싫다. 훌륭한 책은 알맞고 마땅한 값으로 사고팔아야 한다. 좋은 책은 ‘책에 적힌 값’ 그대로 사고팔아야 한다. 헌책방에서 파는 값보다 싸게 팔아치우려는 셈속으로 책마을을 흔드는 못난 짓을 하는 출판사에서 내놓는 책은 그지없이 볼썽사납다. 우리교육 출판사 사장과 간부와 일꾼은 스스로 얼마나 밉고 슬프며 괘씸한 짓을 저지르는지 깨달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바보짓을 하는 출판사에 당차게 사표를 내고 나오는 일꾼은 있을까?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짓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리띠를 질끈 묶고 사표를 걸며 다부지게 맞서 싸우는 일꾼은 있는가? (4343.9.28.불.ㅎㄲㅆ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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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0-09-28 23:14   좋아요 0 | URL
올해 초 우리교육 사태가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교육이 어떤 잡지인데,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노조가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출판계에서 노조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 가를 깨달으며 싸움을 접을 수 밖에 없었지요.

출판사가 가격 경쟁을 벌이고, 반값 할인이나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책을 파는 건,
모두 무리한 영업계획과 그를 바탕으로 한 경영계획 때문입니다.
이건 한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악순환이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파란놀 2010-09-29 06:47   좋아요 0 | URL
우리교육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도 드물었고, 우리교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아보려 하는 전교조 교사 또한 드물었으며, 우리교육 출판사 일을 강 건너 불 구경을 하는 출판사 일꾼이 참 많았습니다.

딱 열 해 앞서에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대단한(?) 일을 저질렀고, 저는 이때 뒤로 '자음과모음' 책은 사 읽지도 비평하지도 않습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며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전쟁미치광이'나 '전쟁장사꾼'하고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셈이 아닐까 싶어요.

여느 독자도 독자이지만, 전교조에 몸담은 교사들이라도 우리교육 출판사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나친 꿈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길 잃은 도토리 쪽빛그림책 1
마쓰나리 마리코 지음,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숲길을 걷는 즐거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 마쓰나리 마리코, 《길 잃은 도토리》



 숲길을 거닐다가 도토리 한 알 주워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앙증맞으면서 고운가를 압니다. 이 앙증맞으면서 곱고 작은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우람하며 씩씩하고 튼튼하게 크는가를 올려다보면서 자연이란 무척 놀라우며 거룩한 줄을 새삼 깨닫습니다. 따로 누군가 나무를 심어 자라는 도토리나무가 아닙니다(‘도토리나무’라고 했지만, 졸참나무나 떡갈나무나 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라고 낱낱이 이름을 들어 말해야 맞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떨구거나 다람쥐가 먹으려고 갉다가 떨어진 씨앗이 제힘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도토리나무입니다(그렇다고 땅에 떨어지는 모든 도토리가 뿌리를 내리며 나무로 자라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수많은 도토리 가운데 고작 몇 알이 겨우 뿌리를 내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나무로 자라나는 도토리는 몹시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이 대단하며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도토리 한 알은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 길디긴 나날을 제힘으로 조용히 큽니다. 씨앗 한 알이 어린 싹이 되고, 어린 싹이 어린나무가 되며 어린나무가 차츰차츰 우람한 어른나무로 뻗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들여다보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를 쉽게 만납니다. 한국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살피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가로지르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곧잘 만납니다. 한국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즐기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는 일본에서 2002년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2007년에 옮겨집니다. 도토리 한 알을 알뜰히 아끼며 좋아한 아이 하나가 숲속에서 얼마나 신나게 ‘도토리 놀이’를 했는가를 보여주다가는, 그만 숲속에서 잃은 도토리가 아이 품에서 떨어진 채 여러 해를 보내며 열 몇 해 뒤에는 그예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새삼스레 다시 만나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참 일본사람 그림책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참 한국사람은 이런 그림책을 못 그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일본이라고 해서 오늘날 시골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숲속을 한참 가로지르며 즐길까 궁금합니다만, 〈녹차의 맛〉이나 〈워터 보이즈〉나 〈스윙 걸즈〉 같은 영화를 보노라면 자연을 벗삼은 학교가 고스란히 이어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나라를 돌아보면 큰도시에서는 아주 마땅하게도 자연이란 눈꼽만큼도 없으며, 작은도시는 큰도시 뒤를 따라 자연을 짓밟습니다.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라면 자연을 둘러싸거나 자연을 품에 안을 만하지 싶은데, 자연과 가까운 작은 학교는 거의 모조리 문을 닫았고,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시골에서 시골다움을 느끼며 학교를 다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흙길을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며 오가는 아이는 몇이나 될까요. 시골 학교를 다니는 한국 아이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달린다 하여도 아스팔트길로 다닐 테고, 이 길은 자동차가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느라 아슬아슬하다며 어버이가 자가용을 태우거나 학원버스나 학교버스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지 않나 싶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논밭이 가득한 시골길이나마 차분하게 즐기며 맞아들이는 가슴은 몇이나 될까요.


.. 준비 땅! 코우가 소리쳤어요. 우리는 떼굴떼굴 떽떼굴 구르며 코우랑 달리기 시합을 해요. 신나게 코우랑 놀아요. 어항을 겨누어 탕. 휘익 날아갈 때 기분 최고!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코우는 나를 찾으러 와 주어요. 엉덩이만 보면 알아요 ..  (6∼9쪽)


 그런데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를 보며 어딘가 얄궂어 자꾸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이가 숲속에서 ‘도토리 던지기’ 놀이를 하는데 어항을 겨누어 던집니다. 다른 데도 아닌 숲속에서. 숲속에 왠 어항? 숲속이라면 벼락을 맞아 쓰러진 나무에 난 구멍이라든지 딱따구리가 파 놓은 구멍이라든지를 이야기해야 걸맞지 않을는지요.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이 어린 날 숲속에서 ‘버려진 어항’을 보고는 오래도록 신나게 놀던 일이 있었기에 뜬금없이 숲속 어항을 보여주는가요.

 게다가 번역이 영 못마땅합니다. “준비 땅!”이라니요. 일본말 “요이 땅!”을 “준비 땅!”으로 옮긴다고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준비 시작!”처럼 옮길 때에도 우리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말로 적바림하자면 “하나 둘 셋!”이라 하거나 “자, 달린다!”라 해야 알맞습니다. ‘시합(試合)’ 같은 일본 한자말은 이 그림책뿐 아니라 운동경기를 말하는 사람들 누구나 아주 함부로 잘못 씁니다. 이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긴 한 사람을 탓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림책을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 ‘시합’ 같은 일본말은 ‘내기’나 ‘겨루기’로 손질해 주어야 합니다. “기분 최고!”라는 대목 또한 일본책을 제대로 못 옮긴 말마디가 아닐까 싶은데, “아슬아슬 짜릿짜릿!”이나 “시원시원 좋아좋아!”처럼 말느낌이나 말맛을 살리며 옮겨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번역 말썽은 “코우의 집”이나 “코우의 발소리”나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데에서도 엿봅니다. 우리 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코우네 집”이요 “코우 발소리”이며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듯해서요”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까지 ‘-의’를 마구 넣는 버릇은 털어야 하며, ‘것’을 섣불리 자주 쓰는 매무새 또한 가다듬어야 합니다. 책 끝에는 “가끔씩 코우가 여기에 와서”라는 대목이 있는데, ‘가끔씩’처럼 적으면 틀립니다. ‘가끔’이라고만 적어야 올바릅니다. ‘가끔’과 ‘이따금’이라는 낱말 뒤에는 ‘-씩’을 붙일 수 없는데, 이를 깨달으며 알맞춤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쓰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이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가누지 못하면서 어린이책을 쓰고 어른책을 내놓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넋을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말에 실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삶을 일구고자 하는 어린이로 크도록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춥니다.


.. 코우의 가방 속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의 씨앗. 나무의 아기 ..  (4쪽)


 이 대목 또한 “코우 가방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가 맺은 씨앗. 나무가 낳은 아기.”로 고쳐야 알맞습니다. “가방에 든 도토리”이지 “가방 속에 든 도토리”가 아닙니다. 뒷 대목은 “모두 나무 씨앗. 나무 아기.”로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번역을 깔끔하며 정갈하게 했어야 《길 잃은 도토리》라는 그림책이 한결 빛났을 텐데, 차분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몹시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뜬금없는 숲속 어항’이라든지 ‘도토리 한 알이 아이한테 지나치게 얽매인 줄거리 흐름’이라든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그림책 모습으로는 코우라는 아이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얼굴인데 기껏 열 해 남짓 지났어도 도토리나무가 그림책에 나오듯 이토록 우람하게 가지가 우거질 수 있나 궁금합니다. 코우라는 아이가 ‘어린 날 코우만 한 나이인 아이와 함께 도토리나무 앞에 선 모습’쯤으로 그려 주어야 어느 만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텐데요.

 그래도 일본에서는 일본 어른들이 숲길 걷기와 숲속 도토리 한 알을 잊지 않고 그림책 하나로 알뜰살뜰 엮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베푸는 그림책이란 오로지 지식과 정보 그림책에 머뭅니다. 살갑게 부대낄 이야기 하나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숲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끄트머리 하나라도 붙안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니는 오솔길조차 아닌, 멧짐승만 지나다녔을 숲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나뭇가지를 쓰다듬는 느낌을 담지 못합니다. 가랑잎 흐드러진 숲길을, 나뭇잎이 바람을 맞으며 내는 소리를, 숲속에 깃든 짐승과 벌레가 내는 소리를, 나뭇잎 사이를 스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송보송해서 손가락을 눌러도 쏘옥 들어가는 좋은 흙을 그림책에 살포시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책이름이 《길 잃은 도토리》인데, “길 잃은”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토리로서는 길을 잃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도토리로서는 제자리를 찾아 ‘하늘이 내려진 고마운 선물’ 그대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우람한 나무 한 그루로 자랍니다(좀더 제대로 말하자면, 도토리 한 알이 나무로 자라자면 다람쥐가 겨우내 먹으려고 갈무리해서 땅에 묻은 씨앗 가운데 한 알이 자라난다고 하더군요). 도토리 한 알은 시골아이랑 한참 신나게 놀다가 제 갈 길을 찾아 조용하면서 따순 흙 품에 안겼고, 흙 품에서 씩씩한 새 삶을 일굽니다. 시골아이는 숲길을 걷는 즐거움을 듬뿍 느끼며 도토리를 만납니다. 도토리 한 알은 흙 품에 안기며 자라는 즐거움을 느끼기 앞서 시골아이 하나를 만나 신나게 놀았습니다. 시골아이와 도토리는 자연이라는 너른 품에서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살가운 벗입니다. (4343.9.28.불.ㅎㄲㅅㄱ)


― 길 잃은 도토리 

 (마쓰나리 마리코 글·그림,고향옥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7.4.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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